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의 서막이 열리다

1987년 5월 18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가 열렸다. 여기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고 폭로했다. 이 폭로는 4.13 호헌조치 이후 각계의 서명운동·단식투쟁으로 민주화투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던 정국을 메가톤급 핵폭탄으로 강타했다. 박종철의 죽음과 4.13 호헌조치로 내연하던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였다.

그해 1월 박종철 열사가 죽고나서 2·7 추도대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을 준비했던 각계 실무대표들은 이 새로운 사태를 호헌철폐·민주쟁취 운동을 진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삼기 위해 5월 20일 우이동 개나리산장에서 긴급히 회동했다. 이때 모인 사람은 김병오 이길재, 김도현, 성유보, 정성헌, 이재오, 정상모, 이병철, 인재근, 유시춘, 이명준, 황인성, 김희택, 박우섭 등 15명 정도였다. (『6월항쟁과 국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날 회의에서는 2·7, 3·3 대회를 치르고나서 해산했던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를 다시 가동하기로 했다. 이 준비위원회를 모체로 하여 5월 23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여기에서 6월 10일 전국적인 국민규탄대회 개최를 선언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6월 10일 국민대회와 그 이후 전개될 국민적 항쟁을 지휘할 수 있는상설 조직으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결성 일정은 5월 27일 발기인대회, 28일 결성대회로 정했다.

그러나 이 조직 작업을 누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당시 전두환 정권의 친위쿠데타설이 떠돌만큼 정국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이라 저들의 수사망을 피하고 정보가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작업은 매우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이 회의에서는 이 중차대한 과제를 성유보, 김도현, 이명준, 황인성 4인에게 위임하기로 했다.결성대회에서 발표할 주요 문건 작성, 결성대회 장소와 연락방법 등 국본 결성준비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이 4인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4인조가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들은 박종철 사망(1월 14일) 사흘 후 1월 17일에 긴급히 소집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이하 고문공대위)’에서 만나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고문공대위 실행위의 위임을 받아 ‘2·7 국민추도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을 기획하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이들의 작업은 강남에 있는 김도현의 지인 정기용의 집에서 3박4일 동안 이루어졌다. 이들은 함께 합숙하면서 대회에 필요한 각종 문건과 전국적 집회전략 등에 대해서 심도있게 논의하고 합의 하에 기획안을 작성했고, 이 기획안은 대부분 실행위에서 수정없이 채택되어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 일로 해서 그들에 대한 재야의 신뢰는 절대적이라 할 만큼 두터워졌다.

5월 23일에는 예정대로 박형규·송건호·장을병 등 재야 원로들이 기독교회관에 모여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35명 중 이민우 신민당 총재를 제외한 134명 명의로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고문살인 사기정권 즉각 퇴진하라’라는 성명을 통해 6월 10일에 전 국민 규탄대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했다. 바햐흐로 6월항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서중석, 『6월항쟁』, 2011)

 

4인조, 6월항쟁의 기초를 놓다

1987년 5월 22일 아침, 성유보, 김도현, 이명준, 황인성 4사람은 강남에 있는 정기용의 집에 다시 모였다. 비밀리에 역사적인 6월항쟁의 기초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투쟁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긴장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역사의 물길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작업임을 모두 실감한 것이다.

집 주인 정기용은 오랫동안 민주당원으로 정치권에 몸담아 왔고, 진보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윤길중이 민정당 대표위원을 할 때 보좌역을 지낸 바 있었다. 민추협 연락책임자였던 김도현의 오랜 지인이기도 했다. 정기용은 몸은 비록 정치권에 있었지만 재야운동에 보이지 않는 후원을 많이 했다. 이날도 김도현의 연락을 받고 4인의 작업을 위해 두말없이 자기 집을 비워주었다.

