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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여성대회 후기] 희망은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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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여성대회 후기] 희망은 연결되고 있다

익명 (미확인) | 월, 2016/03/21- 16:26
[3.8 여성대회 후기]

희망은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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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계여성의 날을 며칠 앞둔 지난 3월 5일 토요일 32번째 한국여성대회의 열기는 악천후를 이겨낼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당일 숨은 주역이었던 여성연합의 스태프들과 자원봉사자들은 행사 사전준비와 행사보조를 원활하게 이끌어가며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확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날 자원활동가로 행사에 참여하면서 다른 봉사자들과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행사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울시청 다목적홀과 종로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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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11시 4분

참가자들을 맞이하기 전에 준비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안내 데스크 정리 외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께서 그린 그림 위에 참여자들이 자신만의 그림을 덧붙여 그려 넣는 일을 도와야 했다. 엘리베이터 사이에 놓인 책상에는 길원옥 할머니의 작품을 모티브로 그려진 A6사이즈의 스노우지에 꽃 두 송이만 그려진 백지가 놓여있었다. 자원활동가들이 사전에 해야 할 일은 몇 장의 샘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곳 그림판에 배정된 자원활동가는 아니었지만 다른 팀에 소속되었던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멋진 가이드라인을 그려넣을 수 있게 다들 심혈을 기울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우리가 그린 이 작품들도 여성미래센터 허스토리홀에서 진행 중인 ‘소녀의 꿈, 함께 피우다-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 전시(3.2-4.1)’에 함께 전시된다는 사실을 안 건 한참 후였다.정성을 들여 한 작품만 만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전 11시 4분~오후 1시 50분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기념식이 진행되는 서울시청 다목적홀 로비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2016년의 희망’을 피켓에 적고 그 피켓을 든 모습을 SNS에 올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해시태그 ‘#희망연결’과 연동되게 SNS에 ‘인증사진’을 올리는 시민들에게는 케이크 선물도 제공했다. 함께 진행했던 친구는 재작년에도 참여했다고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대학 입학 후 계속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 친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현장 속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 부럽기도 했다.
피켓에 내용을 적는 것에 대해 상업용이라거나 혹은 ‘쓸 말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90% 정도였다면 나머지 10%는 여성인권에 대해 그 많은 생각을 간단하게 요약하기 힘들어해 인상 깊었다. 한 줄의 말을 쓰는 일에도 진지하게 참여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여성 인권에 대한 고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어떤 남성분이 적은 ‘성평등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라는 문구는 여성으로서 평소에 여성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졸렬함을 반성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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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50분~오후 2시 30분

방송인이자 한여성단체연합 홍보대사인 김미화씨의 사회로 ‘2016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2회 한국여성대회’가 마침내 시작됐다. 오프닝 율동에 이어 시상식이 이어졌고 3.8여성선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000여명의 참여자가 의자에 혹은 바닥에 앉아 보라색 손수건을 들고 비정규직 철폐, 여성폭력 반대, 역사 왜곡에 대한 아픔을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구호를 외쳤다. 보라색 물결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오후 2시30분~오후 4시40분

장대비를 맞으며 참여자들은 실외로 나가 행진을 시작했다. 자원활동가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퍼레이드의 끝 지점에서 플랜카드, 피켓 등을 수거하는 일을 도왔다. 거센 비에도 불구하고 꺽이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어린아이, 어르신 할 것 없이 보라색, 흰색 우비를 쓰고 소녀상까지 힘찬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퍼레이드 도중 만난 박기혁씨는 자활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로 재작년부터 전국연대에 가입해 여성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깃대를 든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굳건해 보였다. 박씨 외에도 많은 참여자들을 보면서 한국여성 인권이 적어도 지금보다 더 추락할 수 없도록 하는 든든한 ‘시민 배리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국여성의 권리가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의 스쳐갔던 생각들이 ‘개념 있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글 : 이새봄(제32회 한국여성대회 온라인 기자단)
사진 : 김동현, 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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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세상을 바꾼 그녀들 14 홍리리 제주여성인권연대 대표

