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서른, 안정적인 직장 없으면 답은 결혼뿐?

 

만약 당신 주위에 서른을 넘은 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이 모아놓은 목돈도 없고,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 치더니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며 월 100만원 남짓을 벌고 있다면, 그런데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보증금을 모을 때까지 만이라도 참으라거나, 결혼하면 어차피 독립하니 사서 고생하지 말고 결혼 준비를 하라고 조언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신치(별칭)는 다른 답을 찾고 싶었다. 서른 즈음에 5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삶을 실험하며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30대 여성이 자기 방식대로 삶을 기획해보기로 결심할 때, 세상은 그 여성을 불안한 존재로 바라본다. 신치의 엄마도 그랬다. 엄마와 딸은 결국 서로를 긁기 시작했다.  

 

“엄마랑 계속 같이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내가 첫째고 엄마한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다가 그게 땅에 떨어지는 게 나한테 충격이 컸나 봐요. 그래서 그때 되게 우울했어요. 이대로 같이 있다가는 서로 더 힘들어지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신치는 독립을 결심했다. 하지만 어떻게?

 

 

 

가족 밖에 손 벌릴 데가 없는 아이러니

 

다행히 기회가 있었다. 2012년 서울시에서 ‘임대주택 입주가 어려웠던 1인가구와 독신자에게 입주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공공원룸임대주택에 당첨이 된 것이다. 계약금 제외 보증금 1361만7천원, 월임대료 14만5천5백원이었다. 하지만 신치에겐 보증금이 없었다. 기회는 반쪽짜리였다.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둘러봐도 부모님뿐이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주거비가 필요한데, 그 주거비를 마련하려면 결국 가족밖에 손 벌릴 데가 없는 아이러니. 신치를 고민하게 했던 이 아이러니를 들으면서 나는 EBS 다큐프라임 「복지국가를 가다」시리즈에서 본 네덜란드 여성을 떠올렸다. 암스테르담의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24살 여성 캘리 카우퍼스는 20살이 되던 해 동거를 시작하면서 독립을 했다. 그녀가 내는 임대료의 50%는 독립보조금으로 국가가 보조하고 있었다. 내레이션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생애 최초의 집을 구할 때 적당한 집을 물색하고 월세를 지원해준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바로 국가였습니다."

 

 

 

EBS 다큐프라임 <복지국가를 가다> 中  (ⓒEBS)
네덜란드 여성 캘리 카우퍼스는 독립보조금이 있어 독립할 수 있었다.

 

 

 

소셜펀딩으로 다른 답을 만든 신치

 

신치는 ‘부모님께 돈을 빌리면 그 뒤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 지 너무 잘 아니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독립은 이렇게 좌절되는 걸까. 신치는 자신의 처지에 공감해줄 사람들의 연대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130명한테 10만원씩만 빌리면 이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소셜펀딩을 생각해냈어요. 내가 지금 왜 집을 나와야 되는지, 돈을 어떻게 갚을지를 쓰고, 어떻게 상환할지 계획도 썼어요.”

 

 

 

독립을 위한 소셜펀딩 (ⓒ실험하는 아이디어 컴퍼니 블로그)
2012년 10월 신치의 블로그(www.playideacompany.com)에 게시된 소셜펀딩 기획서
 

2012년 10월부터 한 달 동안 30명의 후원자가 모였다. 1300만원에는 모자랐고, 공공원룸임대주택은 막상 가보니 직장과 거리가 멀어서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독립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인 돈을 보증금 삼아 200에 30짜리 5평 집을 구했다. 이후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이제 독립 2년차를 맞고 있다.

 

 

 

탈 많은 집, 말 많은 집주인, 부담스런 주거비에도 독립은 행복

 

독립 이후의 삶이 쉬운 건 아니었다. ‘스티로폼에 벽재를 붙여 벽을 세운 개조식 집’에서 곰팡이와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말하는 소리가 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방음 상태’ 때문에 혼자만의 공간을 침범당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수리 해주지도 않을 집주인과 실랑이 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서’ ‘5시간을 틀어놔도 따듯해지지 않는 보일러’를 참고 살기도 했다.

