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젊은 사람들은 이전 세대가 환경에 대해 너무나 무심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결정권을 쥔 사람들의 이러한 무관심이 변화에 인색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위한 장기적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항상 북극곰이라든가 빙하와 같은, 일상생활과의 접점이 거의 없는 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자료가 하는 일이라곤 환경문제가 일상적 실천이 아니라 국가의 녹을 먹는 전문가들의 몫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덧붙이자면 그저 그들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다고 할까.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특정한 문건에 합의하고 사인하는 일이 환경을 나아지게 하리라 믿음으로 유인되거나, 그린피스가 뭔가 기여할 것이라거나, 부유한 자들 혹은 고위공직자들이 뭔가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으로 유인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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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snacker.hankyung.com/)

환경보호, 북극곰 살리는게 다 아니다

반면 일상생활에서 환경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식의 실질적인 정보는 거의 접하기 어렵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교수나 고위공직자들은 이미 스스로 실천하기를 관두고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전달하며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고위교육기관에서 전달하는 많은 지식에 만일 윤리적 결단이나 구체적 실천지침 따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심장이 뛰지 않고 폐가 숨을 쉬지 않는 신체에 단지 피가 흐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윤리성 없는 그러한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죽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자주 관찰되는 교육의 모습은, 교육이 교육이 아닌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다는 뚜렷한 징후이며, 엔터테인먼트는 중대한 이슈로부터 공공의 관심을 흩어놓는 데 집중한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폭증이나 사막화, 수질오염, 해양생태계 문제, 농업위기와 대기오염 등의 문제는, 그 개선을 위한 모든 단계에서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보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너무나 경직되어 있고 진정 필요한 일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으며, 국제단체는 진정으로 필요한 일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일조차도 외면한다.

그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후대의 안위에 대한 고려는 거의 하지 않은 채 환경을 소비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갖는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실천이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실천이다. 그 실천을 위해 굳이 앨 고어의 기후정책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할 뿐이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환경보호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행복의 열쇠는 자유에, 자유의 열쇠는 용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가 뜻한 바는, 근사한 식당에서 값비싼 식사를 즐긴다든가 좋은 차를 끌고 다닌다든가 하는 바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건, 무언가를 소비하는 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든다면 행복과는 계속 멀어지기만 한다.

인간은 그럴 땐 스스로 뭔가 나아진다는 감각을 얻고자 끊임없이 변죽을 울리며 강박적으로 거기에 매달릴 뿐더러,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도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대개는 광고 등의 미디어로 주입된 관념을 받아들이거나, 주변인들이 자신에게 주입시키도록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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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sig.kr/)

이런 상태에서 행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무언가를 알아내어 스스로 판단하려 할 때, 설령 아무것도 가진 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동시에, 값비싼 식사를 하거나 크고 좋은 집에서 사는 등의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값비싼 음식을 소비한다든가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든가 하는 생활이 환경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대가임을 안다면 양심에 따라 그런 생활을 쉬 청산할 수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일상생활에서 환경을 위해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로.  

어떤 것들은 간단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아울러 이와 관련하여 당신이 내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의제도 제안할 것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항상 귀를 기울이지야 않겠지만, 당신과 주변 동료들이 변화를 위해 함께하고, 용기를 갖고 그런 태도를 고수한다면 변화를 위한 힘을 형성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 착목하여 주변의 친구들, 부모, 이웃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마트에 가면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린다. 물론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스럽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계속한다면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할 수 있다.

당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이를 함께 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현상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때 시민 차원에서의 공적 영역이 발생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일상의 구체적인 장소에서 뭘 해야 하는지조차 희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인식이지만 그만큼 어떤 변화여야 하는지도 뚜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환경보호, 나를 살리는 정신혁명

이것이 결국은, 환경전문가 James Gustave Speth가 일찍이 지적한 대로, 문화운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환경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생물종의 다양성 감소, 생태계의 붕괴, 그리고 기후변화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나는 30년이면 과학이 이런 문제들을 중대하게 다루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건대 정말 중요한 주제는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무관심이고, 환경문제를 위해 필요한 건 문화적/정신적 변화이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서, 당신은 소비문화와의 긴장상태 속에서 씨름해야만 한다.

