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기본소득이고 무엇이 아닌가?
백승호 |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본소득 논의의 확산
최근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언급이 학술공간에서 처음 제안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윤정향, 2002; 성은미, 2003; 윤도현, 2003). 그러나 당시의 기본소득 제안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하나의 몽상가적 제안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기본소득 관련된 다양한 논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2009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발간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강남훈 등, 2009)’와 2010년 한국에서 개최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기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Real Utopia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본소득 논쟁을 소개한 ‘Redesigning Distribution(분배의 재구성)(너른복지모임, 2010)’이 번역되었다. 이후에 다양한 번역서들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2016년에는 약 30편의 학술논문이 출판된 것으로 검색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확산은 2010년 서강대에서 개최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600여명이 서명한 ‘기본소득 서울선언’과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창립, 그리고 2016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의 서울개최 등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기본소득 대중운동의 활성화가 기여한 바가 크다. 국내에서 기본소득네트워크의 활동은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화를 가능하게 했고, 그 영향으로 대선후보들이 기본소득을 제안하거나 언급하면서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그야말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핀란드와 네덜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등 또한 언론과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켰다.
또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기본소득 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 서비스경제로의 산업구조변화와 그로 인한 표준적 고용관계의 해체와 불안정 노동의 일상화, 빈곤 및 불평등 그리고 양극화의 심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위기의식 등 사회경제적 변화는 기본소득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시민들의 관심은 일상화된 삶의 불안정성과 관련이 깊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보장제도가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위험들에 충분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위험들을 해결해 줄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기존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완재로서 기본소득의 역할에 대해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그에 대한 오해와 왜곡들 역시 확산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본소득의 개념과 유형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고 기본소득이 아닌 정책제안들은 무엇인지를 정리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을 해소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기본소득의 개념과 원칙
먼저 기본소득의 개념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가 가장 명료하다.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정치공동체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주기적으로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먼저, 기본소득은 일시금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되어야한다. 기본소득은 시민들 스스로가 소비와 투자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인들의 실질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현금지급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둘째, 기본소득은 중앙 또는 지방정부 수준에서 지급되고 기금이 조성되는 것을 가정한다. 셋째,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하며, 외국인의 경우 최소한의 거주기간이나 조세목적으로 규정된 거주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를 포괄한다. 넷째, 기본소득은 각 개인이 속해있는 가구유형에 무관하게 각 개별 구성원에게 지급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한다. 장애인 가구 등 추가적인 비용이 소요되는 가구에 대해서는 기본소득과 무관하게 수당이 지급된다. 기본소득의 시민권적 권리 차원에서 지급되는 현금금여이기 때문에 추가비용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하여 가치재로 인정된다면 추가적인 수당으로 지급되어야한다. 다섯째, 기본소득은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하되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보다 기본소득 재정에 더 기여하도록 조세시스템의 개혁과 동반되어야 한다. 여섯째, 기본소득은 노동을 하건 하지 않건 지급된다. 기본소득의 기본 철학은 공유경제를 통해서 축적된 공유된 부의 분배와 관련되기 때문에 노동여부와 무관하게 지급된다.
이상의 원칙들은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충분성, 정기성, 현금지급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원칙들 중에서 기본소득의 제1원칙은 보편성과 무조건성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원칙을 기준으로 기본소득과 기본소득이 아닌 것들을 구분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두 원칙이 기본소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다. 둘째, 개별성 원칙은 보편성 원칙에 포괄될 수 있다. 보편성 원칙의 핵심은 시민권이다. 시민권은 개인단위의 권리이기 때문에 보편성 원칙에 개별성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기성과 현금지급 원칙은 기본소득 논쟁에서 큰 이견이 없다. 소수의 논자들이 기본소득 개념을 현물 기본소득으로 까지 확장하여 논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개념의 과잉확장이다.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는 개인의 실질적 자유 보장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현금으로 지급되어야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기본소득론자들에게 이견이 없다. 넷째, 충분성은 기본소득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기보다 기본소득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급여수준과 관련되어 주로 논의된다.
