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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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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39

박광종 선임연구원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 후 조만식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을 거행하였고, <인민신보> 9월5일, <매일신보> 9월16일, <해방일보> 10월3일자등에 현준혁의 장례기사와 조사(弔詞)가 실렸다.현재 현준혁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고, 그가 태어난 개천군 북면 용등리를 ‘준혁리’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해방 후 보름 만에 정치 테러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현준혁의 죽음은 이후 해방 격동기에 벌어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암살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자의 암살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다. 다음에서 현준혁의 일제시기 활동과 그의 암살과 연관된 백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준혁의 생애와 활동

평안남도 개천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개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1922년 협성학교를 거쳐 1923년 4월 중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 3월 졸업했다. 4월 연희전문학교 본과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26년 5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졸업했다. 학창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으로 학비를 조달했고, 연희전문학교 때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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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경북도립사범학교였다가 1929년 4월에 교명이 바뀜) 교사로 발령받고 영어, 한문, 교육사를 담당했다. 현준혁은 영어와 한문을 주로 가르쳤지만 한글과 민족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수업시간에 광주학생사건이나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꺼내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현준혁은 1930년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5명을 조직책으로 뽑아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주의 서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에게서 자비를 들여 비밀리에 입수하였다. 이를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 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몇 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이나 잡혀갔다. 현 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범학교 적화사건으로 불리며 일간지에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32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현준혁은 구속 당시의 심정을 친구한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네, 평생의 원한을 풀었으니. 연전 대구사범에 있을 적에 학생들과 같이 수갑을 차고 송국되던 날, 외아들을 가진 과부 어머니가 원망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고로 나의 가슴은 터질 듯하였네. 언젠가 저 원한을 풀어주겠소! 말을 못하고 나 혼자 입술을 깨물어 맹서하였더니, 인제는 내가 일일이 변명을 안 하더라도 그 어머니들이 곧잘 이해할 터이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사회과학연구회 사건으로 교직에서 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1933년 개천과 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종사했고 1935년 무렵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1935년 6월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좌익소비조합을 만들고, 지하층 노동자들에게 적화사상을 고취하고자 개천 천동철광, 봉천탄광, 자작탄광 그리고 영변 용등탄광 등지에다 각 1명씩 동지를 두어 지하운동을 벌이는 한편, 경성에 이광진을 파견하여 적색 팸플릿을 발행하고 노동대중의 적화 교과서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현준혁은 1945년 8월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창당에 힘썼고 모종의 사명을 띠고 8월 17일 평양으로 향했다.

극우테러의 기획자 염동진

현준혁 암살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놓고 1945년 9월 사건 직후부터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그 중의 하나가 소련군의 음모설이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 정적이 될 수 있는 현준혁을 미리 제거하고자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현준혁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동평양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유기선은 현준혁이 우익의 백색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준혁 계열과 적위대를 관할하던 장시우 계열의 갈등으로 적위대원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2002년 1월 20일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회 비밀결사 – 백의사〉에서의 백근옥(백관옥의 형)의 증언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여 2002년 1월 공개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 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를 통해서 우익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이뿐 아니라 백의사가 해방 공간에서 좌우를 막론한 요인 암살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 9월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기도,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암살 등을 백의사 단원들이 직접 실행했으며 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인사 암살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것이다.
백의사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본명 廉應澤)에 대해 알아보자.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염도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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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기록에 의하면 염동진은 1934년 3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낙양군관학교는 1934년 2월 중국 하남성 낙양 소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운영되었던 한인특별반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고, 1년간의 단기과정이었다. 이 한인특별반은 윤봉길의 의거 직후 중국 국민당이 김구와 김원봉을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염동진은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지청천이 남경에 세운 신한독립당 외교부 부장으로 잠시 맡았다. 이후 백의사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춘택이란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하다가 국민당 비밀첩보조직인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다. 1937년 중일전쟁 후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했다. 염동진은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었다.1


