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권유, 폭력

 

김진석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언제부터였을까? 내게 봄은 견뎌 내야하는 계절이다. 딱히 아픈 데도 없이 몸과 마음이 힘든 계절이 되어버렸다. 말이 열린 공간이지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서일까? 소셜미디어 상의 내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봄이 오면 여기저기서 아파하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만 끙끙대는 것도 아니고 그 신음소리가 열병처럼 퍼지고, 그러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마저 생긴다. 취중 포스팅과 이불킥각인 포스팅이 깊은 밤 올려졌다가 아침 해와 함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이 빈번하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주는 3월의 따스한 봄볕이 긴 겨울 꽁꽁 싸매고 다니던 이들에게 안반가울 리 없다. 봄 햇살 따스하게 쏟아지는 처마 밑에 자리 잡고 오후를 보내는 시골 마당의 게으른 고양이마냥, 봄볕 따스하게 내리는 봄날 광장으로, 들판으로, 밝고 환한 햇볕을 찾아다닐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한다. 버릇처럼 밖에 나와 기지개 한 번 켜고나면, 누가 볼 새라 해지기도 전 어두운 골방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창밖의 봄볕이 이리도 환한데, 일상화된 무력함은 종일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게 쫓기듯 집에 돌아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력함인지 감당 못할 긴장인지 아리송해진다. 아마 내 깊은 곳 감당 못할 그 무엇을 알아챈 내 몸이 무력함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다. 징징거리고 싶지 않은데….

 

“이거 왜 이래?”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이쯤해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은데 쉽지 않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생기는 이 열병은 고질적인 계절성 알러지 탓도 있겠지만, 그 뿐만은 아닌듯하다. “이거 왜 이래?” 이런 외마디가 예상치 못한 자의 입을 통해 불화살처럼 날아오는 것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다 어그러진다. ‘그냥 알러지 탓일 게야’라고 자위하며 겨우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는데, 이런… 다 틀렸음을 직감한다.

 

4월과 5월은 그냥 이런 식이다. 4월 3일 제주에서, 4월 16일 안산과 남녘의 작은 항구, 그 날의 그 바다에서 사람들이 많이 아프다. 5월 광주는 이미 아픔 속에서도 애써 눈물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이 계절이 아팠던 것은 최근의 일만이 아닌 듯하다. 이 시기에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앞당겨 쓰고 산화해갔고,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추모 행렬이 마석으로, 망월동으로, 어느 납골당으로 이어진다.

 

끝을 헤아릴 길 없는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 앞에서 우리는 눈물마저 부끄러워 속으로만 아프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아픔을 나누며 아슬아슬하게 버텨가는 그 때, 가장 어두운 골방에서 숨조차 죽이고 있어야 할 학살자의 입에서 “이거 왜 이래?” 외마디 호통이 터져 나온다. 겨우겨우 가라앉히고 다스려오던 슬픔은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삐져나온다. 이 봄도 틀렸다. 싸우자.

 

용서와 화해의 조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인지 ‘일흔 일곱 번’인지 불명확하지만 여하튼 훨씬 더 많이)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내놓았단다. 2000여 년 전의 그 유명한 제자와 스승이 어떻게 결론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오늘 대한민국에서 인간계를 살아내야 하는 내가 수용하기 쉽지 않다. 한 때 유대인 탄압에 의해 모국인 프랑스에서 교수직과 국적조차 박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용서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처벌의 전제가 되는 사실관계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규명과 상호간의 인정, 이 과정이 전제되었을 때에조차 용서는 ‘가능’할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불명확하고, 그래서 모두가 수긍할 만한 그 무엇도 없는데, 그래서 위에 언급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따르자면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마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하란 말인가? 심지어 이미 가해자로 밝혀진 이들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데, 오히려 그들이 ‘이거 왜 이래?’라며 호통치는 마당에 용서와 화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필시 인간계를 사는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다.

 

강제된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폭력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물리적 강제뿐만 아니라,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반복해서 권유하는 행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행위, 그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본질적으로 그러한 행위는 폭력적이라는 말이다. 나는 아닌데 그게 좋은 거라고, 그게 네 가족과 친구를 위하는 길이라고, 그게 네 이웃과 국가, 역사를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할 거라고, 끊임없이 권유하는 것, 그것은 폭력이다. 하물며 내가 피해자인데 용서해야할 구실을,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 이제 그만 흘려보내라는 말, 이 모든 것은 단연코 폭력적이다. 그렇게까지 그 가족과 친구가 걱정이 되거든, 이웃과 국가의 미래와 역사가 걱정이 되거든,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낼 궁리와 노력을 하라.

 

 

일본 제국주의, 제주, 세월호, 광주…. 우리 역사가 품고 있는 생채기들 어느 것 하나,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용서와 화해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