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이와 마크르스의 사랑

민선영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그녀가 녹음기에 얼굴을 대더니 장난스럽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유쾌한 웃음소리.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바로 오는 길이라는데 어딜 봐도 지친 기색이 없다. 그 이유를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다. 
“표현욕구가 충족되어서 너무 행복하구요, 역시 인터뷰는 즐겁네요. 내 이야기만 이기적으로 계속 떠들어도 되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말이 많다고 중간에 끊지도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니까 너무 행복해요.”
‘글라스 캣 피쉬’라고, 뼈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물고기가 있다. 목소리도 얼굴 표정도 가식을 덜어내고 한껏 가벼워진 그녀가 내 앞에서 물고기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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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마르크스주의 포럼’

 

“3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 휴학 중이에요. 지금은 서울문화재단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데 주 6일 근무하고 시급은 8~9천 원 정도 받아요. 일반사무직과 똑같은 일들, 회계정리나 운영 일까지도 하니까 임금 수준이 결코 높다고는 할 수 없죠.”

한 달에 최소 100만 원은 벌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는 그녀, 무슨 사정일까?
“학사경고를 두 번 먹어서 더는 학자금 대출이 어렵거든요. 학비에다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니 결국 학교를 쉴 수밖에 없었죠. 이미 학자금 대출 받은 것만 해도 3천만 원이 넘어요.”
한 학기 등록금은 350만 원 수준. 사는 곳도 서울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어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다 생활비까지 합해지면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가 된다. 
“부모님 사정도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주거비용만 부탁드리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피자가게에서도 4년 동안 일했고 단기간에 빡세게 일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도 틈틈이 하고….”

빠듯한 삶이 더 빡빡해진 건, 따지고 보면 모두 ‘마르크스’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란 책을 재밌게 읽었거든요. 그래서 대학생이 되면 ‘마르크스주의 포럼’에 꼭 가보고 싶었어요. 근데 참가비가 너무 비싼 거예요. 마침 참여연대에서 인턴 활동을 했던 언니가 참여연대에 가면 좋은 강의들을 싼 값에 들을 수 있다고 알려주어서 ‘공익활동가 학교’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그녀가 참여연대의 핵심 인력이 된 것은, 선거철마다 1번만 찍어대는 부모님의 영향력이 아니라, 순전히 ‘마르크스주의 포럼’의 비싼 참가비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그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이 ‘부천연대’라는 단체의 회원이셨는데 한번은 부천연대에서 청소년기자단을 만든다며 제게 적극 추천해 주셨어요. 당시 회비가 8만원이었는데 선생님이 대신 내주시겠다고, 근데 자존심이 있어서 제가 내겠다고 하고 활동을 시작했죠. 거기서 또래들이랑 라면도 끓여 먹고 신문기사도 같이 읽고 청소년인권운동 같은 활동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 처음 접한 기사 내용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였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신문마다 하는 이야기가 달랐다. 지면의 사진 또한 대조적이었다. 한 편에는 돌을 들고 있는 노동자 사진이, 다른 편엔 곤봉을 들고 있는 시위진압대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충격을 받았죠.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파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가….”
담임선생님 덕분에 무려(?) 중3 때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된 그녀. 근데 마르크스 말고 선생님 말고 그녀를 참여연대와 강하게 연결시킨 또 한 명의 결정적 사람이 있었으니….

 

    청년들의 연대

“‘공익활동가 학교’에서 강의들 듣다가 김주호 간사님을 만났어요. 근데 갑자기 제게 밥을 사주면서 ‘참여연대가 40~50대 이미지가 너무 강하지 않냐, 20대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은데 함께 해 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때 밥 한 끼를 너무 맛있게 얻어먹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네요, 하하하하.”

‘지금 이 자리’는 바로 청년참여연대. 거기서도 그녀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다.
“청년참여연대 운영위원장 겸 경제분과장을 맡고 있어요. 처음 준비모임을 시작할 땐 그저 재밌게 논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막 스무 살이 되어서 20대가 당면한 현실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시작한 거죠. 근데 지금은 청년참여연대라는 기구도 만들어지고 해야 할 일도 쌓이고 실행기구로서의 역할과 책임도 있고 해서, 처음에 뭣 모를 때 모여서 신나게 놀고 공부하던 그런 느낌은 아니죠.”

10월 1일자로 청년참여연대가 1년이 되었는데 운영위원장으로서의 감회가 있다면?
“청년참여연대에 대한 기대치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좀 높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참여연대의 인력풀이 워낙 든든하고 또 열성을 가진 청년 당사자들도 있고 해서 청년의제와 관련한 활동들을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덤벼보니까 상근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크더라구요. 실제로 청년의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른 단체들은 상근자가 몇 십 명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조직들과 비교하면 상근자가 1명뿐인 저희는 가시적인 성과를 뚜렷이 남기거나 문서화된 결과물들을 내기엔 어려움이 있죠.”