따라서 기본소득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기본소득의 제1원칙인 보편성과 무조건성에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원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보편성 원칙
첫째 보편성 원칙이다. 보편성원칙은 기본소득의 대상이 시민권에 기초해서 결정되어야한다는 원칙이다. 기본소득을 수령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시민권이나 공인된 거주권뿐이다(Raventos, 2007). 따라서 시민권에 기초하여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 정책들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그런데 시민권에 기초한 자격규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민권의 보편적 적용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권에 대한 제한적 적용이다. 전자는 전형적인 기본소득에 해당한다. 후자는 사회수당과 같이 시민권을 특정 생애주기에 국한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사회수당을 기본소득에 포함할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사회수당 부분에서 더 자세히 논할 것이다.
무조건성 원칙
둘째 무조건성 원칙이다. 무조건성의 원칙은 보편성의 원칙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그러나 보편성의 원칙이 누구를 대상으로 포함할 것이냐와 관련된 판단기준이라면, 무조건성의 원칙은 기본소득 지급의 조건 부과 여부와 관련된다. 기본소득은 보편성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되고 기본소득 지급에서 아무 조건도 부여되지 않는 제도로 제안되고 있다. 즉, 무조건성원칙은 유급노동에 참여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가구형태와 무관하게, 사회적 기여여부와 무관하게 기본소득이 주어져야한다는 원칙이다.
기본소득과 비슷하지만 기본소득이 아닌 정책들
기본소득과 기본소득이 아닌 정책의 구분은 다음의 절차에 따른다. 우선 특정 제도나 정책 제안들이 앞서 제시한 보편성, 무조건성을 만족시키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이들 원칙중 하나의 원칙만이라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기본소득이 아닌 것으로 분류한다. 둘째, 보편성, 무조건성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경우에는 기본소득의 나머지 원칙들을 판단 기준으로 활용하여 기본소득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이 글에서는 참여소득, 부의 소득세, 사회적 지분급여, 사회수당 등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정책들을 평가하고자 한다.
금전적 지원
먼저 참여소득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만 제공되는 금전적 지원이다(Laventos, 2007).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이란 자원봉사, 유급노동, 가사노동, 훈련 등이 해당된다. 앤서니 앳킨슨이 제안한 정책이다. 참여소득은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에 대한 사회적 반발을 완화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그러나 참여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사회적 시민권에 기반하여 기본소득 대상이 선정되는 것도 아니며, 금전적 지원도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핵심원칙인 보편성과 무조건성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다.
부의 소득세
둘째,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는 면세점 이하의 소득계층에 대한 일정 세율을 적용하여 계산된 금액을 조세환급을 통해 지급하는 제도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먼이 제안한 정책이다. 부의 소득세 역시 기본소득이 아니다. 소득을 기준으로 부의 소득세 급여대상 및 그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보편성과 무조건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사회적 지분급여
셋째, 사회적 지분급여(stakeholder grant)는 모든 사람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국가가 일정액의 현금을 한 번에 지급하는 제도이다. 사회적 지분급여는 기본소득과 가장 유사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아동신탁기금(child trust fund)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미국에서 부르스 애커먼과 앤 알스토트(1999)가 특정 교육 이상을 받은 21세 인구 중에서 범죄기록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8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지분급여는 급여수급에서의 무조건성 원칙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시민권을 특정 연령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 대한 완화된 기준을 제안하고 있다. 결국 사회적 지분급여는 무조건성 원칙을 담지하고 있으며, 제한적이지만 보편성의 원칙 역시 담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지분급여는 정기성의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외에도 사회적 지분급여는 ‘기회의 평등’을 통해 시장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한 더 나은 환경의 제공을 목표로 한다는 점(Laventos, 2007), ‘자산재분배’를 추구한다(서정희, 조광자, 2008)는 점에서, 결과의 평등과 소득재분배를 추구하는 기본소득과 철학적 기반이 다르다. 따라서 사회적지분급여를 기본소득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회수당