4인모임의 중심은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선배인 성유보와 김도현이었다. 그중에서도 후배 이명준, 황인성과 친한 성유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성유보와 김도현은 1961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함께 입학한 입학동기였고, 64년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일어난 ‘6.3사태’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뛴 오랜 동지이자 친구였다. 성유보는 당시 86년 5.3사태로 중요 간부가 모두 구속되고 쑥대밭이 된 민통련의 핀치히터로 나서서 그 해 말부터 사무처장을 맡아 정책실 차장 이해찬과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김도현은 85년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를 중심으로 발족한 민추협의 간부로서 계보상으로는 김영삼계였지만 양김 진영에 두루 신망을 받고 있어 민추협의 대재야 연락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사람은 언론인으로 한사람은 정치인으로 다른 길을 걸어오다가 87년 1월 박종철 열사 죽음 이후 격동하는 정국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당시 이명준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로, 황인성은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로서 각각 천주교와 개신교의 연락 책임을 맡고 있었다.

정기용의 집에 모여 작업에 착수한 이들은 그날 저녁 모임 장소를 김도현의 고등학교 동창이 사장으로 있는 인근 삼성동 금성호텔로 옮겼다. 정기용의 집이 한번 모였던 곳이라 보안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당시 성유보는 민통련이 학생들과 함께 주최한 그 해 4.19 시위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호텔이라 숙박계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도 한 가지 이유라면 이유였다.

금성호텔에 자리 잡은 이들 4인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성유보의 사회로 전체 상황을 종합한 후 토론을 통해 작업내용을 확정했다. 6.10대회에 필요한 문건 작성은 4인이 분담하기로 하고, 황인성이 각계가 모집하기 시작한 발기인 명단을 취합 정리하였다. 문건 중 <6·10 국민대회 선언문>은 성유보가 초안을 작성하기로 하고, <6·10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은 김도현이 초안을 잡았다. <6·10국민대회 행동강령>은 전체 토론을 거친 후 이명준이 정리했다. <6·10국민대회 결의문>은 황인성이 초안을 잡았다. 이 모든 문건은 전체토론을 거쳐 수정 보완하고 최종 확정했다.

4인 기획팀이 또 하나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발기인대회 장소였다. 김승훈 신부의 명동성당 폭로 이후 재야의 움직임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던 터라 집회 장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4인 준비팀은 대회 장소로 성공회대성당, 명동성당, 향린교회 등 후보지 몇 곳을 선정하고 그 교섭과 최종 선정을 황인성에게 맡기기로 했다.

 

시민과 함께 하는 6.10 대회를 위하여

성유보가 작성한 <6·10 국민대회 선언문>은 ‘국민합의 배신한 4·13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는 제목으로 되어있는데, 언론인 성유보의 혼이 담긴 도도한 문장으로 가히 역사적인 명문이라 할만하다. 성유보는 이 선언문에서 4·13호헌조치는 ‘위헌적 월권행위요, 민주주의의 요체인 3권분립을 파기한 폭군적 망동’이라고 질타하고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13호헌조치에 기초하여 현 정권이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강행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엄중히 경고했다. 그리고 이제 민족의 숙원인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어선 우리 국민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힘찬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 고 박종철군을 고문살인하고 은폐조작한 거짓정권을 규탄하고 국민의 여망을 배신한 4·13 폭거가 무효임을 선언하는 우리 국민들의 행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 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천한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민주·민권 승리의 확신과 필승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의 과제 앞에 힘차게 전진하자.

