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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병 피해자 故 박길래 17주기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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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병 피해자 故 박길래 17주기를 기리며

익명 (미확인) | 금, 2017/04/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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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를 뿌리 뽑지 못하면 우리 삶이 뿌리 뽑힌다” 故 박길래 17주기를 기리며

 

조수자(환경보건시민센터 공해피해자지원위원장)

[caption id="attachment_177411" align="aligncenter" width="500"]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서 “내 폐를 돌려다오!!!”라는 피켓을 든 박길래씨(경향신문DB) 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서 “내 폐를 돌려다오!!!”라는 피켓을 든 박길래씨(경향신문DB)[/caption] 검은 민들레 박길래씨는 2000년 4월 29일 이른 새벽,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무거운 세상살이 훌훌 벗고 저승길로 건너갔습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님이 머문 그 나라에서 당신은 더 이상 고울 수 없는 노-오란 민들레로 피어나소서.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 기억 속에 남겨 뒀던 얘기들 한마디 한마디 떠올려 봅니다. 故 박길래씨 그가 이승과 이별한지 17주년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지난 이야기를 여기에 담아 봅니다.
어느 아주머니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박길래씨는 1989년 한국 최초의 공해병 환자로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았습니다. 70~ 80년대 연탄공장이 밀집한 상봉동 삼표연탄 공장  주변에 거주하던 그녀가 얻은 병은 ‘진폐증’이라 했습니다. 한 번 걸리면 까맣게 변한 석탄먼지가 폐에 가라앉아 치유가 되지 않는 불치의 병 진페증은 광부들에게서나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박길래씨로 인해 도시의 오염된 공기 속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임이 알려지고 증명이 되었습니다. 발병에서부터 공해병이란 판정을 받기까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형극의 길로 표현될 만큼 험난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복지와 시민의 건강을 뒤로 미룬 정부는 박길래씨에게 공해병환자로 인정 할 경우 물밀듯 밀어닥칠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것이 두려워 판정을 질질 끌면서 박길래씨의 진폐증과 연탄공장과는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 가기에 급급했습니다. 게다가 사업주 측의 공작 또한 집요했으며 ‘돈을 줄 테니 소송을 포기하라’는 유혹과 협박에 재판기간 내내 시달림에 지친 그 즈음 인권변호사로 명망이 높은 故 조영래 변호사의 도움으로 긴 싸움 끝에 원고 승소 판정을 받아 냈으며 한국 최초로 반공해운동사의 상징적 인물이 됐습니다. 승소 판정 후 14번의 재판 끝에 얻어낸 피해보상금은 고작 1천만 원. 살아있는 동안의 치료비도 감당 할 수 없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보상금이 적다는 생각보다는 재판 중에 함께 했던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더 소중했다고 하였습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는 어느새 반공해 운동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상봉동 지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건강진단을 받도록 하는 한편 공해발생 현장이 있으면 먼 길 마다않고 달려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이 나와선 안됩니다” 라며 피해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강연도 하며 반공해 운동, 환경운동의 전도사로 활동했지만 박길래 그녀의 굴곡진 삶과 고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계속된 건강악화로 그녀는 외부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 갔습니다. “숨이 점점 찹니다. 이젠 몇 발짝 걷는 것도 힘이 들어요” 병명도 모르던 시절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돈도 다 써버린 뒤 남은 것은 병든 육신뿐, 밭은기침과 호흡곤란으로 더 이상 기댈 곳 없어 검은 폐를 끌어안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검은 꽃으로 스러진지 17년. “들레 들레 민들레야 필적에는 곱더니만 질 적에는 까맣구나” 지리산 노고단에서 활동하는 안혜경 선생이 부른 검은 민들레 노래만이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는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된 환경성 피해자들, 현재 진행형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석면피해자, 시멘트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환경공해병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박길래-640x463  

최초의 공해병 환자 박길래의 삶과 죽음

 

박현철(함께사는길 편집주간)