넷째, 사회수당은 "자산조사나 노동의무와 같은 조건이 부과되지 않는 소득보장제도로서 특정 인구학적 집단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시민권적 소득보장제도이다. 사회수당은 기본소득과 같이 무조건성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보편성의 원칙에서 기본소득이 모든 시민의 권리에 주목하고 있다면, 사회수당은 특정 인구학적 집단으로 시민권 적용을 제한한다. 즉 사회수당은 시민권 기반이긴 하지만 아동, 노인, 청년 등 특정 인구집단의 욕구 충족을 위한 현금이전을 강조한다. 사회수당 역시 사회적 지분급여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에 대한 완화된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수당은 무조건성 원칙을 충족시키고 있고, 보편성의 원칙을 제한적이지만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본소득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수당’과 ‘기본소득’은 철학적 기반이 다르다. 기본소득과 달리 수당이 시민권에 대한 제한적 적용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은 앞서 언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론자들은 현대 자본주의를 공유경제로 규정하고 있고, 여기에서 축적된 부를 공유된 부로 보고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이러한 ‘공유’된 부의 분배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동, 노인 등 특정 생애주의의 ‘욕구’에 기반 한 분배원리를 가지고 있는 사회수당과 다르다. 수당은 아동, 노인, 청년 등 특정 생애주기의 욕구에만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높은 수준의 금전적 지원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 변혁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수당과 철학적 기반이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기반의 차이에 근거해서 본다면 사회수당은 기본소득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사회수당을 기본소득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반면에 수당 중에서 명확하게 기본소득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한다. 장애수당이나 실업수당 등이 그것이다. 장애수당은 보편성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시민권에 기반하고 있다기보다 장애 진단이라는 특정 욕구의 인정여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실업수당은 고용이력이 전제된 실직 여부에 근거하여 1차적인 대상자 선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편성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어서 기본소득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상으로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기준으로 기본소득인 제도 및 정책제안을 구분해보았다. 결론적으로 참여수당, 사회적 지분급여, 부의소득세는 기본소득으로 볼 수 없다. 다만 사회수당을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위의 기준으로 볼 때 현재 제안되거나 실행되고 있는 유일한 기본소득은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이다.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은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재원으로 한다. 1976년에 조성된 알래스카 영구기금은 석유수입을 기반으로 지급되는 배당금 형태의 종신기금이다. 미국 영주권을 갖고 1년 이상 알래스카 주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면 연령, 성별, 임금 소득과 관계없이 배당금을 받는다. 2015년에 1인당 2,072달러가 지급되었다.
기본소득의 단계적 실현을 위한 기본소득 모형들
기본소득의 원칙 중 이 글에서 충분성 원칙은 아직 논의하지 않았다. 충분성 원칙은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본소득이 충분히 지급되어야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기본소득인 정책과 그렇지 않은 정책의 구분 기준으로서 논의되기 보다는, 기본소득의 단계적 이행과정과 관련해서 논의되어왔다. Fitzpatrick(1999)은 기본소득의 이행 초기단계에서는 아주 낮은 수준의 과도적 기본소득이 기존의 사회보장과 결합된 형태로 출발하여 점차 급여수준을 확대하는 부분기본소득 단계를 거쳐 현행 사회보장제도를 모두 폐기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완전기본소득 단계로의 발전을 제안하고 있다.
최근의 논의에서 과도적 또는 부분 기본소득 개념이 과잉 확장되는 경향이 있는데 부분기본소득은 충분성의 원칙에 대한 단계적 접근에 한해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재명 성남시장이 제안하고 있는 연간 100만 원의 생애주기별 기본소득은 보편성과 무조건성의 원칙을 지키면서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있는 과도적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안은 충분성의 원칙을 상당부분 제약한 초기 단계의 기본소득 제안으로서 개인의 실질적 자유실현이라는 기본소득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무조건성의 원칙은 기본소득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제약이 있는 정책제안이라면 기본소득이라 할 수 없다. 반면에 보편성의 원칙은 완화된 기준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수당 형태는 보편성의 원칙을 특정 생애주기 수준으로 제한한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다. 보편성 원칙을 특정 생애주기로 제한하고 충분성의 원칙을 좀 더 확장함으로써 개인의 실질적 자유실현이라는 기본소득의 목표에 더 가까이 가고자하는 기본소득이 제안되기도 한다. 19-24세 청년들에게 연간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있는 청년기본소득 제안(이승윤·이정아·백승호, 2016)이 여기에 해당한다.