우리는 환경과 사회를 빠른 속도로 파괴하는 소비문화에 갇혀 있다. 타인을, 환경을 소비해도 좋은 것으로 여길 때, 지금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갖추지 못할 때, 우리는 항상 문제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도 좋다.

필요한 건 소비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소비를 종용하는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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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mischa.tistory.com/)

모든 사람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소비문화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받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협소한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모든 미디어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삶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적어도 소비는 그중 하나가 아니다.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소비주의와 그것이 가져다 줄 폐단을 화제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세미나나 심포지엄과 같은 지식 기반의 활동 혹은 여타 새로운 주체를 세우는 공동체 활동에서 지금의 소비사회가 불러올 위험성을 주제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아래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1) 차선책으로서의 재활용

아마 재활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한 모든 것이 재활용을 위해 수집되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아직은 부족하거니와, 재활용 시설도 미비할뿐더러 재활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도 충분치 않다.

게다가, 트럭으로 실어가는 병이나 캔은 “재활용”이라는 말뜻에 그리 충실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재사용에 쓰이기보다 다른 산업의 생산원료로 가공되고 있다. 재가공된 생산원료가 사용 뒤 어떤 가치 있는 무언가로 변모할 경우가 별로 없다.

그래서 플라스틱 제품은 석유에서 추출하지만, 재가공 과정에서 벽돌이 되기도 하는데 벽돌은 다른 원료로도 생산이 가능하다. 이런 모든 생산 공정은 순환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재활용지의 경우는 매립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재활용지가 애당초 사용되었던 만큼의 몫을 해내진 못한다. 그래서 아예 종이 사용을 가급적 줄이는 편이 낫다.

많은 경우 재활용에는 뚜렷한 제약이 있다. 플라스틱과 같은 제품은, 다른 복잡한 논의를 거칠 필요 없이, 금지되는 편이 맞다. 이런 종류의 제품은 제한적으로만 활용될 수 있는 반면, 그 해악은 그리 제한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애당초 생산 자체를 줄이는 편이 좋은 방안이다.

그러므로 몇 번 쓰고 버려지는 제품의 생산을 규제하는 엄격한 규율과 함께, 오래도록, 적어도 몇 십 년 이상은 사용할 만한 견고한 제품 생산이 필요하다. 생산되는 제품의 원료는 가급적이면 소비되는 지역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면 좋다. 또한 재사용 과정이 까다롭고 어려운 제품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판매 가능하도록 제한할 필요도 있다.

결국 재활용은 윤리적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하게 말해, 자신이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는 일회용품을 사용해선 안되겠지만, 이처럼 높은 윤리적 기준에 모두가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 하나의 사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실천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소비문화에 주변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변화를 위한 하나의 진전이 될 수 있다.

2) 지속성 있는 제품 생산

완전한 재활용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은 지속성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신발과 모자는 20년 이상, 셔츠나 바지는 10년 이상 신고 입을 수 있어야 한다. 탁자, 의자, 자기그릇, 냄비, 펜 등도 디자인이 잘 되고 잘만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한결 오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회용 펜을 불법으로 만들고, 잉크 등을 재사용할 수 있는 펜만 허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근본적으로 두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로 중고시장과 기부문화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옷이나 가구 등의 중고시장은 모든 이들의 수요가 있어야 한다. 이런 중고제품을 구매하는 일은 가난 등으로 인한 수요이기보다 환경을 위한 윤리적 행동이다. 만일 당신이 두 살 난 아이를 두고 있다면, 그 아이는 몇 달 이내로 지금 신는 양말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자랄 것이다.

하지만 아기가 신는 양말은 족히 10년은 유지될 만한 원료로 만들어져야 하고, 아이가 더 이상 신지 못하게 된 양말은 빠른 속도로 중고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체계가 만들어지면 지역민들의 수입에도 도움이 된다.