  2000년 4월 29일 밤 11시 중대용산병원, 꽃 한 송이가 졌다. ‘검은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던 한 사람이 향년 58세를 끝으로 목숨을 꺾었다. 그의 낙화로 인해 한국반공해운동사의 한 장(章)이 또한 접혔다.   ‘박길래, 그 이름은 무한증식의 본능을 가진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희생양이며 이 사회가 키워낸 공해병 때문에 넝마처럼 해진 육신과 영혼이다.’지난 96년 4월, 당시 이미 죽음과 악수하는 삶을 살고 있던 박길래 씨와의 인터뷰 끝에 쓴 기사에서 기자는 그렇게 썼다. 그는 정말 한 벌 해진 옷을 벗듯 병마에 시달린 육신을 놓고 영면했다.   그의 장례는 너무나 검박해서 차라리 초라한 것이었다. 환경연합 등 환경단체와 그의 삶과 반공해운동을 후원하던 이들이 한 뜻으로 환경단체연합장(葬)으로 치르고자 했던 그의 장례는 혈연조차 적빈(赤貧)이었던, 그의 몇 안 되는 친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5월 1일 새로 3시, 마침내 운구차가 차게 굳은 그의 몸을 싣고 떠났다. 그 새벽 고(故) 박길래의 생애는 벽제의 장재장에서 연기로 날아가고 한 줌 뼈로 남았다.한국반공해운동이 사회운동의 한 부문에서 시민운동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웅변한, 존재 그 자체로 환경운동의 귀한 동력이었던 한 탁월한 운동가가 영면의 길을 떠난 것이다.   88년 문송면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한국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천둥소리였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입사한 회사에서 수은중독으로 쓰러진 문송면의 희생은 적어도 다시는 그와 같은 원시적인 작업환경 속에 노동자들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노동환경운동의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그의 죽음은 공장의 담 안에서 벌어진 직업병으로 인한 것이었다.   박길래의 경우, 병의 원인은 공장 안에 있었지만 병을 얻은 것은 정작 공장 밖 그의 생활공간에서였다. 이 경우의 병은 공해병으로 분류된다. 담장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원인은 같다.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대상화하고 투여된 자본 이상의 이윤을 뽑아내려는 비윤리가 당연시되는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장 안의 노동자들의 건강조차 챙기지 않으면서 공장 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해물질의 외부유출까지 신경을 쓰는 곳이 있을 리 없다. 그 결과는 박길래라는 희생자였다.   70~80년대 상봉동은 연탄공장 밀집지대였다. 삼표연탄공장 인근에 살았던 박길래는 연탄공장에서 날아온 탄가루 분진을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폐는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지만 병의 정체는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감기인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감기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어요.”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 상봉동에 이사온 79년, 그해 겨울에 걸린 감기는 정말 질기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잘 낫지 않는 희한한 감기에 걸려 박길래는 일도 못하고 벌어놓은 돈 죄 까먹으며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83년에는 갑자기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이대부속병원에서 건강종합검진을 받았지만 시력저하의 원인은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84년의 종합검진 때도 그의 병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85년 검진에서야 결핵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아무리 결핵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무슨 병인지 알고나 죽자’고 이를 악문 그는 86년 11월 국립의료원에서 폐조직 검사를 받았다. 그의 폐 조각은 숯처럼 검었고 연탄가루처럼 부서져내렸다. 박길래는 그 때 이미 알았다. 자신이 낫지 못할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공식판정은 ‘진폐증’. 탄광촌 광부나 걸리는 병에 자신이 왜 걸렸는지 그는 너무도 쉽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탄공장 밀집지대에 살았다는 죄가 그녀를 진폐라는 불치병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길고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87년 들어서는 이미 치료비조차 구할 길이 없을 지경이었다. 옆집 사람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그 이름으로 병원을 다녀야 했다.   그러던 차에 TV뉴스에 ‘상봉동의 연탄공장 다니는 여인이 진폐증에 걸렸다’는 오보가 나왔다. 억울했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갔다. 87년 1월 23일 조 변호사와 함께 소장을 작성해 삼표연탄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공해추방운동연합(환경연합 전신)이라는 동지가 재판이 진행되면서 생겼다.   박길래의 싸움은 외롭지 않았다. 하나둘 어느 결에 반공해운동의 상징으로서 운동의 중심이 된 그의 곁에 후원자들이 모여들었다. 재판은 지리했고 회유는 끈질겼으며 방해는 야비하고 치사했다. 삼표연탄의 모기업인 강원산업은 거액의 무마비를 미끼로 ‘송사를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고, 깡패들이 계속 협박전화를 해댔다. 박길래는 꺾이지 않았다. 이미 그는 환경운동가였다. 현재진행형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그에게 그 어떤 회유나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전신을 갉아먹는 기침과 피고측의 온갖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87년 12월 그는 승소했다. 그저 연탄공장이 있는 동네의 주택가로 이사왔다는 죄 때문에 천형을 짊어지게 된 대가로 받아 든 보상금은 너무나도 적은 것이었다. 단돈 1천2백만원, 그 돈으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치료비를 갚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2백만원을 보상금에서 덜어내 공해추방운동연합에 비디오와 대형 TV를 사서 기증했다. “나 같은 사람들 더 많이 구제하는 데 유용하게 쓰세요.” 16살에 고향 정읍에서 상경해 결혼도 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장만한 집 두 채를 다 팔았다. 