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현은 2014년 4월 친구 김태경이 죽었을 때 장례식 추모 글에서 김태경을 이렇게 평했다. “출판인으로, 고난 많았던 민주화의 투사로, 탁월한 미식가요 사통팔달의 인문학자로 일생을 풍운아로 살았던 그” 세상에는 법무장관을 지낸 강금실의 전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리 출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출판인이자 60년 한 생애를 ‘굴곡진 우리 역사 한 가운데서 불꽃처럼 살다 간’ 불굴의 민주화운동가였다.
『교수대의 비망록』
죽기 2년 전인 2012년에 ㈜도서출판 다빈치에서 김태경 자신의 이름으로 낸 『교수대의 비망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체코의 언론인이면서 문예평론가였던 체코 공산당 간부 율리우스 푸치크(Julius Fucik 1903~1943)가 체코에 침공한 나찌에 맞서 지하에서 해방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 당하기 직전 까지 쓴 비망록과 옥중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다. 200쪽 정도의 작은 이 책이 평생 출판인으로 수많은 두꺼운 명저들을 출판한 김태경에게도 특별히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김태경은 이 책의 발문을 직접 썼다. 여기에서 그는 푸치크의 죽음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자유혼, 미래에 대한 낙관과 동지에 대한 신뢰,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경탄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는 수식어로 비하하고 낙인찍는 모든 인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푸치크를 보라고. 그러고도 생각이 변치 않는다면 그 가시면류관을 나에게 달라고. 같은 류의 존재로서 억압받고 학대받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빨갱이‘로 낙인찍는다면 그 낙인을 나는 내 삶의 훈장으로 받겠노라고.
사실 김태경의 삶은 철의 규율을 추구하는 현실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학생시절부터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영현, 이을호는 그를 ‘허무주의자’라고 평했다. 그리고 정치사상적으로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철저한 공산주의자 푸치크에 대해서 저렇듯 열렬한 찬사를 보냈을까?
김태경은 감옥을 두 번이나 간 민주화운동가이면서도 천하가 알아주는 미식가여서 장안의 맛집이란 맛집은 그의 발길이 거쳐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조에 따라 결혼 후에도 아이조차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철저했지만 사회적 명성이나 출세 같은 세속적 가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어떤 권력이나 권위 앞에서도 당당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믿는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 주었다.
김태경 장례식에서 호상을 맡았던 친구 양춘승은 김태경에 대해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이 양춘승의 본가가 있는 장흥에 들이닥쳤다. 사건 관련자로 수배 중인 양춘승의 후배를 잡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내시위로 2년여 수형생활 끝에 석방되어 집에서 요양 중이던 양춘승은 간발의 차로 체포를 면하고 맨몸으로 산을 넘어 서울로 도피했다. 무슨 영문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엮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양춘승은 마지막으로 수중에 남은 동전 2개로 김태경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김태경은 두말할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와 당시로는 거금이었던 10만원을 주고 갔다. 양춘승은 그 돈으로 방을 얻고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양춘승은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했고, 김태경이 죽자 호상을 자청하여 사흘을 내리 빈소를 지켰다.
2014년 3월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로 문병 온 친구들은 김태경에게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찬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극도로 쇠약한 중에서도 끊임없이 불의한 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가야할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농담을 받아넘기며 어린아이처럼 웃곤 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그의 모습이 교수대를 눈 앞에 둔 푸치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급조치시대, 대학에서 루카치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읽다.
김태경은 1954년 진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네 살 때 일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계모 밑에서 동생 태성이와 두 형제가 화곡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동초등학교와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다.
그 해는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쿠테타 이후 일인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비판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 옥죄던 숨막히던 시기였다. 바로 그 해 4월에 천여명의 민주인사와 청년 학생들을 구속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1975년 5월 장기독재체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서울농대 김상진이 독재에 항거해 할복자살하고 서울대에서 5.22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1년 반 동안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도 기관원들이 상주하여 감시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복하여 암중모색하였다.
