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 프로필 캐리커쳐

[지상강의 변화의 정치학] 24강. 에필로그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11. 에필로그

알린스키를 읽고 또 그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다양한 정치학자들의 책을 탐독하며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 무엇보다도 좋은 선배들, 선생님들과 토론했던 시간들은 사실 필자에게 위로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9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청년노동운동, 정당, 국회, 지방행정, 시민단체 등을 정신없이 거쳐 왔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아지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해선 닥치는 대로 경험하고 뛰어들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래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늘 격정적으로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변했지만 정작 바꾸고 싶었던 사회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과 후배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을 지속하기보다는 현실의 생계와 고민을 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이전에 ‘신념’과 ‘의지’에 가득차서 강변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무색하고 창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가차 없이 다가온다. 괴로운 순간이다. 그리고 거대한 벽과도 같은 현실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 모든 몸부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고 세상이 나아지는 속도보다 나빠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것처럼 보이는데. 나에게 알린스키를 읽는 시간은 이런 고뇌에 대한 위로이자 한편 깊은 반성의 시간이었다. 알린스키가 날을 세워서 비판하고 질책했던 어리석고 조급한 운동가들의 모습은 바로 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닌 보고 싶어 하는 환상에 근거해 세상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강변하던 모습, 상대의 경험에 근거한 의사소통 보다 차이를 강조하며 쉽게 편을 가르고 목소리만을 높이며 공격적 언어로 상대를 매도하려 했던 태도, 실제로는 하찮기 그지없는 세상의 비밀을 아는 것처럼 젠체하며 음산한 평론이나 하며 비아냥거리던 습관…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고 분노하면 할수록 스스로는 더 편협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했다. 분노는 대상을 찾지 못해 가까운 주변으로 향하고 섣부른 성공에 대한 기대만큼 실망은 크게 마련이어서 내면은 황폐해져만 갔다. 필자가 그 방황의 순간에 알린스키를 만난 것은 작은 ‘구원’과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 문제는 늘 스스로에게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추억의 저편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추억을 아름답게 미화하기 위해 미래의 희망을 거짓으로 색칠할 수는 없다. 이제는 오랫동안 필자를 옭아매던 강박들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여유로워 졌다고는 느껴진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변화할 수 있는 곳이다. 체제 안에서 일해 가는 것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확실한 변화를 만드는 길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법을 배웠고 차이에도 불구하고 갈등하고 설득하며 또 과감하게 타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무한한 낙관은 필요 없지만 또 크게 절망해야할 이유도 딱히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지혜에서 출발해서 딱 그만큼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많은 것을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또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일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 글과 강의는 필자의 동년배 세대들에 대한 위로였으면 좋겠고 더 힘든 시기를 거칠지도 모르는 다음세대를 위해선 변화를 위한 작은 참고서 정도였으면 한다. 필자의 세대들 중에서 세상의 변화를 바랬던 많은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경우가 많다. 선배세대들이 겪었던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절망보다 오히려 우리 세대가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와중에 지푸라기처럼 환상을 부여잡고 왔던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클지도 모른다. 그 환상의 안개가 걷히고 나서 현실을 목도했을 때 안타깝게도 많은 동료들이 실제로 마음의 병을 앓아야 했다. 이제 그만 아파했으면 한다. 모든 아픔이 추억으로 풍화되지는 않겠지만 술자리의 가끔 내뱉는 넋두리 정도로 비켜두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후회라는 감정이 새로운 도전의 발목을 잡게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우리세대가 했어야 하는 일보다 우리가 지금부터 다시 다음세대를 위해 시작해야 하는 일들을 더 많이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음세대에게는 어차피 필자의 경험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극적인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 강의의 이야기들을 결코 ‘지침’ 따위로 삼을 필요도 없고 그럴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막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책 한권을 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제부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할 20대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책 말미에 붙였더랬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책을 한권 썼을 때 말했다. ‘지금 당신들과 같이 걷고 있다고’. 이제 30대의 중간을 넘어 마무리해가고 있는 지금은 그냥 ‘다음세대를 믿는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다음세대를 믿지 않고서는 필자가 하려고 하는 현재의 어떤 시도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굳건히 다음세대의 가능성에 믿음과 애정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마칠 때이다. 조금 감상적인 마무리였지만 그 나름대로 진심이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알린스키의 말로 마무리하려 한다.

‘함께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인 웃음,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창조의 기회를 일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생활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옛 동료들에게. 그리고 희망의 다른 이름인 다음 세대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내며.

 

[조성주 공동대표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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