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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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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39

박광종 선임연구원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 후 조만식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을 거행하였고, <인민신보> 9월5일, <매일신보> 9월16일, <해방일보> 10월3일자등에 현준혁의 장례기사와 조사(弔詞)가 실렸다.현재 현준혁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고, 그가 태어난 개천군 북면 용등리를 ‘준혁리’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해방 후 보름 만에 정치 테러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현준혁의 죽음은 이후 해방 격동기에 벌어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암살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자의 암살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다. 다음에서 현준혁의 일제시기 활동과 그의 암살과 연관된 백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준혁의 생애와 활동

평안남도 개천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개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1922년 협성학교를 거쳐 1923년 4월 중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 3월 졸업했다. 4월 연희전문학교 본과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26년 5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졸업했다. 학창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으로 학비를 조달했고, 연희전문학교 때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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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경북도립사범학교였다가 1929년 4월에 교명이 바뀜) 교사로 발령받고 영어, 한문, 교육사를 담당했다. 현준혁은 영어와 한문을 주로 가르쳤지만 한글과 민족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수업시간에 광주학생사건이나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꺼내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현준혁은 1930년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5명을 조직책으로 뽑아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주의 서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에게서 자비를 들여 비밀리에 입수하였다. 이를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 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몇 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이나 잡혀갔다. 현 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범학교 적화사건으로 불리며 일간지에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32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현준혁은 구속 당시의 심정을 친구한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네, 평생의 원한을 풀었으니. 연전 대구사범에 있을 적에 학생들과 같이 수갑을 차고 송국되던 날, 외아들을 가진 과부 어머니가 원망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고로 나의 가슴은 터질 듯하였네. 언젠가 저 원한을 풀어주겠소! 말을 못하고 나 혼자 입술을 깨물어 맹서하였더니, 인제는 내가 일일이 변명을 안 하더라도 그 어머니들이 곧잘 이해할 터이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사회과학연구회 사건으로 교직에서 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1933년 개천과 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종사했고 1935년 무렵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1935년 6월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좌익소비조합을 만들고, 지하층 노동자들에게 적화사상을 고취하고자 개천 천동철광, 봉천탄광, 자작탄광 그리고 영변 용등탄광 등지에다 각 1명씩 동지를 두어 지하운동을 벌이는 한편, 경성에 이광진을 파견하여 적색 팸플릿을 발행하고 노동대중의 적화 교과서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현준혁은 1945년 8월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창당에 힘썼고 모종의 사명을 띠고 8월 17일 평양으로 향했다.

극우테러의 기획자 염동진

현준혁 암살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놓고 1945년 9월 사건 직후부터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그 중의 하나가 소련군의 음모설이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 정적이 될 수 있는 현준혁을 미리 제거하고자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현준혁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동평양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유기선은 현준혁이 우익의 백색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준혁 계열과 적위대를 관할하던 장시우 계열의 갈등으로 적위대원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2002년 1월 20일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회 비밀결사 – 백의사〉에서의 백근옥(백관옥의 형)의 증언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여 2002년 1월 공개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 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를 통해서 우익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이뿐 아니라 백의사가 해방 공간에서 좌우를 막론한 요인 암살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 9월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기도,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암살 등을 백의사 단원들이 직접 실행했으며 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인사 암살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것이다.
백의사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본명 廉應澤)에 대해 알아보자.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염도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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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기록에 의하면 염동진은 1934년 3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낙양군관학교는 1934년 2월 중국 하남성 낙양 소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운영되었던 한인특별반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고, 1년간의 단기과정이었다. 이 한인특별반은 윤봉길의 의거 직후 중국 국민당이 김구와 김원봉을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염동진은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지청천이 남경에 세운 신한독립당 외교부 부장으로 잠시 맡았다. 이후 백의사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춘택이란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하다가 국민당 비밀첩보조직인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다. 1937년 중일전쟁 후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했다. 염동진은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었다.1


