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제3섹타 경제론 – 인간품성에 대하여

지역

제3섹타 경제론 – 인간품성에 대하여

익명 (미확인) | 수, 2018/08/08- 11:02

지난 2~3세기 동안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자본제 시스템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자유주의 그리고 시장기제와 함께 출범했다. 그러나 성취한 풍요 뒤에는 1%의 소수를 위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극빈적 실업 상태 아니면 현대적인 노예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적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통제불능인 자본의 탐욕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와 극심한 자원 낭비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자연 훼손이 심각해지면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여름 지독한 더위는 이러한 위기를 피부로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팽창과 이익 실현이 주동력인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군사적 영역은 국가 또는 지역 단위에 머물면서 패권 국가 간 또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우려가 점증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라 이름 짓든 현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이에 대응한 정치군사적 체제로는 결코 인류의 미래가 안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해 1월 9일 자 ‘다른백년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관련기사:  ‘한국, 자유주의 결핍인가, 과잉인가’ )

칼럼_180808(1)

존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저술에서 수요와 공급의 합리적 조정과 자원의 배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보와 판단기준을 제공해 주는 시장기제는 체제와 상관없이 가치 중립적으로 적용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에서 역할을 하듯이 사회주의에서도 공히 같은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현재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중국의 괄목할 경제발전의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해당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핵심적 주제는 시장의 기제를 넘어서 배후에 존재하는 이념적 성격인 ‘인간 품성에 대한 견해’와 ‘부와 빈곤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다. 

소위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이데올로기에 항상 인용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완벽하게 조작된 신화적 거짓말이다.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윤리학에 속하여 있던 경제라는 영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독립된 학문으로 개척한 스미스는 단순히 분업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설, 자본축척론, 특혜와 독점에 대한 비판 등을 주창하였고, 주 연구 분야인 윤리학 분야의 저작 ‘도덕감성론’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도덕과 정의, 질서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원용된 표현과는 반대로 그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 상당한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공동체의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곡간에 쌀이 가득해야 인심이 넘친다’는 판단으로 물질적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분업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을 저술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수공업적 가내공업에서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고, 다수의 가내 수공업적 공급체계라는 조건 속에서 이상적인 분업과 시장적 균형이론이 실제로 잘 작동하였다. 본디 애덤 스미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가공의 ‘스미스’와는 정반대로 미래에 다가오는 공장제적 대량생산이 가져올 독점적 폐해를 매우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만큼 잘못 와전된 또 다른 인물이 찰스 다윈(1809~1882)이다. 위대한 그의 진화론은 생명과 자연생태계를 상호관계와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실천적 방법론이고,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두(話頭)였다. 그의 자연(환경) 선택론은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상이 생물계의 개체에서 군락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로 영역을 확장되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스펜서 등 일군의 학자들이 진화론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같이 저급하고 잘못된 이론으로 축소·해석하면서, 자본제 생성 시기에 맞불려 살인적 노동자 수탈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 성장기에 있는 유소년들을 하루 18시간 이상 장기간 노동시키는 것도 약육강식의 논리로 정당화되었고, 뼛골이 빠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과 빈곤을 못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못난 탓으로 돌려졌으며, 탐욕스러운 귀족과 자본가의 풍요 역시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현대 생물학적으로 밝혀지는 내용은 인간의 DNA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불용상태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면서 부단히 다양하게 적응하고 진화한다고 한다(stochastic theory). 인간의 사회적 진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하버드 대학의 거두 로베르토 M. 웅거 교수는 <주체의 각성(The Self Awakened)>(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에서 인간은 고정된 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환경과 제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소적(plastic) 가능성의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경제적 동물’과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규정과 천박한 이론이 자본증식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탈바꿈 등장하여 시장과 결합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으로 찬란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오늘날 끝없는 수탈과 처참한 전쟁과 고통스러운 빈곤, 그리고 노동소외로 퇴행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본의 탐욕과 이를 정당하게 포장하는 논리와 실제로 작동하는 시장이라는 기제가 함께 맞불려 칼 폴라니가 표현했듯이, ‘악마의 맷돌’로 변질되면서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구호는 실상 잘못된 현실을 은폐하고 기존의 기득권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강력한 지배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최근의 현대적 게임이론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도덕의 핵심인 인간의 이타성은 긴 역사를 통하여 공존의 규칙으로 수용되고 정착된 것으로 밝혀졌다. 예외적으로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인 탐욕적 인간이라는 가정은 18세기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기득권을 옹호하고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되고 강제로 적용된 억압이자 이탈이다. 한마디로 대화적 언어를 공유하고 사회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제도와 환경에 의해 유도되고 진화하며 성숙되는 신적(至誠)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연스레 산업사회 초기부터 자본의 탐욕에 대한 문제점과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를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드러낸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로 다가온다.

