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진지하게, 좀 더 느리게
‘슬로우뉴스’를 아시나요?

민노씨 슬로우뉴스 편집장

 

 

글. 박유안
기웃기웃 번역가. 알트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는 “까칠해도 친절하게”가 삶의 모토이며, 쟌 모리스를 번역한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 밤엔 주로 땅고 추며 논다. 맘 놓고 춤 출 좋은 세상을 염원한다.
사진. 박영록

미디어는 세상을 바꾼다. 뉴미디어가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산다. 6년 전 아이폰의 등장이 그랬다. 지금 스마트폰 4천만대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통적 미디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는 소셜미디어는 스마트폰의 보편화와 더불어 우리의 삶 속에서 뉴스가 소비되고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사건 중의 사건이다. 기성 언론이 페이스북의 빅데이터 활용법을 벤치마킹하느라 바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가파르다.  

이번 통인 인터뷰의 주인공 민노씨는 슬로우뉴스 공동대표이자 편집장으로, 파워블로거 출신 인터넷언론인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당신이라면 여러분의 친구가 공유한 슬로우뉴스의 뉴스 콘텐츠를 이미 페이스북에서 접했을 공산이 크다. 민노씨를 만나 이 스마트 시대에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인지, 또 이 시대를 진정 스마트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곱씹는 시간을 나누었다.

 

참여사회 2015년 6월호

    슬로우뉴스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페이스북에서 자주 봤다. 아직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 인터뷰 준비하며 찾아봤더니, 재미난 콘텐츠가 많더라.
슬로우뉴스 재미있다는 분은 처음 본다. (웃음)

 

    무엇보다 블로거들이 모여 인디 매체를 만들었다는 발생학이 남달랐다. 민노씨도 인터넷언론을 만들기 전에는 파워블로거였다는데?
2006년 <타임>지에서 매년 뽑는 올해의 인물을 “YOU”로 뽑았다(“바로 당신, 정보시대를 좌우하는 바로 당신!”). 그것은 유저가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는 UCC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였다. 전적으로 소비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생산자도 아닌, 이른바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를 뜻하는 producer와 소비자를 뜻하는 consumer의 합성어로, 생산에 참여하는 소비자를 의미)가 등장해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이 2000년대 들어서 10년 동안이었다. 적어도 미디어계에서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걸쳐 다양한 자신만의 콘텐츠를 여가시간에 제작해 포스팅하는 블로거들이 이 시기에 속속 생겨나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재주는 블로거들이 넘었으나) 그 결실은 최종적으로 두 왕서방에게 돌아갔다. 피라미드 꼭대기의 왕서방은 물론 네이버나 다음 등의 포털이다. 포털이 모든 이익을 독식하는 구조가 되고 말았다. 작은 왕서방은 이러한 포털 시스템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PR에이전시들(파워블로거와 접촉해 기업 홍보 전략을 세우는 대행사)이다.
대중들이 파워블로거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한 계기는 이른바 “깨끄미 사건” 때였다. 내가 공중파 인터뷰를 처음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억대 수수료를 챙기던 음식 분야 파워블로거 베비로즈가 깨끄미란 불량제품을 홍보한 건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포털은 정치나 경제 분야 콘텐츠를 띄워주기 부담스러워 한다. 반면 음식, 육아, 인테리어 등은 포털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콘텐츠였다. 그런 콘텐츠들을 적극 유통시켰다는 점에서 포털에는 “정치색을 빼버리는 정치성”이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 덕분에 생겨난 파워블로거는 그 힘을 가지고 뭘 했느냐? 장사를 했다. 불량품을 판 거다. 최근에는 ‘파워블로거지’라는 표현까지 생겨난 지경이다. “나 파워블로거인데, 밥 공짜로 안 주면 너네 밥집 큰일 날걸?”이라며 식당 삥 뜯는 애들까지 생겨난 거다.

 

    대한민국에서는 블로그의 역사만 보자면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닌 ‘프로슈머’의 등장이 없었다는 말인가?
블로그의 본질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좀 시적으로 얘기해 ‘인간의 목소리’이고 기술적으로 얘기하면 ‘게이트키핑gatekeeping, 편집자나 기자 등 뉴스 결정자가 뉴스를 취사 선택하는 과정의 제거’이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고 어떤 이야기를 함에 있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게 바로 블로기즘의 본질이다. 기존 저널리즘 콘텐츠는 수직적 위계를 따라 층층의 데스킹Desking, 편집에서 게이트키핑을 통해 생산된다. 사실확인부터 어조를 바꾸는 일, 통편집까지 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블로그는 그게 없다. 취재원에 대한 고려도 없다. 그래서 약점도 있지만, 누구의 간섭도 없이 블로거 맘대로 쓴다는 것, 이 게이트키핑의 제거야말로 블로그가 지닌 가장 큰 에너지였다. 이렇게 솔직한 인간의 목소리를 쓰던 게 자본에 의해 간섭받고 포털의 유통 구조에 의해 간접적으로 간섭받는 식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우리 슬로우뉴스 구성원들은 어디에 살건, 서울대를 나왔건 지방대를 나왔건, 그런 것과 무관하게 블로그에 올린 콘텐츠로, 솔직한 ‘인간의 목소리’로 교류하고 소통하며 만난 사람들이다.