1 염동진이 관동군 밀정 노릇을 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측 자료인 <日寇關東憲兵隊在吉林省的組織槪況>(吉林省革命委員會淸査敵僞檔案辦公室編, 1965.7.10) 186쪽에 관동군 통화(通化)헌병대 본부 밀정으로 ‘廉應澤’이 나온다. 만일 이자가 염동진과 동일인이라면 염동진의 친일 전력을 확인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廉應澤’ 항목의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염응택(廉應澤) : 통화헌병대 본부 밀정.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찍이 우리 동북지하당과 항일연군의 조직정황과 교통연락망, 식량과 탄약 등 정황 및 통화지구 중국인과 조선인의 시국 인식에 대해 비밀리에 정찰하였다. 또한 관할구 내 철광, 오도강과 이도강 지구에서 노동자의 사상동태를 비밀리에 조사했을 뿐 아니라 해당 지구의 우리 지구당 구성원의 활동을 추적하였다. 특무비로 34차에 걸쳐 총 2,481위안(圓)을 받았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염동진은 평양 기림리 영명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의 주지는 박고봉이었고 그의 주위에는 민족주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으며 박고봉의 추천으로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합류했다.
해방 후 대동단이 첫 번째 벌인 일이 바로 현준혁 암살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현준혁을 통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제지하려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응징 차원에서 백관옥을 비롯해 선우봉 박진양 등 대동단원이 그를 제거한 것이다. 수사당국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박고봉을 제외한 관련자들이 1945년 9월~11월 사이에 월남했다.

백의사의 테러 활동과 쇠락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하고 국민당의 남의사를 차용해 백의사라 이름 지었다. 백의사 총사령에 오른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입수하여 본부로 삼았다.
백의사의 초기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      염동진                               부사령 박경구(함남,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고문         유진산(신민당 총재), 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노총 조직부장)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평양)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염동진은 은밀히 백의사 단원을 모집하였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동진을 통해서만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의사 단원 수는 비밀에 부쳐졌는데 전성기 때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한편 백의사 단원을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 즉 경찰이나 국방경비대는 물론 노동총연맹에까지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정국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나가려 하였다.
백의사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첫째 반공·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이는 1946년 3월에 집중되었으며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에 이루어졌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북한지역에 파견하였는데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백의사 결사대는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의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김일성을 노리고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였고,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되잡아 던지려다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1946년 3월 3일과 5일에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3월 9일 김책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 3월 11일에는 강양욱의 집을 습격, 그의 아들·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죽이고 말았다.
둘째 남한 내에서의 반공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여운형을 암살하는 데 쓰인 45구경 권총은 바로 염동진이 암살범들에게 건넨 것이고, 백의사 부사령 박경구는 염동진의 지시로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하였다.
셋째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CIC)와의 연계하에 벌인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을 벌인 것이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백의사 첩보대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백의사 첩보대원들은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을 받았다. 1946년 5월 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하여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냈다. 이러한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은 1946년에 시작해서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가라앉자 테러집단인 백의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부분의 단원은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던 100여 명의 단원은 대한민국 육군의 첩보부대와 맥아더사령부가 만든 KLO부대에 흡수되었다.
염동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붙잡혀 행방불명되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제20권에 실린 〈염동진〉이란 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 냉혈인간 / 그의 말은 칼끝 /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 그의 하루하루는 / 누구를 죽이는 일 /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 홀연 사라졌다 /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발췌)

[참고문헌]
나일부, 「해방 후 보름 만에 아깝게도 쓰러진 우리들의 지도자 현준혁의 내력」,<신천지> 1946년 10월호.
강만길·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1996,창작과비평사
정병준,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 <韓國史硏究>128(2005,3)
이완범,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국가정보연구>제3권1호(2010)
카프, 「잊혀진 역사인물, 현준혁 암살사건을 다시 생각해본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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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 국군 역사에 편입 검토” 학술대회 개최 이례적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육사가 그간 독립군·광복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육사는 11일 서울 노원구 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특별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은 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게재된 초대 말씀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육군의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을 이번 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공론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다.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육사의 이런 움직임은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육사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등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다. 육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주요 연혁을 봐도 육사는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삼고 있다.

육사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방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장은 지난 9월26일 단행된 군 인사를 통해 임명됐다.

정희완 기자 [email protected]

<2017-12-07> 경향신문

☞기사원문: 정권 바뀌니 달라진 육사…‘임시정부’서 뿌리 찾는다

※관련자료

육사학술회의 –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歷史”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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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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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 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명입니다.

2016년 9월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이 되고

그 이후 모집책이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저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그동안 너무 신뢰했었던 사람이기에

이 일에 대해 모든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려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단돈 얼마라도 제발 변제를 해주었으면…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양파껍질같이 하나하나 들어날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제발… 제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일, 2017/12/1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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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자료 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1일 오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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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 섬의 한국인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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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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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며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연구팀은 이 기사가 위안부를 27명이라고 적은 것은 아이 3명 가운데 1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명부를 보면 승객 368명 가운데 조선인 249명, 여성과 아이 29명이 확인된다.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노동자’, 아이는 ‘무직’으로 돼 있다.