칼럼_180808(8)
샤를 푸리에(왼쪽), 로버트 오언(오른쪽)

유토피아를 상상한 토머스 무어, 자연재의 공유개념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을 제시한 토마스 페인, 무제한적 사유제를 비판한 시몬 드 보부아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시종들을 해방시킨 귀족 출신 생 시몽, 그리고 아래에 언급할 사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 등으로 연결되는 산업혁명 초기 시절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는 일로 문제가 많은 현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에 와서 화려하게 재평가받는 사를 푸리에의 천재적 제안과 로버트 오언의 실천적 실험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푸리에의 시각에서는 가난과 실업에 시달리는 한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이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주권론의 원칙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의 개념은 생활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그에게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는 의미 없는 망상과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에 유행하던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들도 가난한 인민들에게 품위 있는 생활 수단을 제공해주고, 최고의 자연권적 권리인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시대적 명령에 무지하다고 반발한다. 가난한 인민들은 곧 정치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노동할 권리의 보장을 절대적인 요구라 주장하며, 이 노동할 권리 없이는 여타의 모든 권리가 무용지물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푸리에는 노동의 문제를 계급적 관점보다는 자연적 인간 존재라는 방식에 기초하여 고찰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을 쫓는 즐거운 노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참조로 푸리에의 열정과 즐거움에 근거한 노동의 개념은 후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다시 현대적 의미로 부활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려는 시도로써 그는 ‘팔랑주(phalange, 적이 공격할 수 없는 잘 짜인 밀집 방어진)’의 건설을 꿈꾼다. 농업과 산업 활동의 결합체이며, 그 운용방식은 노동의 형태와 생산물의 분배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공동노동, 업적 및 도급에 의한 차등분배, 조직원의 최저생계보장, 생산단위 간의 업적 경쟁 등을 기초로 하여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팔랑주의 밑그림을 기획한다.

애초에 내면의 열정과 즐거운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나, 현실적으로는 힘들거나 쾌적하지 못한 노동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산공동체 체계 속에서도 사회적 차별, 임금의 차등, 사유재산제도 도입, 사적 자본의 공헌(일종의 기부금) 등 어쩔 수 없이 불평등적 요소가 존속함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팔랑주 간에 생산물의 상호교환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공정성이 유지되도록 정치 경제적 최고의 권력이 개입하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최소 80가정과 400여 명 수준의 개인에서 최대한도로 300가정과 1500~2000명 정도를 상정하고 이 단위가 점차 연방적으로 결합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체제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유치한 상기 팔랑주의 구상에서 우리는 현대적 협동조합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푸리에는 자신의 글 ‘통일의 이론’에서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연대의 개념에 처음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 보험의 원칙, 위험과 빚에 대한 공동의 책임 △ 재산의 공유원칙,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려는 자세 △ 사회적 집단적 연대, 공동체적 소속감을 위한 원칙 △ 공공부양의 원칙, 최저생계의 보장 등 역시 현대적 복지국가의 개념을 시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모범적으로 잘 이루어진 팔랑주가 표본이 되어 결국 세계적 변혁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 않은 그는 이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의 충당을 위해 여러 내각 대신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나 아무도 그의 호소에 응대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을 누군가가 자신의 기획, 팔랑주의 실현을 지원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자신을 찾아오리라 굳게 믿으면서 매일 정오에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푸리에가 몽상적 휴머니스트라고 조롱을 받는 배경이다. 

그러나 그가 제기했던 맹아적 주제들은 마르크스 등에 의해 ‘과학적 인간해방론’으로 되살아나고 20세기에는 정치적 권리를 넘어선 노동과 생활권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개념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고, 현재에 일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의 역사적 동력을 미리 일깨운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푸리에 이후 이론보다는 산업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로버트 오언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기업가이며,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장인 역시 규모가 제법 되는 방직공장의 소유주였다. 

당시 산업계에는 기업가와 노동자 양측이 끙끙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규율이 무너진 노동자들의 불량하고 게으른 근무 태도였다. 이를 잡기 위해서 기업가들은 협박, 벌금, 해고 등 강압적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간 노동, 열악한 환경, 저임금과 학대, 영양실조 등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스스로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상황을 안고 있어서 앞뒤의 두 가지 문제들이 뒤엉키어 악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장인인 데일 씨는 당대의 보기 드문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뉴라니크 공장에 이미 소년소녀들의 기숙사를 각각 분리 제공하였고, 양호한 급식, 깨끗한 작업환경을 제공하며 야간학교까지 운영해 왔다. 오언은 이에 더하여 고임금 정책을 유지하고. 10세 미만의 아동노동을 금하고, 인원 감축 없이 최신 설비를 들여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당시 평균 노동시간이 14시간 이상인데 반해, 10.5시간으로 대폭 줄였다. 장인이 기초를 만들었던 여러 가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복지시설을 더욱 확대하였고, 근무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언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노동자들의 교육문제였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공공적 보편적 행복으로 확대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교육이야말로 이성적 사회실현의 참된 지렛대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교육의 지향은 한마디로 사회교육이었고 교육환경론이었다. 노동자들이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노동의 주체로서 객관적 능력향상과 주관적 품성을 갖추는 것이 사업성공의 요체로 굳게 믿었다. 