 

    동료인 슬로우뉴스의 어느 편집위원께서 “민노씨가 모든 걸 슬로우뉴스에 갈아 넣고 있다”고까지 표현하신 걸 봤다.
내가 시간이 많아서일 뿐이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 때문에 슬로우뉴스를 하는 건 아니다. 블로거 시절에도 내가 시간이 제일 많았다. 그래도 내가 자꾸 불러내면 “한번 나가볼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시간강사, 기성언론 기자, 박사 등 주로 글쓰기와 관련된 분들과 점점 교류가 쌓였다. 앞서 말한 ‘YOU’들이 포털에 차츰 종속되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블로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마침 스마트폰도 등장했다. 2010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콘텐츠 생산의 조건, 유통의 조건은 ‘모바일’이다. 그에 따라 마이크로블로그 현상이 일어났다. 웹에서 모바일로 토대가 바뀐 것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카톡이 사람들의 콘텐츠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미디어 현상을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었고, 블로그로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을 키워보려 한 우리들도 더 이상 할 게 없어진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조직적인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을 결합하는 뭔가를 꾸준히 고민했고, 2년 반 동안의 콘퍼런스 실험 끝에 많든 적든 날마다 콘텐츠를 공급하는 미디어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게 슬로우뉴스가 된 거다.

 

    기자들도 많았다고 했는데, 새로운 뉴스 매체를 만들자는 데는 기존 언론에 대한 반성도 큰 역할을 했겠다?
우리나라 저널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 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기계적이고 동물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속보에 길들여지는 언론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늦더라도 인간의 목소리를 내자” 싶었다.

 

    그 점에서 보자면 슬로우뉴스는 짧고 강렬했던 블로그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셈인 건가?
그런 블로기즘에다, 절차적으로는 게이트키핑 요소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의 성격도 강화했다. 

 

    그런 ‘저널리즘+블로기즘’의 요소가 슬로우뉴스 조직 구성에도 그대로 녹아 있을 듯한데?
당연히 그렇다. 제일 할 일 없는 내가 인문·사회 쪽 편집장이자 대표이고, 시스템과 IT 쪽 편집장이자 발행인은 써머즈 님이 맡는다. 우리의 취지에 동감해 날마다 글을 쓰겠노라며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한 열다섯 분 중에는 기성언론 기자들이 제일 많았다. 직업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잉여시간에 해보겠다며 모인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 그것이 슬로우뉴스의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지금은 이 편집팀원들이 미디어오늘 편집장, 한국일보 디지털팀장, 연합뉴스 노조 전임 등 직장에서 중책을 맡아 너무 바빠졌다.

 

    그런데도 슬로우뉴스는 3년 넘게 꾸준히 성장 하고 있지 않은가? 자발적 참여만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게 벅차지 않은지?
블로거의 정체성으로 만났던 초기 슬로우뉴스 편집팀원의 참여 밀도가 느슨해지는 대신, 그들이 생산해낸 슬로우뉴스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해준 분들이 꾸준히 ‘초대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참여연대도 초대필자 중 한 명이다. 그 필진이 폭발적으로 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늘어 250여 명에 이른다. 그 분들이 진심을 다해 쓴 글이 슬로우뉴스가 조금씩 커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쨌거나 신생언론이다. 어떻게 차별화해 선택 받으려고 애쓰는지? 
일상적인 고민이면서, 긴급하고 간절한 고민이다.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는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일상인들이 진지하기만 한 슬로유뉴스보다 희한한 고양이 사진으로 도배된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는 게 이해는 간다. 우리는 자타공인 너무 진지해서 탈이다. 쉬운 얘기도 어렵게 쓴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니까. 그래도, 진심이 느껴지네, 고양이 사진은 없어도 소외된 이웃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구나. 그런 지지리 궁상이 우리의 차별화다. 하지만, 아무리 진지하게 쓰면 뭐 하나? 읽지 않으면? 

 

    그 말씀을 들으니, 차별화된 콘텐츠의 생산은 그걸 어떻게 유통시킬 것인가 와도 직접 맥이 닿아 있겠다 싶다.
피키캐스트나 인사이트, 위키트리 같은 모델은 “읽히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콘텐츠를 만든다. 편집팀도 자기가 발행하는 글이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다 어디서 베껴 오는 거니까. 오로지 트래픽Traffic, 정보의 이동량 늘리기 위해 자극적으로 부풀린다. 이들에겐 전 세계 모든 콘텐츠가 자기 거다. 심지어 “저작권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고 공공연히 떠든다. 이건 아예 게임의 룰이 다른 거다. 슬로우뉴스는 타인의 콘텐츠를 철저히 무시하는 그런 반칙은 하지 말자, 누군가 처음 콘텐츠를 만든 이의 땀과 눈물, 슬픔과 기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짓은 하지 말자, 다짐한다. 

