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경실련 2021년 5,6월호][지역이야기]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오주섭 광주경실련 사무처장

 
지난 5월 12일 저녁 뉴스에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의 인터뷰를 보다 순간 나는 그 날이 떠올라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광주교도소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에 M60 기관총을 설치해서 고속도로 또는 국도상으로 지나가는 모든 차량에 총격을 가하고, 사람들을 사살했습니다. M60 기관총은 5월 22일 이후 광주교도소의 감시탑과 건물 옥상 등 6곳에 설치됐습니다.”

1980년 5월 나는 전남대사범대부설고등학교 1학년생이었고, 형,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가 전남대 정문 바로 옆에 있어 입학한 날부터 날마다 최루가스 냄새를 맡고, 전남대생들이 데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사는 곳은 광주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되었고, 월요일인 5월 19일부터 중간고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선생님들께서 “고등학생인 너희들은 다른 데 신경 쓰지말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틈날 때마다 강조했던 터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음에도 19일 아침 예정대로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전남대사거리 승강장에 도착하여 시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총을 둘러멘 공수부대원이 곤봉으로 나를 가리키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고, 학교에 간다고 했더니 학교는 폐쇄되었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공수부대원을 피해 학교로 가기 위해 전남대 정문앞을 가보니 이미 공수부대원들이 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대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물러가라!”

당시 살던 골목에 여섯 집이 있었는데 대학생 형, 누나들과 어른들은 나와 뒷집에 사는 고등학생 형한테 골목에 사는 중학생, 초등학생 동생들을 돌보게 하고, 매일 도청 앞 금남로로 시위를 하러 나갔다. 어른들은 총알이 솜이불을 뚫지 못한다며 방문마다 두꺼운 솜이불을 커튼처럼 쳐놓았다.

어느 날 밤, 광주역 방향에서 총소리가 들려 창문 틈으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니 무등산 쪽으로 빨간 도깨비불 같은 것이 연속해서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 빨간불이 M60 기관총 10발당 한발씩 있는 예광탄이라는 것을 군대에 가서 알게 되었다.

최근 5·18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제3공수여단이 5월 20일 오후 10시 이후 광주역에서도 M60 기관총으로 시민들을 사살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들었던 총소리가 바로 5월 20일에 제3공수여단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총격이라고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위협 사격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날 광주시민들을 향해 M60 기관총을 쐈던 것이다.

5월 22일 점심 때쯤 곡성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광주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취방을 찾아오셨다. 어머니께서 “군인들이 광주사람들 다 죽인다고 하더라. 얼른 시골로 내려가자”고 했지만 형과 누나는 도청 앞 시위 현장을 다녀와서인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시골로 갈 수 없다고 강하게 버텼고, 어쩔 수 없이 나만 가기로 합의를 봤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포위하고 봉쇄 작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라 버스는 끊긴 지 오래였다. 걸어서 고향인 곡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주교도소 근처인 담양 가는 국도와 순천 방향 호남고속도로를 지나야만 했다. 어머니께서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걸어가면 담양에서 온 택시들이 있으니 호남고속도로로 가자고 하셨다. 광주에 오실 때도 택시를 타고 호남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내려 걸어왔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광주교도소 옆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빠져나가기 위해 걷고 있었다. 마치 영화나 TV 뉴스에서 봤던 한국전쟁 때 피난민 행렬을 연상케 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덩달아 뛰어가며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군인들이 총으로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가는 방향 오른편에 광주교도소 담벼락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참호 속에서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나 군인들이 총을 쏠까봐 어머니 손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 그곳을 벗어났다. 다행히 군인들은 총을 겨누기만 할 뿐 쏘지는 않았다. 지금도 총을 겨누고 있던 그 군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5·18진상규명위원회 발표처럼 만약 하루 늦은 23일 날 나와 어머니가 그곳을 지나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년 5월이 오면 광주사람들은 41년 전 그날에 기억이 멈추곤 한다. 가슴이 먹먹하고 뭔지 모를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아마도 그것은 아직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전두환을 비롯하여 책임있는 자들이 반성과 사과는커녕 책임을 부인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북한군 개입설 등을 주장하며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 배우 안성기 주연의 ‘아들의 이름으로’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5·18 때 가해자였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식당 화장실에서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문구를 보고 복수에 대한 결심을 굳히게 된다. 감독은 영화로나마 5·18 가해자 중의 한 명인 공수부대원이 반성과 사과를 하고, 복수를 통해 광주시민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지난 3월 당시 계엄군이었던 전직 공수부대원이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숨진 희생자의 유족을 만나 사과한 일이 있었다.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당시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은 5·18의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

지난 1년 동안 5·18진상규명위원회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특히, 조사 개시 1년이 되는 시점에 광주에 투입됐던 2만 353명의 계엄군 가운데 200여 명으로부터 유의미한 증언도 확보했다고 한다. 앞으로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2천 명 이상의 증언을 계획 중으로 진압 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 5·18의 진실에 다가설 계획이라고 한다.

부디 발포 책임자 규명, 행방불명자 문제 등 핵심 의혹들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밝혀져 내년 오월은 새롭게 시작하는 오월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