실제로 20년간 오언은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실천하여 동일한 노동자 숫자로 생산량을 두세 배 증대시켰고, 순익도 두 배 이상 증대하는 등 대단한 성공을 이룩하였다. 이윽고, 뉴라나크 방적공장은 사회개량 운동의 산지로 각지에서 명사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생기는 법, 외부적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다른 주주와 동업자들은 오언의 운용방식이 자본의 논리에 어긋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파산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업자들과의 불화가 오언의 절절한 오랜 꿈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고 1825년 홀연히 미국을 향해 떠난다. 

영국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경험 중에 최신기계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가 생산물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는 증대된 생산물을 선순환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면서, 단기적인 자본주의 이익에 매달리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를 온전한 기여자인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해결된다는 취지로 푸리에가 구상한 팔랑주와 비슷한 생산협동의 공동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구상을 실현시키기에는 조국인 영국은 너무나 전통적 보수적 관행에 젖어 있었고 경제 불황과 실업의 확대 속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동업자 간 불화가 그를 동요하게 한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오언에게 미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신천지로 등장한다. 그는 독일인 목사가 인디애나 주에 창설한 종교공동체인 ‘뉴하모니’를 사들이고 푸리에가 이상적인 숫자로 제시한 900여 명의 주민들과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예비실험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험은 4년만인 1829년에 실패로 끝나고, 그는 다시 영국 사회로 돌아온다. 

뉴하모니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그의 신념과 구상을 홍보해냈고 1836년 다시 햄프셔에 퀸즈우드라는 공산적 공동체를 건립하였으나 이도 18년 뒤인 1854년에 와해된다. 2년 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세계에 중요한 진리를 가져왔다. 세상이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여기서 섣불리 오언의 다양한 시도에 대한 실패 원인을 쉽게 언급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의 관념적 성급성을 비난할 수 있고, 또는 기존 조직원의 종교적 관행과 오언의 사회경제적 신념의 충돌과 부조화를 지적할 수도 있고, 그의 철저하지 못했던 공동체적 방법론을 탓할 수 있다. 사회 전반적 변혁 없이 부분적 지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백한 한계도 언급될 수 있다. 혹은 기회의 땅이었던, 그래서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주의에 의존하던 미국적 풍토에 오언의 공동체적 이상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언의 변혁적 운동에 대한 실패에 대해 어떠한 단정적인 판단은 유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칼럼_180808(4)

참조로, 우리에겐 고전적 교과서가 된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저자 칼 폴라니는 실패한 오언을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의 한 사람이며 인본적 실천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언의 실험적 시도가 실패한 후에 뒤따라온 것은 19~20세기를 장식한, 강철 같은 조직을 통하여 노동계급 주도의 투쟁과 혁명,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후반 인간 품성을 무시한 소련 연방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주요 활동은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것, 물질적 생산 기반과 인간의 해방적 공간을 정합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인본주의적 상상과 헌신적 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붙인 ‘공상적’이라는 형용사는 이제부터 ‘인본적’ 사회주의자라는 찬사로 바뀌어야 한다.

사유재산의 무제한적 허용, 기득권 방어적 거래의 일방적 제도화, 자본만을 중심축으로 하는 회사의 설립과 계약에 관한 법, 이들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제도와 서민적 참여를 제어하는 복잡한 우회 구조,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문화적 흐름과 사회적 관행 등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비판과 대안을 찾으려 했다면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인간과 사회의 해방적 조건을 모색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과학이 발달하고 정책적 경험이 누적된 현재, 우리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에 고통을 받는 힘없는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현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 의지가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제3섹터 경제론은 유용한 도구로서 과학적 방법론을 뼈대로 삼고, 전망적 좌표로서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녔던 도덕적 의지를 신경줄 삼아 새로운 모색의 길로 나서고자 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이야기는 서강대 박호성 명예교수의 ‘공동체론’에서 원용하였습니다. 필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한국노총 및 산하조직 주요 일정 2017년 8월 14일(월)∼ 2017년 8월 20일(일)   1. 한국노총 주요...
금, 2017/08/11- 13:58
240
0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10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소속이 외교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로 바뀌었을 뿐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 자리 그대로다.

노무현 정부에서 조지 부시 미 행정부를 상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계 협상을 주도했다면, 이번에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한미FTA개정 협상을 지휘하게 됐다.