김태경 역시 입학하자마자 인문대 선배들의 학생운동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당시 인문대학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태경은 천재로 알려진 철학과 이을호와 글솜씨가 뛰어나 나중에 소설가가 된 철학과 김영현, 국문과 김사인(시인, 현재 동덕여대 교수)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들은 학문적 관심사도 비슷했지만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식을 공유한 동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3학년 때인 1976년부터는 인문대 학보 편집실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 김영현과 김사인이 학보 편집위원으로 있었는데, 거기에 김태경과 이을호가 합세하여 편집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 시절이 김태경에게는 사회과학 이론과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루카치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함께 읽었는데, 텍스트가 되는 책들은 대체로 김태경이 공급했다.
김태경은 대학시절부터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는 대학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고, 외국 원서 전문서점과 청계천 헌책방들을 섭렵하여 당시로는 귀하기 힘들었던 철학/미학 책들, 그리고 금서가 된 사회과학 원서들을 구했다. 당시 서울대도서관에 유일하게 고속복사기가 있었는데, 김태경은 이 복사기를 이용하여 이 책들을 복사하여 복사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은밀히 팔았다. 주로 루카치, 헤겔, 모리스 돕, 카우츠키 등의 영어 원서들이었는데, 이 책들은 모두 당시에 당국에 의해 금서로 분류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란 커버를 씌운 이 책들은 당시 학내 이념서클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태경은 책을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항상 주머니가 풍성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가난한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는 물주였다.
반유신 시위 모의와 투옥
1976년 12월 8일 이범영, 박석운, 백계문 서울법대 삼총사의 유신철폐 시위사건은 철옹성 같은 유신체제에 균열을 냈다. 한동안 잠잠했던 학생운동권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1977년 4학년이 된 김태경과 편집실 친구들 역시 이 저항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9월 김태경과 김영현, 이을호, 김사인 등 4명은 서울근교 일영 장자원에 가서 10월 중에 학내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인문대 74, 75학번들 중에서 함께할 사람들을 물색하고, 시위 선언문 초안은 김영현이 작성하여 이을호 자취방에 보관해 두었다.
이들의 시위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연기되었다. 그해 10월 서울대 26동에서 사회과학대학 심포지움이 대학당국의 저지로 무산되었는데,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자연적인 반정부시위로 발전하였다. 이 시위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연행된 학생들 속에 김태경과 김영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구속은 면했지만 구류 처분을 받아 15일 만에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지 얼마 안 된 11월 11일, 국사학과 김경택 등이 주동한 학내시위가 서울대 도서관을 점거한 채 수천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유신독재 철폐의 함성으로 서울대 교정을 뒤흔들었다.
이런 저런 사유로 지지부진하던 김영현 김태경 그룹의 시위계획은 결국 불의의 사건으로 무산되게 되었다. 11월 16일 김영현이 서울대 후문 낙성대 쪽에서 이을호에게서 등사기를 받아들고 나오다가 서울대 상주 기관원의 검속에 걸려 체포된 것이다. 김영현이 관악서로 붙들려 가고, 이어 김사인과 이을호도 차례로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에 앞서 김태경의 집에도 경찰이 들이닥쳐 김태경을 체포함과 동시에 집안에 쌓여있는 수십 박스의 책들을 압수해 갔다. 이 속에는 김태경이 공들여 수집한 수십 종의 사회과학 원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지 자체만으로도 몇 년씩 징역을 살아야 하는 금서들이었다. 그런데 압수된 장서 속에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들이 있었는데, 이런 책들에 눈이 팔린 기관원들이 금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단순 압수물로 넘어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가슴 조마조마했던 김태경이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이 불발 시위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과 별개로 진행되던 75학번 반병률, 이증연, 배남효 등의 시위모의사건을 합쳐 <불온 유인물 제작배포 미수사건>으로 확대했다. 이들 서울대 74,75학번 10여명은 한 묶음이 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경은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구속 후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김태경은 1심 재판이 시작되면서 서울구치소로 옮겼다. 이후 항소심 진행 중에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어 1년 6개월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
광화문 시대 – <민중문화사>와 양서조합운동
김태경의 출판 경력은 1979년 광화문에서 시작한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고대 출신 김진영과 함께 민중문화사라는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을 냈다. 이 서점에서는 주로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들 뿐만 아니라 루카치나 모리스 돕, 폴 바란 등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원서를 복사본으로 만들어 팔았다. 물론 이런 책들은 대개가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당시 진보적 변혁 이론에 갈급했던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이런 책들을 구할 수 있는 민중문화사는 반드시 들러야하는 필수 코스였다.
