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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 김종필의 삶에 투영된 근현대사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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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 김종필의 삶에 투영된 근현대사의 명암

익명 (미확인) | 수, 2018/07/04- 08:20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한국 근현대 정치사를 관통하는 92년의 영욕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명암을 드러낸 것 같았다. 국민훈장의 수여를 놓고 불거진 그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역사를 평가하는 시각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을 하던 김상배씨와 이정훈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검도와 승마, 그림을 즐기는 낭만 소년이었다고 한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범대학(교육학부)에 진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친의 작고로 교사의 꿈을 접었고 사범대도 2년 만에 수료로 그쳤다. 자기 힘으로 앞길을 나가야겠다며 군에 자원했다가 일주일 만에 탈영하고, 다시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면서 그야말로 앞길이 달라졌다.

1949년 5월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JP는 육군 정보국에 배치됐다. 당시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만남은 그의 운명은 물론 우리의 역사를 가르는 출발점이 됐다. JP는 1951년 2월 박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했다. 박 전 대통령과 상사와 부하는 물론 처삼촌과 조카사위의 끈끈한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인척의 연이 쿠데타의 동지로, 나아가 정권의 1·2인자로 권력을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었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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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JP와 한국 현대정치사

JP를 거론하지 않고는 한국 정치사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확연히 엇갈리는데 그 갈림길의 시작은 곧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로 비롯된 30여년의 군사 통치, 그 사이 이어진 잔혹한 독재, 민주주의 말살이라는 공포와 암흑의 역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는 점은 어떤 공(功)을 강조해도 씻어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군(整軍) 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가 하극상의 주동자로 몰려 강제 예편됐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박정희 등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곧 권력의 정점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JP의 나이는 불과 35세. 박정희 소장이 전면에 나서 권력을 빼앗을 때 이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것이 바로 JP였다. 그리고 쿠데타의 성공으로 JP가 앉게 된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자리는 이후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탄탄한 뒷받침을 하는 역할로 굳혀졌다. 정보정치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에 대한 고문과 탄압을 통해서 말이다.

중앙정보부장인 JP는 1962년 11월 12일 일본의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을 갖고 대일 청구권과 평화선, 법적지위 등에 대해 협상한다.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초석이 됐다. 훗날 JP는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조금 적은 액수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겠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43년 정치인생 가운데 1997년 DJP 후보단일화 결단과 함께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로 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 중 크게 엇갈리는 대목이 바로 이 회담이다. 훈장 수여 논란에서도 그가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공(功)’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과 은밀하게 무리한 국교 재개를 서두르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등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팽팽하게 맞선다. 깔끔하게 처리되지 않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까지도 일본과의 긴장관계를 지속하는 주요 요인이다. 2015년 말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또 다시 졸속으로 과거사를 덮으려던 역사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하기도 했다.

권력의 2인자였지만 정계에 뛰어든 JP의 정치 항로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며 실세 2인자로 떠올랐지만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창당을 하루 앞두고 1963년 2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를 떠나야 한다. 그의 어록 가운데 하나인 ‘자의반 타의반’의 첫 시작이었다.

그해 11월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돼 공화당 의장에 임명되며 부활했다가 다시 한일기본조약의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면서 또 다시 외유길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 공화당 의장으로 복귀했다.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냈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설득돼 개헌 작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돼 1975년까지 활약했다. 그러나 정작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것과 같이 JP로부터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잃게 될 것을 걱정하며 김 전 총리를 의심하는 등 끊임없이 경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JP는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10·26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공화당 총재로 돌아왔다.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정치인으로까지 주목을 받았지만 5공화국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JP는 “박 대통령이 나를 태평양 한복판에 내놓고 가셨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동지의 딸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선 “막상 의지하고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도” 자신에게 한 번도 자문을 구한 적이 없다며, 권력에서 멀어진 자신을 멀리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자주 토로하기도 했다.

2인자의 삶은 1986년 귀국해서도 이어졌고, 오히려 더욱 굳혀졌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3대 대선에 출마했던 JP는 8%의 득표율로 낙마했다가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캐스팅 보트’이자 권력의 2인자로서의 행보가 지속됐다. 1990년 1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3당 합당을 하며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YS) 민자당 후보를 지원해 여권의 2인자가 된다. ‘굴신의 정치’를 폈지만 YS와 민주계 진영에서 2선 후퇴 압력을 받자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총선에서 ‘핫바지’로 불리던 충청권의 세력화로 다시 입지를 굳혔다.

