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골짜기를 지나며
글. 장성익 환경 저술가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한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재앙의 폭주, 핵발전
지난 9월 한반도 동남부에 리히터 규모 5.8의 강진이 덮쳤다. 우리나라 관측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여진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데 이번 지진이 새삼 일깨워준 훨씬 더 큰 위험이 있다. 핵발전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당 원전 설비용량, 원전 단지별 밀집도, 원전 반경 30킬로미터 이내 인구수 등이 모두 세계 1위다. 특히 고리와 월성을 비롯해 지진이 강타한 우리나라 동남쪽 해안 일대에는 핵발전소가 유난스레 빼곡히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고리 원전이다. 반경 30킬로미터 안에 거주하는 사람이 380만 명에 이른다. 참사가 터지기 전 일본 후쿠시마의 같은 기준 인구는 고리의 22분의 1 수준인 17만 명이었다. 전 세계에서 원전이 6기 이상 몰려 있는 단지 가운데 주변에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여기다. 월성, 한울(울진), 한빛(영광) 원전 단지 또한 세계 원자로 밀집 단지 10위 안에 든다. 수백만이 넘는 사람이 언제 터질지 모를 초강력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사는 꼴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지진 발생 확률이 낮아서 큰 걱정 안 해도 될까? 그렇지 않다. 지진은 예고나 징후 없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이번 강진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거니와, 언제든 이번보다 더 강력한 지진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단 한 번의 강진만으로도 우리가 겪어야 할 재앙은 상상을 초월하리라는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을 말이다. 정부는 강진이 닥쳐도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내진 설계가 돼 있다고 강변한다. 헛소리다. 후쿠시마 참사가 남긴 쓰라린 교훈이 무엇인가? 정부 당국이나 전문가들의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쓰나미가 들이닥친 탓에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초대형 원전 사고로 치닫지 않았던가? 자연재해는 본디 예측하기 어렵다. 또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실수하기 마련인 불완전한 존재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용틀임을 가벼이 여기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오만이다.
핵발전은 죽음과 파괴의 불씨가 내장된 거대한 재앙의 에너지다. 애당초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는, 그래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공격적인 원전 확대 정책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안 그래도 이미 우리나라는 최근 30년간 원전 설비용량 증가율에서 체코에 이어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다. 이런 판국에 정부는 지난 6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허가를 승인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 지역에 지진을 일으키는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기기까지 했다. 탈핵으로 가는 시대 흐름과는 반대로 이 땅에서는 위험천만한 ‘재앙의 폭주’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은폐와 거짓말, ‘원전 마피아’의 부정부패와 기득권 지키기 따위로 덕지덕지 얼룩진 채 말이다.
일상이 재난이고, 재난이 일상인 나라
어디 지진과 핵발전뿐이랴. 톺아보면 우리는 온갖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재난의 골짜기를 아슬아슬 지나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일상이 재난이요 재난이 일상이다. 당장 세월호 참사를 보라. 희생자 대부분은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무슨 특별한 여행이라도 가고 있었던가? 아니다. 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던 중이었다. 고2가 되면 누구나 참여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사다. 국가는 단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다. 대통령이란 사람은 300명이 넘는 국민이 참혹한 떼죽음을 당하는 그 급박하고도 처절한 순간에 7시간 동안이나 뭘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일상이 재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故 백남기 선생의 죽음은 다른가? 그는 무엇을 하다 참변을 당했는가? 그가 한 일이라고는 민중대회에 참가해 시위를 벌인 것뿐이다. 헌법이 천명하는 바 민주공화국에서 시위는 자기 의사나 권리를 표현하는 일상적인 행위다. 그런 평범한 일에 국가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결국은 고귀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또한 일상이 재난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고 무엇인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도 다르지 않다. 이 사건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어디에서든 맹목적인 무차별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뿐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자살률과 산재사망률 모두 세계 1위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의 상당수는 먹고살기가 너무 고달파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이른바 ‘생계형 자살’이다. 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지고 복지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 등이 튼실하게 갖춰져 있다면 막을 수 있는 자살이라는 얘기다. 일종의 ‘사회적 타살’인 셈이다. 삼성 백혈병 사태가 보여주듯 빈발하는 산재는 수많은 노동자의 일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뼈아프게 알려준다.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수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간 옥시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유해 화학물질을 비롯해 미세먼지, 유전자 조작 먹거리GMO 등도 우리네 일상의 건강과 생명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주범들이다. 일상이 재난이고 재난이 일상인 나라, 국가권력이 재난을 막기는커녕 재난의 원흉이 되는 나라의 서글픈 자화상이 이러하다.
광주항쟁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보면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장례식이 된다. 진정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면 온전한 삶도 불가능한 것이다. 시야를 넓히면 사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일상이 되어버린 재난의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가? 사회적 맥락에서 진정한 장례식이란, 다시 말해 궁극적인 애도란, 죽음과 위험을 끝없이 강요하는 재난의 뿌리를 도려내는 것일 터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