시는 “다른 문서와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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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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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이키노호 승선 명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그래픽] ‘트럭섬’으로 끌려간 위안부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이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인물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있는 고(故) 이복순 할머니라는 점을 판명해냈다.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 구술자료를 남기지 않고, 1993년 12월 정부에 피해를 신고했을 때에도 간략한 피해 내용만 남겨 삶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이 생전 이복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에게 트럭섬 위안부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며칠 뒤 할머니의 아들도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 경북 안동, 대구의 공무원들이 자료를 뒤진 결과 하토가와 후쿠준이 할머니의 창씨명이 맞고, 주소지도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시는 “할머니의 남편 호적이 있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사무소 계장은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온종일 제적등본을 뒤져 해당 자료를 찾아줬다”고 관계자의 노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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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복순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일본 패전 후 그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항으로 갔다.

이 할머니는 이후 도쿄로 갔다가 규슈 후쿠오카 현 하카타 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26명 가운데 이복순 할머니를 뺀 나머지 25명의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나머지 할머니들의 신원도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이날 오후 1시 30분 서울시청 신청사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발표한다.

또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출간한다. 내년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해 성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email protected]

<2017-12-11> 연합뉴스

☞기사원문: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관련기사

☞뉴스1: 일본군 위안부 남태평양 ‘트럭섬’까지 끌려갔다…서울시 첫 확인(종합)

☞민중의소리: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한국NGO신문: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명부, 사진 … 서울시 첫 확인

☞KBS: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첫 확인

※뉴스영상

☞MBC: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화, 2017/12/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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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2/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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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유산에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강제동원 상처 아물지 않았다”
日강제동원네트워크,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노동’ 가이드북 출간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재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시설의 강제동원 역사 은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진상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한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정보센터를 하시마에서 1천㎞를 훌쩍 뛰어넘는 도쿄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 각종 꼼수를 동원해 은폐에 급급한 상태다.

이런 일본 정부에 맞서는 일본 시민단체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최근 우리나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이라는 책자를 내고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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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발간한 강제동원실상 소개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우선 하시마에 대해 가이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가량이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고로 변을 당했다. 탄광 매몰에 의한 질식사, 압사, 외상에 따른 사망, 여기에 탈출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익사도 있었다.

책자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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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에서 군함도의 실상을 설명한 부분.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실제 1943년 전북 김제군에서 군함도로 끌려온 윤춘기 할아버지는 “임금의 3분의 1은 강제 저금되었고, 3분의 1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됐다”고 일본측을 고발했다.

그는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며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밥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시 열악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경우 14세이던 1943년 전북 익산에서 군함도로 강제동원됐다.

책자에는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증언도 소개됐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관계자는 12일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설명 속에,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되는 강제노동 등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 한다”며 “이는 2차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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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email protected]

<2017-1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군함도는 지옥”…日시민단체, 진상은폐 日정부 ‘꼼수’에 맞선다

※관련기사

☞한국일보: “군함도는 지옥이었다” 日시민단체, 일제 강제동원 만행 고발책자 출간

세계일보: ‘군함도 진상 규명’ 책 출간한 日 시민단체

☞인사이트: ‘군함도’ 사실 은폐하려는 아베에 맞서 싸우는 일본 시민들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이렇게! –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가이드북 공개

※ [다운로드] 2017 유네스코 가이드북 [한글] [영문] [일문]

화, 2017/12/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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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일 연구소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여는역사_역적’시즌 2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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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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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출연진 : 박한용, 노기환, 방학진, 김광진 등

목, 2017/12/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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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린 대한민국의 자존심

이게 다 친중사대주의에 빠진 민족문제연구소때문에 생긴일

...

토, 2017/12/1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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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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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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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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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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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2017-1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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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민주 이어 공화 정신 살려야”…3.1운동 100년 준비하며 다시 짚어보는 민주공화정

토, 2017/12/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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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 만드는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프롤로그

수, 2017/12/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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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포스터 ©근현대기념관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와 근현대사기념관은 22~23일 오후 2시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강좌를 개최한다.

이번 강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올해 극장가에서 주목 받은 영화를 보며 일제 강제동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2일은 ‘근현대사에 매료된 한국영화, 화제작 ‘군함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23일에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국제사회로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본다.

강의는 무료이며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참여 대상은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으로 매 강좌 25명 내외를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mhmh.or.kr) 또는 전화(02-903-7580)로 신청하면 된다.

15~16일에는 다큐멘터리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과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2016년 5월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찾을 수 있도록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를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선열들의 묘역을 따라 그 뜻을 새기며 걸을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2구간 ‘순례길’ 아래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년간 약 2만 명이 방문했다. 인근 국립4·19민주묘지와 함께 근현대사 탐방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2017-12-20> 뉴스1

☞기사원문: 영화 ‘군함도’ ‘아이캔스피크’ 보며 역사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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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2/2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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