1997년 대선에 도전했다가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내 다시 킹메이커가 됐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에 임명된 뒤 6개월 동안 ‘서리’ 꼬리표를 떼지 못했지만, 민주정부의 초대 총리로 다시금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JP는 생전에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 중에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를 의식해서였는지 “대통령 하면 뭐하나. 미운 사람 죽는 거 확인하고 편안히 숨 거두는 게 승자지”라고 말했단다. 이른바 ‘승자론’이다. 격동의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권력의 바로 옆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3김(金)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진정 자신이 원하던 승자론을 실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승리로 끝났을지 몰라도 그 사이 우리의 역사는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아야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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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가 되자 일반 가정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전화회선으로 거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한정된 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슈퍼에서 사온 딱딱한 두부를 요리해서 둘이서 먹었다. 독일인 지인은 “두부는 인터넷 같다.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고 먹어 볼 기회도 없었는데 지금은 없는 곳이 없어 모두가 두부를 먹는다” 며 인터넷과 두부가 사회에 침투하는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의 보급도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정보화 사회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편리함의 중독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물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의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나도 아무런 악의 없이 단지 흥미위주로 성범죄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던 중에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사에 ‘범인은 재일교포’ ‘한국과 북한은 성범죄대국’이라는 문자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가벼운 생각과 무지가 얼마만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괴롭히고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유럽 등 서양을 동경했고 실제로 프랑스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 지인도 생기고 가끔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젊었을 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향되고 무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는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한국인은 일본인을 아주 오픈 마인드로 대해주고 일본인이 한반도를 통치했던 역사에 대해서도 이를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일본의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한일 간의 여러 가지 문제가 실은 전쟁 비즈니스를 획책하는 일본 정부가 이를 선동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가와나카 씨도 조선학교에 가보세요”라는 한국에 사는 페스트리치 씨에게 권유를 받았을 때, “네”라고 짧게 대답은 했으나 전혀 모르는 타인인 내가 조선학교를 찾아가면 과연 학교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의 목적이 인터뷰로 정해졌을 때 지금까지 품어왔던 거리감 같은 것이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일본인이 갖고 있는 차별적 사고를 조금은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던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나라와 지자체로부터 차별을 받아 가나가와현 내의 외국인학교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업료 무상화제도를 적용받지 못하고, 현은 이 학교를 포함해 다섯 개 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에 대한 학비보조를 2016년 이후 정지했다. 이에 대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은 요코하마 시내의 모처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라와 자치단체에서 솔선해서 차별을 하고, 국민의 차별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관제 헤이트다.”라며 이를 비판했다.

내가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를 방문했을 때 김찬욱(金燦旭)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넓은 교내를 구경시켜주며 wifi 배선 등도 졸업생과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자신들이 직접 깔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높고도 넓은 천정에 저렇게 긴 배선을 깔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릴텐데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것을 직접 해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에서는 특히 어학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조선어, 일본어, 영어의 세 언어를 철저히 배운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 언어의 검정시험의 자격보유를 목표로 하여 어려운 공부를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한다. 일본 학교가 도입하기도 전에 정보교육을 실시하고, 정보리터러시 등을 배워 스스로 정보를 발신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라고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그것은 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 일부인데, 무엇보다도 이 학교의 교육방침의 기본 베이스는 서로 돕는, 무언가를 잘하는 학생은 그렇지 못한 학생을 돕는, 상조(相助)의 정신을 기조로 한, 조선민족으로서의 마음과 자부심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과의 잡담에서, “장래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물으니 어떤 학생이 “이 조선학교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수줍어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김찬욱 교장선생님에게 들려주자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학교 걱정을 하다니, 이런 건 원래 안 해도 되는 건데요…”라고 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많은 학부형과 졸업생들의 도움에 의해 운영되기도 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봤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의식하고 있는 걸까.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학생들의 의견은 김찬욱 교장선생님을 위시로 한 이 학교 선생님들의 교육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조선민족의 상조 정신이 계승되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교내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로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 전철 안에서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는 이곳에서는 털끝만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수업을 견학해보니 학생들은 지진재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자든지, 인사는 중요함으로 특히 손윗사람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든지 하는 주제를 자신들이 직접 정해 발표를 하고, 음악수업에서는 아카페라로 합창을 하며 서로 웃거나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학교와는 조금 다르게 느낀 점은 발표 전에는 학생들이 다소 떠들거나 장난을 치더라도 선생님은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같이 웃으며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느꼈다.

