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의 죽비
글. 법인스님
참여연대 공동대표.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전남 땅끝 해남 일지암 암주로 있다.
하늘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청안청락한 일상이라 믿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촘촘히 정독했습니다.
목사님! 저와 목사님은 이상동몽(異狀同夢, 행동하는 장소나 처지는 달라도 생각과 뜻이 같음) , 대동소이(大同小異,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음)의 길을 가는 수도자입니다. 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지요. 지금 세상에는 전문가가 참 많다고요. 그런데 정작 자신의 존재 자체로 다른 이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요. 뼈아프게 공감합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수도자는 일상에서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대로 ‘말’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말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넘치는 말 속에서는 나쁜 말들이 교묘하게 숨어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좀 먹고 있습니다. 내 편을 만들고, 남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고립시키는 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초점을 흐려놓고 시선을 돌려놓는 말을 생산하는 언론 기술자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당히 행세하고 있습니다. 또 지식인은 어떠한가요. 보수적인 정권과 천박한 자본가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생산해 주고 돈과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 자기가 배운 것을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그것을 굽혀가면서 세속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속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지식인과 종교인은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말을 용기 있게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믿음을 얻어야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사람들의 가슴에 스밀 수 있겠지요. 목사님! 어떻게 해야 말이 믿음과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은 간명합니다. 평소에 지행일치(知行一致, 지식과 행동이 일치함),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같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진리를 내면화하고 일상화하는 삶이 곧 수도자의 길이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빛이요 소금이요 목탁이요 죽비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각고의 정진이 필요하겠습니다.
목사님! 요즘 사유의 줄거리는 평범한 대중의 성찰과 성숙입니다. 이번 책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물으셨지요.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일상의 노동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라고요. 저의 고민도 이런 지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층부 사회의 부조리를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각 영역의 1%에 해당하는 그들의 그릇된 세계관과 행태가 평범한 다수 대중의 삶을 헝클어뜨리고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단면으로 이루어진 단세포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면이고 입체적이고, 그런 입체적 다면들이 다양하게 관계하면서 삶의 여러 모습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원인이 어찌 한쪽에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시민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시민은 사회라는 관계망의 시민으로 존재합니다. 또 개인 시민이 존재합니다. 하여 평범한 직업을 가진 시민은 이 두 갈래 길 모두에서 성찰과 성숙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시민은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상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단위에서 참여하고 연대하는 실천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염려하신 평범한 사람들,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성찰’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보편윤리의 삶을 지적하고 지향하는 것이겠지요.
“분노와 적대감은 타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기 파괴적 열정이기에 더욱 심각합니다.” 목사님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행하고 있는 무지, 게으름, 비겁함, 불성실, 방관과 방종, 불성실, 몰염치와 무례, 평범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갑을 관계, 작은 거짓, 지역과 연고주의에 의한 편견과 편향 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의 이런 삶들은 면죄되는 것일까요. 이런 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고치지 않으면 자기 삶을 어둡게 하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성찰하고 바꾸고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는 소명과 원력이 저와 목사님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깊은 하늘 아래 부끄러움도 깊어 갑니다. 그럼에도 늘 강건하시고 나눔과 섬김의 은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