 

 

 

신치가 그린 '나의 집' (ⓒ한국여성민우회)
곰팡이를 닦으려고 벽지를 뜯었다가 벽이 가벽인 걸 알게됐다

 

 

주거비도 여전히 고민이다. 소셜펀딩 상환금과 이사를 하면서 결국 부모님께 빌린 300만원, 40만원으로 오른 월세를 더하면 신치는 매달 60만원 이상을 주거비로 쓰고 있다. 소득의 60%를 넘는다. 신치는 주거비가 30%정도만 되도 좋겠다고, 그러면 ‘지금은 전혀 못하고 있는 문화생활’을 하고 싶다고도 한다. 하지만 독립한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네!”이다.

 

 

 

그래도 SH가 있어서 덜 불안하다

 

많은 사람에게 주거 문제는 현재의 고난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잘 해나가고 있는 신치였지만 그래도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까 궁금했다. 대답은 의외였다.

 

“사실 그런 압박은 별로 없어요. SH를 계속 넣어볼 거예요. 여러 번 시도하면서 기회를 잘 만나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전세는 구하려면 적어도 오천 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그 돈을 언제 모으지? 그런 생각을 하긴 하지만, 나한테는 어차피 비현실적인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정치인을 잘 뽑아서 공공임대주택을 늘리는 수밖에, 그 방법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요."

 

 

 

SH 국민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재민

 

재민(가명)은 신치가 소망하는 SH의 국민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20대 후반의 비혼여성이다. 20대 초반에 대학 진학을 하면서 부모님께 전세금 삼천 만원을 지원받아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세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10평 내외의 집을 유지하는 데 드는 월세 40만원이 부담스러워 매번 룸메이트를 구해 살았다. 독립 4년차를 맞던 지난해, 은평구 뉴타운 국민임대주택 입주자 모집 공고를 보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신청을 했다.

 

 

 

국민임대주택 공고 (ⓒSH공사)
"내가 뭐 되겠어? 그러면서 넣었는데, 연락이 와서 신기했죠." 

 

 

“60가구 정도를 뽑는 거였어요. 자격은 서울에 사는 무주택 세대주. 근데 순위가 있었어요. 1순위가 은평구 거주자, 2순위가 마포 서대문 종로였나? 3순위가 나머지 서울 권역. 그리고 월소득이 도시노동자평균임금의 50%이하. 그게 2백 몇 십 만원이었는데 가뿐히 미달되고 (웃음). 그래도 워낙 조금 뽑으니까 내가 뭐 되겠어? 그러면서 넣었어요. 처음엔 떨어지고 예비가 됐는데 나중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되게 신기했죠.”

 

 

 

‘집주인이 법인’인 행복

 

재민도 국민임대주택에 살기 전까지 비혼여성 세입자들이 겪는 고생들을 두루 거쳤다. ‘방범창이 없는 1층 집에 살다가 도둑이 들어’ 충격을 받기도 했고, ‘수도가 얼어 생수 사서 씻고, 찜질방에서 버티는’ 동안 ‘아가씨가 수도를 제대로 안 틀어놔서’ 동파가 됐다며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잔소리는 많았던 집주인 때문에 마음고생도 했다.

 

“그전 집 집주인 할머니가 간섭이 많으셨어요. 처녀 둘이 사는데 집이 왜 이렇게 더럽냐고 잔소리 하고, 교회 다니라고 그러시고, 시집 빨리 가라고 그러시고. 근데 간섭할 건 다 하시면서 뭘 고쳐달라고 요구하면 아유 늙은이가 뭘 알겠어 그러면서 힘없고 약한 사람인 것처럼 구세요. 또 뭘 해주면 엄청 생색을 내시고요.”

 

 

 

재민이 그린 '나의 집' (ⓒ한국여성민우회)
매년 수도가 얼었고, 매년 집주인은 수리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국민임대주택에 살아서 좋은 점을 물었을 때 재민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집주인이 법인이라는 점’이었다.

 

“여긴 집주인이 법인이니까 그런 터치가 없어요. 집주인이 젊은 여자들한테 하는 잔소리에 자질구레하게 감정 소모할 일이 없으니까 좋죠. 또 연말정산 할 때도 월세 낸 것도 할 수 있는데 집주인 눈치 보여서 못하잖아요. 근데 법인이니까 그냥 하면 되고. 세입자의 권리 같은 걸 집주인이랑 옥신각신하고 사정하고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국민임대주택에 없는 것 세 가지

 

두 번째 장점은 집수리 걱정, 주거비 걱정, 이사 걱정이 줄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삶에 안정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집이 고민거리가 아닌 보금자리로 느껴졌다.

