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원도 화실로 들어오는 길에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1년 중 시월이 맘 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은 나무다. 천 년을 살아온 이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나는 이 나무 앞에 서서 두 손 모아 묵시로 노래 했다.

 

천년 나무 앞에서.

오전 내내 내린 비에도 안 떨어지네.

노랑 은행잎은 비바람에 지지도 않고

자기 때를 맞추어 지게 하려나 보다.

천년이 가도 의연한 은행나무여.

귀귀형용한 가지들마다 세월 비바람 사연들 다

받아 새기며 하늘 향해 두 팔 벌리니

나는 마침내 시월 상달에 대지신의 빛을 보았다.

노란빛으로 맞이하는 천신의례를 하노라.

여기 강원도 초입 문막의 신목은 따로 없구나.

반계리 천년 은행나무가 우주목이고 당산목 일세.

두 손 저절로 모아 모시나니

천년을 더 사시며 이 땅을 빛내소서.

자랑스런 새나라 새 땅 새사람 중원에서 빛나소서

칼럼_181102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 수령 1000년은 족히 되었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더욱 장관을 이룬다. 나무 높이 40미터, 둘레가 열명의 사람들이 팔을 벌려서야 겨우 잡힌다.

 천 년이 지나도 싱싱한 나무로 살아있는 반계리 은행나무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이 천 년을 넘게 살면 경이롭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천 년을 내려온 사실에 대해선 눈길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당장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시대에 살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겨레는 천년을 넘게 이어온 문화가 많다.  장맛 발효음식, 온돌, 옹기, 금관, 굿, 풍물, 탈춤, 상두소리, 국악, 고구려 붓그림, 민화, 단오굿, 마을신화, 농요….. .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나열은 그만하고 천년의 무형문화가 우리 겨레의 뿌리문화가 되어 오늘의 현대 한국대중문화까지 영향을 주는 사실만은 확인하고 싶다. 우리겨레의 뿌리문화를 한마디로 특징을 말할 순 없지만 대체로 영성이 깊고, 신명이 나고, 한의 정서가 깃들고, 정이 많은 모성적 문화란 점은 그 동안 한국학에서 누누이 밝혀온 것들이다. 이런 문화를 한국의 심층문화라고 부른다. 전통문화는 시련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풍진 속 초탈’로 다져져 왔다.

 

이 심층문화는 아직도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인 교육제도로 정착되지도 않고 헝클어진 채로 있다. 최근에 와서 민족문화 중흥이라는 헌법정신 차원에서 일부가 우대 보존되는 것 같지만 편의적인 발상으로 선별된다. 만일 정상적인 문화강국의 정책이 일관성 있게 펼쳐진다면 한국문화의 세계화니 한류니 민족문화 수립이니 하는 것들에 장기적 계획과 비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심층문화는 홀대 당하여 비주류문화로 갇혀 있다. 그나마 심층문화를 창조력으로 끌어 올리는 민간인들 덕분에 한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한 복판에 예술인들과 전통장인들이 있다. 오늘은 한류의 성공적 사례로 꼽히는 BTS(방탄 소년단)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BTS는 한류문화의 세계진출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로 꼽힌다. 유튜브 하루 조회수만도 4500만명이라는 신기록을 만들었고 미국 빌보드 챠트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그들의 공연을 보러 수천명의 미국민들(주로 소녀들)이 며칠씩 탠트를 치고 4회 연속 8만명을 관람을 기록하며 트유터 팔로워 16000, 유투브 조회수18000를 기록할 정도다. 그 의 노래는 이제 유럽 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이건 일본 중국 노래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회에서 이제는 서구유럽의 주류음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틀즈의 팝음악이 서구유럽의 음악문화를 바꾼 것과 맘먹는 성공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비 영미권 음악이, 가사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노래로 서방 주류 음악방송을 타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인가? 그 이유를 찬찬히 찾아보자.