11761_8512_4442
지난 4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취임사를 하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사진 출처: http://www.news33.net/)

김 본부장은 지난 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수동적이고 수세적인 골키퍼 정신은 당장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예측 가능하게 행동하기를 원하는 건 협상 상대방 뿐”이라고도 했다. 취임 일성부터 한미FTA 재협상을 위한 포석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여정부 한미FTA의 주역

‘김현종 귀환’에 대한 평가는 논쟁적이다. 한미FTA의 직격탄을 맞은 농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촛불정신을 훼손하지 말라”며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2005년 김 본부장이 주도한 쌀시장 개방 재협상에 대한 국회비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정용철·홍덕표 농민이 사망한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고 있다. 새 정부에서 또다시 통상 개방으로 농민의 삶을 앗아 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20170814_110351
지난 1일 청와대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단체모임 ‘농민의 길’과 시민단체모임 ‘FTA(자유무역협정) 대응 범국민대책위’가 정용철, 홍덕표 농민의 영정을 들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출처: 전국농민회총연맹).

김 본부장은 대한민국이 처한 통상 환경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며 자신의 복귀의 불가피성을 에둘러 설명한다.

그는 “우리에게는 안이하게 상황을 판단하거나 오판할 여유가 없다”며 “전시 지도자와 평시 지도자는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모범답안을 새로이 쓸 때”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통상정책과 전략이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이었다면 이제는 성동격서(聲東摩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이 과연 참여정부의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과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된다.

조기유학 1세대…업신여김 극복하려 독종으로 공부

김 본부장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노르웨이 대사까지 지낸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두 살 때부터 미국, 일본 등지를 거듭 옮겨 다니며 자랐다.

14세때 아버지가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자 가족과 떨어져 미국에 남아 공부했다. 이 때문에 조기 유학 1세대로 꼽히기도 한다. 조기유학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7막7장’의 주인공 홍정욱 헤럴드 회장보다 11년 앞서간 나 홀로 유학 길이다.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보딩스쿨(기숙학교) 월브라햄 앤 몬슨 아카데미(Wilbraham & Monson Academy)가 모교다. 지금도 한국인은커녕 아시아계 학생도 찾아보기 힘든 백인 중심의 유명 사립학교로 알려져 있다.

20170814_112028
왼쪽 사진은 김현종 본부장의 부모 김병연(오른쪽)·최정심 부부. 오른쪽 사진은 초등학생 시절의 김현종 본부장(오른쪽)과 동생 현용 씨. (사진 출처: http://egloos.zum.com/)

김 본부장은 독종으로 여겨질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위해 책상 아래 바닥에 못 박아 고정한 운동화를 신고 공부한 일화도 알려져 있다.

“미국 아이들이 두 시간 공부한다면 나는 4, 5시간 공부해야 이길 수 있다”는 각오였다고 한다.

‘마이너리티’(소수자)라는 자각이 채찍이 됐다. 김 본부장에게 미국·일본에서의 생활은 또래 친구들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의 기회였지만, 때로는 ‘조센징’으로 때로는 ‘옐로 칼라’로 이유 없는 멸시를 받아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기도 했다. 어린 김현종 홀로 들기에는 만만찮은 짐이다.

부친인 김병연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대사관 근무 때 소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일본 아이들이 조센징이라고 놀려대 크게 상처받고 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다”며 “자신이 소외계층에 속한다는 생각이 어린 현종에게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갖게 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1977년 아이비리그에 속한 컬럼비아대에 진학해 국제정치학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는다. 내쳐 통상법 전공으로 진로를 바꿔 법학박사 학위도 따낸다.

1982년 같은 대학 로스쿨로 진학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뒤에는 뉴욕 월스트리트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대형 로펌에서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로 1985년부터 4년간 활동했다. 로펌 근무 중 단기 선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김 본부장은 1989년 귀국해 김·신&유 법률사무소에 몸담는다.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 “내 ‘에센스’는 국익”

김 본부장은 한국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1993년 홍익대 교수 공채에 응모해 무역학과 조교수로 채용된다.

1995년 외교통상부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대책반 고문변호사로 위촉되면서 정부와 첫 인연을 맺는다. 무역분쟁과 관련해 필요한 소장을 작성하고 증빙서류 등을 준비하는 일이 주어졌다.

한국산 TV에 대한 미국의 덤핑관세 부과, 한국의 농수산물 수입통관절차에 대한 미국의 제소, 한국 주세 불평등에 대한 제소 등 거의 모든 무역분쟁을 다뤘고, 승소율도 높았다.

김 본부장은 1999년에는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라는 기록을 세우며 WTO 법률자문관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20170814_111618
김현종 본부장은 지난해 WTO 상소기구 위원으로 선임돼 최근까지 활동하다 이번에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사임했다.