김도현이 초안한 <6·10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도 성유보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정보기관 관계자, 치안공무원, 경찰, 전경에게 말하는 상당 분량의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성유보의 한 경험과 맞닿아 있다. 그 당시 경험에 대해서 성유보는 2014년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길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이 4인모임이 있기 직전인) 5월 중순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성유보는 이해찬과 함께 정현백 교수 집에 들렀다가 헤어져 사당역 지하보도를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성 처장”하고 불러 돌아보니 국가정보원 정보국의 민통련 담당 정아무개였다. 그가 “차나 한잔 합시다.”라고 말해 다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는“ 위에서 당신을 잡으라고 난리다. 열흘 전에는 수사국 요원과 같이 당신 집 앞에서 일주일간 잠복했다. 나는 그때 당신이 내 손에 잡히지 않기를 하늘에 빌었다. 다행히 당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며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그때 ‘전두환 정권은 이제 끝났구나!’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성유보는 전두환 독재를 지탱하는 정보기관조차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감지했다. 그래서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정보기관이나 경찰 공무원도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것’을 요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권력의 위신을 회복할 것’을 간곡히 권면했다. 그리고 ‘이번의 국민대회에 대한 일체의 방해를 중단할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87년 6월 5일 국본에서 고문·공동대표 명의로 발표한 <6·10국민대회 행동강령>도 이 4인팀의 작품이었다. 여기에서 6시 국기하강식 때 애국가 제창, 자동차 경적 울리기, 성당·교회·사찰 등에서 42번 타종하기, 9시부터 10분간 소등하기 등이 제안되었다.

이런 제안은 대학생들의 전투적인 운동가요와 시위문화에 익숙했던 당시로서는 조금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획기적인 것이기도 했다. 박종철 죽음 이후 가두시위에 일반 국민들의 참여가 뚜렷하게 늘어난 시점에서 보다 많은 국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특별한 용기가 없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토론한 끝에 이 국민 행동강령이 탄생했다. 이 행동강령은 4인 합작품이지만 그 중에서도 성유보와 김도현이 아이디어를 많이 냈고 이명준이 정리했다. 이 행동강령은 이후 6월항쟁이 전 국민이 동참하는 국민항쟁으로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중 타종하기는 이명준의 제안이었는데, 천주교에서 ‘삼종기도’라하여 성당에서 하루에 3번 종을 울리고 기도를 올리는 관습에 착안하였다. 6시에 치는 종을 만종(晩鐘)이라하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6월항쟁 당시 전국의 성당·교회와 사찰에서 울리는 타종은 국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87년 5월 27일 아침 8시 역사적인 국본 발기인대회 겸 창립대회가 2,191명의 발기인 중 약 150명이 명동 향린교회에 모여 열렸다. 대회장소와 연락을 책임 맡았던 황인성이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수배자 성유보는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보는 그날 저녁 대회에 참석한 황인성으로부터 대회가 무사히 치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벅찬 감회에 눈시울을 적셨다.

 

성장과정과 대학생활

성유보는 1943년 6월 28일 경북 경산에서 부친 성태후 선생과 모친 신순득 님의 팔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해방 전 일제 말기에 성유보의 집도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부친이 지어준 성유보의 일본 이름은 나리오카 다카히코였다. 해방이 되자 호적에 새로 이름을 올리면서 부친은 무심결에 ‘철수’라고 적어 올렸다. 아마도 가장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유보는 대학 때까지 ‘성철수’라고 불리웠고, 그래서 지금도 대학 동기들은 ‘성철수’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 이름을 싫어했던 성유보는 대학을 졸업한 후 스스로 이름을 ‘유보(裕普)라고 고쳤다.

성유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은 허약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곧잘 했다. 그래서 성유보는 ‘그 시절 “키는 조그마하고 볼품 없지만, 공부는 좀 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고 회고했다. 시골에서 자란 성유보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명문 경북중학교(1955년)와 경북고등학교(1959년)에 시험쳐 무난히 합격했다.

1960년 경북고 2학년이었던 성유보는 대구 2·28 학생의거에 참가했다. 2월 28일 경북고 학생 800여명은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도지사에게 항의하기 위해 대구시청까지 행진했다. 여기에서 성유보는 투입된 경찰에게 붙들려 도청 회의실에 무릎 꿇고 있다가 오후 5시쯤 훈방되었다.