여기에 나머지 보상금 1천만원을 보태 치료에 진 빚을 갚았다. 그래도 20만원이 모자랐다. 청춘을 걸고 모은 재산이 7년 투병 끝에 날아간 것이다. 사라진 것은 그 뿐 아니었다. 남겨진 것은 육신을 갉아먹는 기침과 썩은 폐뿐이었다. 그의 나머지 인생은 무덤으로 가는 긴 터널일 뿐이었다.   박길래는 굴하지 않았다. 박길래의 법정투쟁은 똑같은 사연을 가진 상봉동 주민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이후 5명의 진폐 환자가 상봉동에서 더 발견됐다.   박길래는 상봉동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상봉동 주민 공해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 삼표연탄공장 즉각 이전 △ 전 주민 건강검진 실시를 당국에 요구했다.   이들의 운동에 의해 88년 6월 서울시내 연탄공장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X-선 검사가 실시됐다. 1천8백42명이 검진에 응했고 그 가운데 상봉동 주민들이 1천2백명이나 됐다. 그리고 국정감사를 통해 검진 결과가 드러났다. 1천8백42명 중 50명이 진폐의증의 정밀검진대상자로 밝혀졌고 상봉동 주민이 24명이나 됐다.   박길래는 진폐 판정 이후 반공해운동가로 살았다. 어디든 자기를 부르는 곳에 달려가 “공해를 뿌리 뽑지 못하면 우리 삶이 뿌리 뽑힌다”고 호소했다. 90년 남산에서 공해추방운동연합 주최로 열린 지구의 날 행사에서 박길래는 이미 기울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진폐증을 불러오는 주택단지 내 연탄공장들은 이전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공해를 거부해야 합니다.” 박길래의 호소는 빗소리에 녹아들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는 한번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생명의 길이를 한줌씩 걷어내야 할 정도로 병세 심각한 환자였지만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해추방운동연합과 함께 공해추방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반공해운동의 전도사로 끈질기게 활동했다. 진폐 판정 후 이사간 세검정 신영동에서도 그녀의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당나무를 지키는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여름 당나무가 토지주에 의해 결국은 베어지고 그의 몸조차 함께 무너졌다. 진폐 합병증으로 허리뼈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굽은 척추로 인해 보조대를 차야 앉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깥나들이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런 상태로 여러번 죽음의 문턱을 넘어들었다. 모두가 “이젠 가시나 보다” 할 때에도 그는 다시 깨어났다. 민들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언젠가는 정말 상황이 나빠져 지인들이 병원에 모여들었을 때에도 다시 살아나 “괜스레 성가시게 했다”며 도리어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99년 말 정말이지 힘든 상황이 되었다. 너무나 오래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탓에 다 해진 입으로는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가 됐다. 무너진 척추 때문에 보조대를 하고 간신히 앉아서도 박길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후원해 온 만화가 신영식 씨의 집에 요양하러 갔을 때 그는 말했다.“신 선생님, 부지를 좀 알아봐 주세요.”불우아동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건립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박길래의 마지막 꿈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살면서 자신의 약값조차 마련할 수 없이 고생하면서도 박길래는 그 꿈을 위해 후원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북한선교협의회가 주관하는 탈북동포돕기운동에 거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4일 오후 2시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추모식에 오랫동안 그의 후원자였던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정욱 교수, 만화가 신영식 선생,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 등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이들은 몰랐던 박길래의 면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감동과 더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박길래는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의 수의를 마련하고 장례비까지 다 챙겨두었다. 그렇게 삶을 정리한 채 오래 기다리던 나라로 갔다. 남겨진 이들의 흐느낌이 길게 이어졌지만 그의 영정은 웃고 있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 돕기 후원회>를 통해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지켜온 지인들 가운데 하나인 조수자 선생은 박길래를 보내는 인사가 단지 슬픔이어서만은 안 된다고 말한다. 박길래, 그는 한국의 공해추방운동을 환경운동으로 대중화하는 길목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뛰었던’ 걸출한 환경운동가였다는 것이다. “그저 그를 한 명의 공해 피해자로 보내버리고 잊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를 동지로서 앞세운 것입니다. 그를 보내는 인사는, 다시는 당신과 같은 이가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이어야 합니다.”그럴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은, 한국환경운동사의 지울 수 없는 상징으로서 고(故) 박길래 동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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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손실이란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손실되거나 낭비되는 음식의 덩어리로 사람의 소비로 가는 먹을 수 있는 제품”을 의미하며, 식품 폐기물(음식물류 폐기물)은 “소비 단계에서 발생하는 음식 손실”을 말합니다(FAO).」