전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140여명의 통상전문 변호사를 물리치고 WTO법률국 수석법률자문관 자리를 차지했다. 김 본부장은 “WTO에 들어가기 위해 통상법률 분야의 핵심 인사들과 교류하고, 시사에 뒤떨어지지 않게끔 50여 종의 통상법률 국제학술지를 구독하는 등 꼬박 5년을 준비했다”며 독종의 면모를 드러냈다.

김 본부장의 세계관에 가까운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자각은 그를 다시 한국으로 이끈다.

2003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대비해 통상교섭조정관으로 영입한 것이다. 앞서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당선인 신분이던 노 대통령 요청으로 통상분야에 대한 비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이 계기가 됐지만, 연봉이 반토막 나는 선택을 한 데 대해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김 본부장은 이에 대해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에센스가 있는데, 내게는 국익”이라며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유독 ‘국익’, ‘국가관’ ‘애국심’ 등의 단어를 많이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말 실력이 출중한 것도 “언제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준비해온 덕이다.

28ÀÏ ³ë¹«Çö´ëÅë·ÉÀÌ ÇÑ´ö¼ö ±¹¹«ÃѸ®,±èÇöÁ¾ UN´ë»ç, ¹®ÀçÀÎ ºñ¼­½ÇÀåµî°ú ÇѹÌFTAÇù»óÀ¯°øÀå°Ý·Á¿ÀÂùÀåÀ¸·Î °É¾î¿À°íÀÖ´Ù.
2007년 8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FTA 유공자 격려 오찬장으로 입장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의 모습.

김 본부장은 초등학교 3, 4학년 2년간만 서울에서 다녔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생각도 영어로 하고, 꿈도 영어로 꿀 정도로 영어가 친숙하다.

하지만 우리말도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법전을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유창하다. 부모님의 힘이 컸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도록 했다.

어머니 최정심씨가 학년에 맞춰 국어, 국사 등 한국 교과서를 마련해 가르쳤다. 만화책은 가장 좋은 교과서였다. 월가 로펌에서 근무할 때도 빠듯한 시간을 쪼개 ‘공포의 외인구단’을 빠짐없이 읽었을 정도로 만화 사랑이 대단한 배경이다.

김 본부장은 자신과는 반대로 자녀들에게는 미국 만화책으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승부사 기질 강한 FTA협상 적임자… 친미·친대기업 꼬리표

김 본부장은 2003년 1급 통상교섭조정관으로 공직 입문 1년 2개월만에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 자리를 꿰찬다.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통상협상 전문가답게 한미FTA 체계에 속도를 더한다.

그는 FTA전도사를 자임하며 국익론을 앞세워 국내의 반대 여론을 지워간다. “개혁 개방을 미루고 기존 시장에만 안주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는 김 본부장을 FTA 반대 진영에서는 “개방주의적 친미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

반면 국익에 어긋난다면 FTA 협상을 언제든 내던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를 ‘개방주의적 국수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놓는 이도 적지 않다.

일례로 2007년 한미FTA 협상 당시 김 본부장이 협상중단이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일화를 든다.

2007.4.2 / 2ÀÏ ¿ÀÈÄ ¼­¿ï ÇÏ¾æÆ®È£ÅÚ¿¡¼­ ¿­¸° ÇѹÌFTA Çù»ó Ÿ°á ¹ßÇ¥ ±âÀÚȸ°ß¿¡¼­ ±èÇöÁ¾ Åë»ó±³¼·º»ºÎÀå°ú Ä«¶õ ¹ÙƼ¾Æ ¹Ì¹«¿ª´ëÇ¥ºÎ ºÎ´ëÇ¥°¡ ¾Ç¼ö¸¦ Çϰí ÀÖ´Ù. / ¿À¸¶ÀÌ´º½º ±Ç¿ì¼º
2007년 4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김 본부장은 협상 마감을 하루 앞두고 카란 바티아 미통상대표부(USTR) 부대표에게 “24시간 안에 많은 이슈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협상은 끝났다. 짐 싸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라”고 최후통첩 했다.

자동차 등 한미간 최대 통상 현안과 관련해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승부수 띄운 것이다. 결국 미 측이 협상 마감시한을 목전에 두고 대폭 양보한 수정안을 내놓으면서 협상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김 본부장이 한미FTA 개정 협상의 적임자를 평가가 적지 않은 배경이다.

다만 친미, 친대기업 성향의 행보 등의 논란 가능성은 여전하다. 김 본부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주UN 대한민국대표부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했다.

2009년 삼성전자 해외법무 사장에 영입돼 2011년까지 재직하며 애플과 특허소송 등을 총괄했다. 지난해에는 WTO 상소기구 위원으로 선임돼 최근까지 활동했다.

