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도마뱀처럼 : <프란시스 하(2012)>

 

 

 

• 스머프 (여는 민우회 회원)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그 때, 야생동물을 다룬 인기 프로그램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보고 있었고, 그날 프로그램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프로그램은 도마뱀이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고 설명했다. 어린 내 눈에는, 신체의 일부를 포기하고도 한 생명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일부, 내가 욕망하는 것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음을 알았을 때, 이는 더 이상 신기한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 기로에 섰을 때, 꼬리를 자르고 삶을 선택하는 도마뱀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때, 나는 의아하기보다 불안했다. 저렇게 하고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영화 프란시스 하의 시작, 주인공 프란시스와 그녀의 친구 소피는 싸움 놀이라는 것을 한다. 그녀들은 실제로 서로를 때리고 상처 입히지 않는다. 단지 싸움을 흉내만 내며 놀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싸움의 순간순간일 것 같은 때 역시 프란시스는 농담처럼 가뿐하게 지나친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결별한 후에도 파티에서 사람들과 잡담을 주고받고, 룸메이트 소피에게 농담처럼 그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영화가 본론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프란시스는 불안정한 그녀의 삶에 맞서 진짜 싸움을 해야 하는 순간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서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무용단 동료에게 거처를 의탁했을 때, 프란시스는 싸움 놀이라는 것을 아냐며 그녀에게 놀이를 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프란시스의 동료는 그녀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며 놀이를 거부한다. 프란시스는 더 이상 싸움이 놀이가 아닌 공간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전환은 그녀의 단짝이자 룸메이트인 소피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결혼할 남자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어쩌면 소피처럼, 프란시스 역시 사회가 말하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 다음단계로 나가는 대신 프란시스는 다른 룸메이트를 얻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새로 이사 간 곳의 룸메이트들은 집정리가 귀찮아 가정부를 쓸 것을 고민하는 부유한 남자 아이들이다. 당장 수입이 없으면 방세 낼 돈도 없는 프란시스와 달리, 이들은 손만 벌리면 돈을 내줄 부모가 기다리고 있다. 두 룸메이트의 차이는 부모가 돈을 내주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데이트를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다. 말하자면 이 룸메이트들은 놀이를 끝내고 진짜 싸움과 마주할 일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프란시스가 이들 사이에서 싸움 놀이를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란시스는 불안정하게나마 있던 일자리도 잃고, 방세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쯤 되면, 일찌감치 프란시스를 떠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애인에게 정착한 소피가 부러울 법한 심정이다. 프란시스는 모교에서 서빙을 하며, 직장도 그만두고 애인을 따라 일본으로 떠난 소피의 소식을 허탈한 눈으로 듣는다. 내가 만약 프란시스였다면, 나도 진즉에 의탁할 만한 사람을 찾아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소피와 프란시스는 대면한다. 프란시스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파티에, 소피가 그녀의 애인과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소피는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일도, 친구도 버리고 애인과 떠난 도시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피는 스스로를 버리고 사회가 말하는 다음 단계로 나갔지만, 다름 아닌 스스로가 사라진 삶에서 그녀가 행복할리는 만무했다.

이 후의 전개에서 프란시스는 결국 무용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유예하고, 안무가이자 무용단의 사무직 직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혹자는 이러한 프란시스의 결정이 급작스럽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전의 이야기들을 봤을 때, 이런 결정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꿈을 지킬 자원도 없지만, 스스로를 버리고 기반을 택한 단짝의 행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프란시스는 과연 어떠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을까. 자신의 욕망을 잠시 유예하고서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프란시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도마뱀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때가 있는 것처럼. 프란시스 또한 더 이상 장난이 아닌 진짜 싸움에 맞서서 이런 결정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꼬리는 잘라두고, 일단 스스로를, 스스로의 삶과 공간을 지켜내는 결정 말이다.

 

 

최근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의아해 하지만, 한 때 내 꿈은 학자였다. 공부가 이었던 고등학교를 막 벗어난 때, 나는 순진하게도 공부를 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순진하게도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연구하는 나를 누군가는 지원해주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꿈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딱 1년 반만큼의 타지생활이면 족했다. 계절 학기를 마치고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와 차를 마시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 어른이 된다는 건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 인 것 같아.’ 엄청난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말에 엄마는 위로는커녕 이런 답을 던져주었다. ‘널 가졌을 때, 엄마는 어땠겠니.’

상당히 우울한 광경 같지만 그 때, 나는 모종의 위로를 받았다. ‘맞아 엄마도 그랬어, 누구든 뭔가 놓아야 할 때가 있고 그건 나 뿐 만이 아니야’, 라고. 영화를 본 사람들 중 누군가는 프란시스처럼 긍정적으로 성장통을 지나가다니, 이 영화는 진짜가 아니야.’ 라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누가 진짜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는가. 당연히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놀이가 아닌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영화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진짜 성장은 이래가 아니라 이렇게 성장해보는 건 어때가 아닐까. 영화는 발랄함을 잃지 않지만 결코 삶의 무게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가 지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란시스는 온전한 그녀만의 공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그 공간의 우체통은 너무도 작아, 프란시스 할러웨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모두 적어 넣기는 좁다. 그녀는 이름을 적은 종이를 조금 접어, ‘프란시스 하라는 이름을 우체통에 넣는다. 다시 도마뱀의 은유로 돌아가자면, 그녀는 그녀의 꼬리를 잘라두고 삶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잘린 꼬리는 결국 다시 자라기 마련이다. 언젠가 그녀는 프란시스 할러웨이로 존재할 공간을, 온전한 이름을 기입할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고 프란시스 로서 남으면 어떠한가. 어쨌든 그녀는 여전히 프란시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너무도 대단한 사람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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