 

  1. BTS는 주류 언론과 방송 루트를 타지 못했다. 한국3대 메이저 음반회사에 끼어야 겨우 세계로 진출하는 구조인데 돈도 없는 방탄소년단은 유튜브를 활용했다.
  2. 유튜브에 팬덤을 형성하였다. 이는 열성팬들 인데 주로 세계 곳곳의 소녀들이다. 유튜브 조회 하루 사이에 4500만명을 조사해 보니 세계 곳곳에 골고루 널리 퍼져 있다. 주류 방송 체널을 무시하고 SNS로 일대일 소통을 하는 미디어로 꾸준히 영향을 넓혀 마침내 세계적인 주류음악을 창조했다.
  3. 음악적으로는 사우스 아프리칸 비트 음악 위로, 국악 장단과 탈춤과 추임새가 곁들고 트랩 구룹의 랩을 최신 유행의 EDM 리듬 소스가 받쳐준다. 아프리카 댄스 구아라구아라와 한국 춤이 섞이고 사바나와 북청사자놀이 이미지, 서브 컬쳐 그래픽 효과와 유라시아 건축과 한국건축양식이 섞여 백 이미지로 작동한다.- 방탄소년단 앨범 소개 글에서.
  4. 이 열성팬은 아미(ARMY)라고 명명하고 방탄소년단 측이 직접 소통하고 관리하며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댓 글로 반응 해주고 콘서트장에 초대장도 보내주고 생일 축하해 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 팬들과 소통을 한다.
  5. 아미들은 스스로 고립을 벗어나 스스로 동아리들을 구성하고 끼리끼리 이벤트를 만들어 BTS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음악 행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행동도 취한다. 이제는 세계시민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영상음악이 되었다.
  6. BTS는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가 춤과 영상과 어울려서 종합예술을 만든다. BTS 뒤에는 스텝의 협업이 돋보인다. 작사 작곡 영상제작 안무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는 데 가사가 특히 십대 소녀 소년들의 갈망에 부응한다. 영상은 환상적이며 칼춤이라고 할 정도로 집단적 카르스마와 리비도로 넘쳐난다.
  7. 서구인들의 반응들을 보자. BTS영상을 보면서 “걸리쉬하다, 뱀파이어다, 이런 집단무용은 처음 본다, 하나의 잘 짜여진 축제 같다, 축제기념 송 부르는 거 같다. 여러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 전자목소리와 진짜목소리가 혼재해, 라이브로 보고 싶다, 흰 호랑이와 불과 물과 폭풍과 모래 등 신화적 상징들을 영상에 잘 사용 한다, 나를 슬프게 하는 뭐가 있다”  갇힌 공간 속에서 웅크림과 거절의 몸부림, 절망을 넘어 해방의 몸짓들이 춤이 되고 이미지로 흐른다. 물론 랩과 힙합과 아프리카 토속춤과 탈춤이 혼재되어 있다. BTS의 미학은 동서고금의 축제미학이 화려하게 섞여 있으나 자기들이 주장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한 축제로 젊은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8. BTS는 “저는 여러분의 희망이고 여러분은 저의 희망입니다.” 팬들과 늘 일체감을 강조한다. 세계의 젊은 소녀들의 현실과 미래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파고 든다. 젊은이들은 BTS를 보고 ‘나를 슬프게 하는 뭐가 있어서’ 그들 스스로 뭔가를 찾게 한다. 그것은 기성사회와 다른 심리적 전선을 치게 한다. 억압으로부터의 초월, 억압의 초월이다. 전자는 역사적 혁명이고 후자는 예술적 해방감이다. 미래에 ‘역사적 혁명’으로 진화 할지는 미지수 지만 ‘촛불혁명’이 필경 배경일 것이다.
  9. 동아시아3국의 다른 나라 청년들과 다르게 자유와 해방의 몸짓이 격렬하며 어딘지 슬픔과 격조(유럽 청년의 표현에 의하면 매너)가 느껴진다. 서구유럽 청년들이 유독 동양 삼국 중에서 한국의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1세기 불확실성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미래가 막막한 세계의 청년들에게 세계의 정치 경제 체제는 아무런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랑도 불안하고 더군다나 청년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 매우 불안한 시대이다. 한국 사회만 삼포세대니 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불안한 미래는 세계사적 현상일 것이다. 여기에 젊은 예술가들이 빛을 밝힌 것이다. 세계청년들에게 심리적 위로가 되는 가사와 희망의 노래와 초월적 이미지로 K-pop의 새 경지를 보여준다. 프랑스 미국 라이브 공연에서 아미들이 보여준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보여준 모습은 눈물이었다. 이 눈물의 의미는 후회와 성찰의 눈물로 보인다.