당시 ‘범생’이었던 성유보는 동기생 이대우가 주동한 학생의거에 ‘뜻하지 않게’ 참가하여 처음으로 혹독한 경험을 했고, 이것이 성유보에게 ‘조용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 때부터 성유보는 기숙하고 있던 숙부 댁에서 <동아일보>를 읽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정치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어 밀어닥친 4.19혁명의 열풍은 성유보로 하여금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했다. 당시 경북고에는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한 진보적인 선생님이 많았는데, 이 선생님들로부터도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친은 법대를 가기 원했지만 4월혁명의 영향으로 성유보는 ‘민주정치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3학년 때 정치학과로 목표를 바꿨다.

성유보는 1961년 4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한 달 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학교는 휴교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고, 1년 동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었다고 성유보는 고백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니힐리스트였고, 술을 많이 마셨다.’ 술에 약한 성유보는 주로 기원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죽였고, 스스로 세월만 죽이는 ‘어영구영파’라고 생각했다.

1962년 2학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볼 즈음에 접한 체코 역사학자 한스 콘의 『민족주의의 이념』은 성유보에게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1963년 가을 문리대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하 민비연)이 결성되자 성유보는 여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종률, 김중태, 현승일 등이 회장이 되어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민비연에서 성유보는 기획부 차장, 연구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64년은 새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한일협상반대 시위로 대학가가 뜨겁게 달궈졌다. 이 해 4월 서울대 문리대와 성균관대 학생 1000여명이 연합하여 “5·16은 결코 4·19의 계승일 수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협상 반대 시위를 벌였다. 성유보도 정치학과 동기생들과 함께 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김문원 등 6명이 함께 구속되었고 사흘만에 석방되었다. 첫 서대문형무소 입소였다. 5월 20일에 있었던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모의에도 민비연 회장 현승일의 권유로 참여했다가 6.3 계엄령 선포로 수배자가 되어 한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동아일보 입사와 해고, 감옥살이

1964년 말 대학 졸업을 앞둔 성유보는 스스로 ‘4월혁명으로 민주주의 세례를 받았다’고 믿어온지라 직접 정치에 나설 형편은 못되고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언론인이 되는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기자시험을 쳤으나 보기 좋게 낙방했다. 1965년 봄 조선일보에 응시했다가 1차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낙방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제2차 민비연 사건을 일으켜 김중태 등 민비연 간부 9명을 구속하자 계제에 군대문제나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입대를 결심하고, 1966년 1월 성유보는 논산훈련소에 자진 입소한다.

1968년 9월 만기 제대한 성유보는 작심하고 마포 사촌 누나 집에 기숙하면서 기자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드디어 1968년 11월 동아일보 기자시험에 합격, 이부영(전 국회의원), 김두식(한겨레신문 사장 역임), 김언호(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등과 함께 11기 수습기자로 입사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편집부 기자로 일하던 성유보는 “동시대 기자로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때의 부끄러움을 성유보는 평생 잊지 못했고, 그로 하여금 기자로서, 민주언론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서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항상 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974년 10월 24일 서울농대생 시위 보도를 문제삼아 박정희 정권이 송건호 편집국장을 연행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동아일보 기자들은 다음날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하고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내연하던 언론자유운동이 드디어 표면화한 것이다. 그해 말부터 정권의 사주로 시작한 광고탄압에 굴복한 동아일보 경영진은 결국 1975년 3월 17일 새벽 폭력배를 동원하여 100여명의 동아일보 기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성유보도 이 때 해고되었고, 신산(辛酸)한 재야운동가로서의 삶을 걷게 되었다.

성유보는 동아사태 직후 해고된 동아일보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에서 활동하면서 감옥살이도 여러번 했다.