WTO 실무규칙에 따라 상소기구 위원이 사퇴할 경우 이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90일간 정부직을 맡지 못하도록 돼 있기도 하다.

월, 2017/08/14- 11:31
239
0

5.9 대선승리 이후, 5월 10일 오전 8시 처음으로 당선증이 나왔다.

이후 약 11일 동안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일들을 복기해보면, ▴임종석-조국 등 청와대 참모 인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 ▴국정교과서 폐지 ▴미세먼지 축소를 위해, 노후 화력발전소 일시적 가동중단(=셧다운) ▴세월호 기간제 선생님 순직 인정 ▴돈 봉투 감찰 지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임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사 ▴윤석열 검사의 서울지검장 임명 ▴5당 원내대표 청와대 초청 회동 등이다.

20170523_143620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했고, 19일에는 5당 원내대표와 만나 협치와 개헌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치는 의회의 입법없이 대통령의 지시만으로 가능한 조치들이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제도개혁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이러한 문재인 정부 초기 활동에 대한 조선일보 분석의 핵심은 ‘국민 지지율 60%가 넘는 정책’만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분석이다.

5/9 대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파 후보가 몇 달 전부터 ‘당선이 유력한’ 상황에서 맞이한 최초의 선거였다.

문재인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도 월등히 앞섰다. 그렇기에 당적 일체감이 높았고, 경선 후유증이 적었고, ‘취임 100일 플랜’ 등에 대해서 미리부터 준비하기 용이했다. 최근 우리가 목도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그 결과물이다.

2004년 4대 개혁입법은 왜 실패했는가

오히려 문제는 ‘100일 이후’이다. 100일 이후에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2004년 4월 총선을 목전에 두고, 3월 12일 한나라당-민주당은 ‘의석수가 많음’을 믿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국회에서 가결한다. 이후 ‘민심의 역풍이 분다. 그 에너지로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원내과반 정당이 된다.(*총의석 299석, 한나라당 125석, 민주노동당 10석, 민주당 9석이었다.)

2004년 총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민주파 정치세력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한 최초의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과반 미만’ 의석이었기에 ‘한나라당 때문에 안된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남 탓의 정치학’과 ‘핑계의 정치학’이 통용되었다.

2004.4.15 / 15ÀÏ Àú³á 6½Ã Á¤°¢ Á¦7´ë ±¹È¸ÀÇ¿ø¼±°Å ¹æ¼Û»ç ÃⱸÁ¶»ç °á°ú ¿­¸°¿ì¸®´çÀÌ °ú¹Ý¼ö¸¦ Â÷ÁöÇÒ °ÍÀ¸·Î ¿¹ÃøµÇÀÚ °³Ç¥»óȲ½Ç¿¡¼­ ¹æ¼ÛÀ» ÁöÄѺ¸´ø ´çÁ÷ÀÚµéÀÌ È¯È£Çϰí ÀÖ´Ù. / ¿À¸¶ÀÌ´º½º ±Ç¿ì¼º ±âÀÚ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는 출구조사결과를 지켜보며 환호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민주파는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의회 다수파가 됐지만, 개혁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행정부도 잡고, 입법부도 과반을 차지하게 되자 더 이상 핑계꺼리가 사라진다. 이제 온전히 ‘실력으로’ 개혁을 이뤄내야 했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제시한 의제는 4대개혁 입법이었다. ▴국가보안법 ▴과거사법 ▴언론개혁법 ▴사립학교법이다.

2004년 그 해 겨울, 국회는 4대개혁 입법을 둘러싼 내전을 치뤘다. 국회는 몸싸움과 욕설로 뒤덮였다. 당시 한겨레-경향 등 진보언론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적극적으로 지지-엄호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개혁’이 아니라 ‘민생’이 중요하다고 비판했다. 즉, <개혁 VS. 민생>의 프레임을 짰다.

4대개혁 입법은 결국 실패했다. 중요한 것은 ‘왜’ 실패했는지를 제대로 성찰하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리고 최근 열성적인 문재인 지지자들 일부가 진보언론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타당한지와 직결되며, 동시에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와도 직결된다.

반대파 집결시킨 요란한 개혁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4대개혁 입법은 3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아젠다 셋팅’에서 실패했다.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 한경오프(한겨레-경향-오마이-프레시안) 모두 틀렸다. 결과적으로, 조선일보가 옳았다.