 주류사회에 방해 받지 않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SNS를 수단으로 해서 세계의 젊은이와 직접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한국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국가 경계를 너머 젊은 상상력으로 모이고 예술로 형상하여 가상적 현실을 이룬다. BTS의 가상현실- 유비코터스는 젊은이들의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청년들 스스로 만들어온 유비코터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20년전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주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으나, 이제는 발달된 SNS로 국경을 너머 세계의 젊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젊은 슬픔’을 극복하려는 힘이 결집하고 있다. 국가와 기성사회의 체제와 이념으로도 못 말리는 젊은이들의 신세계를 찾는 신성한 힘이 느껴진다.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현대신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신화학을 집대성한 신화학의 거장 조셉 켐밸은 무수한 저서를 남겼다. 하루는 제자가 “선생님, 선생님은 신화 이야기를 책으로 많이 쓰셨는데, 신화란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요?” 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신화는 신성한 힘입니다.”

 

 이 답변을 주목한다. 신화학은 20세기 인문학을 다시 종합 정리하는 21세기 인문학으로 포스트인문학이다. 20세기 인문학이 주제별로 쪼개고 쪼개서 분할 시키고 나니 인간, 자연, 우주의 유기체적 관계를 망실한 인간 중심적 학문이 되었다. 그것도 엘리트들의 아카데미즘으로 박사들만 양산시키며 세상을 하나로 보는 관점을 잃은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만연시켰다. 모든 인문학을 융합한 신화학에 와서 이 이기적 인간중심주의가 깨지기 시작한다. 선사시대 신화를 독해해봐도 그렇고 오늘날에 와서도 신화는 살아 있다. ‘신화는 신성한 힘이다’라고 한 것은 신화가 단지 과거 옛 이야기만 아니고 지금 내 안에도 있는 이야기다. 신성한 이야기라 할 적에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지만 신화, 의례, 예술, 행위로 들어나는 신성한 힘을 다 뜻한다.

 

조셉 켐밸은 이어서 말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행위야말로 신화다.” 오늘의 과학과 인문학으로 풀리지 않는 신성한 힘의 기적 같은 일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과 나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말하는 기적과 영성은 무엇인가. 물론 이것들은 고대 신화시대부터 진화하며 각 지역의 큰 종교로 변화하며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종교가 신성한 힘을 독점하면 할수록 그 ‘신성한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자연과 인류의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신화적 현상을 종교가 철기시대 빅갓(Big God)시대를 지나면서 지배적 독점을 한 결과 배타적 도그마 현상을 갖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한 짝을 이루어 제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종교적 도그마는 해체되지 않는다. 아마 국가주의와 운명을 같이 할 때까지 ‘그들만의 종교’가 된다. 그래서 신화학적 관점으로 보면 오늘의 문화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들만의 신화를 갖고 사는 사람, 신화를 버린 유물주의자, 신화를 잊고 사는 세속주의자, 다시 신화를 갖는 자. 즉 재신화적 인간으로 분류한다. 그렇다. 재신화적 인간형은 배타적이고 유일신화적 종교적 도그마를 벗어나 내 안에 신성도 살리고 우주적 신성도 모시는 문화다원주의에서 산다.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탈국가주의적 평화시민의 문화다. 인류가 창조한 ‘유일한 믿음의 신은 없다,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다양한 신화(원형문화)가 있을 뿐이다. 인류는 다양한 신화를 창조했듯이 저마다 스스로 신화를 창조한다.