지속성 있는 제품을 생산할 때 필요한 다른 한 가지라면, 제품의 가치를 20년 정도 줄잡아 매기는 일이다. 신발 한 켤레가 20년 정도 신을 수 있게 만들어졌고 다른 것보다 가격이 비싸다면 소액금융재단을 통해 구매 시에는 합리적 가격을 지불하고, 이후 그 신발을 신는 동안 소액결제로 나머지 금액을 채우는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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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ecotiger.co.kr)

바지 한 벌에 5백 달러 정도 한다면, 처음엔 100달러로 구매한 뒤 15년 간 다달이 2달러씩 할부로 지급하는 식이다. 이런 금융재단의 운용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져야 하고 은행의 이익보다 소비자들이 적정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장기적 안목으로 구매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분실이나 손상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소액보험도 이런 시스템에 필요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우산이나 신발 등을 쉽게 버리곤 하지만, 이건 우산이나 신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우리가 새로운 문화를 일궈낼 수 있다면, 보존을 우선적이고 윤리적으로 보는 새로운 습속과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며, 사람들은 소유물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그것들을 보존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소비의 문화를 넘어 보존의 문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변화는 ‘보수적’이란 어휘에 담긴 정직한 의미를 실천하는 문화를 초래할 것이다.

3) , , 자전거, 가구, 그리고 이외 모든 것들을 수리할 수 있는 체계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음식이나 의약품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생산을 금해야 한다. 이를 위해 주방용품에서 옷, 가구, 자전거, 카메라 등 생산품의 수리와 복구를 위한 분야를 지금의 경제체제에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펜이나 스테이플러 같은 사소한 물건이라도 쉬 수리할 수 있도록 생산공정과 디자인이 바뀌어야 한다. 새로운 제품은 버려져선 안 된다.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한 첫걸음은

첫째, 모든 전자기기와 기계의 작은 부품이 교환 가능하도록 법적으로 보장할 것, 그리고 자전거나 토스터, 컴퓨터, 카메라 등의 모든 부품이 생산한 회사와 관계없이 호환 가 능할 것.

둘째, 집에서 스스로 수리하는 일을 미덕으로 보는 공교육 구축

세째, 수리에 필요한 기술 교육프로그램의 접근성 강화 : 모든 시민이 쉬 접할 수 있도록 한다.

4) 재사용을 위한 기초단위로 분리할 수 없는 제품이라면 팔아선 안 된다

모든 제품은 재사용이 용이하도록 하는 데 생산 공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대여섯 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제품이라면, 반드시 대여섯 개의 부품을 분리하여 각기 재사용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분해가 불가능하다면 그런 물건은 팔지 말아야 한다.

재활용시설은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마련되어야 하고 가능한 물건의 목록과 방안이 상세하고 분명하게 적혀있어야 한다. 컴퓨터 메인보드처럼 복잡하고 재활용하기 어려운 기기들은 재사용 비용을 포함한 세금을 지불한 뒤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시설이 주변에 마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환경친화적 위생방안

마트나 식당, 병원 등 공공장소에 저렴한 비용으로 마련 가능한 환경친화적 위생의 개발도 필요하다.

현재로선 필요 이상으로 랩핑을 하고 냉동하거나 패키징한 음식물 등이 넘쳐나며 이외 의약품이나 다른 제품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위생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많으며, 그럴 수 있는 제품도 그만큼 많다.

물건의 위생을 위해 여러 겹으로 랩을 싸야 한다는 생각은 오해이다. 그릇된 정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정보제공 및 교육활동을 통해 불필요하게 환경을 훼손하는 시장의 습속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랩으로 감싸고 밀봉하고 패키지로 묶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질문 앞에서 정직해져야 한다. 결국, 세균을 막아준다며 안팎으로 화학약품과 플라스틱을 이용해 싸맨 제품이 환경에는 재앙이 되고, 때로는 제품 자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불필요하게 의례적인 자원낭비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원시시대라고 하는 이전 시대로부터 자원을 덜 소비하면서도 적절한 위생방안을 배우는 편이 좋겠다. 아주 적은 양의 물로도 식기를 닦고 샤워를 할 수 있지만, 그런 방안을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6) 나무 한 그루를 베어야 한다면, 나무 세 그루를 심자

전시성으로 행해지는 식수가 전 세계적인 녹지파괴 방지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면서도, 우리는 매번 그런 전시성 행사에 기꺼이 속아준다.

이젠 그런 속임수를 멈추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녹지파괴의 실상을 직시하며, 법적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베었을 때 적어도 한 그루의 나무를 다시 심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쪽에서 1제곱미터의 흙이 빌딩으로 덮이면, 다른 곳에선 꼭 그만큼의 흙이 보존 혹은 확장되어야 한다.

