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좋은 일, 공정한 노동⑪ “내가 맺은 근로계약이 무슨 내용인지부터 알자”
“노동자가 근로 계약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서명할 수 있게 지역 고용관청 공무원이 관리를 하도록 합시다.”
“공정노동에 대한 인증제도가 필요합니다.”
“기업들이 노동시간을 공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근로기준법에 명시해야 합니다.”
“직장 내 차별을 줄이려면 원청‧발주 회사를 ‘공동사용주’로 지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월 24일 오후 서울 평창로 희망제작소 4층 희망모울에서 열린 ‘좋은 일을 위한 단순명료한 정책요구 토론회’에서 나온 전문가 의견들이다.
이 자리는 희망제작소가 2016년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2015년 11월부터 진행한 ‘좋은 일, 공정한 노동’ 연구기획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진구 경향신문 논설위원(공인노무사),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김혜진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참석했다.
본격적인 전문가 토론에 앞서서 황세원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이 그동안 진행해 온 ‘좋은 일’ 탐방 및 인터뷰, ‘좋은 일 기준 찾기 설문조사’ 및 ‘좋은 일 찾기 복면 좌담회’ 등에 대한 결과를 전했다.
진행을 맡은 이원재 희망제작소장은 “설문조사, 좌담회에 생각보다도 큰 호응이 있었고, 특히 20~30대 청년층의 반응이 뜨거웠다”면서 “이 목소리를 참고해서, 시민사회가 정부의 노동 정책의 방향을 이렇게 해 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전문적인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개개인에게 ‘근로기준명세서’ 교부하자”
이날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대부분은 현행 법제도를 크게 바꾸지 않아도 가능한 방안들이었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주장한 “노동자 개인에게 지역의 고용 관청에서 ‘근로기준명세서’를 교부해 주도록 하자”는 방법이 그 중 하나였다.
강 교수는 “내가 맺은 근로계약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 근로계약을 맺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면서 “그러면 내 근로조건이 법적 기준에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도 없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디에 호소할 생각도 하지 못 하게 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서 “이미 현행 근로기준법 제17조에서는 주요 근로조건(임금‧소정근로시간‧주휴일‧연차휴가)을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서면으로 교부하도록 정하고 있다”면서 “이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공무원이 중간에서 일정 역할을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19세 청년이 편의점에서 일하게 됐다면, 가까운 고용청, 또는 고용안정센터 등 관련 기관을 방문해서 담당 공무원에게 내 조건에서의 합법적인 최저 근로조건 기준에 대해 설명을 듣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공무원에게서 “근로계약서에 말이 안 되는 조항이 있으면 여기로 가져오라”는 말을 듣는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서명하는 일은 덜할 것이다. 근무 중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어디에 가서 말하면 될지도 미리 알게 되는 셈이다.
노동자가 이렇게 준비하더라도 사용자 측이 거부하면 고용계약을 제대로 맺기 어려운데, 강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했다. “사용자는 고용자를 신고하게 돼 있는데, 그때 체결한 근로계약서를 같이 제출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 고용하거나 불합리한 내용을 넣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용관청은 그 내용을 노동자의 집에 우편으로 보내주도록 하면 된다면서 “이미 영국 등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 강 교수는 설명했다.
이 같은 행정 서비스는 현행 체계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강 교수는 “청소년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업종에서부터 시범적으로 실시하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퇴근 후 다음날 출근까지 최소 12시간 쉬어야
강 교수는 이밖에 노동시간 단축 방안과 직장 내 인권 보호를 위한 방안들도 제시했다. 먼저 노동시간이 실질적으로 줄어들게 하려면 기업들이 합법적인 ‘최대근로시간’을 명시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위의 ‘근로기준명세서’에 최대근로시간을 명시하는 방법이다.