내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도 감정적인 발언이 아닌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결코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태도는 김찬욱 교장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볼 수가 있어서 조금 놀랐다.

예를 들면 많은 일본인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라든지, 징용공의 문제라든지, 전쟁책임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왠지 우리들을 일방적으로 힐문(詰問)한다고 느끼는 건지, 이미 해결이 다 끝난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 문제시 삼는 조선민족은 질이 좋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인 의견이 많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속해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든지, 필요악이었다는 등의 실언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도 “한국 측 태도가 나쁘니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 학생이 “우리들은 사상이랄까,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제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갖고 서로 이야기를 한다면 편향된 정보에 현혹됨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우리들 일본인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무지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무지 –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만연케 하고 있는지. 예전의 나는 단순히 인터넷에 실려 있던 정보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편향된 사고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안다’는 것의 중요함조차 ‘몰랐던’ 것이다.

10대 때도 병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내 가족이 내밀어준 손도 보지 못하고 가족에 대해 못된 짓을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야말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이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채 못된 짓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와 겹쳐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배려와 공정한 시선이라는 것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완고해져버린 사람의 마음은 실패를 실패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찬욱 교장선생님과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의 학생들은 차별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본인과 평소와 같이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 ‘학교를 열린 장으로 해서 많은 일본인이 찾아와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안심하려 드는 사람들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자기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다면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이 차별하는 상대인 재일조선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들은 차별을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냉정하고 공정하게 대해줄 터이니.

학교를 떠날 때 “언제든지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준 김창욱 교장선생님과 밖에서 놀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또 인사를 해준 학생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마음을 그들이 ‘조선민족의 자부심’으로써 교육에 도입하여 끊임없이 계승하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그들을 만나보면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의 중단과 무상화제도에서 제외한 정부와 자치단체의 모든 대응이 잘 짜여진 비지네스와 같은 차별의 실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가와나카 요

아시아인스티튜트 연구원

수, 2019/03/2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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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나는 미국의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으면 한다” 미국 전 FBI 수장이었던 제임스 코미가 NYT에 보낸 칼럼의 구절이다. 그는 트럼프로부터 대통령직을 보호해 달라는 간접적이고 부당한 압력을 거부한 대가로 모욕적으로 트윗터로 해임당한 트럼프 정권내 첫 번째 최고위직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트럼프의 자질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진실이 밝혀지고 법치가 투명하고 흔들림 없이 공정하게 작동하길 희망하면서 담담하고 적어 내려가고 있다. 조폭 수준의 수많은 사건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국이 여전히 위대한 국가인 것은 바로 뮬러와 코미 같은 강직한 공직자들이 미국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미의 3월 21일자 뉴욕타임즈 기고문 :

미국은 지금 로버트 뮬러 특검의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보고서에서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탄핵당해 마땅한 범죄자라는 결과 혹은 그에게 기본적으로 죄도 없다는 결과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가 보고서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와야 “맞는지”는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미국 대통령직을 맡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뮬러 특검이 트럼프를 범죄자라고 발표하는 것을 지지하진 않는다. 나는 또한 뮬러 특검이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지지하지 않지만, 특검이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있게, 그리하여 기소할 일은 기소하고 그가 조사한 내용을 보고서에 그대로 적을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연방수사국과 법무부는 지난 2년간 대통령이 특검에 개입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사법부에 불을 지르는 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이러한 행태는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뮬러 특검의 수사를 막기 위해 그의 권력을 사용하진 않았다(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다른 차원의 비상사태였을 것이다. 수사의 신뢰도를 무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수사자체를 막는 시도일 테니).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특정한 답이 나오길 희망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법치주의는 편파적이지 않고 완전한 수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법집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사가 관련된 모든 의혹을 제대로 밝히고 사건의 진상에 가장 근접하는 것만이 사법정의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나는 트럼프씨가 러시아인들과 고의적으로 공모하여2016년 대선에 개입하였는지, 혹은 그가 충분히 부패한 의도를 가지고 재판을 방해하려 하였는지에 대해 특검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지 못하며, 그러한 결과에 대한 관심 또한 없다. 나는 오직 수사가 제대로,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정리의 승리가 될 것이며, 국가의 지도부가 진실과 법치에 대한 책무를 저버린 이 시점에도 가장 중요한 미국적 가치들이 보호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전세계에,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과 의문고리의 권력들에게, 미국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사법체계가 있으며, 이는 사법체계를 믿고 개인적 당파적 이익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들 덕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체계가 도달하는 결론을 사람들이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정치와 무관한 법집행은 이 나라에 있어 맥동하는 심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특검이 하는 수사에 대해 최대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일이다. 나는 수사의 종결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또 언제 이야기를 꺼낼 지에 대한 고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언제나 공익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하며,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종결된 수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공공이 필요로 할 때 제공해야 한다.

