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자 시리즈>

다른백년은 ‘금주의인물’ 코너를 통해 매주 소개해 온 인물 가운데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추려 <대선후보자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소개 시점이 빨라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후보자도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번 시리즈가 올바른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마운드에 오른 폐족, 안희정 충남도지사 (2016. 9. 13)

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2016. 10. 14)

말이 통하는 보수주의자, 유승민 의원 (2017. 1. 20)

계급배반을 꿈꾸는 금수저, 남경필 경기도지사 (2017. 2. 14)

‘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2017. 2. 21)

길 잃은 ‘새정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그런 말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지난 13일 광주에서 열린 광주전남언론인포럼 초청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지 않아 실망감을 줬다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안 전 대표는 “양보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 (정치의) 기본적 도리 아니냐. 동물도 고마움을 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후보를 양보한 이후 40회가 넘는 전국 유세, 그리고 4회에 걸친 공동유세를 했다. 선거 전날 밤에는 그 추운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고 핏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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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에겐 권력의지가 충만해졌고, 화법도 단호해져다는 평가가 많다. 정치판에서 단련됐지만, 그를 상징하던 ‘새정치’의 프리미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강철수로…안철수Ver. 3.0 으로 변신 중

부드러운 이미지의 안 전 대표가 작심한 듯 ‘센 발언’을 쏟아내자, 드디어 ‘독철수’(독한 안철수)가 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후보의 제1 덕목으로 꼽히는 ‘권력의지’ 측면에서 안 전 대표가 자격 요건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라며, 비문(비 문재인) 진영을 중심으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지자들은 “간 보는 ‘간철수’ 말고, ‘강철수’(강한 안철수)가 되라, 울트라 철수, 최강 철수가 돼야 한다”고 요구에 호응하는 모습에 “우리 안철수가 달라졌다”며 환호했다. 물론 경쟁자들은 안 전 대표가 권력에 눈이 멀어 ‘막철수’(막 나가는 안철수)가 됐다고 깎아 내린다.

안 전 대표에게 지난 5년여의 시간은 영욕의 시간이었다.  2011년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 속에 ‘안철수 현상’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과 함께 등장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 안철수’로 전격 변신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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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6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단일화는 선거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사진 출처: 데일리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아름다운 단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이전투구였다. ‘단일화 피로감’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고, 대선 무대에 서 보지도 못한 채 패배의 책임은 오롯이 나눠져야 했다.

앞으로의 5년을 준비하는 안 전 대표는 그 사이 ‘Ver 3.0(V3)’가 됐다. 재선 국회의원이 됐고,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등 당 대표도 두 번이나 지내며 두 차례의 업그레이드됐다.

바이러스 백신 ‘V3’처럼 ‘정치인 안철수 V3’도 시민들의 폭발적 관심과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안 전 대표가 누군가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하거나 중도에 후보 직을 사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만연한 ‘시스템 바이러스’를 없앨 백신으로 어떤 것을 채택할 지의 선택은 오로지 ‘민주주의의 유저(사용자)’인 유권자 몫이다.

가난한 의사 아버지 보고 자란 책벌레

안 전 대표는 1962년 2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안 전 대표의 아버지 안응모씨가 밀양에 있던 육군병원 군의관으로 결핵 환자를 치료하던 때다.

아버지 안씨는 1963년 전역 후 부산 범천동에서 개원했다. 피난민이 많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고, 자연스레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한 2012년까지 이 지역에서 49년간 범천의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며, 큰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혹자는 안 전 대표의 삶의 뿌리를 이곳에서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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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부친 안응모 원장과 모친 박귀남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아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부친, 두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소년 안철수’는 유별날 게 없었다. 그 모습은 안 전 대표가 2009년 출간한 책 ‘행복바이러스 안철수’에서 엿볼 수 있다. 초등학생을 위한 자서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안 전 대표는 본인 스스로는 두드러지게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열등감에 사로잡힐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대단했다.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메추리알을 품고 자다 알을 깨뜨렸을 정도로 엉뚱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전기에 나오는 거위 알 일화를 아직 몰랐을 때였다고 한다.

책 읽기를 유독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에는 학교 내 도서관에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장난으로 대출카드 모두에 자기 이름을 적어 놓은 걸로 선생님들이 오해하기도 했다. 안 전 대표는 “평생 읽은 책의 절반 정도를 중학교 때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성격은 내성적이었다. 안 전 대표는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학교를 한 살 빨리 입학해 키가 제일 작았고 공부를 못했다”며 “초등학교 내내 ‘수’ ‘우’가 별로 없었는데, 성적표에 ‘수’가 보이는 게 제 이름 철수였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1등을 못해봤지만,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이과에서 1등이었고,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공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의대 진학을 원했다고 한다. 

컴퓨터 백신 개발…의사에서 벤처CEO로 변신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82년 하숙집 친구의 컴퓨터를 보고는 그 매력에 곧장 빠져든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1988년 한국에 상륙하면서 6년간 애지중지 해온 자신의 컴퓨터도 감염되자 안 전 대표는 직접 치료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한 컴퓨터 프로그램 상점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 형제가 1986년 만든 ‘브레인’ 바이러스다. 그렇게 일명 ‘V1’으로 불리는 컴퓨터 바이러스 첫 백신(Vaccine)을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안티 바이러스’ 라 불리는 스프트웨어가 한국에서는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된 유래다. 안 전 대표는 연 이에 V2, V3 백신도 개발했다. 그리고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안 전 대표는 1989년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뒤 27세에 최연소 의예과 학과장이 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이후 7년간은 낮에는 의사, 새벽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이중생활을 했다.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1991~1994년)할 때도 새로 발견되는 바이러스에 맞춰 백신을 업그레이드 배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컴퓨터를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의학 공부로는 느낄 수 없었다”며 제대 후 1995년 ‘안철수 연구소’를 세우면서 이중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창업 후 3, 4년 동안은 직업 월급을 줄 돈이 없어서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 월급에 손을 대야 했다. “단 한 달만이라도 월초에 월급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다.