1975년 6월에는 동아일보사 침묵집회 직후에 중앙정보부 요원에 체포되어 남산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동아투위 동료 이부영, 정정봉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청우회’라는 ‘모택동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명백히 동아투위 활동을 탄압하기 위한 용공조작이었고, 이 과정에서 혹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해야했다. 이 사건으로 성유보는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고, 2심에서 1년으로 감형되어 1976년 7월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2014년 11월 성유보 타계 직후 열린 재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978년 10월에는 이른바 ‘민권일지 사건’이 있었다. 동아투위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을 맞아 명동 한일관에서 천관우, 송건호 선생을 모시고 ‘진정한 민주언론의 좌표’라는 성명과 함께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1년간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일지‘ 125건을 실은 유인물을 배포했다. 박정희정권은 안종필 위원장 등 4명을 즉각 구속했다. 그러나 동아투위는 굴하지 않고 후속 집행부를 구성하여 저항했다. 11월 3일에는 후속 집행부 장윤환 위원장, 김종철 등 7명이 구속되었고, 이듬해 1월 성유보는 3차 집행부 윤활식 위원장과 이기중 총무 등과 함께 3차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성유보는 79년 7월 1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자 12월 7일 2심 재판부는 구속집행정지로 성유보를 갑자기 석방했다. 바로 그날 밤 12시에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것이다. 당시 석방 장면은 한국일보 박래부 기자가 취재하여 성유보가 어린 두 아들과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보도되어 눈길을 끌었다.

동아투위 위원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성유보는 한편으로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1976년 4월에는 동아투위 동지들과 ‘종각번역실’을 만들어 번역 일을 했고, 1976년 말부터는 <월간 바둑> 편집장, 중앙대가 운영하는 <주간시민> 편집 촉탁으로 일하기도 했다. 1979년 말 석방되고 나서도 쉴 틈도 없이 이태영 변호사의 <가정법률상담소 25년사>를 편집하는 일을 했다.

1980년 5.17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김종철, 정연주(KBS 사장 역임)와 함께 도피했다. 그러나 암으로 입원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도곡동 집으로 들어왔다가 보안사 요원에게 붙들려 남영동 분실에 끌려갔다. 다행히 닷새 만에 풀려났다. 아버지는 이듬해 1981년 작고했다.

남영동에서 풀려나고 나서도 성유보는 1981년부터 김언호 사장 부탁으로 2년간 한길사에서 번역을 하는 등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을 계속해야했다. 이때 나온 책이 조지 세이빈의 <정치사상사>로 1983년 출판되었다.

 

민언협 시절, <말> 창간

1984년부터는 민주언론운동을 하지 못해 애달아 하면서 생활전선에서 악전고투하는 남편을 보다 못해 부인 장연희 여사가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장 여사는 웅진출판사 외판사원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성유보는 조금 홀가분하게 재야운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우선 성유보는 1984년 12월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해직 언론인들이 모여 창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다. 당시 의장은 송건호 선생이었고, 최장학, 김태홍, 김승균 등이 공동대표, 윤활식, 이부영, 노향기, 박우정, 이호웅, 김도연 등이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성유보는 1985년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창립한 재야 연합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에도 참여하여 언론분과위원장을 맡았다.

민언협 사무국장으로 민주언론운동 일선에 복귀한 성유보는 무섭게 일에 몰두했다. 1985년 1월부터 마포경찰서 맞은편에 사무실을 내고, 젊은 상근 간사를 뽑아 실무력을 보강했다. 김도연의 추천으로 처음 간사로 뽑은 사람이 최민희(현 국회의원)였다. 이후 김도연과 최민희의 추천으로 정봉주(전 국회의원), 정수웅, 김원득, 배시병 등 유능한 간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다.

성유보는 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양김씨의 신민당이 약진하자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될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보고, 송건호 의장과 실행위원들과 협의하여 시대적 추세에 맞는 독자적인 민주언론 매체를 시작하기로 했다. 새로운 매체의 이름은 신홍범의 제안으로 <월간 말>로 하기로 했다.

