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등이 지원하는 동남아 국제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옆의 외국 단체는 모두 사업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 토론을 많이 하는데 한국 팀들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 쓰기에 바쁘다고 한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소에 관계하는 교수들은 한국 정부의 연구지원비를 받으려면 보고할 것이 너무 많아 짜증나서 다시는 지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 정부가 발주하는 각종 공모 사업을 하다 보면 지나치게 까다로운 영수증 처리 작업에 질릴 정도다. 마치 “너희는 돈을 떼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구차한 돈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난 몇달 동안 한국의 모든 대학의 대학평가 담당 교수들은 교육부에 제출할 서류 준비에 날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그들을 더 힘 빠지게 만든 것은 점수 0.1점을 올리기 위한 각종 그럴듯한 ‘말 만들기’ 작업이었다. 그 알량한 정부 지원금에 목을 맨 대학의 슬픈 풍경이다. 그렇게 해서 지원을 받게 된 대학과 탈락한 대학의 교육 성취가 실제 크게 다를까? 그래서 지원을 독식한 대학들이 정말 한국 대학교육을 선도하고 있을까?

‘진보’ 교육감이 들어서고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당국에 제출할 각종 보고사항 처리나 지원비 따내는 일에 머리를 맞대느라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여전히 수업과 학생지도를 뒷전으로 돌려야 한다. 교사들 사이에서 교육문제를 토론하는 일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교육부는 교사를 평가하고, 교사는 학교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 학생의 모든 활동을 평가한다. 지금 학생들은 평가받으러 학교에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두 번의 평가 결과에 따라 개인과 조직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회에서 평가자는 수치화된 점수나 등급 매기기 시험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는 졸업장을 자격증으로 인정하자는 로스쿨 변호사 양성 제도도 결국 시험 제도로 퇴행했고, 시험을 거쳐 입사하지 않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는 공기업 정규직 청년들의 분노가 거세다.

예산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예산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할 것이다. 수량화된 점수로 등급을 매기지 않고서는 이해 당사자들이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정, 절차가 해당 조직의 미래와 존립의 이상을 압도하면 자발성과 창의성의 싹은 아예 자랄 수도 없을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은 관료적 형식주의와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의 논리가 완벽하게 결합하여 성과 평가의 큰 칼이 모든 학교, 정부, 공기업의 문화를 지배하는 ‘평가국가’가 되었다. 평가 절차가 빈번하고 평가 방식이 더 정교해질수록 평가자 즉 관료의 권력은 더 커지고, 평가받는 쪽은 더 무력화되며, 그들의 온 삶은 피폐해진다.

물론 평가권력의 창궐은 사회의 도덕적 진공 상태와 맞물려 있다. 한국에서 시험 성적, 정량평가 방식이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그것 외에는 믿을 만한 사회정치적 권위체나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 사법부 등에 대한 신뢰 수준이 언제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불신사회에서 평가권력의 힘은 더 커진다. 특히 시민사회의 자정능력이 약하고 전문가 집단의 직업윤리가 없다는 것이 큰 원인이다. 직업집단 자체의 이상과 성취의 기준이 없으니 평가권력이 개입해서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생긴다.

평가 만능주의는 구시대의 자의적 권력행사보다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합리’의 이름으로 ‘비합리’를 은폐할 수 있다. ‘기회의 평등’ 없이 ‘과정의 공정’은 허구적인 것이다. ‘실적’을 말하기 전에 그 실적이 무엇에 쓰기 위한 것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단기적 실적’, ‘성과’, ‘경쟁력’을 내세우는 평가권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바로 ‘평가권력’을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과 사회적 권위가 필요하고, 재벌과 경제관료들 간의 오랜 공생관계를 끊을 수 있는 사회정치적 대항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정작 평가받아야 할 집단, 세력, 세대는 평가의 무풍지대에 있고, 평가와 무관하게 꿈과 실력을 키워야 할 사람들은 매일 지독한 평가의 칼날 위에 있다는 점이다.

학생과 청년들을 ‘평가권력’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자.

원문보기: 한겨레 김동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