 

    ㅍㅍㅅㅅ는 어떤가? 그곳도 페이스북에서 자주 공유되는 미디어인데?
ㅍㅍㅅㅅ는 슬로우뉴스에서 독립한 미디어인데 최소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많이 생산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허핑턴포스트는 도둑질과 창작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중이다.

    

참여사회 2015년 6월호

아무리 온라인 매체라지만, 그런 콘텐츠 도둑질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더니,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의 미디어판이나 다름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더군다나 이들 뉴미디어는 정치, 경제, 사회는 구색 맞추기로나 다룰 뿐, 대부분의 에디팅(리포팅이 아니다!) 노력을 특이한 동식물, 동성애나 섹스, 연애 등에 쏟아붓는다. 아, 낚시질은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피키캐스트는 구글 뉴스스탠드 다운로드 1,000만을 기록했다고 한다.

 

고양이 사진으로 도배된 그런 뉴미디어 콘텐츠의 주된 소비층이 젊은이들일 것 같아 염려스럽다. 젊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콘텐츠 고민도 좀 듣고 싶다.
20대, 30대가 슬로우뉴스의 주력 독자층이다. 40대는 그 다음이다. 아주 젊다. 무리 속에서 잘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다. “뇌가 섹시한 사람”, 어떤가? 우린 그걸로 어필하고 싶다. 지적으로 풍성한 사람이 성적으로도 매력적일 확률이 높다. 
스마트폰 발명 이후 콘텐츠 소비의 실시간성이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과거를 반추하고 회고, 성찰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미디어적으로 그렇고, 산업적으로 기술적으로 그렇다. 애플은 “전화기를 새로 만들었다”고 자평하지만, 그걸 넘어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조건을 만들었다고까지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시스템의 진화가 인간의 진보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낳는 암울한 묵시록을 얼마나 많이 보았나. <터미네이터>,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를 보라. 우리가 사랑하는 테크놀로지, 우리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피키캐스트가 우리를 좀 더 하찮은 문명 속에서 살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손바닥 위의 스마트폰으로 세계와 실시간 접속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착각이다. 대단히 큰 착각이다. 

 

    자칫하면 뉴미디어가 뉴 디스토피아를 낳을 수도 있는 시대라는 진단인데, 이런 시대에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일까?
슬로우뉴스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웃음) 좀 느리더라도 책임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 저널리즘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위해 당파성을 지워야 한다고들 하는데, 당사자로서의 솔직하고 진정한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서라면 난 차라리 객관성을 포기하겠다. 직접 체험한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의 가슴속에 담긴 뜨거운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불편부당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껍데기 객관성 아래에서는 그 어느 주관적 평가보다 더 편파적인 행태를 보이는 걸 오늘날의 조선일보가, 또 그 반대편의 한겨레가 잘 보여주지 않는가. 객관성이 그 공동체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다시 질문하는 게 미디어다. 어떤 게 객관적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저널리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의 문제요, 선택의 문제다.

 

참여사회 2015년 6월호

정리한 이야기보다 정리하지 못한 얘깃거리가 더 많은 인터뷰도 참 오랜만이다. 우리나라 뉴미디어 스타트업의 롤모델이 된 버즈피드 이야기, 아리아나 허핑턴이 블로거들 삥 뜯은 이야기, 언론비평권력을 어떻게 만들어낼지에 대한 고민, 일본 산리즈카 마을의 투쟁과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즈카 다큐 7부작 이야기, 타이레놀 탐사취재로 대박을 낸 프로퍼블리카 이야기, 프로퍼블리카 같은 대규모 투자를 받는다면 “일본의 포르노 산업을 이율배반적인 동방예의지국 출신 한국인의 관점에서” 집중 탐사취재를 해보고 싶다는 본인의 핑크빛 포부까지. 

민노씨의 말들 중 특히 깊은 공감을 자아낸 말이 있다. “지금 모든 미디어 현상의 배후에는 혹독한 노동, 혹독한 일상이 도사리고 있다.” 인터뷰 내내 민노씨는 뉴미디어 전문가의 풍모를 풍겼다. 그런데 새로운 미디어 현상에 대한 그의 개탄과 염려, 기대와 포부는 모두 어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혹독한 노동에 내몰려 여유가 없는 사람들. 혹독한 학습노동에 내몰려 여유가 없는 학생들. 혹독한 일상에 내몰려 멍 때리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트래픽 늘리기와 속보 경쟁의 시대에 공공연히 느림을 표방한 민노씨의 뉴미디어도 그만큼이나 그 사람들을 향해 있다. 느릿느릿, 진지하게, 지지리 궁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