1999년 체르노빌(CIH)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기회가 찾아왔다. 창업 4년만에 흑자 전환을 이뤘고, 2001년 코스닥 상장사가 된다. 2004년 매출 300억원을 돌파하며, 안 전 대표는 벤처창업 1세대를 대표하는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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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안철수연구소가 백신 기업에서 통합보안 기업으로 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당시 CEO였던 안철수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CI광고.

안 전 대표는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 2005년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안 전 대표는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김 교수는 워싱턴주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안 전 대표 부부는 2008년 귀국 후 나란히 카이스트(KAIST) 교수가 됐다. 2011년엔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같이 자리를 옮긴다.

‘무릎팍도사’  출연 이후 안풍(安風)… 아름답지 않았던 ‘단일화’

안 전 대표는 2009년 MBC 예능 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폭발적 관심을 받게 된다.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과 의기투합해 시작한 ‘지방대학 기 살리기’ 강연은 법률 스님과 인연을 맺어주며 ‘청춘콘서트’로 이어진다.

‘젊은이의 멘토’라는 이미지를 굳혀가던 2011년 여름, 안 전 대표가 서울시장 재ㆍ보궐 선거 출마 의사를 내비치자 시민들이 뜨겁게 반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지지율 50%를 넘어서며 유력 후보로 자리매김 한다. 지지율 5%에 그쳤던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조건 없이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결단으로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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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안철수는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법칙 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안 전 대표의 ‘아름다운 양보’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안 전 대표는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7월 각종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안철수의 생각’을 내놓으며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한다. 당시 예비 대선후보들이 차례로 출연하던 SBS TV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도 출연하며 대중들의 기대치를 높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며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겠다며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급격히 식어간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단일화 피로감’만 키운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안 전 대표가 11월 23일 대선 후보등록일(25, 26일)을 목전에 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한다”며 돌연 대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자 그칠 것 같지 않던 안풍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당 창당 후 돌연 통합…새롭지 않은 ‘새정치’

대선 이후 미국에 머물던 안 전 대표는 2013년 4월 재ㆍ보궐 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하면서 원내 입성에 성공한다.

안 전 대표는 ‘새정치’의 가치를 완성하겠다며 신당 창당을 추진했고, 김성식ㆍ금태섭 의원 등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안 전 대표를 돕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런데 안 전 대표가 별안간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와 통합을 결정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기대보다는 실망의 목소리가 컸다.

그렇게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2015년 12월 문재인 전 대표의 패권에 밀려나면서 끝내 탈당했다. 정치권에서는 “3대 미스터리가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북한 김정은의 생각 그리고 안철수의 새정치다”라는 조롱이 나돌기도 했다.

불분명한 화법과 우유부단한 태도 탓에 ‘간철수’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다녔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최장집ㆍ장하성 고려대 교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송호창 전 의원 등 안 전 대표 주변에 있던 이들은 소통 문제를 지적하며 그를 떠난 게 뼈아팠다.

국민의당 창당 승부수… 대선에도 통할까?

안 전 대표는 지난해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신당 창당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당 안팎의 우려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자노선 의지를 꺾지 않았다. 선거 결과 국민의당이 38석으로 단숨에 제3당의 자리에 오르면서 안 전 대표 또한 대선 재도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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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당내 김한길 의원(왼쪽)과 천정배 공동대표(가운데)로부터 야권연대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는 이들 주장에 대해 “연대는 없다”고 쐐기를 박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사진출처:http://m.monthly.chosun.com/)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간철수’의 이미지를 벗고 ‘강철수’(강한 안철수)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귀국 이후에는 반 전 총장과의 거센 연대 요구에도 ‘자강론’이 우선이라며 꿋꿋이 버텨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근성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안 전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녹녹하지 않다. 안 전 대표가 내세우는 중도ㆍ실용 노선은 확장성이 큰 반면 일관성을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다. 

당장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오락가락 행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라는 장점을 살려 ‘4차 산업혁명’을 자신의 정책 브랜드로 띄우려 힘을 쏟아 붇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해 보인다.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이 주춤하는 사이 중도ㆍ실용의 영토를 안희정 충남지사가 장악해 가며 ‘안희정 대안론’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5일 내놓은 정례 여론조사 결과 안 전 대표는 지지율 8%로 문 전 대표(32%)와 안 지사(21%)에 크게 뒤졌다. 이재명 성남시장,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함께 3위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이번 대선은 저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이 될 것”이라며 “저는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안 전 대표 측은 특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탄핵 심판 결론 이후 보수 지지층 표심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재 결론 이후 선출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누가 뽑히느냐도 대권의 향배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안 전 대표는 9일 JTBC 뉴스룸 연속대담에 출현해 “대선 직전에 거의 한 90일, 100일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생길 거라고 한다”며 “저는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