1 염동진이 관동군 밀정 노릇을 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측 자료인 <日寇關東憲兵隊在吉林省的組織槪況>(吉林省革命委員會淸査敵僞檔案辦公室編, 1965.7.10) 186쪽에 관동군 통화(通化)헌병대 본부 밀정으로 ‘廉應澤’이 나온다. 만일 이자가 염동진과 동일인이라면 염동진의 친일 전력을 확인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廉應澤’ 항목의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염응택(廉應澤) : 통화헌병대 본부 밀정.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찍이 우리 동북지하당과 항일연군의 조직정황과 교통연락망, 식량과 탄약 등 정황 및 통화지구 중국인과 조선인의 시국 인식에 대해 비밀리에 정찰하였다. 또한 관할구 내 철광, 오도강과 이도강 지구에서 노동자의 사상동태를 비밀리에 조사했을 뿐 아니라 해당 지구의 우리 지구당 구성원의 활동을 추적하였다. 특무비로 34차에 걸쳐 총 2,481위안(圓)을 받았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염동진은 평양 기림리 영명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의 주지는 박고봉이었고 그의 주위에는 민족주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으며 박고봉의 추천으로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합류했다.
해방 후 대동단이 첫 번째 벌인 일이 바로 현준혁 암살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현준혁을 통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제지하려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응징 차원에서 백관옥을 비롯해 선우봉 박진양 등 대동단원이 그를 제거한 것이다. 수사당국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박고봉을 제외한 관련자들이 1945년 9월~11월 사이에 월남했다.

백의사의 테러 활동과 쇠락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하고 국민당의 남의사를 차용해 백의사라 이름 지었다. 백의사 총사령에 오른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입수하여 본부로 삼았다.
백의사의 초기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      염동진                               부사령 박경구(함남,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고문         유진산(신민당 총재), 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노총 조직부장)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평양)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염동진은 은밀히 백의사 단원을 모집하였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동진을 통해서만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의사 단원 수는 비밀에 부쳐졌는데 전성기 때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한편 백의사 단원을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 즉 경찰이나 국방경비대는 물론 노동총연맹에까지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정국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나가려 하였다.
백의사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첫째 반공·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이는 1946년 3월에 집중되었으며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에 이루어졌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북한지역에 파견하였는데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백의사 결사대는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의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김일성을 노리고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였고,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되잡아 던지려다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1946년 3월 3일과 5일에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3월 9일 김책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 3월 11일에는 강양욱의 집을 습격, 그의 아들·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죽이고 말았다.
둘째 남한 내에서의 반공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여운형을 암살하는 데 쓰인 45구경 권총은 바로 염동진이 암살범들에게 건넨 것이고, 백의사 부사령 박경구는 염동진의 지시로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하였다.
셋째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CIC)와의 연계하에 벌인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을 벌인 것이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백의사 첩보대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백의사 첩보대원들은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을 받았다. 1946년 5월 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하여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냈다. 이러한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은 1946년에 시작해서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가라앉자 테러집단인 백의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부분의 단원은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던 100여 명의 단원은 대한민국 육군의 첩보부대와 맥아더사령부가 만든 KLO부대에 흡수되었다.
염동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붙잡혀 행방불명되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제20권에 실린 〈염동진〉이란 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 냉혈인간 / 그의 말은 칼끝 /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 그의 하루하루는 / 누구를 죽이는 일 /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 홀연 사라졌다 /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발췌)

[참고문헌]
나일부, 「해방 후 보름 만에 아깝게도 쓰러진 우리들의 지도자 현준혁의 내력」,<신천지> 1946년 10월호.
강만길·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1996,창작과비평사
정병준,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 <韓國史硏究>128(2005,3)
이완범,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국가정보연구>제3권1호(2010)
카프, 「잊혀진 역사인물, 현준혁 암살사건을 다시 생각해본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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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사기 사건의 피해자로 1년 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김성훈은 이미 2심에서 15년의 중형을 받은 사기꾼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피해금을 변제하겠다

변제하겠다 하면서 시간을 끌어오다  지난 8월에는 비상장주식인 정체불명의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 자신의 감형에만 정신을 쏟다기 몇몇 몰지각한 피해자의 파산신청을 옳다구나 받아들여

자신의 1조에 채무를 벗어나려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를 바르게 풀어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 변호사이신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김성훈 사기꾼을 돕고 수많은 피해자를 또다른 고통으로 몰아가는 일에 앞장서신다는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시고,..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는 길에 오점이 생기질 않길 바랄뿐입니다.

목, 2017/12/07- 02:03
76
0

정만순 변호사님 부탁드립니다.

29명이 1만명의 생각 몫까지 생각해 파산을 신청한다는건 김성훈에게 면죄부를 주는일은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일이고, 잘못된 일인줄알면서 했다는건 더 그죄가 악질입니다.

많은 변제안으로 사람들을 현옥시켰고

서민들이 피땀흘려 번것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사측에서의 장난

목, 2017/12/07- 00:37
96
0

정만순 변호사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고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문이라면 ‘어떤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품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고문으로서

29명이 1만명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산을  대신한다는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발 다시 한번 생각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온갖 비리가 다 걸쳐져 있는 ids !