또한 ‘1일 최소 휴식시간’에 대한 법규정을 만들 필요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는 퇴근 후 다음날 출근까지 최소 몇 시간 이상 쉬도록 하는 것으로 강 교수는 “OECD 회원국 중 대부분 나라가 1일 최소 휴식시간을 11~12시간으로 강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만 이런 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야간‧연장‧휴일근로를 일삼게 하는 ‘질 나쁜 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 등한 특별 규제가 필요하다면서 강 교수는 “좋은 일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회사에 적용되는 모든 규칙을 노사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퇴근 후 전화‧이메일 안 받아도 성과 영향 없도록”
강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도 근로계약이 제 역할을 못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제가 만난 한 청년은 정규직으로 채용됐는데도 계약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면서 “매년 연봉계약서에 서명한 것을 근로계약을 갱신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강 위원장은 “자기 근로계약서를 봐도 어디가 ‘정규직’에 해당하는 부분인지 읽어낼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청년들의 현실”이라면서 “근로계약 체결 방법, 노동권 등에 대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과 직장 내 인권 보호에 대한 의견도 있었다. 강 위원장은 “청년유니온 조합원 대상 조사 등에서 파악되는 경향은, 긴 노동시간과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일자리의 질과 크게 연관된다는 것”이라면서 “이 두 가지 측면의 개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서는 더불어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발의한 일명 ‘칼퇴근법’의 방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칼퇴근법’은 근로시간 주 52시간 이내로 명확히 규정, 연장근로수당에 대한 포괄임금제 사용 규제, 근로시간 공시, 기업에 장시간근로에 대한 부담금 부과 등을 시행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고용정책기본법 등 개정안을 통칭하는 것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약 1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 위원장은 “기업이 노동시간을 데이터화 해서 공개하도록 한 점이 긍정적이고, 장시간근로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규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퇴근 후에 전화나 이메일로 받은 업무지시를 이행하지 않더라도 성과에 반영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사나 선임에게 맞고 욕설을 듣는 ‘폭력’이 존재한다”면서 “기본적인 인권부터 지켜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기업 알려지게 공정노동인증제 마련하자”
강진구 경향신문 논설위원(공인노무사)은 ‘좋은 일’이 확산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정노동인증제 도입’을 제안했다.
강 위원은 먼저 2005년 하버드 대학이 뉴욕시 소매상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서 ‘공정노동’에 대한 사회적인증이 붙은 제품들의 매출이 종전보다 증가했고, 소비자들은 공정노동 인증 제품에 대해 10~20% 높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를 표했다는 결과를 얻은 일을 전했다.
현행 공정노동인증제로는 미국의 공정노동위원회(FLA‧Fair Labor Association) 인증제, 포브스(Forbes)지의 ‘일하고 싶은 기업’(Great Place to Work) 인증제, 그리고 우리나라 고용노동부의 노사문화우수기업 인증제 등을 설명했다. 강 위원은 “각각은 장단점이 있지만 직장 내 민주주의, 노동 3권 보장에 대한 평가 항목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면서 “이를 보완한 인증제도를 개발‧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또한 강 위원은 직장 내 차별을 줄이기 위해서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원칙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어느 법에도 규정돼 있지 않다. 남녀차별금지법에서 같은 일에 대해 남녀의 임금 차이를 둘 수 없도록 했고(8조), 근로기준법도 성별, 국적‧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의 차별을 할 수 없도록(6조) 하고 있지만 현실에 만연한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사내하청 및 용역‧파견직에 대한 차별 등을 규제할 법조항은 없는 것이다.
강 위원은 “근로기준법 6조에 모든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원칙으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명시해야 한다”고 개선안을 제시했다. 또한 기간제 및 파견노동자 등을 위한 ‘차별시정’ 대상에 무기계약직 노동자도 포함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현행 법률 상 무기계약직이 정규직(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와 구분되지 않아서 차별 시정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직장 내 차별 막으려면 ‘공동사용주’ 지정 필요
김혜진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도 동일노동에 대한 차별 문제를 개선할 방안을 제시했다. 하청·용역업체 노동자에 대해 원청회사 또는 발주회사를 ‘공동사용주’로 지정하는 것이다. 공동사용주로 하여금 법적 사용자의 의무를 공동으로 지도록 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노동자의 산업안전에 공동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임금협상에도 사측으로 참여하며, 임금 승진 등에서 차별이 이뤄질 경우 그 주체로 판단되도록 하는 등이다.