나 스스로도 희망 하나를 품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트럼프씨가 탄핵을 당해 임기전에 집무실에서 물러나야 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의회에서 보기에 입증가능한 사실들이 있다고 할 때 의회가 헌법에 명시된 탄핵절차를 진행해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럴만한 일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만약 의회에 의해 트럼프씨가 집무실을 나가야 한다면, 트럼프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쿠데타로 볼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미국적 삶의 보편적인 가치에서 멀어지고, 결국 국가를 분열시키고 말 것이다.

트럼프씨를 비판하는 이들은 왜곡하기 어려운 무언가, 혹은 불만을 해소할 무언가가 나오길 바랄 것이다, 적어도 탄핵보단 나은 결과여야 한다. 2020년 대선은 완전하게 치러져야 한다. 비록 주요한 정책문제 – 이민, 총기, 임신중절, 규제, 기후변화, 세금과 같은- 에서는 이견을 보일지라도, 국민들이 잠시 시간을 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통합을 이뤘음을 보여줘야 한다. 더 큰 무엇은 미국의 대통령이 거짓말을 일삼고 법치주의를 연신 공격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정책에 대한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

 

James Comey

미국 전 FBI 국장

월, 2019/03/2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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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7시, 서울 북촌의 은덕문화원에서 다른백년 친교의 밤, ‘당신과 나와 다른백년’ 행사가 열립니다. 

이번 행사는 지난 6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다른백년의 창립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준 분들을 모시고 여는 첫번째 행사입니다. 

행사는 총 2부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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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행사는 실내에서, 2부 행사는 은덕원 내정에서 이뤄집니다. 가을밤, 서울 북촌의 멋과 정취를 만끽하실 것입니다.

1부에서는 다른백년의 정체성과 지향을 소개합니다.  2부에서는 참석하신 분들이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저녁식사와 다과가 마련돼 있습니다. 

행사가 열리는 서울 북촌의 은덕문화원은 원불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문화공간입니다. “서울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멋과 정취가 넘치는 곳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은덕문화원은 현대건설 계동 사옥과 창덕궁 사잇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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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6/09/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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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 글은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PI)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모니크 모리세이 (Monique Morrissey)가 2019년 12월에 발표한 미국의 연금제도 동향과 과제에 대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연금체계가 대표적인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제도인 401k를 중심으 로 발달하면서, 심각한 노후불안에 처해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노후 를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3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재정불안을 부추기고 정치적인 악의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공적연금(사회보장연금)의 역할과 확대를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꼽으면서, 급여 상향뿐 아니라 기여의 점진적 상향과 부과 소득상한 개선 등을 통해 공적연금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확정기여형 중심의 퇴직연금에 대한 비판과 한계를 극 복하기 위해, 전통적인 확정급여형 연금을 지켜내는 한편, 노사가 공동으로 기여 하고 공적으로 관리하는 GRA(Guaranteed Retirement Account)를 현실적 대안 모델로 제시한다.

이 글은 미국의 연금제도에 대한 개괄적인 평가와 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의 연금개혁에도 많은 의미와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보고서의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 모든 국민들이 부담 가능하고 걱정 없는 안정적인 노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공적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워킹페이퍼 원문: 워킹페이퍼_미국의_공적연금과_401k의_현실과_과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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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08/2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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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토론회 개최

연금행동은 2019년 11월 11일(월) 13:30,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의실에서
국민연금 개혁, 이렇게 하자!
연금특위 다수안의 의미와 입법과제
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첨부. 토론회 자료집
191111 국회토론회 자료집(재단선 없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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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9/11/11-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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