이는 무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네시아나 타일랜드 등지에서 가구 제작을 위해 부유한 국가로 목재를 수출하는 일은 가까운 곳에서 나무를 베어다 쓰는 것보다 더 반윤리적이다.

자연에 위해를 가하는 모든 일은 엄격히 제한되는 동시에, 장기적 안목으로 녹지를 지키기 위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이 목표는 오직 지속적인 실천이 세상의 변화와 맞물리는 방식을 뚜렷하게 인식함으로써만 달성 가능하다. 아직 이 세계엔 나무를 심고 녹지를 조성하여 대기의 탄소량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녹지 조성을 위한 장려책은 미비하다. 사용하지 않는 건물은 과감히 철거하고 녹지로 조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녹지를 훼손하여 그곳에 건물을 새로 세우는 일도 금지해야 한다.

7) 환경지수 (gross domestic environment) 개발

시민사회에서는 정부기구를 향해 환경훼손에 따른 손실을 경제 측면에서 분석한 실질적 지수를 요구해야 한다. 이 지표는 주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 토양오염 등이 만일 정책의 결과이거나 어떤 프로젝트의 결과라면 경제지표상 이는 손실로 계산되어야 한다.

이런 환경지수엔 국내환경지수GDE (gross domestic environment)와 국제환경지수GGE (gross global environment) 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런 지수들이 일정 주기로 갱신되어 시민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이 지수를 기준으로 하여 당장의 이익을 미덕처럼 여기는 정책이나 어떤 실천도 허용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지수는 예일대의 환경평가지수 모델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업그레이드형 지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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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lattepapa.tistory.com/)

국내환경지수와 국제환경지수에는 지역별 지수와 국내 총지수, 그리고 국제 총지수가 모두 포함되어야 하며 단기지수와 장기지수,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지표까지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지수는 신뢰할만한 체계로 구축되어 오늘날 국내총생산과 같은 권위를 지녀야 한다. 현재 우리를 호도하는 그릇된 통계수치, 막대한 환경손상을 손실로 간주하지 않는 까닭에 장기적이고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도움될 것이 없는 경제수치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8) 에너지표시화면 의무화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에너지를 일상적으로 낭비하는지 모른 채 살아간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환경을 어떤 식으로 무너뜨리는지는 고사하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주는 지표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매순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이 얼마이고,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냉장고나 텔레비전, 컴퓨터, 샤워기, 토스터를 비롯한 모든 물건에는 정확한 에너지 소비량, 그 가치를 표기하는 화면이 장착되어야 한다. 모든 공공빌딩에도 빌딩 내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표시되는 전광판이 설치되어야 한다.

물론 전원관리 모니터는 지금도 이용되고 있지만, 이제는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이런 화면표시는 모든 기기에 효율성을 고려하여 장착되어야 한다. 모든 제품의 생산 공정에서 에너지효율은 최우선시 되어야 하며, 에너지효율 표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제품은 생산이 제한되어야 한다.

9) 사람들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다른 이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적으로 그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진 않더라도, 사실 현재로선 어디든 마찬가지로 개인이 자신이 사용하는 기기에 직접 에너지를 만들어 공급하는 장치를 이용하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전력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대안이라면 개인이 직접 필요한 에너지를 소량이라도 생산하고, 서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완전히 개별적이라기보다 이런 시스템은 커뮤니티 단위로 구비하여 모든 이들이 미량이나마 에너지 생산에 참여하고 추후 필요한 전력을 축적해둘 수 있도록 하거나, 혹은 판매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자전거를 두어 시간 타는 정도에는 많지 않은 수입이라도 생긴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이미 하와이에서 실행중이기도 하다.

10) 중산층을 타겟으로 한 환경운동은 넌센스다

사회운동에서 가장 웃지 못 할 희극이라면 아마도 프리우스(도요타 하이브리드 자동차) 운전자들이 환경을 생각한다는 착각일 것이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들 중에서도 고소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전기자동차를 구입하며 자신들이 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유기농 농산물의 경우 연봉 8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 계층에서나 일상적으로 사먹을 수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은 간단히 말해 거의 엽기적이다. 이제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환경운동에서 경제적으로 노동자 계층에 의미 있는 의제를 일궈내지 못한다면, 기껏해야 그런 운동이 불러올 결과란 “일자리 창출을 위해 환경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유산계급의 기만적 담론과 지극히 제한적인 개선 외에는 없다.