충분성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기본소득의 본래 목적인 개인의 실질적 자유실현 여부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충분성의 원칙에서 제약이 가해진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 제안일수록 기본소득의 실효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존의 노동시장 및 복지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기본소득론자들은 최저생계비 수준까지의 충분성이 확보된 기본소득과 기존의 소득보장 및 사회서비스 제도들과의 유기적 결합을 단기간 내에 실현가능한 기본소득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특히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사회보험과 같은 기존의 소득보장 정책 뿐 아니라, 좋은 일자리 창출, 일자리 나누기 정책과 같은 노동시장 정책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시민들이 적정수준으로 소득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상으로 기본소득의 개념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의 원칙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원칙들의 준수 여부를 기준으로 기본소득이 정책과 그렇지 않은 정책유형들을 구분해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기본소득의 개념에 대한 과잉확장이 가져오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많은 오해와 왜곡은 기본소득 개념에 대한 오남용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나중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하여
Dynamic Korea라는 명명이 무색하지 않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시간내에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한국사회에서 활성화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기본소득 제안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장벽은 ‘예산제약’, ‘우선순위’ 논리이다. 기본소득 논쟁과정에서 가장 많이 직면하는 반대논리는 “송파 세모녀가 주변에 여전히 많은데, 그 많은 예산을 들여 기본소득을 실현할 필요가 있느냐? 욕구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복지를 먼저 강화해야하는 것 아니냐?”라는 반론이다. 몇 년 전 보편주의 논쟁에서 ‘보편주의’를 역설했던 사람들도 이 논리를 기본소득 반대논리로 활용하곤 한다. 물론 이 주장이 틀린 주장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 속에 내재해 있는 ‘우선순위’, ‘나중에’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가장 흔하게 이 패러다임을 활용해 온 것은 우파정권이다. 복지확대를 주장하면 ‘경제도 어려운데 복지는 경제성장이후에 생각해보자’는 등의 ‘우선순위 패러다임’, ‘나중에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좌우를 막론하고 어느 새 한국사회를 걱정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운동진영에서도 젠더평등이 주장될 때 ‘민주화가 우선이니 젠더이슈는 나중에 다루자’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순응했었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현재라고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여성인권 은 나중에 정권교체가 우선’, ‘노동자 권리도 나중에 정권교체가 우선’, ‘성소수자 인권도 나중에 정권교체가 우선’이라는 구호를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정권교체가 ‘여성인권’, ‘노동자 권리’, ‘성소수자 인권’, ‘필요한 사람의 복지’를 실현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기본소득은 나중에 기존 사회보장제도 강화가 우선’ 구호도 마찬가지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사회문제들이 뒤엉켜 혼재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젠더 이슈가 서로 상반되고 우선순위가 있는 이슈가 아니듯이, 기본소득과 기존 사회보장제도 또한 우선순위가 있는 상호 배타적으로 논의될 이슈가 아니다. 이제 그러한 ‘우선순위’ 패러다임 ‘나중에’ 패러다임을 버리고, 어떤 복지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본소득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기존 사회보장제도와 기본소득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발전해야하는지, 기본소득이 아니라면 어떤 대안들이 있는지 등을 논의하는 패러다임으로 한국사회의 복지국가 재구성을 위한 논쟁이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그 출발은 ‘우선순위’, ‘나중에’ 패러다임을 폐기하는데서 출발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강남훈 등(2010).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민주노총.
너른복지모임(2010). 분배의 재구성. 나눔의집.
윤정향(2002). 기초소득 도입가능성연구. 한국노총.
윤도현(2003). 신자유주의와 대안적 복지정책 모색. 한국사회학, 37(1).
성은미(2003).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안전망 : 기본소득.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 학술대회.
이승윤·이정아·백승호(2016). 한국의 불안정 청년노동시장과 청년기본소득 정책안. 비판사회정책, 52.
Fitzpatrick, T(1999). Freedom and Security: An Introduction to the Basic Income Debate. London.
Raventos, D.(2007). Basic Income. The Material Conditions of Freedom. Pluto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