<말>을 만드는데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민언협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목사가 700만원, 조선투위의 백기범씨가 300만원을 쾌척하여 4-5개월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성유보는 김도연을 편집차장으로 임명해 <말> 창간호 편집 책임을 맡기고, 중심 간사로 최민희를 임명하여 비밀리에 창간작업을 진행하여 드디어 1985년 6월 15일 <말> 창간호를 발행해냈다. <말>은 창간되자마자 서점을 통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나 그 엄청난 파급력에 놀란 경찰은 서점에서 일제히 잡지를 압류하고 편집인 성유보를 연행했다. 성유보는 즉결심판에 넘겨져 29일 구류를 받았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당시 <말>의 인기는 대단하여 독재정권의 실상을 고발하고, 민주화운동·민중운동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말> 창간호 표지 맨 위에 인쇄되어 있는 ‘민주·민족·민중 언론의 디딤돌’이라는 표어는 성유보의 언론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늘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귀로 듣고, 민중의 입이 되라”는 명령이라고 성유보는 해석했고, 이것은 전태일의 죽음 이후 성유보의 변하지 않는 언론관이었다.

성유보가 사무국장을 맡은 85년 말까지 <말>은 4호까지 발행했는데, 기존 제도언론의 관행을 깨고,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족자주 문제와 구로동맹파업 등 민중생존권 문제를 심층 취재하여 보도했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과 김근태 고문 같은 인권문제, 여성문제,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도 적극적으로 취재 보도하여 국민의 귀와 입을 열어주었다.

당시 <말>지가 한 호 발행될 때마다 당국은 편집인을 구류 살게 했기 때문에 송건호 의장 제안으로 편집인을 호마다 교대로 등재하게 했다. 그래서 창간호는 성유보, 2호는 신홍범 실행위원, 3호는 최장학 공동대표, 4호는 다시 성유보 사무국장이 편집인으로 등재하여 구류를 살고 나왔다.

 

민통련 사무처장 시절

1985년을 민언협 사무국장으로, <말>지 편집인으로, 사무실과 경찰서 유치장을 오가며 바쁘게 살았던 성유보는 86년 초 사무국장을 김태홍에게 넘겨주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왔다. 천성이 어디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유보인지라 맡은 책임 없는 모처럼의 여유시간이 좋았다. 그리고 약골 체질에 워낙 ‘빡세게’ 1년간 민언협 일을 하고 난 뒤라 건강도 많이 안 좋아져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형세가 성유보에게 그리 오래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성유보가 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고 있는 민통련이 86년 5.3 인천사태로 쑥대밭이 된 것이다. 5.3사태 이후 민통련은 문익환 의장을 비롯하여, 강희남, 백기완, 이창복, 임채정, 김종철, 이부영, 장기표 등 거의 모든 간부들이 구속 수배되는 바람에 완전히 기능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6월 초 어느 날 수배 중인 이창복 부의장이 성유보를 불러 수배된 이부영 대신 사무처장 대행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6월 26일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처음에는 건강상 이유와 활동자금 조달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고사했던 성유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다. 간판만 지켜달라”는 이창복의 간곡한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6월 말 장충동 민통련 사무실로 출근한 성유보는 계훈제 부의장, 이해찬, 박우섭, 정선순, 이명식 등과 함께 사무실을 추스려 나가기 시작했다. 시인 김정환을 대변인으로, <말>에서 함께 일했던 김도연을 편집실장 대행으로 새로 임명하여 마이크 역할을 보강하였다.

그런 와중에 7월3일 권인숙 양의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터졌고, 김근태 고문사건으로 모였던 고문공대위가 다시 소집되었다. 고문공대위가 이 사건에서 인상 깊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와 야당의 연대가 다시 시작되었고, 정권의 탄압으로 거의 와해 직전까지 갔던 민통련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잠깐 ‘건국대 사태’가 터졌다. ‘건국대 사태’는 전국 26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에 모여 집회를 열고 있을 때 전두환 정권이 쳐들어가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는 학생들과 4일 동안 대치하다가 8천명의 경찰과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최루탄을 쏘고 들어가 전원 연행, 구속한 사건이다. 1,525명을 연행하여 1,287명을 구속한 초유의 사건이었고, 말 그대로 전두환 정권의 학생운동 섬멸작전이었다.