국가보안법같은 ‘개혁이슈’가 아니라 ‘민생이슈’를 전면에 내걸었어야 했다. 개혁이슈는 속된 말로 운동권 출신들이 좋아하는 이슈였다. 생활에서 겪고 있는 서민대중의 눈물과 울분을 달래주는 이슈가 아니었다. ‘국민들을 위한 아젠다’가 아니라 ‘운동권을 위한 아젠다’였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고학력 + 메이저 캠퍼스 중심’이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먹고 사는 것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 ‘고소득 + 중산층’이 된다. 4대개혁 입법의 오류는 본질적으로, ‘고학력 + 중산층 + 민주화 운동 세력’이 낳은 자기만족적 패착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지표 중 하나가 당시 국가보안법에 대한 여론조사이다.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가보안법 개정 및 폐지 입장이 1/3, 반대 입장이 1/3이고, 나머지 ‘관심없다’가 1/3이었다.

2004년탄핵몸싸움
2004년 1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보법 폐지법안을 단독상정하려는 여당 의원과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의원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media.khan.kr/)

둘째,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 다수자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4대 개혁입법은 오히려 ‘반대파, 다수자연합’을 만들어줬다. 국민들은 관심 없는 아젠다였고, 반대파는 결집시켜줬다.

①국가보안법은 한국전쟁의 경험과 분단을 중시여기는 보수 유권자 전체를 민감하게 자극했고 ②과거사법은 한국전쟁과 연결된 보훈단체들을 자극했고 ③언론개혁법은 조중동을 단결시켜줬고 ④사립학교법은 지역구 선거에서 목소리가 큰 이권집단인 학교-이사장-교장을 자극했다.

4대개혁 입법을 통해 보수유권자-보훈단체-보수언론-사립학교 이사장이 연대할 수밖에 없는 ‘반(反) 노무현, 반(反) 열린우리당 통일전선’을 구축해서 ‘선물’해준 꼴이었다.

셋째, 국가보안법 ‘폐지’가 아니라 ‘개정’ 수준에서 합의하고 빠져나왔어야 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근혜였다. 과반 집권여당이 쎄게 밀어붙이자 당시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한나라당도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해서는 개정 의견을 밝혔다.

국보법 7조는 ‘찬양•고무’ 조항이다. 국가보안법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판할 때, 핵심조항이 바로 7조이다.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책을 소지하거나, 봤다는 이유로 잡아가는 것도 7조에 근거한다. (*이적표현물은, 민중가요 노래책, 전태일 평전도 포함된다.)

열린우리당 152석 중에 108명은 ‘초선 국회의원’이었다. 이들 108명은 ‘개정’은 안되고 ‘폐지’만이 옳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민주당(=열린우리당)의 왼쪽’을 자임하는 노회찬-심상정을 포함한 민주노동당 역시 폐지만이 옳다고 강변했다. 진보언론도 대동소이했다.

열린우리당 초선 108명은 워낙에 강경한 입장만을 고집했기에 ‘백팔(108)번뇌’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혹은 ‘열린우리당 탈레반’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약 90%는 7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2004년에 열린우리당이 ‘7조+알파’ 수준에서, 국보법 개정 합의를 했었다면,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도, 김부겸 의원같은 분은 용감하게 ‘개정’에서 합의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지난 대선TV토론에서 여전히 ‘폐지론’을 주장하는 심상정 후보를 보며, “아직 2004년에 머물러 계시는구나~..”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개혁

논의를 정리해보자. 4대개혁 입법은 왜 실패했나?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아젠다 셋팅’에서 실패했다. 어떻게? ‘국민들이 관심있는’ 이슈가 아니라, ‘운동권(출신 국회의원들)이 관심있는’ 이슈를 추진했다. 이들은 ‘의석수만 믿고’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민심을 무시한 오만함이 있었다.

둘째, ‘개혁파, 다수자 연합’을 만들어야 개혁을 성공할 수 있는데, 거꾸로 ‘반대파, 다수자연합’을 만들어줬다. 역시 ‘아젠다 셋팅’의 실패에서 파생된 문제이다.

셋째, 초기 아젠다 셋팅이 실패했으면, 민심의 흐름을 읽고 ‘개정에서 합의하고’ 빨리 빠져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들 선명성 과시에만 혈안이 된 (운동권스러운) ‘포지셔닝 정치’를 일삼는 108번뇌-탈레반-진보파들에 의해서 타협국면 및 국면 전환 시점을 놓쳐 버렸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정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에서 한번 패배는 병가의 상사”(一勝一敗 兵家常事)”라는 말이 있듯이, 실패한 것을 성공했다고 우길 필요도 없고, 거꾸로 한번 실패했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벤쳐-스타트업 창업 분야에서는 ‘실패학’을 존중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실패에서 배운다. 정치에서도 <왜 실패했는지>를 복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4대개혁 입법의 실패를 고려할 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위의 3가지 결론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

문재인정부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

첫째, ‘아젠다 셋팅’이 가장 중요하다. 야당-진보-운동권 출신이 관심있는 아젠다가 아니라 ‘국민들이 관심있는’ 아젠다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핵심은 ‘불평등’과 ‘저성장’이다. (*현재 ‘검찰개혁’은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둘째, ‘반대파, 다수자연합’이 아니라 ‘개혁파, 다수자연합’을 만들어야만 개혁을 성공한다. 아젠다 셋팅 단계에서부터 유념해야 한다.