 

“일단 단열이 되게 좋아요. 집세는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할 때 오르기는 해요. 그래도 무작위로 올리지는 않고 물가상승률에 따라 법적으로 정해진 금액이 있어요. 그걸 대비해서 청약 저축 5만원씩을 계속 넣고 있어요. 2년 넣으면 120만원 인데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이사를 가야된다는 압박이 없는 것도 좋죠. 2년마다 심사를 하고 재계약을 하지만 어차피 제 소득 수준이 더 나아질 일은 없을 거라서 (웃음) 재계약이 매번 되면 30년까지는 여기 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처음으로 옷장도 샀어요. 전에는 이사를 또 가야하니까 뭘 사는 게 짐스러워서 옷도 플라스틱 수납함 같은데 넣었거든요. 이사 갈 걱정이 없어서 그런 게 달라졌어요. 좀 안정감이 들고, 집이라는 느낌도 들고.”

 

 

 

공공임대주택을 늘릴 때도 성찰은 필요하다

 

재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치가 말했듯 ‘정치인을 잘 뽑아서 공공임대주택을 늘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OECD 평균 전체 주택 대비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11.5%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는 32%, 오스트리아 23%, 덴마크와 스웨덴은 18%이다. 한국은 5%이다. 공공임대주택 늘리기는 절대 명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민은 ‘어떤’ 공공임대주택인지도 질문하자고 한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좀 불편해요. 여긴 뉴타운이잖아요. 원래 있던 마을을 밀고 산도 밀고 아파트를 세운 거니까. 뭔가를 파괴하고 여기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 사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해요.
은평새길이라고 도로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여기랑 고양쪽 뉴타운 사는 사람들이 서울로 출퇴근하기 불편하니까 은평에서 종로까지 북한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든대요. 지하화를 한다 어쩐다 말도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단지에 찬성이라고 현수막도 붙였어요. 집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개발 같은 건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긴 거예요. 이게 유일한 자산이라서 그런 건지. 근데 산을 뚫는 건 사실 엄청 큰일이잖아요. 지금도 구기터널이 뚫려 있기는 하지만. 은평새길 건설 같은 건 여기에 뉴타운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은평새길 구상도 (ⓒ서울시)
"뉴타운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을 길이니까요"

 

지난 9월 4일 서울시는 ‘시정 4개년 계획’에서 앞으로 지향할 주거복지정책의 방향을 발표했다. 다행히 서울시는 앞으로 '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을 표방하며 '건설형·매입형 임대주택의 비율은 축소하고' '노후한 공공시설을 활용하거나 도시재생 사업, 리모델링 지원사업 등과 연계해 다양한 유형의 임대주택을 개발'하겠다고 하니 기대를 걸어본다.

 

 

복지는 복지제도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재민이 꼽았던 국민임대주택의 장점은 사실 <비혼여성 세입자 릴레이 인터뷰>의 모든 인터뷰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바램을 다 담고 있다. 집이 멀쩡하기를, 주거비가 내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기를, 집주인이 상식적인 예의를 갖춰주기를, 수리 책임을 세입자에게 떠넘기지 않기를.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공공임대주택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고, 공공임대주택을 만드는 과정을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공공임대주택에 살아야만 그 장점들을 누릴 수 있다면, 나머지 세입자들은? 공공임대주택에 살지 않아도 누구나 이런 조건을 누릴 수 있어야, 세입자들은 비로소 '주거복지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거 복지란, '복지'라고 이름붙은 몇가지 제도만을 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택임대차 관련 제도 전반을 ‘세입자 주거권’을 중심으로 재정비할 때 비로소 갖추어 지는 게 아닐까.

 

 


<기획 연재 소개>

집은 꼭 필요하지만, 살기 위해 사야하는 것 중 가장 비싸다. 그래서 우리는 매달 월세만으로도 생활고를 겪고, 전세 대출금을 생각하며 직장에서의 모욕을 견디고, 지금보다 십년 뒤가 더 불안하다. 이렇게 뼈 빠지게 유지하는 집은 나쁘거나 썩 좋지도 않으면서 계속 탈이 나고 대부분의 집주인은 그걸 모른척한다. 그래서 세입자라 쓰고 비적정주거 생존자라 읽는다. 복지예산은 점점 늘고 있는데 이상하게 여전히 가족 말고는 비빌 언덕이 없어 보이는 2014년의 한국.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에서 비빌 언덕이 없는 비혼여성 10명을 만나 비적정주거 생존자로 살아왔던 집 역사를 인터뷰했다

 

 

* 이 기획기사는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도 동시에 연재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Creative Commons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