이에 민통련은 11월 3일 전두환 정권의 야만적 진압작전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경찰은 바로 민통련 사무실을 포위하고 사무실 폐쇄를 통고했다. 성유보는 사무처장으로서 계훈제 부의장, 민통련 간사들, 가맹단체 회원 등 30여명과 함께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닷새째 되던 날 전투경찰은 산소용접기와 쇠망치로 사무실 문을 부수고 쳐들어와서 성유보 처장과 박용수 실장등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고, 이해찬, 김도연 등 간부들을 수배했다. 이날로 민통련과 민통련 가맹단체들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다.

성유보는 남영동에서 조사를 거쳐 구속 송치되었으나 한 달여 만인 1986년 12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나와 보니 분도회관의 사무실은 폐쇄되어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성유보에 대한 감시는 강동경찰서로 넘어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만 그 감시망을 뚫고 성유보는 민통련 간사들과 비밀 연락망을 복원했다. 그리고 이명식이 맡고 있던 지역운동협의회(이하 지운협)을 통해 지역 가맹단체들과 연결하고, 새로 영입한 김부겸(현 행자부 장관)을 통해 부문단체들과 연락망을 구축했다. 학생운동권과의 연락망도 연말까지 점차 회복되었다.

민통련은 성유보 사무처장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1986년 말에는 ‘의연하게’ 송년사를 통해 1987년의 강력한 투쟁을 예고했다. “1987년은 이 땅의 반외세 자주화와 반군사 독재 민주화가 실현되는 민중해방의 새날이 되도록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정진합시다.”

1987년 새해 벽두부터 전두환 정권의 과속 질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수배자 검거를 위한 조사과정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서서히 6월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미완의 혁명’, 6월항쟁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민심에 굴복하여 노태우 성명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6월항쟁은 우리 국민이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제한적이었고, ‘혁명’이었으되 ‘미완의 혁명’이었다. 이에 대해서 성유보는 이렇게 평가했다.

6월항쟁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제도 도입’. ‘대통령 5년 단임제’, ‘지방자치제 도입’ 등으로 대한민국 수립 이래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정치의 국민 대표성 부재를 해소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해나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6월항쟁의 성과는 그야말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그쳤다. 경제민주화, 노동의 민주화, 언론의 민주화, 사법의 민주화, 교육의 민주화, 문화예술의 민주화 등 사회 각 분야에서의 민주화는 너무나 소홀히 취급했다. 남북의 평화공존과 교류 협력에 필수적인 ‘국가보안법 폐기’도 방치됐다.

이러한 결말은 ‘양김씨’가 재야세력과 너무 빨리 결별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생각한다. 대권 경쟁이 급했던 두 정치인은 민주·민중·통일운동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운동권 인사들을 세 확보를 위한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재야’는 분열됐다.(성유보, 『미완의 꿈』, 한겨레출판, 2015)

6월항쟁의 성과로 이루어진 1987년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양김씨’의 분열로 군사독재의 후계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성유보의 평가처럼 시급한 개혁은 소홀히 취급되거나 방치되었고, ‘재야’는 분열되었다. 6월항쟁에 참여했던 국민들과 함께 성유보 역시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성유보는 대통령 선거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내일의 민주화를 위한 희망의 새 아이콘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한겨레>의 창간 작업이었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가 창간되고 성유보는 초대 편집위원장에 취임했다.

