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영화관] 우리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03)>
∙ 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
불안을 극복 하는 것. 작년 연말 나는 이런 새해 목표를 세웠다. 당시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뭇 최근의 졸업생들이 그렇듯 진로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목표로 세운 일이 내게 적합한지, 내가 그 일을 얻을 만큼 재능이 있는지, 내가 그 목표를 달성할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나는 이런 상황보다, 이런 상황이 내게 안기는 불안이 더 견딜 수 없었다. 밤에 쉬이 잠드는 것도, 뭔가 읽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가능성 앞에서 들뜨던 삶이 익숙했지, 당면한 책임 앞에서 불안을 겪은 적은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을 가능한 빨리 타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새해 목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올해 초, 한 선생님을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한해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 선생님에게, 나는 반쯤 취한 목소리로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술집이 떠나가라 웃으시더니 옆 사람을 붙들고 말했다. ‘쟤 진짜 대단해. 나도 평생을 못한 걸 자기는 일 년 안에 하겠데.’ 그리고 선생님의 말은 옳았다. 삶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고, 원하는 것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때 마다 삶은 또 다른 불확실함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우리가 움직이는 시간에 다른 사람도, 세상도 움직인다. 막연함은 항구적이다. 요즘 나는 누가 새해 목표를 물으면 로또 당첨 혹은 금주라고 말한다.
막연한 미래 앞에서 불안에 떠는 캐릭터,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이 바로 이런 캐릭터다. 그녀는 막 결혼을 한 사진작가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온다. 일 때문에 바빠 미칠 지경인 그녀의 남편과 달리 그녀는 현재 무직인 상태다. 그녀는 일 구하기가 애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철학 전공자이며, 한 때 글을 써볼까도 했지만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고, 지금은 자기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인물이다. 남편이 일을 하러 며칠씩 호텔을 비우면 그녀는 호텔, 혹은 도쿄의 거리를 배회한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그 속에 섞여들지 못하고, 풍경 언저리를 정적으로 배회한다. 그녀의 삶에 어떤 역동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그녀가 겪는 것은 우울과 냉소, 그리고 불면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부러워 할만한, 이미 자기 삶을 살아본 인물은 다를까. 중년의 배우 밥은 샬롯의 대척점에 있다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다른 의미로 불안에 시달리는 캐릭터다. 그의 삶은 정체되어 있다. 그가 광고 촬영차 들른 일본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찍은 영화를 방송해주며,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를 그 영화로 기억한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 흔히 사람들이 이상적이라 할 만한 가정이 있지만 거기서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모양새다. 말하자면 그의 커리어도, 관계도 정체 상태에 놓여있다. 오죽하면 화려한 무늬의 티셔츠를 입고 외출에 나서려는 그에게 샬롯은 이렇게 말할까. ‘와, 당신 정말 중년의 위기로군요.’
삶의 정체기를 맞은 중년의 남성, 막연한 미래 앞에서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 그리고 타지에서의 만남. 이런 배경에서 우리가 쉽게 떠올릴 것은 두 사람의 ‘짧고 뜨거운 로맨스’일 것이다. 불안과 공허 앞에서, 치정으로 이를 대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차별 점은 여기서 나타난다. 영화는 두 사람을 로맨스로 엮는 대신, 두 사람 사이에 유대 관계를 심어준다.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 역시 여기서 한 번의 반전을 겪는다. 물론 두 사람이 낯선 공간에 있으며,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그 곳에 쉽게 섞여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전과는 더 역동적이고 화기애애하게 그 곳을 배회한다. 낯선 세상에서(영화에서는 다른 의미지만)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이런 것일까.
또한 두 사람의 유대 관계는 진솔한 자기고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나는 외출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처한 막연함과 불안을 이야기하던 샬롯은 밥에게 ‘그 나이가 되면 무언가 달라지냐’고 묻는다. 밥은 애써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대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더 알수록 덜 흔들릴 것’이라는 진솔한 조언을 건넨다. 물론 두 사람도 마찰을 겪지만, 친구 사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서로 다투고 짧은 휴지기를 가진 뒤에,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점심 때 갔던 식당이 이상했다는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 세대와 성별을 넘는 두 사람의 유대가 부럽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먼 타지에서 겪는 인물들의 소소한 에피소드라고도 할 만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삶 전반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밥은 샬롯에게 귓속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나는 오랜 시간, 과연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를 궁금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데 그 말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말은 어떤 상황, 사람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사를 마친 뒤, 샬롯은 여전히 낯설고, 알 수 없고, 막연한 거리를 걸어간다. 밥 역시 정체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나는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막연하고 불안한 길이 놓여있지만, 그 길목 길목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서로의 삶과 지혜를 나누고, 또 다시 막연한 길을 나서는 그런 일말이다.
2014년이 끝났고, 나는 여전히 불안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일을 얻고 원했던 삶을 산다고 해도, 나는 또 다른 불안이나 막연함 후회와 마주할지 모른다. 여전히 삶은 막연하고 불안은 항구적이지만 살아가는 길목과 길목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 마치 샬롯과 밥과 같은 사람들과 나는 마주쳤고 또 마주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였다 다시 헤어지다를 반복하며 나는 살아갈 것 같다. 한해를 마치며 새로운 해의 목표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고맙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