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재용이었고, 비서실장은 장충기였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들러리처럼 보였다.”
최근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내용을 보도한 <시사IN>에 따르면, 국정농단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수사 과정에서 나온 이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못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청와대와 국정원의 고위 관계자는 실시간으로 장 전 사장에게 내부 정보를 보고한다. 대법관 후보자로 추정되는 인사는 계속해서 자기 상황을 보고하면서 삼성의 눈치를 본다.
전직 검찰총장은 삼성에 근무하는 사위의 인사를 청탁한다. 언론인들은 떨어지는 떡고물 하나 없을까 하고 연신 굽신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장 전 사장이 대체 어떤 인물이었길래 그의 주변에서 쉴 새 없이 정보가 드나들고 검은 청탁이 오가며 때론 쉬파리까지 들끓었을까. 그는 삼성에서 정보 및 대관(對官)업무를 총괄해 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대관 업무란 정부나 국회 관계자들을 만나서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때론 로비활동까지도 벌이는 업무를 말한다. 그의 삶을 추적하다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은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삼성의 제갈량’으로 불린 기획통
‘삼성 기획통의 삶 그 자체’로 불리는 장충기 사장은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부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이 부산고 동기로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다. 부산고 후배로는 역시 삼성 내에서 전략통으로 꼽히는 윤순봉 전 삼성서울병원 사장이 있다.
서울대 무역학과 동문으로는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 박상진 삼성SDI 사장 등이 있다.
최지성 전 실장은 직장생활도 장 전 사장과 삼성물산에서 출발했고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우연히도 두 사람 모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함께 기소된 처지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우연히 서울 종암동의 같은 하숙집에서 살며 친구가 됐다고 한다. 하숙집에서 그는 ‘부산고 천재’로 불렸다.
홍준표 대표는 “고2 때까지 반에서 48등을 하다 고3 때 ‘서울대 상대에 가야겠다’고 선언하더니 몇 개월 만에 성적을 최상위권으로 올렸고, 정말로 서울대 상대에 갔다. 당시 충기는 정말 머리가 비상했다”고 회상한다.
1978년에 삼성물산에 입사하면서 삼성그룹에 첫발을 내딛는다. 삼성에 ‘기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생긴 것이 그 해 입사한 19기라고 한다. 훗날 이들은 임원급만 70여명을 배출할 정도로 잘 나갔다.
장 전 사장은 삼성물산에서 전자2과, 일반상품과, 완구팀 등을 거쳤다.
기획통으로서 발돋움한 것은 1993년이었다. 그해 삼성물산은 전략경영팀을 신설하고 경영 효율 극대화를 위한 ‘2000년 장기 비전’ 수립을 맡긴다. 신설된 이 전략경영팀의 팀장을 맡은 인물이 장 전 사장이었다.
그 후 장 전 사장은 1995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홍보팀 기획담당 이사보로 자리를 옮긴다. 삼성그룹 총수체제의 핵심이자 컨트롤 타워에 진입한 것이다.
1959년 이병철 회장 시절 출발한 삼성그룹 비서실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구조조정본부로, X파일 사건이 불거진 2006년 전략기획실로 간판을 바꿔달기도 하고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이후 잠시 해체되기도 했지만 이내 2010년 미래전략실로 부활한다.
장 전 사장은 비서실을 거쳐 구조조정본부 기획팀장, 전략기획실 기획홍보팀장을 지냈고 해체 시기에는 브랜드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가 다시 부활한 미래전략실의 커뮤니케이션팀장을 맡았다. 20년이 넘도록 그룹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셈이다.
최근까지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의 바로 아래인 미래전략실 차장으로, 이른바 ‘실차장’으로 불리면서 그룹 내 3인자로 꼽혔다. 장 전 사장은 임원 승진 이후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았을 정도로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미래전략실의 기능은 재무와 경영진단·지원, 기획홍보, 인사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삼성전자 사장단도 크게 COO(전략·기획) 출신, CMO(마케팅) 출신, CFO(재무) 출신, CTO(R&D) 출신 등 4개 파트로 나눠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장 전 사장은 전통적으로 기획 파트를 맡았고, COO형 인사로 분류된다.
여기서 ‘기획’이란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듯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투자를 조정하고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일까. 그런 업무들은 미래전략실 내에 경영과 재무 파트에서 담당한다.