성유보는 <한겨레>에서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고 1991년 2월 퇴사했다. 돈에는 별로 인연이 없던 그가 한겨레가 운영난에 빠졌을 때 발전기금모금특별위원장을 맡아 95억을 모금하여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성유보는 <한겨레> 퇴사 이후에도 많은 조직의 직책을 맡아 일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한겨레>를 고향처럼 생각했고, 틈나는 대로 후배들에게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았다.

<한겨레> 이후 그의 활동 중에 주요한 것만 살펴보면 1993년 월간지 <사회평론> 발행인, 1998년 민언협 이사장, 2003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200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설립위원 겸 이사, 2012년 희망래일 이사장,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 등을 들 수 있다.

 

『미완의 꿈』

2014년 1월 1일부터 성유보는 <한겨레>의 ‘길을 찾아서’라는 기획코너에 자신의 회고록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생애 회고담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기획취지에 충실하게 성유보는 이 연재를 통해 자신이 활동했던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 연재는 2014년 6월 24일까지 6개월간 계속되었고, 이듬해 6월 한겨레출판에서 『미완의 꿈 – 언론인 성유보의 한국 현대사』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연재를 끝내고 두 주일 쯤 지난 7월 초 어느 날 성유보 선생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비용은 당신이 댈 터이니 주말에 양구에 혼자 사시는 오충일 목사님 집에 가서 하루 놀자는 말씀이었다. 사모님을 여의고 외로운 목사님을 위로하러 간다는 명목이었지만 <한겨레> 연재 때문에 6개월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좋아하는 바둑도 실컷 두고 싶으신 것이었다. 그래서 연락하여 모인 사람이 이철, 정상모(전 MBC논설위원), 유시춘(작가), 차수련(전 병원노조 위원장), 이인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사료관장)과 나, 성유보 선생을 포함해서 모두 7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인수가 모는 기념사업회 스타렉스를 타고 양구의 오충일 목사님 댁에 가서 1박 2일을 잘 놀고 왔다. 파로호 호숫가에서 민물매운탕도 먹고, 시골 밤길을 걸으며 보름달도 보고,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며 밤 늦도록 고담준론을 나눴다. 젊은 축은 일찍 떨어져 방에 들어가 자고, 오히려 오 목사, 성유보 선생, 정상모 선생이 끝까지 남아 밤 3시가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성유보 선생은 술이 약해 한 두잔이면 끝이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한겨레>에서 원고료 받은 거 있다며 여행 비용을 한사코 당신이 내겠다고 했지만 선생의 형편을 잘 아는지라 우리가 십시일반 추렴을 했다. 그래도 상당액수는 성유보 선생이 부담한 것으로 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미완의 꿈』을 읽으면서 이산(怡山) 김광섭 시인의 말이 생각이 났다. 1974년 『김광섭 시 전집』을 창비에서 출판하면서 전집 발문(跋文)에 김광섭 시인이 이렇게 썼다. “이 전집을 내면서 나는 인생은 짧고 무상하지만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한겨레> 연재를 끝내고 난 성유보 선생의 감회가 그러지 않았을까? 책으로 된 『미완의 꿈』을 받아 보셨으면 훨씬 더 기꺼워하셨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양구행이 있은 지 겨우 넉달 만에 성유보 선생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을 듣고, 이산 선생의 시 <겨울날>을 떠올렸다. 마지막 한 연을 인용한다.(김광섭, 『겨울날 – 김광섭 시 선집』, 창작과비평사, 1975)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 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 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치 한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大地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나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나온다

어느날 목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성유보 가는 날

2014년 10월 8일 성유보 선생은 췌장암 진단을 받고 긴급히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중 쇼크로 사망했다. 성유보 선생의 장례는 함세웅 신부를 장례위원장으로 많은 언론인들과 재야 인사들의 애도 속에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1일 오전 7시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한 성유보 선생의 운구행렬은 공덕동 <한겨레> 사옥과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노제를 하고, 9시 30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 고인의 유해는 원지동 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문익환·전태일·조영래·김근태·김병곤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고인이 가는 길 마지막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