이제부터 할 환경운동은 중산층이 아닌 노동자 계층을 주된 고려대상으로 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한 식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며 그들 스스로 환경의 위험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전기자동차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보다 더 저렴해져야 하며 대중교통은 모두가 필요한 최소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녹색성장이 보다 균등한 성장이 될 때 우리는 더욱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 것이다.

높은 교육수준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생각하는 환경문제는 이미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11) 환경문제는 미학의 문제이지, 경제학이나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환경문제가 그릇된 경제모델의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문제는 미학적인 전제와 맞닿아 있다. 탐욕, 무관심, 그리고 통제 불능의 소비문화는 기후변화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배치하는 가치관에 따른 혼동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가 그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는 데 감사할 줄 모르는 천박한 미적 관념에 의해 호도되어 왔다. 이제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전제 하에 실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하는 일이 세상을 파괴한다는 걸 모르는 건, 자신들을 위한 가치와 자신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골과 유리,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 현대적이고 매력적이라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길을 걷다가, 혹은 물웅덩이를 지날 적마다 썩은 식물의 냄새를 맡는다면, 지금 사회가 묵인과 (정신적) 빈곤의 상태로 퇴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매끈한 표면으로 마감된 건물은, 지역의 장인들이 만든 것들이 조악하고 부실해 보이는 반면, 현대적이고 왠지 믿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런 식의 인식과 미적 관념이 어마어마한 낭비를 일으킨다는 데 있다.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소비, 낭비, 사치를 미덕으로 삼는 견고한 미적 관념을 심어주었다.

플라스틱이나 유리로 완벽히 방부처리된 세상, 도무지 멈출 줄 모르고 생태계 파괴를 지속하는 세상보다, 다소간 부식되는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현실이 도래할 것이다.

환경운동에서 주요한 도전과제 중 하나는, 자연과 일상생활을 시답잖은 것으로 여기는 거대자본의 독점적 미적 관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대자본이라든가 자본주의라든가 하는 것들을 문제 삼곤 하지만, 실상 그와 같은 것들은 뒤틀린 미적 관념에 의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습성이나 문화를 바꿀 가능성은 과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성이 제공한다. 인류의 행보가 어디로 갈지를 논의하고 바꾸기 위해 지금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12) 명상 훈련: 관조적 이성의 계발

우리는 단지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자원을 낭비한다. 사그라지지 않고 생산되는 수요에 이끌려, 우리는 집 주위를 배회하며 먹을 필요 없는 것들을 먹고,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는 영화를 보고, 차를 끌고 나가 살 것, 먹을 것, 낭비할 것들을 찾는다.

그러나 책을 읽고 요가를 하며 명상을 하고, 글을 쓰는 일도 분명 가능하며, 앞서 말한 것보다 한결 성취감이 크다. 그런 활동을 하면서는 몇몇 친구들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런 대화의 시간이 서로의 유대감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등을 두고 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별다른 소비 없이 작은 방 안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환경보호를 위한 그 어떤 기술로도 이러한 행동상의 변화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의미 있는 대화에 집중하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삶을 향유할 때 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이런 식의 행동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명상이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지, 충동을 조절하는 방안은 무엇인지 등을 고민하는 숙고가 바로 그것이다. 명상이나 요가 등이 환경문제와는 다른 문제처럼 보이더라도, 이런 식의 생각의 전환이 모든 것을 바꾸는 주춧돌일 수 있다.

모든 시민들이 취학 전부터 이 같은 명상훈련을 접하고, 고요 속에서 자각하는 문화에 젖어들게 한다면 이후 세대는 방 안에 하루종일 앉아서도 평안함과 충족감을 느끼는 그런 문화를 향유하며 살게 될 것이다.