이건 아마도  더이상 유사수신등 의 건으로 이런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록

법을 개정하도록 힘을 주세요

이건 아마도

 

목, 2017/12/07- 00:51
109
0

정만순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의 김성훈 사기사건으로 매일 밤잠 설치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는 피해자입니다.

김성훈은 사기꾼입니다. 무허가 유사수신회사를 설립해 1만 2천여명의  투자자로부터 1조원을 챙긴 나쁜 사기꾼입니다.

김성훈과 일부 파산을 신청한 사람들은 또 다른 사기로 투자자들을 힘겹게 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숨과도 같은 피 같은 돈입니다.

부디  피해자들의 고통을 혜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김성훈의 파산을 막아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수, 2017/12/06- 23:32
16
0

안녕하세요

저는 IDS피해자입니다

이번에 채권자라는 20여명이 신청한 파산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저희 가족의 피같은 돈을 이렇게 사기당한것도 억울한데 다른 피해자들의 대표도 아닌 사람들이 변호사와 함께 파산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잠도 못자고 정말 자멸감이 뭔지 느끼고 있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정말 이게 옳은 일인지 생각하시고 돕고 계신지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로 인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시는데 앞장서서 훌륭한 일을 하시는데 어찌하여 김성훈 사기범을 돕는 일을 하시는지요

파산을 김성훈은 쌍수를 들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공평..말이 공평이지 피해자들은 또 파산이후 돈을 들여 법정싸움을 해야하고

김성훈은 파산됐으니 홀가분하게 지낼텐대.. 변호사님께서 이 일을 전체에게 좋은일인지 몇명에게 좋은 일인지 판단하시여 파산을 멈춰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 2017/12/07- 19:18
41
0

정만순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IDS홀딩스 김성훈은 1조원대 사기범이고 피해자가 1만2천명입니다

13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아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사기 당하고 하루라도 빨리 변제가 이루어 지기만을 소망하는 피해자로 현재 파산절차를 보면서 깊은 절망속에 있습니다

이 파산은 1만명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며 단 20여명이 신청하였고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써 김성훈에게 파산은 결코 용납 할 수 없습니다.

김성훈 파산이 이루어지면 동의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게 공평한 재산 나눔일까요

파산이 이루어지면 김성훈과 동조했던 이들이 월급이라며 받아가고

직급자들도 투자사실있으면 받아가고.. 현재 피해자별지에

누락된 피해자들은 또 법정싸움을 해야합니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생각해주십시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죄없다며 상고중에 있는 김성훈을 돕는 파산 진행은 되지 않도록 도움 부탁 드립니다.

목, 2017/12/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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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s홀딩스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입니다.

제2의 조희팔 사건..

제가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될 거라 생각도 못했었답니다.

저의 욕심이 이렇게 힘든 생활의 연속이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처럼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29명이 12000명을 대표하여 파산신청을 진행한다는 말에 더 놀랐습니다.

어렵게 모으고 모은 돈을 기다리면 준다하여 1년반을 넘게 기다렸는데 단 한푼의 변제도 받지 못한 상태인데

이제는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니요…

제발 간혹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훌륭한 곳이고 이런 곳의 고문변호사이신 분께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목, 2017/12/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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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2의 조희팔”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하루하루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변제해준다는 말만믿고 기다렸지만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않고

단한푼의 변제도 받지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2,000명의 피해금에 대한 파산을

극히 일부인 29명의 파산신청인이 대표하여 진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29명이 만명을 대신할수는 없습니다

파산이 받아들여진다면

만명의 피해자들이 또한번의 절망적인 일을 겪는것입니다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않도록 파산을 막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목, 2017/12/0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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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이번 사기사건으로 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있습니다. 정말 김성훈이 피해자들을 기만하며 변제한다 떠들기만 할뿐 실제 1원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성훈은 피해자들에게 파산을 하면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며 편지글을써서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정의가 살아있나 싶을정도로 사기범이 자기 파산하니 찬성해달라하니.. 어느 사람이 이해하며 받아들일까요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만일 제 입장이시라면 파산 좋으니 동참하세요 하실수 있으실까요? 민족문제연구를 이번에 처음알고 친일파를 바로 잡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란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성훈의 파산을 도와 1만가정의 결제를 파탄내는 일을 도우신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1만명의 목소리와 피맺힘이 들리시는지요?

