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균열 : 영화<크랙>(2009)
• 스머프 (여는 민우회 회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키팅 선생은 훌륭한 교육자의 모범일까. 그는 아무런 질문을 받을 필요가 없는 무결한 캐릭터일까. 특히나 영화의 주인공이 결국 부모와의 갈등 속에서 자살을 선택할 때,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하게 들었다. 자유롭게, 자기에 충실하게 살라고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정말 책임 있는 교사라면 그 과정에서 부딪히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 불가능한 순간도 존재할 수 있으며, 자유는 자기에게 충실한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넘어서거나 혹은 그것과 협상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키팅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한 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살게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또한 아이들이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키팅은 ‘부당한’ 학교에 의해 방출되고, 그는 아름다운 캡틴으로 남았다. 때문에 나는 어떤 의미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는 혁명적이기 보단 매우 안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 <크랙>은 앞서 언급한 <죽은 시인의 사회>의 여성 판이자 앞서 제기된 질문들의 연장과도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배경도 인물도 유사하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간략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영화는 1930년대 영국의 한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다이빙 교사 미스 G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스 G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자유로운 수업 진행으로 아이들의 인기를 얻는다. 특히 학급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 할 학생 디는 그런 미스 G를 선망하고 그녀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이 같은 이들의 관계는 귀족 출신의 전학생 피아마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미스 G의 무용담이 사실은 책에서 베껴온 것임을 폭로하며, 그녀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균열(crack)'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초반부터, 미스 G가 지닌 한계를 적극적으로 은유한다. 가령 미스 G가 아이들에게 다이빙은 연습 시키는 체육관 장면을 보자. 연습이 난항을 격자 미스 G는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신·죽음 등 다양한 답이 나오지만 미스 G는 그 중에서도 ‘욕망’이라는 답을 선택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불가능은 없다’며, 마치 키팅 선생처럼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할 것을 주문한다. 이윽고 다시 연습은 진행되고, 소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은 채 매트리스 위로 높게 점프하기 시작한다. 미스 G는 그녀에게 높이 날 것을 주문하고, 높이 뛰어오르는 소녀와 그녀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어찌 보면 미스 G와 아이들의 즐거운 한 때와 같은 장면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소녀가 여전히 줄에 매달려있다는 점이다. 또한 소녀는 줄에 의지 한 채(혹은 묶인 채) 높이 올라가지만 결국 ‘낙하’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자기 조건에 대한 고민 없이 말하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공허한지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 또 완벽한 욕망의 추구는 사실 욕망의 내재적인 성격상 불가능하며, 우리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결국 내려와야 함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사실 다이빙이라는 운동부터가 어떠한가. 가장 높이 떠오르지만, 가장 아름답게 ‘낙하’해야 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축구 장면과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해진다. 포스터에도 사용된 이 유명한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횡으로 내달리며 자신의 자유로움과 욕망을 아무런 장애나 한계 없이 분출한다. 이에 반해 영화 <크랙>은 끊임없이 떨어지길 반복하는 주인공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는 미스 G의 한계를 주요하게 다루지만, 또한 그녀의 대립 항이라 할 피아마의 한계도 다룬다. 언급했다시피 그녀는 귀족 가문의 딸로서, 영화의 주인공들 중 가장 최근까지 외부세계에서 살다온 소녀다. 외부세계에서 살다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미스 G가 여행했노라 거짓말하는 나라를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때문에 미스 G의 거짓말을 일찌감치 눈치 채기도 한다. 또 그녀는 미스 G에게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면서 왜 학교 남아있냐며, 그녀의 학생들이 영원히 그녀 옆에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스 G가 가진 권력에 균열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만다. 분명 그녀는 미스 G에 비해 더 많은 경험을 했고,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것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원'에 기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스 G가 결국 학교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버린 것처럼, 그녀도 아버지의 보살핌 밖을 벗어나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세계가 아무리 물리적으로 미스 G의 것보다 넓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균열을 낸 경험이 없다. 때문에 영화의 중반, 그녀가 디에 의해 학교 밖으로 쫓겨났을 때, 그녀는 배를 타고 섬을 떠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구해줄 것을 요청한다. 어떤 면에서 미스 G와 피아마는 동전의 양면 같은 캐릭터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미스 G와 고립된 학교를 떠나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캐릭터는 피아마가 아닌 디다. 디는 피아마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누를 은폐하는 미스 G를 보고, 결국 그녀가 용기 있게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겁 많은 권력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디는 진실을 고백하지만, 학교에 의해 사건이 유야무야 은폐되는 모습을 본 뒤 그곳을 떠난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자유로운 삶은 미스 G처럼 그것을 구호처럼 내뱉는다고(카르페 디엠!) 혹은 피아마의 경우처럼 다른 이의 자원에 의탁해 경험해본다고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간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혹은 매혹적이라고 해도, 그것의 한계를 깨고 나올 때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삶’이란 균열을 내는 행동(cracking), 그 자체가 아닐까. 끊임없이 자기가 속한 곳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그 균열을 통해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 말이다.
사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용기 있게 학교를 떠나지만, 그녀는 가진 자원도 없고 직접 만든 지도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여성주의자로 산다는 것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 사회가 싫어서 뛰쳐나왔지만, 가진 언어도 자원도 충분치 못한 그런 상황 말이다. 하지만 디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당장 코끼리를 만나거나 악어를 만나는 멋진 경험은 할 수 없지만, 지금이 바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고된 균열내기의 너머, 그 말이 맞았노라고 이야기할 순간이 꼭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