[caption id="attachment_229349" align="aligncenter" width="640"] 출처 : FAO[/caption] 국내 1인당 식품 폐기물 발생량 세계 평균보다 높아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 식품의 약 13%가 수확 후 소매 시장에 도달하기 전에 손실되었는데, 이는 농장 내 활동‧운송‧저장‧처리‧도매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UN, 2022,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Report」). UN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국내 1인당 식품 폐기물 발생량이 총 110kg으로 세계 평균(89kg)보다 21kg 많으며, 64.5%가 가정에서 발생했습니다. UN SDGs에서는 2030년까지 식품 폐기물을 반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목표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식품 폐기물을 55kg까지 감소해야 합니다.

[caption id="attachment_229347" align="aligncenter" width="640"] 국내 1인당 식품 폐기물 발생량(kg), 2019 / 출처 : Our World in Data[/caption] 국내 식품 폐기물의 대부분은 재활용 처리

한국의 SDG 이행보고서(2022/통계청)에 따르면 2005년에 음식물류 폐기물 직매립이 금지되어 그 이후로 동물 사료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지만, 조류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으로 인해 잔반 사료는 퇴출되는 분위기입니다. 따라서 바이오가스화 등 다른 재활용 방법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시설 확충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도시의 경우 소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서 앞으로 소각 처리가 증가할 것으로 분석됩니다.

[caption id="attachment_229348" align="aligncenter" width="640"] 국내 음식물류 폐기물 발생량(톤/일) 및 처리방법별 비율 / 출처 : 통계청 통계개발원(2022), 한국의 SDGs 이행보고서 2022[/caption] 식품 손실과 식품 폐기물에 대한 국가 전략 부재

국내에서 2010년부터 음식물 종량제를 시범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여 현재 환경부, 농림축산식품부, 보건복지부, 해양수산부 등에서 식품 폐기물 저감 및 관리 정책이 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주문솔, 2021, 「식품 손실·폐기량 저감과 관리 정책 동향·입법과제」). 하지만 국가 푸드 시스템에서 지속가능성 제고에 필수적인 식품 손실과 폐기에 대한 이슈는 선언적인 수준이며, 식품 손실과 폐기물에 대한 국가 전략이 부재한 상태입니다(프레시안, 2022.4.23. 보도자료)

KFEM 활동 사례

식품 폐기물 관련하여 서울환경연합에서 ‘도전, 음싹!’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나날이 늘어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음식물 일지를 쓰고, 식습관을 바꾸고, 어쩔 수 없이 배출된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하는 ‘음식물쓰레기 자원순환 프로젝트’입니다(참여자 밴드).

[caption id="attachment_229350" align="aligncenter" width="480"] '도전, 음싹!' 캠페인 과정 / 출처 : 서울환경연합 홈페이지[/caption]

우리나라는 식품 원재료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1인당 식품 폐기물 발생량이 세계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식품 폐기물 처리에 집중된 법 제도를 가지고 있어서 식품 손실과 관련된 정책과 데이터 등 자료가 매우 미흡한 상태입니다. 해외의 경우 식품 손실과 식품 폐기물 관련 별도의 법 제정 및 식품 폐기물 감소 목표를 설정하여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순환경제의 실현을 위해 국내 식품 손실과 식품 폐기물을 줄이고,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별도의 법 제도 마련 및 식품 폐기물 감소 목표 설정이 필요합니다.

