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된 젠더가 증축해온 K-수용소 군도를 인식 시켜준 강의>
∙ 유체 (여는 민우회 회원)
안녕하세요, 저는 6년째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이성애자 여성입니다. 저의 페미니즘에 대한 쫓아버릴 수 없는 호기심과 집착은 처음부터 사회운동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제가 ‘여성’으로서의 생애에서 부대껴온 사건사고와 비극, 부조리 현상들을 대할 때, 사후적인 관찰 도구로서 페미니즘을 끌어들이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페미니즘을 해부학과 유사하게 다루며 무언가 은닉되거나 소홀히 되어 왔던 증상들을 규정하고 문제를 가시화하는 관념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일에 단번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민우회 열독에서 마련해주신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는 이러한 제가 가진 기존의 관성을 더 정밀하게 조율하는데 도움을 준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보는 시각을 비틀고 해체시켜 젠더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넓히도록 자극하고, 페미니즘이 동시대의 상황에 개입해서 생생하게 작동하는 사회운동이 되려면 정확히 무엇을 적대시하고 어떤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인지에 대한 단서를 준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강의 중 던지신 ‘누가 피해자이고 여성이며, 누가 가해자이고 남성인가?’ 라는 질문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떼어놓고 순수하게 수학적, 생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이야말로 여섯 번의 강의를 모두 관통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가부장제의 가장 충실한 ‘케르베로스’ 역할을 자처하며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의 몸이 며느리에게는 기이하게 과장된 남성성의 그림자이고, 국가의 병역의무를 강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짜 사나이’로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병사로 분류된 총기 사고 가해자의 몸은 불완전한 트렌스젠더 섹슈얼리티가 재현된 장소라는 것. 저는 이러한 다중으로 교직된 젠더 이슈를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이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폭력과 외상을 가시화하는 것과 동일한 강도로 페미니스트에 의해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더 많은 계층, 섹슈얼리티, 더 다양한 맥락의 사람들과 연대해서 보다 더 강하고 실제적인 힘을 실어줄 ‘여성성’에 대한 규정과 논의의 경계를 확장하려면요. 제 식대로 정희진 선생님의 유머를 흉내 내서 ‘여성 해방의 날’의 풍경을 공상해보자면-
1) 역대 최악의 병역기피 이슈에 휘말렸던 MC몽이 가요계 컴백기념으로 자신의 연말 콘서트에 역대 병역기피 연예인들 (유승준, 김종국, 마이티마우스의 상추, 비 등)을 게스트로 부르고 ‘남성성과 젠더(자음과 모음, 2011)’의 저자들과 매향리 미군 폭격 실험을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을 초청해 “우리는 진짜로 가짜 사나이가 되고 싶다”라는 이름의 토크쇼를 공연의 막간 극으로 진행하고 피날레로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 일장기, 북한 인공기를 함께 불태운다. 이것이 크게 회자되며 책의 판매 부수가 기형적으로 늘어나고, 매향리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광화문 광장에 보수단체 할아버지들이 가스통을 들고 와서 ‘가정과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항의 시위를 하고, MC몽의 트위터와 소속사의 웹사이트가 일베 회원들로부터 디도스 공격을 받게 되어 이 사건 전반이 조/중/동 보수 언론 1면과 타임지에 동시에 실린다거나-
2) 자식들의 학원 스케줄 매니저 노릇에 빠져있는 고학력의 똑똑한 ‘강남엄마’들이, 개화기 직후 ‘일과 사랑’ 모두에서 처절하게 오갈 데 없어진 신여성들이 목포, 인천으로 이주해 세도가의 첩살이를 하며 자녀들을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로 보내는 임무를 떠맡아 가부장제를 위해 봉사하다 세월을 허망하게 다 보내버렸던 비극의 한국사를 다룬, ‘대장금’을 뛰어넘는 높은 시청률과 국민적 사랑을 받는 시대극 드라마를 시청한 후 철저히 각성하여 자신의 삶 위에서 비극이 동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용기를 획득하게 된다. 이후 그녀들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과잉 사교육 풍토 철폐 , 수학능력시험 폐지와 대학의 의무 교육화 촉구 가두 시위를 벌이고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반강제로 경력단절 겪어서 주부가 된 것이니 이제라도 일터로 돌아가겠다고 싸움을 걸거나, 전업 주부로서의 생활은 받아들이겠지만 부부의 삶은 없고 애만 키우는 섹스리스 생활을 지금 당장 중단하자고 선언해버려 대형 입시학원가와 교육산업 전반의 주가가 폭락하는 반면 여성향 성인 용품과 포르노 사업이 크게 유행하게 되어 이 아내들에게 보내는 성노동 운동 진영의 연대와 지지 발언이 이어진다거가-
이런 일들 이야말로 동 시대에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 되지 않을까-하고 저는 가늠해봅니다.