삼성에서의 ‘기획’ 업무란 사주 일가의 그룹 지배력을 유지하는 업무를 말한다. 이때 주가 되는 것이 바로 대관업무를 비롯한 대외 협력 업무다.
기획홍보라는 이름으로 같은 파트에 있어도 홍보가 ‘양지’의 커뮤니케이션을 맡는다면, 기획 파트는 ‘음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다.
예전 삼성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사실 기획 파트에서 하는 일은 웬만한 고위급 인사들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보안 수위가 높다”고 말했다.
따라서 기획 파트는 X파일 사건, 비자금과 편법 승계 등과 같이 삼성이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업무들을 음지에서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동원하고 필요하면 로비까지 불사하는 것이다.
이건희 인물…이재용 체제에서도 건재
장 전 사장은 ‘삼성의 제갈량’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 신년사를 대신 쓰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룹 내 기획과 정보수집, 분석 등의 업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 전 사장은 이건희 체제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이재용 체제로 넘어와서도 여전히 건재했다. 전략기획실이 해체돼 삼성물산 보좌역으로 물러나야 했던 시기에도 그는 계속해서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만큼 삼성 입장에서는 ‘쓰임새’가 컸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일을 소신껏 밀어붙이지만 꼼꼼하게 일처리를 한다는 의미의 ‘불도저와 돌다리’라는 독특한 별명 역시 의미심장하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의 로비를 담당한 핵심 임원 30여명의 명단을 특검팀에 제출했다. 그 중 국회 등 정치권과 금융감독원 로비를 맡은 인물로 올라와 있던 것이 장 전 사장이었다. 그는 이 일로 특검 수사에 불려가기도 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자산 중 상당부분이 임직원 명의의 차명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그 명의를 빌려준 사람 중 한 명이 장 전 사장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2007년 임채진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에는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임 총장 후보자와 장 전 사장이 함께 자주 골프를 쳤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삼성에버랜드가 소유하고 있는 베네스트 골프장은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로비가 주로 이루어졌던 장소라고 지목했던 곳이다. 장 전 사장의 부산고 1년 선배인 임 전 총장은 사위의 인사를 부탁한 문자메시지에서도 알 수 있듯 계속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 비자금 사건 이후 물러났던 이건희 회장이 다시 일선에 복귀한 뒤 삼성 서초사옥에 본격 출근하면서 한 일은 바로 장 전 사장을 미래전략실 차장에 임명한 것이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이 본격적으로 ‘몸을 푸는’ 신호탄처럼 해석됐다.
장 전 사장이 최지성 실장과 함께 ‘현명관-이학수’, ‘이학수-김인주’ 등로 대표되는 삼성의 실·차장 라인 핵심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안팎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한 실무적 토대를 제공할 인물로 장 전 사장을 꼽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에도 여러차례 교체설이 나돌았지만 그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런 장 전 사장이 왜 휴대전화를 순순히 특검에 압수당했는지, 또 문자메시지를 삭제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대관 업무의 핵심으로서 휴대전화만 7~8개를 가동했을 법도 한데 그는 어떤 연유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심정이었을까.
그는 법정에서 “10년 넘게 한 번호만 썼고 다른 휴대전화는 없다”며 “이 사건과 관련해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문자메시지가 논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숨길 게 없었다’는 태도다.
삼성공화국의 민낯
박영수 특별검사는 지난 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함께 기소된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전 차장,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경영권 승계의 편의를 봐 주는 대가로 계열사 자금을 횡령해 300억 원대의 뇌물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 전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 최지성 미래전략실장과 함께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장 전 사장은 특검 수사 이전 국회 국정조사에서도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여야 간사 간 협의에서 빠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삼성의 로비력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그 만큼 핵심 인물로 꼽혔고, 또 삼성 입장에서도 보호해야 할 인물이었던 셈이다.
미래전략실의 최고 우두머리는 최지성 부회장이지만, 사실상 대관 업무를 총괄하면서 실질적으로 외부 인사를 접촉하고 일을 만들어나간 것은 장 전 사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장 전 사장은 삼성의 청와대 창구를 맡아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여러 차례 접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장 전 사장의 문자메시지는 ‘뇌물 재판’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삼성의 뇌물 대가성 여부를 더욱 확실히 굳혀주는 증거로 채택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변호인 측 주장처럼 “대관업무를 하는 사람에게 여러 사람의 문자가 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 전 사장의 문자메시지가 삼성 X파일 녹취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이어 ‘삼성공화국’의 민낯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으로 매김할 것이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