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인간다운 대접을 해줄 것을 요구하던 선희는 마트 밖으로 쫓겨난다. 다시 마트로 진입하려는 그녀와 노조원들을 경찰은 물대포를 동원해 막는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여 카트를 끌고 마트를 향해 돌진한다.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훌쩍일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의아함이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달려 나가는 캐스트들을 정면에서 찍는다. 말 그대로 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자신들을 보는 관객들을 향해 돌진한다. 약간의 비약을 보태, 이들이 스스로의 인간성을 주장하는 대상이 회사이자 ‘관객’이기도 하다면, 영화가 상정한 관객들은 누구이며, 전하고자한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씨네21에서 우연히 접한 부지영 감독의 인터뷰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기자’는 자기 자리를 보전키 위해 주인공들을 내치는 최 과장이나, 파업 앞에서 자신의 불편을 호소하는 마트 고객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부지영 감독은 그 관점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그들은 단지 돈을 중심으로 사고했기에 ‘사람’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들이 자기중심성을 벗어난다면 주인공들에 대한 공감은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카트가 그런 ‘공감의 폭을 넓히는 영화’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왜 관객을 향해 돌진하는지, 그것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 또 그 말을 건네고 싶었던 관객은 ‘누구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는 비정규직과 부당해고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 스스로 이 문제의 주변인이라 여겼던 사람들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카트>가 주류 배우들을 기용해 통속적인 서사로 극을 꾸린 이유가 명확해진다. 일차적인 목표는, 일단 널리 알리는 것이다. 주인공들, 주인공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어떤 부당함에 마주했고,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가를.
하지만 나는 질문하고 싶었다. 이 영화의 효용이 단지 거기에서 그칠까. 다른 관객층에게 이 영화가 제시할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가령 나의 경우, 비정규직과 부당해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20대 후반이며, 곧 노동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내 또래가(극중 천우희가 맡은 ‘미진’처럼) 정규직에 편입되지 못해 비정규 노동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나는 마트 ‘안’에서 주인공들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트 ‘밖’에서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셈이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을까.
먼저 한 장면을 제시하고 싶다. 막 매장 점거를 시작하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선희 옆에 혜미가 앉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그러던 중 혜미가 선희를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라는 호칭을 익숙해하지 않는 선희에게 혜미는 “우리가 ‘여사님’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답한다. 마트의 모범 직원으로 일하는 영화 초반, 선희는 ‘여사님’, ‘아줌마’ 혹은 ‘저기요’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그녀가 마트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고, 싸움을 시작하고, 동료들과 연대한 이후, 혜미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이 호칭은 그녀가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호칭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어쩌면 이 영화는 선희가 여사님과 아줌마를 넘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에 관한 영화인 셈이다.
영화 ‘카트’는 마트 내의 노동문제를 다루는 영화지만, 동시에 마트에서 겪은 일이 일상에서도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면밀히 관찰한다. 즉 영화는, 마트 ‘안’과 일상적 공간인 마트 ‘밖’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령 혜미가 고객의 부당한 사과 요구에 무릎을 꿇느라 어린이 집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지 못하는 장면이 한 예다. 또 부당해고로 일을 잃은 선희에게 그녀의 아들이 학교에서 보낸, 수학 여행지를 결정할 설문통지서에 대한 답을 재촉할 때, 그녀가 무기력하게 아무런 답을 못하는 장면도 있다. 말하자면 이 장면들은 노동 문제가 일상과 분리된 문제가 아님을, 일터의 문제가 어떻게 노동자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일터와 일상이 긴밀히 연결된 이야기 구조는, 회사를 대상으로 한 싸움이 본격화 됨과 동시에 다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이 때에, 주인공들이 투쟁 현장을 넘어 일상에서도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령 선희의 아들 태영이, 편의점 사장의 부당한 처우 탓에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에 휘말려 경찰서에 있을 때, 선희는 사장에 맞서 일 한만큼 돈을 주지 않는 법이 어디 있냐며 맞선다. 나는 생각했다. 지난한 싸움의 순간이 없었다면, 어쩌면 선희는, 마치 마트에서 잔업을 요구받을 때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그녀는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했고, 그녀는 사장에게 정당한 처우를 요구한다. 그녀의 아들도 말하지 않는가, “엄마가 내 억울한 거 풀어줬어.”라고.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주인공이 투쟁을 통해 어떻게 성장해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 모범직원으로서 정직원이 된 선희는 동료들 앞에 선다. 그리고 그녀는 회사가 원하는 구호를 외친다. 잔뜩 움츠린 모양새로 홀로 단상위에 서서, 황량한 배경을 뒤로 한 채 말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녀는 경찰들의 물대포와 방패와 회사의 탄압을 마주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옆에는 동료들이 일렬로 서있다. 그리고 그녀는 어깨를 움츠린 ‘모범 직원’이 아니다. ‘언니’이자, ‘억울함을 풀어준 사람’이자,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관객을 마주한다. 마치 영화의 초반, 쇼핑 도구였던 ‘카트’가 마지막엔 투쟁의 도구가 되는 것처럼.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2009년에 그녀를 처음 만났고, 달력이 2010년대로 넘어오는 동안,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누나, ‘지는 싸움’하지 말고, 살 길을 찾아.” 그때 그녀는 그랬다. “인마, 이기려고 하는 싸움이 아냐. 싸움을 하면서 나는 내 존엄을 찾는 거야.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냐. 가만히 당하는 사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싸우면서 나를 찾고 주장하는 거야. 그 과정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거고. 그걸로 됐어.”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이 새삼 동의가 되었다. 물론 나는 그녀가 행복했다는 것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 투쟁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이자 실존으로서 스스로를 주장하며, 그녀는 적어도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화 속 선희도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스크린을 향해 뛰어오며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희는 묻는다. 마트 밖에 있지만 아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사람에게 묻는다.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싸움을 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카트의 마지막 장면이 내게 던지는 메시지다. 그리고 나는 이 메시지가 나에게만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족.
몇몇 지인들은 내게, 영화의 엔딩이 아쉽다고 말했다. 엔딩에서 명확한 결말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싸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고 결말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깔끔한 결말이 내려지지 않은 이 영화의 끝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