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
최근 나는 가정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듣게 된 계기’를 질문을 받지만, 나는 이번 교육의 유일한 남성 수강생인 탓에 특히나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주로, ‘원래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았’으며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며 이 문제가 내 주변 문제로 와 닿았기 때문’에 교육을 듣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답이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답은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라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내 답에 따르면, 나는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제 3자’이기 때문에 교육을 듣는 셈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스스로에게 숨기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여성주의, 그 중에서도 폭력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듣기까지 된 데에는, 단순한 관심을 넘어선 더 큰 동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동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는 것은 물론, 나 스스로 직면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었다. 자꾸 의식하지 않고 회피하기를 반복하다보니, 그 동기를 까먹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도 까먹게 된 동기를 다시 상기한 것은 의식향상 교육을 들은 때였다. 그 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고민과 교육을 듣게 된 계기를 꺼내놓았다. 상당한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민감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때문에 나는 긴장을 풀고 내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여자’ 같은 아이였다. 학교에서 나는 눈에 띄는 아이었고, 내가 폭력에 노출되는 데는 그밖에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폭력 그 자체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더 괴로운 것은 폭력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가해자들은 그것이 ‘단지 장난’ 혹은 ‘농담’이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폭력이, 유년기 남자 아이들의 혈기왕성함에서 나올 법한 일이라 여기는 교사들에게, 골치 아픈 쪽은 오히려 나였다. 사람들은 흔히 ‘피해자’의 위치가 많은 특권을 제공하리라 생각하지만, 막상 그 위치에 서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나 폭력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회적 통념에 그다지 반하지 않는 경우, 문제는 피해자에게 있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기가 매우 쉽다. ‘축구라도 하면서 아이들과 더 어울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사람들의 반응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닫는 것뿐이었다.
영화 <노스 컨츄리>는 미국 최초로 성희롱 집단 소송을 제기한 한 여성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시는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난다. 부모의 집으로 도망쳐온 그녀는 우연히 지역 광산에서 여성 인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부 일에 지원한다. 미용실 보조로 일 할 때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게 된 그녀는, 아이들과 살 집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막 소수의 여성 광부를 받기 시작한 광산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공간이었고, 그 곳에서 여성 광부들은 공공연한 성추행에 시달린다. 조시 역시도 이런 현실에 직면하고, 그녀를 향한 추행은 점점 심각해진다. 참다못한 그녀는 회사에 문제제기를 하지만 돌아온 것은 회사의 냉대와 배신자라는 낙인뿐이다. 그러다 결국 조시는 한 남성 동료에게 폭행을 당하고, 회사를 나와 소송을 제기한다. 물론 소송 과정이 그리 순탄 하지만은 않다. 남성 동료들은 그것은 ‘장난’이었을 뿐이며, 문제라면 그녀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뿐이라고 반응한다. 소송 때문에 일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여성 동료들은, 가만히 있으면 지나갈 일을 조시가 크게 만들었다고 침묵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그녀의 변호사인 빌의 반응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처음 그녀의 변호 의뢰를 거절하며 그는 말한다. ‘정의가 항상 이길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재판에서 기껏 이긴다고 해도, 당신은 과대망상 환자나 ‘창녀’ 취급을 받을 겁니다. 둘 다 치욕일 겁니다. 그러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세요.’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성폭력 사건 앞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어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그 말이 내가 가졌던 두려움을 정확하게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것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현실 앞에서, 내가 기껏 ‘나는 폭력을 겪었고 그 사람들은 가해자였다’라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해도, 내가 받을 취급은 뻔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 혹은 과대망상 환자. 때문에 내가 보인 반응은 정확히 그가 권고한 것과 같았다. 살던 곳을 떠나, 그 일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잊자, 살려면 잊자’ 그리고 나는 내 기억에서, 유년시절의 경험들을 지워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물론 영화 속 조시는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 힘으로 살 것이라고 답한다. 상술했다시피 조시는 가정폭력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나는 이 부분을 그녀가 가정폭력을 ‘피해’ 집에서 ‘도망쳤다’고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조시에게 합당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탁했을 때, 또 다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했고, 거기에서 얻어낸 통찰에 따라 행동한다.(그리고 나는, 다른 가정폭력 생존자들 또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그녀는 이것이 모두의 문제라고 답한다. 이 문제가 광산에 있는 모든 여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녀는 광산에 있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직장이 절실함을 알고 있으며, 직장 내 성희롱 문제로 그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약간의 비약을 보태서 말하자면,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에서 모종의 ‘책임’을 발견한 셈이다. 그녀가 지금 물러선다면, 그녀의 동료들의 노동 환경이 퇴보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이 다른 이들의 삶과 연관된 문제임을 깨닫고, 그녀의 표현처럼 ‘모두’의 삶을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성폭력’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여자’로 지칭되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폭력이 발생했다면, 나는 그 폭력에는 분명 ‘성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에게서 단지 ‘여성’을 떠올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공동체가 그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저지른다면, 그 폭력은 그 집단이 ‘여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있는 셈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했다. 계속해서 답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여성’의 이름으로, 단지 다른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손쉽게 폭력에 노출되는 사람들. 조시의 경우를 빌려 말하자면, 나는 내 경험을 직시했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았고, 그 문제에 다양한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다.
혹자는 이 영화가 다소 감상적인 구석이 있다고 평한다. 사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 부당한 현실에 대항해서 일어나기는 커녕 자신의 경험을 직면하는 것 조차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무소의 뿔 처럼' 분연히 나아가는 조시를 보고 있자면, 동질감 보다는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감상이 내게 힘이 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안다. 같은 폭력을 경험했다고 말 할수 없지만, 나의 것과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한 폭력을, 그 양상조차 소름끼치도록 닮은 폭력을 겪은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언젠가 또 다시, 나는 내가 직면했던 경험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놓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올 때 조차, '모두'가 연루된 이 문제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싶지 않다. 마치 영화 속 조시가 그러했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