물론 이런 책들은 서점 진열대에 놓지 않고, 안쪽 골방에 숨겨 놓고, 믿을만한 고객이 찾을 때만 꺼내서 팔았다. 그리고 국민연합이나 민청협 등 재야운동권에서 나오는 유인물도 이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엄혹한 철권통치가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이 작은 서점이 재야 민주화운동권의 정보가 공유되고 유통되는 거점 구실을 한 것이다.
이 당시 이 서점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 중에 강금실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법대 4학년으로 이 서점에서 김태경을 처음 만나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김태경과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2-3년 후 결혼으로까지 발전한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 5월까지 ‘서울의 봄’이라는 잠시 동안의 열린 공간이 열리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서구의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는 열풍이 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양서조합운동도 그런 흐름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태경은 이을호, 김영현 등과 함께 양서협동조합을 만들고, 헤겔 철학,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변혁 이론, 루카치의 미학이론 등에 관한 책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책들은 김태경이 공급했고, 그 근거지가 민중문화사였다. 이런 양서조합운동은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광주의 녹두서점, 전주의 금강서점 등이 지역근거지의 역할을 했다.
김태경의 민중문화사는 양서조합운동을 통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게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넘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민주변혁운동의 이론과 실천의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했다. 민중문화사를 효시로 서울에도 박경희 사장이 세운 광화문 논장서점이 문을 열었고, 서울대, 연대, 고대 앞에도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촌시대 – <오늘의 책>과 <이론과 실천>
1985년에 김태경은 광화문 민중문화사를 접고 신촌 연대 앞에 <오늘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서점을 오픈했다. 이곳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의 약속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이곳은 양질의 사회과학 서적과 문화비평서들을 소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기획도서전을 열었다. 소설가 공지영, 백원담(백기완 선생 딸, 현재 연대 중문과 교수) 등도 이 서점의 단골이었다. 이 서점의 골수단골로 당시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연대 국문과 학생 김재환(현재 헝가리한국문화원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서점은 좋은 책을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의 책>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김태경은 서점운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 초 출판사 지청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회과학 출판사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백원담 씨가 운영하던 <이성과 현실>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해 운영했다. 그러다 이듬해 1986년 <이성과 현실>을 편집장으로 일하던 최청수(현재 출판사 <자작나무> 대표)에게 넘기고, 본인은 마포구 신수동에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설립해 국내의 대표적인 철학/예술 분야 출판사로 키웠다.
<이론과 실천>는 한국 출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슬람문명사’, ‘음악이 있는 풍경’ 등을 출간해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설립 당시 미학과 출신답게 책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그는 삼청동에서 부부가 운영하던 북 디자인 회사에 표지를 맡겨 당시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교보문고>에서 주는 ‘올해의 북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서점 <오늘의 책>과 출판사 <이론과 실천>은 출판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영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태경은 확대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세 출판사 4-5개를 합병하여 사업 규모를 키워 나갔고, 그가 기획한 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업의 황금시대’를 열어나갔다.
1986년 김태경은 사업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 속에서 학생시절부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사업에 착수했다. 마르크스 <자본>의 독일어 원서 번역본 출판이었다. 이 책은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에서 금서로 되어 있는 책이라 출판 자체가 위험부담이 컸다. 게다가 총 9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라 번역 출간하는 데에 적지않은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김태경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노력을 이 사업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5년만인 1990년 드디어 한국 최초로 <자본> 전 9권을 완간하였다. 이것은 군사정권이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출판계에 드리웠던 오랜 금기를 깨뜨리고, 국내 마르크스 연구의 물꼬를 터놓은 쾌거였다. 그러나 이 획기적 출판으로 김태경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두 번째 징역 생활을 해야 했다.
<자본> 완간은 김태경의 배짱과 수완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85년 이후의 사업적 성공이 바탕이 되었다. 김태경은 <자본> 출판 다음 해인 1991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출판인으로서 최고 정점을 찍었다.
