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또 들어야 하지 않을까? : <래빗홀>(2010)


• 스머프 (여는 민우회 회원)



얼마 전 지인과 식사를 하던 중, TV에 세월호 관련 뉴스가 나왔다. 속수무책으로 침몰하는 배, 오열하는 유가족들을 교차 편집한 영상을 지켜보던 지인은 저런 것 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어.’라며 신경질적으로 TV를 꺼버렸다. 그는 세월호가 계속 회자되고, 정치 이슈가 되는 것이 못마땅한 여당 지지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인 사람이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입술을 앙다문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기 때문이다.

 

 아마 어린 시절, 누구나 중병에 걸렸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을 것이다. 아프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만큼 순진할 때 말이다. 나 또한 그랬다. 동화를 읽으면, 병든 주인공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돌봐주고 배려해주는 인물로 가득했다. 살아있거나 건강해지는 것만으로도 사랑받는 주인공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거짓말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다. 나이를 먹으며 나부터도 고통 받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기를 힘들어 했다. 그리고 점차 나 뿐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도 그러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죽음, 질병, 상실 같은 것이 뒤섞이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마치 공동묘지가 점차 교외로, 교외로 멀어지듯 고통 받는 사람들은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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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래빗홀의 두 주인공, 베카와 하우위는 바로 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불의의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다. 둘은 여전히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들이 고통 받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일상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 사람은 어둔 밤, 침침한 체육관에서 열리는 피해자 모임에서나 죽은 아이의 부모로 등장한다. 혹은 새벽에 거실 구석에서 홀로, 죽은 아이의 영상을 보면서나 슬픔을 표출한다. 물론 두 사람이 일상적인 공간에 상실과 함께 등장하려한 순간도 있다. 베카는 임신한 동생에게 죽은 대니의 옷가지를 가져다주고, 하우위는 집을 보러온 부부 앞에서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동생은 베카에게 내 아이가 대니의 옷을 입고 노는 모습은 괴상할거야.’라고 답하고, 하우위의 이야기를 들은 부부는 동정과 경악이 반 쯤 섞인 눈빛을 던진다.

 

 상실의 경험을 일상 밖으로 몰아내고 싶은 게 주변인들뿐 일까. 당사자인 베카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사실, 이는 베카와 하우위의 생활 차이에서부터 비롯된다. 직장을 가지고 집을 떠나, 일에 열중할 수 있는 하우위에게 그의 아들은 이따금 돌아보게 되는 아픔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을 집에서 보내는 베카는 반대다. 집에는 아들의 방, 아들의 물건, 손자국과 낙서와 같은 흔적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아들이 죽은 곳은 대문 바로 앞이다. 그녀는 일상을 아들의 부재와 함께한다. 그녀에게 아들은 떨치려고 해도 떨칠 수 없는 고통이다. 결국 이 갈등은 베카가 집에 있는 아들의 흔적들을 지워나가며 극에 달한다. 베카는 집을 팔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이를 반대하는 하우위에게 말한다. ‘그래도 당신은 탈출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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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베카의 엄마인 이다. 그녀 역시 젊은 시절 아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베카와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내내 베카와 가장 강력하게 충돌하는 캐릭터다. 베카는 죽은 아들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하지만, 냇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 시절, 누군가 자신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며 대니의 이야기를 계속 꺼낸다. 하지만 죽은 아들의 기억에 삶이 매몰될 것이 두려운 베카는 냇이 대니의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같은 상처를 공유한 그들이지만, 두 사람은 영화 내내 갈등을 빚는다. 오히려 베카와 호의적으로 지내는 인물은 실수로 대니를 죽게 만든 소년, 제이슨이다. 어쩌면 그녀가 그 소년과 지속적으로 만나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베카나 그 소년이나 대니의 죽음을 잊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 일련의 사건을 겪은 베카는 묻는다. 이 느낌(상실감)은 사라지냐고. 냇은 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다만 언젠가는 견딜만해져서 그 아래서 기어 나올 정도가 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한 것이 된다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 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 그녀는 제이슨을 찾아가고,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오열한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무언가 축하받는 소년의 모습과 베카의 아들이 죽는 장면은 교차편집 된다. 베카는 임신한 동생과 아이 이야기를 할 때처럼, 마트에서 엄마에게 칭얼거리는 아이를 볼 때처럼, 자기 아들이 누리지 못한 미래를 누리는 남자아이를 볼 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자신이 상실한 것을. 자기 아들의 죽음을. 그리고 그녀는 결국 받아들인다. 냇의 말처럼, 언젠가 이것이 주머니 속의 조약돌만한 기억이 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그저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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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세월호 보도나 유가족생존자들의 소식에 귀를 막고,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러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다른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을 바라 볼 때처럼 막막하기에, 일상에서 그 무게를 함께 지기에 버겁기에 그랬을 것이다.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고, 상실감은 사라지지 않는 상황. 복구도 나아가는 것도 힘든 상황. 이런 막막한 상황 앞에서 차라리 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사실 나도 그러했다. 한동안 뉴스도 신문도 잘 보지 않던 나는, 특별법 문제가 대두되고 공이 국회로 넘어간 이후에 다시 신문을 보았다. 이제 더 이상 지면에 유가족과 생존자들,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법 제정이 지지부진해지자 얼마 전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국가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하는. 나는 상실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냇의 조언이 꼭 베카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베카와 같은 사람들을 바라봐야하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조언이다. 보지 않고, 한 쪽으로 밀쳐낸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론 사라지지 않는 고통도 있다. 하지만 그 막연함 때문에 그 경험을 부인하고,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우린 그 경험을, 이를 겪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마치 베카가 스스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베카의 주변인들이 베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냇의 조언처럼, 언젠가 이것도 벽돌만큼 작아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까지 듣고, 또 들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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