 

2022년 12월 09일

환경운동연합

금, 2022/12/0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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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소의 탈을 쓴 펫숍, 조심하세요!

  '보호소’라는 말은 좋은 인상을 줍니다. 보호소는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조하고, 살뜰히 돌보다가, 가족을 원하는 이들이 입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라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보호소의 입소 승 낙을 특히나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은 바로 ‘개인구조자’ 분들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동물의 생명과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하나로 그들을 구조했지만, 직접 데리고 있기 어려운 개인구조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임시보호처’입니다. 사랑으로 초대해줄 가 족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소한의 보호라도 제공해 줄 곳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호소’가 동물을 입소시키는 데 몇십 만원의 비용을 요구하고, 입소 후 동물을 어디론가 사라지게 하고, 동물의 거취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이 보호소는 어떤 곳일까요?   [caption id="attachment_230105" align="aligncenter" width="538"] 보호소 사칭 신종펫숍과 동물보호단체 보호소, 이렇게 구분해 봅시다![/caption]   '보호소’, ‘입양’, ‘책임비’ 라는 단어들은 모두 펫숍에 대항해 싸워온 동물보호단체들이 지금까지 사용해 온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말만 같고 그 양상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경험이 많은 개인구조자분들은 대부 신종 펫숍을 구분해낼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조가 처음인 분들은, ‘보호소’의 탈을 쓴 ‘신종펫숍’의 사기나 다름없는 행태에 큰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구조자의 절실한 마음을 이용해 이득을 편취하고, 그간 ‘사지 말고 입양’ 이라는 구호를 목놓아 외쳐온 동물보호단체들의 노력을 교묘하게 무화시키는 신종 펫숍의 행태는 정말 배로 지탄받아야 마땅합니다. 꼭 구조가 아니더라도, 여러 다른 이유로 반려동물의 새로운 보호처가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질병, 사고 등 보호자의 일신에 큰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고,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가족 구성원의 알러지가 악화되기도 하고, 직업적 변화 때문에 동물 을 위한 돌봄자원을 오롯이 홀로 감당 하기 어려워지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신종펫숍이 거세게 파고드는 지점이자, 우리에게 ‘사육동물인수제’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230106" align="aligncenter" width="640"] 유기견 무료 분양을 홍보하고 있는 유기견 보호소의 인터넷 홍보 페이지. ⓒJTBC 보도화면[/caption]  

정말 기쁘고 다행인 것은, 2022년 4월 5일에 「동물보호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민간 보호소 신고제(제37조), 사육 동물인수제(제44조)가 도입되어 2023년 4월 27일 시행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에 서는 보호소라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할 것을 명하고 있으며, 지자체가 보호소 운영을 지원할 수 있는 통로를 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민간 보호소라면 중성화를 의무화하고, 개체가 늘어나는 부분은 어떤 이유로 얼마나 늘어나 는지에 대한 지자체의 인지와 관리감독이 가능하도록 시행령을 구체화해야 할 것입니다.이 글을 쓰는 동안, 저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나는 얼마 전인 2022년 12월 15일 미국 뉴욕주에서 (메릴랜드주, 일리노이주에 이어) 펫숍이 금지됐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요? 우리는 아직 위에 말씀드린 법개정을 통해 펫숍, 즉 판매업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겨우 바뀌고 있는 단계입니다.)