‘복장도착자가 된 가부장제의 미망인, 박근혜’
제가 민우회 열독을 전강 신청하게된 계기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정희진 선생님의 글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진이 재현하고 있는 중산층 여성성과 대통령 이미지의 정치학. 여성은 여성다움을 ‘연기’하면서 남성 사회에 적응, 협상하며 이득을 취한다. 남들 앞에서 밥을 조금 먹고, 과일이나 꽃향기를 맡는 포즈를 취한다.
손을 가리고 웃고, 어린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냄새를 맡고 구입하는 식자재는 거의 없다. 생선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흙 묻은 감자를 코에 바짝 대고 과일 향기를 맡는 듯 포즈를 취한 여자 대통령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당황한 나머지 적당한 우리말을 찾을 수가 없다). 대통령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스러운 포즈의 진부함과 오브제의 야릇한 부조화는 비/웃음을 생산했다.’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군주론>, 마키아벨리 지음, 임명방 옮김, 삼성출판사, 1990 ; 사랑과 외경(畏敬) 중 어느 것이 나은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1524.html)
강의 중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적당히 교양 있어 보이는 중산층 여성을 모사한 석고상처럼 연극적으로 구동되면서, 미망인의 특권으로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보호받으며 모든 정치적 이슈를 탈정치화시키고 있는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모든 국민들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자리에 위치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면서도, 결국 이 나라 어디에도 가부장은 존재하지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지자들이 원하는 완벽한 박근혜적 재현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온전한 의미의 여성도, 남성도 될 수 없으며 ‘아버지 대신에 살아있을 뿐인 미망인. 아버지와 함께 죽지 못한 미망인’ 오직 그 자리에만 고정됩니다. 때문에 그녀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나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장관에 비교했을때 가장 정적이고 무색무취한 특징을 지녔으며 그 몸체는 다른 국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떠안게 된 부채의식과 한의 정서가 뒤섞인 향수가 발현되는 텅빈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어딘가 디스토피아적 분위기의 SF소설을 연상시키는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여체女體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민행복기금의 복지 수혜를 기다리는 많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는 이 국가에서 가장 힘센 가부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때의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끝내 온전하게 완성될 수 없었던, 짜깁기된 한국의 남성성을 역사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버지 없이 살아있는 것이 철저히 무의미하므로 좀비의 신세에 가깝기 때문에 온전히 사람 취급 받을만한 ‘독재자의 딸’도 아니고,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어림도 없다’는 정치를 그것도 최고의 지위에서 하고 있는 데다 알파걸이나 우먼파워로서의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질도 빈약하니 ‘여성 대통령’이라 불리기에도 어딘가 꺼림직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특정한 계급, 중산층 여성의 패션을 고집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복장 도착자’라는 호명은 꽤 정확한 것 아닐까요?
‘K-수용소군도에 기거하는 붉은 방들’
K-Pop이라는 한류의 기대를 등에 업은 신조어를 필두로, K- 라는 접두어를 붙여 여러가지 말을 만들고 있는 동시대의 유행속에서 저도 글의 제목에서 솔제니친의 소설 제목에서 가져온 ‘수용소 군도’ 앞에 K-를 붙여 보았습니다. 저는 정희진 선생님의 ‘나는 열 명의 여성이 있다면, 열 개의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814) 라는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불균질하게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며) 일어나고 있는 젠더 트러블의 상이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트러블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든지 여성, 피해자의 위치로 내몰릴 수 있는 대다수의 개인들이, 각자의 붉은 방의 벽에 포위된 채 젠더와 그들 간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맺으며 히스테리적 저항과 아늑한 굴종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맥락’을 지워버리지 않는 일과 이길수 있는 싸움의 ‘전선’을 구성하는데 동참하는 일이 상호 모순되지 않도록 하는 것. 저는 이것이 제가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섬세한 전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끝내며 짧게나마 정희진 선생님과 민우회 교육팀, 뒷풀이자리에서 제게 '유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민우회 분들께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