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청 사실은 통지하지 않으면서 통신사실 확인자료에만 통지하라는 모순
헌재 결정의 최소한의 요구만 이행하려 하지 말고
감청 통지의무 개정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 전반에 대해 요건 강화해야
법무부는 2019년 3월 2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정부, 의안번호: 2019416)’을 제출했다. 지난 2018년 6월 28일 송경동 시인의 위치정보추적자료제공 사건(2012헌마191 등) 및 같은 날 내려진 기지국수사 사건(2012헌마538)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해당 법률의 위헌적 요소를 제거하는 입법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헌재의 결정취지를 최소한으로 이행하는 선에서만 당사자에 대한 통지의무 및 통신정보 취득 요건을 강화하고 있는 바, 이는 헌법과 통신비밀보호법의 근본적 정신과 체계에 맞지 않는 새로운 모순을 창설하고 있다. 이에 사단법인 오픈넷은 정부가 이 법안을 철회하고 국민의 통신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개정안을 새로이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통신사실 확인자료 취득 전반에 더 엄격한 요건 적용해야
‘기지국수사’는 특정 위치의 기지국에 접속한 ‘이동전화번호’(도심 기준 1시간당 수천 개에 이름)를 모두 알아내어 수사대상을 좁히는 것을 말한다. ‘위치정보추적자료(이하 ‘위치추적’)’는 ‘IP주소’나 ‘접속기지국의 위치정보’로서, 통신이용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정보를 말한다. 위의 두 가지 정보는 모두 ‘통신사실 확인자료’이며, 편지봉투에 쓰여진 주소처럼 통신이 완결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생성되어 공유되어야 하는 정보이다.
헌법재판소는 현행법과 같이 ‘수사의 필요성’만을 이유로 국가기관이 위의 두 가지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1) 기지국수사의 경우, 수사 편의를 위해 “범죄에 아무 관련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일괄적으로 알아내는 방식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2) 위치추적의 경우,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위치정보는 통신의 내용만큼이나 “사적 생활의 비밀과 자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무부가 제출한 위 개정안은 기지국수사나 위치추적에 있어서는 ‘수사의 필요성’ 외에도 ‘보충성’ 요건을 추가했다. 즉,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에만 기지국수사, 위치정보추적자료를 취득할 수 있게 하도록 요건을 더욱 엄격히 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시민단체들이 비판한 것과 같이 이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최소한의 요구만을 반영한 것이며 위 두 가지 뿐만 아니라 모든 통신사실 확인자료 취득의 전체적 요건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하여, 오픈넷은 기지국수사나 위치정보추적자료가 아닌 일반적인 통신사실 확인자료 취득에 있어서도 미국의 기준(‘관련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명시가능한 사실의 증명’)이나 독일의 기준(‘통신데이터의 수집이 사건의 죄질에 비추어 적절한 관련성이 있는 때에 한하여’)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수사의 필요성’은 터무니없이 낮은 요건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정보주체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지국수사, 위치추적을 포함한 통신사실 확인자료 전체의 취득 요건을 ‘수사의 필요성’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위 개정안은 통신사실 확인자료 전반에 대한 검토 없이, 계류된 사건과 관련하여 헌재가 위헌성을 지적한 기지국수사와 위치정보추적자료에 대해서만 국한적으로 요건을 높이고 있다. 이렇게 일부의 통신에 대해서만 요건을 높이는 것은 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것이다.
감청 사실은 통지하지 않으면서 통신사실 확인자료에만 통지하라는 모순, 감청 통지절차도 개정해야
헌법재판소는 현행법이 기소나 불기소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피감시자에게 위치추적 여부가 통지되지 않는 것에 대해 적법절차 위반이라며 반드시 감시대상자에게 통보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전에 정보주체인 피의자 등에게 이를 통지하는 것은 수사의 밀행성 확보를 위하여 허용될 수 없다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전기통신사업자로부터 위치정보 추적자료를 제공받은 다음에는 수사에 지장이 되지 아니하는 한 그 제공사실 등을 정보주체인 피의자 등에게 통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수사기관이 피의자 등에게 위치정보 추적자료 제공사실을 통지함으로써, 피의자 등은 위치정보 추적자료의 제공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위치정보 추적자료가 제공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되었는지 또는 제공된 위치정보 추적자료가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규정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폐기되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정보주체인 피의자 등은 이를 통하여 수사기관의 불법 또는 부당한 행위가 확인되는 경우에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그 시정을 요구하는 등으로 실효성 있게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개정안은 피감시자에 대한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 이후 1년이 지난 기간부터 30일 이후 통지를 의무화하여 기소/불기소결정에 관계없이 특정 기간이 지나면 원칙적으로 통지가 이루어지게 했다. 그러나 통신사실 확인자료에 대해서만 통지의무를 강화하면서 통신의 ‘내용’을 감청하는 ‘통신제한조치’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통지의무 조항을 만들지 않았다. 결국, 통신사실 확인자료에 대해서는 비교적 빨리 통지를 받게 되는 반면, 사생활의 비밀을 더욱 크게 침해하는 감청에 대해서는 기소/불기소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한, 피감시자는 자신이 감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감청행위 종료 후 30일 이내에, 미국의 경우 감청행위 종료 후 90일 이내에 대상자에게 통지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감청은 사생활의 비밀을 가장 심대하게 침해하는 강제처분이기 때문에 피감시자 통지의무가 개선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다.
정부는 헌재 결정의 최소한의 요구만을 반영하여 통신비밀보호법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헌재 결정의 취지를 다시 고민하고 제대로 이해하여 국민의 통신비밀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개정안을 새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19년 5월 9일
사단법인 오픈넷
문의: 오픈넷 사무국 02-581-1643,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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