사회운동 세력은 51%를 중시여기지 않아도 된다. ‘소수파’ 진보정당도 51%를 중시여기지 않아도 된다. 지지율 6% 진보정당은 진보성향 유권자 30%만 찬성하는 이슈를 해도 (속된 말로) ‘남는 장사’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다루는 ‘수권 정당’은 개혁을 지향하되, 항상 51%를 유념해야 한다. “자나깨나 불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나깨나 51%”이다.

20170517220336402797
문재인 정부의 초반 성적은 매우 좋다. 개혁의 열기는 높고, 여론의 지지도 높다. 그러나 초반의 조치는 대통령의 업무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성격이 강하다. 개혁이 법과 제도의 뒷받침을 받으며 항구화하려면 의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개혁을 위한 다수파의 확보, 여기에 문재인 정부 개혁의 성패가 달려 있다.

셋째,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합의’하고 다음 의제로 넘어가야 한다. 정치 리더십의 핵심은 결국 선후경중(先後輕重)을 잘 가리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슈-분쟁-갈등도 ‘제한된 자원’이다.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80년 5월 광주, 광주시민들의 억울한 죽음, 학살자에 대한 분노, 증오심, 독재타도, 그래서 반대하는 용기가 가장 중요했던, 80년대스러운 ‘민주화운동 세력 전체’의 오류와 한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포함한다.)

운동권 출신이 ‘처음으로’ 집권했을 때, ‘처음으로’ 뺏지를 달았을 때, ‘모든 처음’이 그렇듯이, 서툴렀고, 의욕이 앞섰고, 반대 세력의 비판은 ‘악의 무리’가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전체적인 지형지물을 살피기보다 환호하는 우리 편에 도취되어 너무 앞질러갔다. 게다가 운동권들의 존재적 기반은 예나 지금이나 ‘고학력+중산층+소득 상위 10%’이다.

‘희생양’을 찾지 말자. ‘남 탓’을 하지 말자. ‘핑계’를 대지 말자. 진영론에 기반한 ‘희생양의 정치’, ‘남 탓의 정치학’, ‘핑계의 정치학’은 ‘민주정부 3기’의 성공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지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복하는 지름길이다.

정치는 본래, 주어진 모든 제약조건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소명(召命)을 달성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주껏~ 잘해야 하는 것이다.

핵심은 결국, 아젠다 셋팅이다. ①국민들이 삶에서 고통받는 것이되 ②‘개혁파 다수자연합’을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③중요한 핵심이 반영된다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합의하고, 다음 단계 의제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문재인 정부는, 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성공하는 통치의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

화, 2017/05/23- 14:45
239
0
'래미안 파크스위트'의 견본주택은 서울 송파구 문정동 래미안갤러리 3층에 마련돼 있으며 26일 공개된다. 삼성물산은 29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3월2일 1순위 청약을 받는다. 당첨자는 9일 발표되며, 계약은 15~17일까지 3일간...
목, 2016/02/25- 06:02
238
0

201606_철학사이다.jpg

 

철학사이다/테마토크.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당신은? 3회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당신은?'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 회는 '자유, 나라사랑, 애국'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와 우리 사회에서 사용돼온 역사적 맥락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공=자유'라는 개념으로 쓰여왔고, 원래 '자유'라는 의미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권리'는 희석되고 '공동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면서 전체주의와 동일시 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한국의 보수주의는 '시장 경제에서 기업의 자유'이외의 자유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과연 얼마나 자유를 추구하고 있을까요?

 

또한, 진보주의는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진짜 그럴까요?

2년 전 세월호 침몰 사고는 '국가'라는 존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그 국가에 속한 구성원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라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이 '세월호 침몰의 진상규명, 안전한 사회'를 요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보주의'의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더욱 건강하고 안전하게 오래 갈 수 있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 사랑은 애국이 아닐까요?

 

철학사이다를 들으며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 경우 : http://www.podbbang.com/ch/8005?e=21980442

* 아이튠즈로 듣기 : https://goo.gl/DXQOEn

 

이번회 소개된 인물과 책

  • 존 롤스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On Liberty》

 

월간 참여사회 2016년 6월호 특집 - 고장 난 나라, 빗나간 애국

 

같이보기

 

같이듣기

톡톡!철학 사이다 테마토크 1 - “불평등”

톡톡!철학 사이다 테마토크 2 - SOS 응답하라 '국가'

톡톡!철학 사이다 테마토크 3회 - 숨은 '민주주의' 찾기

톡톡!철학 사이다 테마토크 4회 -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당신은?

 

월, 2016/05/30- 22:18
23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