13) 보다 물질론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대개 ‘물질적’이라고 하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언뜻 그것이 오늘날의 지나친 물질문명을 가리키듯 하지만, 실제로 작금의 정신 나간 소비문화는 물질이 지닌 고유의 성질에 착목하지 못하는 탓에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물질 그 자체로부터 멀어지고, 또한 경험의 구체적 면면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마치 모든 것들이 즐거움을 위해 언제든 교환 가능한 것처럼, 가격으로 가치를 결정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양식은 우리를 물질의 참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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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m.wikitree.co.kr/)

어느 쪽이건, 소비문화는 양적 측정이거나 질적 측정을 전제로 한다.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문화의 결과는 더 많이 낭비하면서도 더 적게 즐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얼마나 소비하게 되는지에 맞추어져 있을 뿐,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에 진정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 특성은 무엇인지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물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문화, 나무나 돌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고, 책과 연필 등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문화로 전환을 꾀해야 한다.

단순한 물건이나 간소한 음식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아는 태도는 소비를 자연스럽게 감축시켜줄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주위의 사물, 자연, 물질 등은 오래도록 지속하며 어떤 수준의 소비에서도 얻지 못할 담백한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다.

14)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기후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들과 맞서는 일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주는 막대한 위협 앞에서 행동은 고사하고 그를 인식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그릇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가방 등의 사용을 거부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굶을 각오도 해야 할 만큼 이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전장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용맹과 다른 종류의 용기이지만, 어쩌면 이런 종류의 용기는 훨씬 더 고결한 것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앞을 설 만큼 용기있는 자들은 사실 많다.

그러나 오래도록 가족과 주변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삶의 토대, 그런 제도나 관념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파헤치는 용기를 지닌 이들은 많지 않다.

우리는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그 끔찍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거나 전기제품을 사용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누가 이러한 낭비 앞에서 단호하게 거부를 선언하고 이런 환경파괴에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

바다생태계를 염려하여 해산물을 먹지 않겠다거나, 버스를 타는 대신 걷겠다는 식의 용기는 불편함을 야기하지만, 다른 이들로 하여금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더불어 진실과 마주하길 꺼려하는 사람들의 몰이해, 멸시 등에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용기 중 최상위에 속하는 것은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지 말자고, 음식을 낭비하지 말자고, 환경보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말할 수 있는 태도에 있다.

마트의 운영자에게 가서 에너지와 물품, 음식을 낭비하지 말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꿈꿀 수 있다.

15) 고통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무지에 맞서야 한다

무지, 실체적 진실에 대한 거부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수와 같아서, 매순간 맞서야만 한다.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위협이나 그들의 행동이 후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소한 일로 그런 무지를 이겨냈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항상 실체적 진실을 은폐하는 사고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내곤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어머니는 2월치곤 지나치게 기온이 높다는 점이 분명함에도 날이 춥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심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단 행동하기 전에 기후변화의 실상과 그 끔찍한 결과에 마주하는 일에서부터 용기를 내야 한다. 더불어 이런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주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피력할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위기상황에 얼마간 원인을 제공한다. 크든 작든 우리의 모든 행동은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지만, 애석하게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 삶을 바꾸는 데 적절한 사고훈련이 되어있다.

무지와 자기정당화는 진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만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16) 광고와 미디어가 인과관계를 은폐한다

현대의 문화는 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여러 콘텐츠로 단지 스릴과 충격을 주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작금의 세계는 사유의 부재를 부추긴다. 부분적으로 이는 기술을 오용한 결과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연속적으로 이미지를 보게 되지만, 그런 이미지가 나오게 된 결과를 볼 수는 없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런 몰이해는 자본의 기만적 기획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를 알지 못하고 기후변화에 인류가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물신숭배, 소비문화에서 벗어날 때

어디에서나 우리는 콘크리트와 유리로 자연을 간과하는 인간의 자기숭배 양식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의 거대하고도 뿌리 깊은 구조는 “보라, 이 전능함을! 그리고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소위 선진국의 이미지에서 이런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접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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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

그런 결과 우리는 그 같은 문명이 땅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고, 개인과 개인이 속한 커뮤니티, 그리고 우리 모두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게 되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전적으로 착각이다. 어릴 적부터 자연의 웅숭깊고도 단순한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존중할 줄 아는 교육을 구축하기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작고 간결한 주거형태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치를 찾는 일 역시 그러하다.

나는, 보다 웅장한 건물이 우리의 경험을 확장하고 삶을 종요롭게 만들고, 문명을 완성하게 할 것이라는 그 조악한 생각이 그릇된 숭배의 문화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런 문화적 착각은 지금의 소비문화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전제이지만, 조금씩 그리고 신중하게 바뀌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