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명예란 무엇인가

 

 

글.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나의 서양사편력 1·2>, <번역은 반역인가>, <밀턴 평전> 등의 저서와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등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를 통해 서양사를 우리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영국 총리 글래드스턴Gladstone이 다윈Darwin의 거처를 직접 방문했다. 다윈의 학문적 업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글래드스턴이 누구인가. 19세기 후반 영국 총리를 네 차례나 역임한 존경받는 정치인이요, 박애주의자였다. 당대 거물 정치인의 방문을 받은 다윈은 이렇게 소감을 남겼다. “그토록 위대한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두 사람의 만남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는 다윈이 글래드스턴의 방문을 명예롭게 여겼다는 것은 그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다윈에게 ‘역사적 시야’가 결여돼 있었음을 드러내 준다고 살짝 꼬집는다. 

 

후대의 평가야말로 진정한 평가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다윈이 명예롭게 여기는 게 맞을지 모르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오히려 글래드스턴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미친 영향력과 역사적 중요성이란 점에서 다윈은 글래드스턴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당장 길에 나가 중학생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라. “글래드스턴이 누군지 아느냐”고. 아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 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이라면 누구도 다윈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의(名醫)였다. 특히 할아버지는 국왕 조지 3세가 주치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나 이렇듯 저명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은 학창 시절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윈은 과학자가 되기 전부터 자연애호가이자 수집가였으며 동시에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여우사냥, 사격, 그리고 말과 개의 사육이 영국 상류계급의 주요 오락이던 시절, 그 역시 영국 지방 젠틀맨의 취향을 익히며 자랐다.

다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사냥과 개 경주와 쥐잡기 말고는 관심이 없구나. 그러다간 너 자신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겠다.” 당연히 가업인 의학에도 소질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가문에서 가장 아둔한 아들’을 교회에 보내던 당시 영국 사회의 관습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다윈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1827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한다. 모두들 다윈이 성직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렇듯 어린 시절 열등생 소리를 듣던 다윈은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해양탐사·측량선 ‘비글호’에 승선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다윈 자신을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의사가 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다윈과 글래드스턴의 경우에서 보듯이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당대의 정치적 사건들은 그것들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유럽사에서 17세기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유럽 모든 국가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히 싸우던 이 시대는 또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의 수모를 당한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을까? 당연히 30년 전쟁이었다. 전 유럽이 전쟁으로 요동치던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 과학자의 지동설 주장과 그로 인한 가택연금은 존재감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어떨까. 압도적으로 갈릴레이에게 더 큰 비중을 둔다.

 

삽화-역사

 

현실은 언제나 혼탁한 흙탕물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당대의 아테네인은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던 수많은 소피스트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했다. 2500년이 지난 우리 눈에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차이가 분명히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게 어려웠다. 우리는 숲을 볼 수 있지만 그들에겐 나무만 보일 뿐이었다. 현실은 흙탕물이다. 시간이 흘러야 침전물이 가라앉고 투명해진다. 
연일 매스컴의 이슈로 부각되는 ‘현실 정치’가 역사의 흐름을 온통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러셀의 ‘역사적 시야’로 보면 역사의 원동력은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100년, 500년 뒤에는 지금의 정계 거물들의 이름은 존재감이 없어지고, 한적한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어느 과학자의 이름만이 기억될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역사를 읽으며 ‘더 중요한 것’,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키우는 것도 미래의 도약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국민 전체의 복리와 국가 백년대계는 나 몰라라 하면서 사리사욕과 당리당략만을 좇기에 바쁜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진정한 명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