시련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대를 거침없이 달려온 김태경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왔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을 선도했던 <오늘의 책>에게 정권의 손길이 뻗쳐왔다. 건물주가 어느날 갑자기 보증금을 10배, 임대료를 3배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요구나 다름 없었다. 신촌 대학가 학생들에게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전파하는 서점에 대해서 정부당국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김태경이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고, 연대, 이대 학생들이 ‘서점지키기 운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이론과 실천>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형식적/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사회주의운동 등 진보적 사상 이론과 문예에 대한 출판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속에서 김태경이 영세출판사들을 인수 합병하는 등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1992년 무렵 김태경의 <이론과 실천>은 수십억의 부도를 내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몰렸다. 부도를 막기 위해 김태경은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을 처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본인은 파산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아내 강금실의 월급까지 차압당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출판인이자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추락한 김태경은 모든 일을 접고 아내 강금실과도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북한산 밑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건강도 급속하게 나빠졌다. 오랜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시력도 현저히 저하되어 반실명상태가 되었다. 결국 90년대 말 강금실과도 이혼했다. 계속되는 부채의 압박에서 아내를 해방시켜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지만 이로써 부부로서의 법적 관계는 정리되었다.
이런 실의의 상태 속에서 10년을 지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김태경은 출판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해외의 출판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후배들과 만나 토론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90년대 말 그가 후배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 인사동 카페 ‘하가(霞歌)’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강대 출신 최석도 등 후배들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출판이야기를 나눴다. 이것이 그의 삶에 큰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었다.
2000년 이후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책들을 훑어보고 있던 그에게 세계역사에 관한 아동도서 시리즈가 눈에 들어왔다. 출판인으로서의 오랜 경험 속에서 직감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 책들을 번역해서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다시 신수동 출판단지에 <꼬마이실>이라는 출판사를 새로 내고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004년 펴낸 『세계역사이야기』 (전 5권)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청소년 추천도서와 각 신문사의 ‘올해의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려나가 그의 말년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새로운 삶과 죽음
2004년 8월 20일 김태경은 출판사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홍대입구 철길 옆 땡땡거리의 카페 ‘섬’에서 김인미를 만난다. 카페 주인 김인미는 사업 실패 이후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던 김태경을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고 품어 주었다. 김태경은 그해 말 김인미에게 프로포즈했다.
김인미와 북한산 밑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생활의 안정을 찾은 김태경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책들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전투적인 작업 속에서도 인생의 맛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김인미와 함께, 때로는 신세진 출판계 동료들과 함께 이태리, 체코, 독일, 프랑스,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그에게 병마가 찾아 왔다. 2009년 11월 뇌경색이 왔고 12월에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좌측 마비와 언어장애가 왔지만 강한 의지로 재활 치료에 전념하여 일년 만에 거의 정상상태로 회복했다. 주치의에게서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셔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그래도 아주 완전하지는 않아 김태경은 이후에도 지팡이 신세를 져야했지만 그러나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2013년 12월 육십세 생일기념으로 일본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배에 복수가 차는 등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급히 여행에서 돌아와 2014년 1월 1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김태경은 검사 결과 악성 간암 진단을 받는다. 암종의 위치가 나빠 수술이나 화학요법 시술도 어려운 상태였다. 간의 해독기능이 멈춰 간헐적으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찾아왔다. 간성혼수가 올 때면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몰라봤다. 평생 천하에 두려움이 없었던 김태경이지만 자신의 그런 상태만은 몹시 두려워했다. 두 번의 간성혼수를 겪은 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김태경의 마지막 투쟁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남은 기운을 다 쓴 듯 김인미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서서히 악화되어 갔다. 간암 말기 신부전으로 신장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의사가 투석을 권했지만 김태경은 거절했다. 자신의 상태가 끝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 것이다.
2014년 4월 초 병세가 위급한 상태로 가면서 집에서 가까운 일산 명지병원에 입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김인미가 강금실에게 전화해서 문병을 권했다. 황급히 달려온 강금실을 김인미가 병실로 안내했다. 강금실의 뜻밖의 방문에 김태경은 깜짝 놀라면서도 짐짓 농담을 하는 여유를 보였다. “내가 평생 당신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이 사람에게 다 해 줬어.” 세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강금실이 다녀간지 사흘 후인 2014년 4월 17일 03시 20분 김태경은 마지막 10년간을 항상 그 옆에서 지켰던 아내 김인미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틀 후 4월 19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한 후 김태경의 유해는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을 했다. 그리고 유골은 김태경과 김인미가 말년에 자주 찾았던 양평미술관 발치의 남한강 강변에 뿌려졌다.
공동선, 2017년 11-12월호 13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