 

 미래의 인간형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Love Yourself, Love Myself”에 기초하는 인간형 사회일 것이다. 20세기 산업사회에 개개인을 도구로 사용했다. 그런 인간형을 기르기 위해 경쟁력 교육을 시켰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노래해도 모자랄 판에 자학과 열등의식에 젖게 하는 성적순위 교육, 산업 일꾼 교육, 애국교육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긍정하며 오직 나에게서 만이 희망이 있다. 희망은 나에게서 발견하고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거기서 신화를 창조한다. 신화창조는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자기 원형 에너지로부터 만들어진다. 신성한 힘을 벗겨버리고 거대한 신의 한낱 피조물이고 국가와 사회의 모범이 되는 시민이 되는 것을 젊은이들은 거부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BTS가 국가를 너머 서구사회까지 진출해서 당당히 세계주류가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세계 젊음의 반란은 과거처럼 이데올로기에 맹종하는 혁명의 전사가 아니라 ‘문화 아미’가 되어가는 것이고 자기들의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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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서울공원에서 열린 강명구 유라시아평화마라톤 환영문화제, 2018년 4월17일 유라시아의 절반을 달려온 강명구 마라토너를 환영하는 소년소녀들이 김봉준 작가와 타슈켄트 시민이 제작한 평화그림 깃발을 들고 환영하고 있다. 이곳 중앙아시아도 K-pop과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많다.

그렇다면 “종교가 한계를 들어 낸 오늘날 신화를 주력은 누구입니까?” 라는 물음에 조셉 켐밸은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예술가입니다.”

 왜 그런지는 이 글에서 상세히 말하지 않으리라.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예술가란 무엇인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만 언급한다면 20세기가 이기적 인간중심주의 인본주의 시대였다면21세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다원주의시대로 간다. 감성과 영성이 리드하는 시대가 분명하다. 나의 행복은 내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된 다는 시민적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원주의다. 세계의 젊은이들 중심으로 반란은 시작되었다. 그 젊은 마음들 속에 BTS가 잠시 꽂힌 것뿐이다. 이 거대한 세계청년의 문화반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사냥하면서 유비코터스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딘가 현실공간에서 청년의 창조도시라도 만들 것인가.

 20세기 기성사회가 스스로 개혁하는 힘은 상실한 것 같다. ‘거짓 사랑’에 염증을 느낀 21세기 소년소녀들이 문화반란으로 꿈꾸는 ‘행복한 세상’을 목도하는 세상까지 왔다. 그러나 이런 가상현실적 현상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촛불혁명도 다르지 않다. 시민이 꿈꾸고 이루려는 유비코터스 같은 현장을 한겨울 맛본 것이고 도로 20세기 국가주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며 적폐청산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역사는 점진적 개혁’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이렇게 휩쓸고 한 세대를 걸친 문화전쟁을 세계는 열풍처럼 볼 것이다. 나는 기성세대에 별로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렇게 되어 먹으며 살라왔고, 거기다 집을 짓고 시스템을 만들어 살아왔다. 청년의 반란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신화를 잃어 버렸다. 자기를 창조한 신성한 힘을 버린 채 굳어졌다.

젊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무조건 젊음만이 희망은 아니다. 저 천년의 은행나무 앞에서 비손으로 빌었다. 젊음이 보이지 않는 오랜 미래를 볼 적에, 예술에 그치지 않고 가상공간을 너머 현실공간에 초월적 상상이 창조도시로 뿌리를 내릴 적에 천년의 나무처럼 인류 미래의 희망의 싹이 나기를 빌었다. BTS 는 보여주고 있는 세계 청년문화는 집단무의식이 의식화하는 영성이 깊고, 일상을 축제화하는 신명이 나고, 한의 정서가 깃들어 있지만 슬픔을 이기고 나가는 매너 있는 젊음이 있고, 자유와 평화를 몸짓으로 외치며, 정이 많은 모성문화란 점들은 분명히 보인다. 신세계 청년문화의 비젼이 보인다.  BTS는 시련의 역사 속에서 ‘풍진 속 초탈’한 세계인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