김성훈에게 파산이라니.. 이걸 채권자라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돕고 있으니 정말 1만명의 피해자 대표도 아닌 그들이 나서서 김성훈을 돕는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제발 !! 올바른 길이 무엇일까 생각해주십시요. 저는 김성훈의 파산을 절대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부디 파산을 막아주십시요

목, 2017/12/0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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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을 가지고 가서

호의호식해놓고…

지금 깐빵에 있는 인간!

죄를 뉘우치고 돈을  갚을 생각은 커녕

파산으로 배째라 하는 인간!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닌 행동을 하는 인간!

그리고 많은 서민들은 눈물과 괴로움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목, 2017/12/0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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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Ids홀딩스 피해자 입니다.

김성훈 대표는 피해자들의 돈을 훔쳐가고 변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본인이 죄를 뉘우친다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변제를 해야하는데

그런행동도 없이 파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김성훈의 파산를 막아주세요

 

목, 2017/12/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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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서정주를 비롯한 친일문인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일본의 침략에 의해 36년 간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일제를 적극 옹호하고 일본국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고 했던, 적국의 편에 서서 민족을 배반한 부역자들이다.

이들은 단지 문화예술을 통한 일본에 협조한 행위를 넘어서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전범들’이었다.

중앙일보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미당문학상 운영과 수상자 선정을 즉각 중단하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미당문학상 폐지하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역사의 무덤 속으로!

2017년 12월 5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 민족문제연구소 / 역사정의실천연대 / 친일문학상 폐지를 위한 학생시민연대

금, 2017/12/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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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은평구에 거주하는 결혼7년차 평범함 주부입니다

 

결혼할때도 최대한 돈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마음에 결혼전 쓰던 저의 대부분의 물건을

 

가져와서 신혼살림을 차렸을만큼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아놓았고, 결혼후에, 저없이 혼자살게될 어머님도

곰팡이 나는 집에서 이사시켜드리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절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IDS홀딩스에 투자한 돈은 결혼 전 밤낮을 일하며 어렵게 모은돈과 친청어머니에게 생활비의 도움을

드리고자 친정어머님집에 대출을 받아서 ids에 투자하여, 어머님께 용돈 및 대출 이자를 갚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69ids사태가 벌어지고 어머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의 이자까지 너무 힘겹게 매달 갚아내고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해서 저는 건강도 많이 안좋아지고, 결국 몇 달몇 버티다

남편에게 이실직고후엔 부부사이는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모집책은 김성훈대표의 계좌동결만 풀리면 원금 회수를 할 수 있다하였고,

 

저는 그 말만 믿고 몇 달을 기다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모든것이 거짓임이 밝혀진 지금에도, 이들은 아직도 피해자들에게 ids가 변제를 해줄것이라며 합의서와

함께 지점장 처벌불원서를 받고 있으며 본인들도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늦게 파악한 저는 원금 손실이라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결혼한지 7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질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상황입니다..저는 그동안 돈을 아끼느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돈 때문에  밤잠을 설쳤을 때

피해자들의 돈으로 수당을 받아 호의호식한 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피해자들이 대형 보험사의 FC나 재무설계사, 자산운용가를 통해 IDS홀딩스에 가입하였습니다.

이들 모집책은 금융전문가들로써 IDS홀딩스가 불법 유사수신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이득을 위하여 원금 손실이 없는 월이자식 금융상품인양 안내하여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이에 ids홀딩스를 신고합니다.

 

 

 

 

금, 2017/12/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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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모텔주인은 여석가구로…

적십자희비

마는세종대왕… 그라고….$$$$$…..%%%%%시민역사관 낸다고….

집현전열장

사임당두장                   $약속%

그러나

그인력노동자는  그약속이

일부 달방세입자와나 ……..그리고  ……주인으런의  횡포라고

볼수 있는 ……..그러나

백이호실의 몽문일부

 

부분파손(기물폭행)그리고수갑

그인력노동자의 저녹서 출소날이

십유길

그복직된  화면목탁에게  하소연 하는가?

니는 일마야  최소한  삼육오라는  그팀장형사!

섣딸양력에 이사도  자라는데,

이게  무슨  인심고!?(참고사진경남민언련)

 

금, 2017/12/0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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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임을 하시려거든 그래도 말이 되는 수임을 하시지.. 여기저기 깨끗한 이름이 더럽혀 질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본인도 아시리라 봅니다. 속히 돌이키시어 정의를 지켜주시는 변호사님으로 남아주세요

금, 2017/12/0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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