또 하나는 카카오톡에 들어갔다가 이런 광고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느낌이 싸해 클릭해보니 역시 '보호소'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상하게 반려동물생산자, 판매자가 많이 가입해 있는 '반려동물협회'에서 공식인증을 받은 곳이라고 광고하고 있더라고요. 이곳은...정말 보호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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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과 우리동생은 한 달에 한번 컨텐츠 교류를 통해

‘사람과 동물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목, 2023/02/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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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와 바다의 생명과 문화를 연결하는 물길

 

홍선기(목포대 생태학 교수)

바다의 물은 강의 물이고, 또 산의 물이다. 숲속과 계곡에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물줄기들은 강이라는 공간에 모여 바다로 향한다. 숲과 계곡, 강과 바다의 물은 특성은 각각 다르지만, 다양한 생명이 탄생하고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인간은 이러한 공간에 생활 터전을 잡아 살아왔고, 다양한 물 문화를 창출했다. [caption id="attachment_231347" align="aligncenter" width="640"] Ⓒ환경운동연합[/caption] 인류의 문명 발상지는 대부분 강에서 시작하였으며,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의 공간인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숲속에서 살던 인간은 개활지인 강에 모여 문명을 일으켰고, 나아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역에서 그 꽃을 피웠다. 배를 이용하여 강을 따라 바다의 산물을 내륙 마을까지 전달해줬던 과거와는 다르게 근현대에 들면서 강의 물류 기능은 육지의 도로가 대신하게 되었고,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며 찬란하고 다양하게 진화하였던 강변 문화는 점차 쇠퇴하여 사라지고 있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강은 단순히 도시의 식수나 산업용수를 공급하는 물탱크 정도로 간과하는 사고가 지배적인 상황이고, 더욱이 강의 자연성 기능을 변경하여 인간 편의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이기적 사고가 결국 기형적인 하천을 탄생시켜 생태적 생명 순환을 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 해외 연안 지역에서는 방조제로 막아왔던 하구역을 터서 물의 순환 기능을 되돌리는 역간척 사업이 진행 중이고, 과거 제방과 둑, 댐으로 막았던 강을 다시 자연형 하천으로 되돌리는 진정한 생명 회복이 세계적 추세이다. 우리는 자연의 기능을 강화한다는 말은 하면서도 강을 막고, 보를 쌓고, 강변을 인공화하는 이율배반적인 4대강 사업을 해왔다. 섬에 다리를 놓으면 섬의 정체성이 변하듯 강변이 변하면 강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강의 형상과 생태계 특성의 변화는 결국 강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현재 우리나라에 원형 가까운 강과 하천은 존재하는가. 강 문화, 강변 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가. 발원지에서 시작한 강은 상류에서 하류, 그리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길고 복잡한 지리 지형적 특성을 통해 생기는 다양한 생태적 기능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강을 이해한다는 것은 물의 흐름을 토막 내서 살펴볼 수 없는 역동적이며 포괄적 특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역(流域)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강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물의 역할이 달라진다. 식수인지, 농업용수인지, 레저 공간인지, 아니면 뱃길인지. 우리는 부처별, 지자체별, 물을 다루는 전문가 별로 서로 다른 눈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다. 숲에서 시작된 유역은 바다와 접하면서 해역(海域)과 만나는 것이 정상적인 물의 순환이다. 유역과 해역을 만나게 하는 완충지역이 하구역(河口域)이고, 그곳 또한 고유한 생활문화가 존재한다. 강을 통해 육지의 물질이 흘러나가기도 하고, 또한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하천 물관리를 환경부에서 일원화하여 담당하게 하는 다행스러운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면서 아직도 강의 기능에 대해서는 시원한 해결을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강 정체성에 대한 퇴행적 사고가 다시 지배하는 구조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심히 우려가 된다. 물은 고이면 썩게 된다. 4대강 사업으로 잘못된 부분은 조속히 수정하여 막힘없이 흐르는 강이 되도록 바꿔야 하는 것이 생태전환 시대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된다.
목, 2023/05/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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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지향)일기 시즌4]