그럼에도 청년참여연대가 낸 뚜렷한 성과물들은 있다. 
“대학교 입학금 문제를 이슈화시켰다는 자부심은 있어요. 입학금이라는 게 대학을 입학하는 데 실제적으로 필요해서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등록금이 적어서 받는 것도 아니고 근거도, 명목도 없이 걷는 돈인데 100만 원 넘게 받는 대학도 있거든요. 그래선지 사회적으로 반향이 커요. 또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채용비리와 관련해서 최경환을 고발한 것도 성과가 있었죠. 근데, 밖으로 보이는 성과들도 중요하지만 내부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즐기면서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가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힘을 쏟다 보면 결국 내부구성원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져요.”

그럴 때마다 그녀는 술과 밥의 힘을 빌려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최근엔 구성원들이 내놓은 제안들을 어떻게 하면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머리가 무겁다. 지난날 자신보다 먼저 운영위원장의 자리를 맡았던 이를 향해 뭣 모르고 내뱉었던 비난의 말들이 못내 쓰라리기만 한 요즘이다.

 

    끝이 없는 질문들

청년참여연대 내부적인 사업 외에 다른 사회적 이슈에도 동참하나요?
“그럼요, 세월호 900일에도 함께 했었고 백남기 농민과 관련된 집회에도 함께 갔었어요.”

알바에 학업에 청년단체 활동에 각종 집회에, 참으로 부지런히 사는 청년들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와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청년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할 말이 많다. 
“그런 소리들을 들으면 여전히 화가 나요. 뒤에서 숨어서 탓하지 말라고, 거리로 나오라고 그러는데 이젠 운동의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또 분명히 80~90년대와는 사회적 조건이 달라졌는데 같은 행동방식, 같은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도 답답하구요. 질타보다는 왜 청년세대가 목소리를 충분히 내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필요한 거죠. 극한으로 치닫는 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이들에겐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거리로 나올 여유도 없어요.”

점점 그녀의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도 높아진다.
“선거 날에 MT가는 대학들이 있다고 SNS에 썼던 이재명 시장님한테도 서운해요. 사실을 파악해 보니 딱 한 군데가 그랬다는데, 이런 식으로 그저 청년세대 전체를 싸잡아가지고 매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이 사회가 바뀌지 않는 건 청년들 탓이라고…. 그런가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는 나는 다만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사회가 이 모양인 게 정말 청년들 탓인가? 유권자 중 16%에 해당하는 670만 명의 20대 청년들을 기성세대가 진정한 파트너로 대해준 적이 있었던가? 각 정당의 청년비례대표는 충분한가? 청년세대들의 투표율이 오른 만큼 과연 청년정치인도 늘었는가? 왜 그리도 많은 수의 청년들이 빚을 지는가? 삼포(연애, 결혼, 출산)로 시작해서 오포(인간관계, 내 집 마련)로까지 늘어났던 그 암울한 리스트에 이제 다시 6번째, 7번째로 올라온 그 두 가지의 이름을 세상은 아는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 사이를 그녀의 목소리가 힘차게 뚫고 나온다.
“청년참여연대의 비전은 정치판이든 시민운동이든 청년세대가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지금은 청년들이 불려 다니면서 그저 우리 처지에 대해 얘기만 해주고 그 다음은 기성세대들이 알아서 나머지를 다 하잖아요. 앞으로는 그 이후의 과정에도 청년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게끔 하고 싶어요. 지금의 우린 그저 미끼나 포장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청년세대가 요구하는 것은 동정이나 배려가 아닌, ‘동등한 자리’다. 

 

1주년입학금

청년참여연대 1주년 행사(좌)와 대학 입학금 문제를 제기하는 청년참여연대(우).

 

    선영아, 사랑해!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총평을 부탁한다는 말에 그녀는 선언하듯 ‘후회 없이 살았다’고 했다. 즐겁게 놀았고 연애도 해봤고 공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는 했고, 20대에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균형을 잘 맞추면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살다가 30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지금 가지고 있는 목표다. 
“청년참여연대 활동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이게 가장 고민이 되요. 가장 힘든 건 주위 사람들이 지쳐하는 모습을 볼 때예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때론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토익공부나 하고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곳에서 활동하며 스펙만 쌓을 수도 있는데…. 이번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일하려고 이력서 쓰는데 진짜 쓸 게 없는 거예요. 지난 3년간 정말 정신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정작 이력서엔 쓸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녀가 ‘마크르스주의 포럼’에 가서 무엇을 듣고자 했는지 나는 모른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깊이 있는 앎이 없기에 딱히 전해줄 말도 없다. 그러나 문득,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 카피에 등장해 유명세를 탔던 그녀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을 두드렸던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를 인간적인 자세로서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은 오로지 사랑하고만, 신뢰는 오직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너의 생활표현으로 너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 <1844년 경제학 초고>, 칼 마르크스

 

아무 것도 적을 게 없다는 그녀의 이력서에 대신 적어주고 싶은 한 줄.
‘생활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삶.’
내가 오늘 만난 ‘선영이’는 마르크스와 바로 그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