김 교수는 최근 언론에 보도된 재판 사례들을 통해 그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중 하나가 지난 1월의 대법원 판결이다. 지역 소각장에서 설비‧보수 일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가 2차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었지만 실제로 작업배치, 작업지휘, 근태관리 등의 권한을 행사한 것은 1차 하청업체였기 때문에 불법파견으로 볼 수 있고, 1차 업체의 근로자인 것으로 인정된다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김혜진 교수는 “원청‧발주회사와 하청·용역업체는 전형적인 갑‧을 관계, 수직적 관계이기 때문에 하청‧요업업체의 노동조건과 고용안정성은 원청‧발주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면서 “심지어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에도 원청 회사가 직접 개입하는 일도 있다”고 전했다. 이는 고용비용을 줄이기 위한 형식적인 재하청, 파견, 용역 등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공동사용주 지정’으로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김 교수는 “현재의 비정규직을 전면 정규직화 하도록 요구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고, 파견법, 기간제법 등 관련법들이 나뉘어 있어서 규제의 효과성도 떨어지는데, ‘공동사용주 지정’을 통해서는 이런 문제점들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청년 고용 위해 ‘노동시장 이중화’ 개선부터
마지막 토론자인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희망제작소 설문조사 등을 통해 특히 청년층(20~30대) 인식 속의 ‘좋은 일’은 ‘노동시간이 짧고 개인 삶이 존중되어 일과 생활의 균형이 보장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임금이 높더라도 너무 가혹한 근무조건, 개인의 삶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정책 입안자들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대기업 정규직’으로 대표되는 ‘1차 노동시장’과 계약직 등 비정규직의 ‘2차 노동시장’으로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그 임금 격차도 심해지는 가운데, 청년들로서는 1차 토동시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배 선임연구위원은 진단했다. 한 번 2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면 생애에 걸친 소득 격차가 너무나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고용정책은 이와 같은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배 선임연구위원은 또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연장근로수당을 월 급여에 합산해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를 규제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신규 채용을 할 때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한시적)하는 방법 등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 변칙적으로 운영돼 온 장시간 노동의 실태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장시간 노동 문화가 개선될 경우, 포괄임금제 하에서 연장근로수당을 마치 기본급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오던 노동자들로서는 임금이 줄어드는 것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이 이 부분을 감수하기로 결단해야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청년 목소리를 더 모아서 국가에 전달해야”
5명 전문가들의 제안이 끝난 뒤 서로의 의견에 대한 교차 토론이 이어졌다.
강진구 위원은 “‘좋은 일’의 조건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짧은 노동’보다는 ‘좋은 노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라면서 “노동 자체를 좋은 노동으로 만드는 것, 인간다운 노동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행복과 더 밀접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혜진 교수는 “희망제작소의 연구나 청년유니온의 조사 등에서 ‘적정한 근로시간이 임금보다 중요하다’고 나왔지만 실제로 임금이 줄어드는 것을 용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면서 “적정한 노동시간과 적정한 임금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소비 패턴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 ‘좋은 일’을 실현하려면 생산과 소비의 두 측면이 함께 바뀌어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강성태 교수는 “희망제작소의 연구가 의미 있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세대 간 목소리의 불균형이 심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더 모여서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청석에서도 질문들이 나왔다.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이상호 박사는 “지금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나쁜 기업이 살아남기가 더 쉽고 좋은 기업이 살아남기는 어렵다”면서 “좋은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혜택이나 규제, 제품에 대한 인증 등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원재 소장은 “토론회 제목처럼 ‘단순명료한 정책요구’를 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질, 삶의 질 등 목표를 좀 더 명확하게 해서 논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이야기 해 나갈 수 있도록 함께 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로써 희망제작소의 ‘좋은 일, 공정한 노동’ 기획연구의 모든 과정은 끝났다. 지금까지 진행된 탐방과 인터뷰, 설문조사, 비공개 좌담회, 그리고 이 전문가 토론회의 내용은 ‘좋은 일을 위한 정책요구 보고서’로 정리, 발표된다. 그 후로도 ‘좋은 일’을 위한 희망제작소의 노력은 계속될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시민의 요구가 크다는 것이 이번 연구를 통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글 : 황세원 |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 이우기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