결혼식에서

시무

   지난주 토요일 J 언니의 결혼식이 있었다.      J 언니는 대학생 때 라오스 해외 봉사를 하러 갔다가 친해진 언니다. 해외봉사단에는 총 세 팀이 있었는데, 언니는 태권도팀이었고 나는 난타팀이었다. 비건인 나를 위해 J 언니는 비건 옵션이 있는 슬런치 팩토리라는 식당에서 청첩장을 주었다. 그때 식사를 하면서 태권도팀 친구들이 결혼식에 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식 시간은 오후 6시 반, 식장은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뷔페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을 텐데.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고 갈까 고민을 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 5시쯤 집을 나섰다. 2호선에서 6호선으로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곧 만나게 될 봉사단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다. 여동생 H, S 오빠, 남동기 K 등등... 설레기도 했지만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고 보지 못했던 세월이 어언 7년이었다.      J 언니와 신부대기실에서 사진을 찍고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오른편 하얀 천으로 덮은 동그란 테이블 위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하지만 동기 중의 반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7년 전에 비해 나는 몸무게가 8~10kg 정도 빠졌다. 2년 4개월 전 비건을 지향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빠졌다. 옆에서 여동생 H가 "언니 살 많이 빠졌지?" 하고 이뻐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채식을 지속해 오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예전보다 보기 좋아 보인다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식이 끝나고 다 같이 뷔페에 들어가 각자 접시에 자기가 먹을 음식을 담아왔다. 나는 유부초밥과 샐러드, 구운 버섯, 단호박, 두릅, 해초 묵 같은 메뉴를 골라왔다. 아! 여기에선 내가 갔던 결혼식 중 처음으로 콩고기가 들어간 메뉴가 있었다! 새우와 함께 양념 된 요리였지만 들뜬 마음으로 콩고기와 버섯만 골라 담아왔다. 두 번째 접시에서도 내가 유부초밥을 담아오자, 옆에 앉은 Y 언니가 "아까도 이거 담아왔는데 또 가져온 걸 보면 맛있나 보다"라고 말을 걸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초밥 중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언니는 생선을 못 먹냐고 물어봤다. 나는 비건이라고 말했다.     바로 내 맞은편에 앉아 육류를 가득 쌓아놓고 먹던 B 오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놀란 표정이라고 해야 맞을까. B 오빠는 왜 채식하게 되었냐고 물어봤다. 처음 비건을 지향하게 된 건 동물권 때문이었지만 그다음에는 환경을 위해서, 최근에 「맥두걸 박사의 자연 식물식」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 계속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고 간단하게 이유를 얘기했다. B 오빠는 나보고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B 오빠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다르게 보인다는 건지 부정적으로 다르게 보인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B 오빠 옆에 앉은 S 오빠는 자기도 한때 '플렉시테리언'이었다고 말했다. '플렉시테리언...!' 보통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특히 남자면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채식에 관심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순간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하이 파이브를 칠 뻔했는데 바로 뒤에 다른 말이 붙었다. "반강제로". 왜냐고 묻자 3년간 만났던 전 여자친구가 비건이었다고 했다.     이제 막 300일이 넘은 나의 논비건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그때의 S 오빠는 지금의 내 남자친구와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약간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 "만나는 동안 어땠어?" S 오빠는 시선을 접시에 옮기곤 포크로 가져온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잠깐의 정적 후 S 오빠는 입을 열었다. "힘들었지."      뭐가 힘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4년쯤 전이면 내가 비건을 시작했을 때보다 비건 하기 더 힘들었겠다... 요즘은 비건 식당도 많이 생기고 비건 식품도 다양하게 나와" 하고 말했다. 그 뒤로는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기 H가 남자친구가 데리러 와서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할 때 나도 뒤따라 나갔다.     비건이 되고 나서 불필요한 살들이 많이 빠졌고, 더 건강해지고 부지런해졌다. 동물에게 공감하면서 내 세계는 점점 확장되었다. 더 작은 존재의 입장을 헤아려 보고 존중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자신도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좋아 보인다, 멋져 보인다" 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렇지만 비건인 나와 논비건인 내 주변인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논비건 가족, 논비건 친구, 논비건 직장동료, 논비건 풋살 학원 동료, 논비건 코치, 논비건 애인… 누구에게도 비건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주 난감해진다. 누군가의 생일일 때, 여행을 갈 때, 기념일일 때, 모임을 할 때. 어느 자리에서든 먹는 일은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른 우리가 같은 식탁을 앞에 두고 만나려면, 각자 힘들고 괴로운 지점이 있어도 서로 맞춰주고 조율하고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탁 앞에 힘듦이 끼어들 틈새가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진다. 내 남자친구도 언젠가 나와 헤어지고 나면 남들에게 S 오빠처럼 얘기하게 될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여동생 H의 이뻐졌다는 말과 S 오빠의 "힘들었지"라는 말이 머릿속에 번갈아 가며 맴돌았다.  
화, 2023/07/1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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