“여성운동이 노화방지 해줘요”



“창립 10주년, 제주여성운동 정리하고파”
제주지역 여성단체들과 연대 꿈꿔
제주 해녀, 여성ㆍ지역운동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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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리리 제주여성인권연대 대표는 여성운동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의 역사가 그렇게 길진 않지만 우리 세대가 시작했고, 뿌리내렸고, 여기까지 왔다고 자부합니다. 이 자부심을 나누고 싶어요. 여성운동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또 얼마나 열정을 쏟을만한 일인지 막 자랑하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홍리리 제주여성인권연대 대표의 목소리는 제주의 날씨만큼이나 청량했다. ‘거센 바람을 뚫고 말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 목소리가 크다’는 그의 설명 탓인지 시원한 목소리와 얼굴 가득한 함박웃음이 천생 ‘제주 여자’인가 싶었다.
내년에 창립 10주년을 맞는 제주여성인권연대는 제주여민회에서 2006년 분리ㆍ독립해 여성폭력방지 등 여성인권을 위한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제주여민회에서 상담활동을 시작한 홍 대표는 2007년 제주여성인권연대 부설 상담소장을 거쳐 2012년부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그는 “제주의 여성인권 운동 역사를 정리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이야기했다.
“지난 10년 간 여성인권적 가치를 잘 만들어왔는지 돌아보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제주여성인권연대가 어머니와 같은 제주여민회에서 독립한 것은 알이 부화해 병아리가 새로 태어난 것과 같아요. 새로 태어나 연약하지만 여성인권 함양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리고 제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단체들 간의 연대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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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리리 대표가 제주대학교 총여학생회의 첫번째 교지를 필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민주없이 평등없고, 평등없이 민주없다”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85학번인 홍리리 대표는 ‘운동권’이었던 언니의 영향으로 신입생 때부터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경험한 그는 그의 표현대로 ‘구호만으로도 성과가 있던 시대’를 희망과 열정으로 지나왔다. 당시 총학생회 산하에 있던 여학생회는 ‘별로 인기가 없던’ 한직 취급을 받았다. 홍 대표는 학생회와 여학생회 일을 겸해서 맡고 있다가 4학년이 되면서 총여학생회를 총학생회에서 분리 독립시키는 일에 주역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여학생회가 형식적으로만 있었어요. 그 때는 젠더라는 말보다 평등이라는 말을 주로 썼어요. ‘남녀차별’이나 ‘남녀불평등 불식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민주’라는 화두로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이는데 ‘평등’이라는 제목에는 사람들이 모이질 않더라고요. ‘민주없이 평등없고, 평등없이 민주없다’라고 말들 했지만 여학우들조차 모이지 않아서 더 섭섭했어요.”
홍 대표는 가방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햇귀’[햇살]라고 적힌 책은 1988년 독립한 제주대학교 총여학생회가 처음으로 내놓은 교지였다. 그는 이 책이 “총여학생회가 더 이상 총학생회 산하의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라는 선언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젠더’라는 단어조차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미 제주지역의 여성운동은 상당히 막강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 제주지역 시민단체 중 1987년 11월 제주여민회가 제일 먼저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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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인권연대의 제10차 정기총회 모습. @제주여성인권연대>


제주도 운동의 시작은 해녀

“제주는 가부장적이고 통제된 사회에요. 제주도라는 이유로 중앙으로부터 상당한 착취가 있었고, 주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남자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웠어요. 남편이 세상을 뜨면 집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아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죠. 대를 이을 아들을 보호하느라 가부장제가 육지보다 강건했다고 생각해요.”
홍 대표는 이러한 공고한 가부장제 하에서도 “제주 여성들은 남성들을 대신해 가계 경제를 꾸리며 자신의 노동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한 협상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부당한 노동착취에 대항해 맞섰던 해녀들은 ‘제주도 운동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대학 4학년 때 제주도 모든 일대에서 해녀투쟁이 일어났어요. 지금은 중산간을 중심으로 산개발이 많지만 당시는 바다개발이 굉장히 활발한 때였거든요. ‘공유수면매립법’이라는 것을 제주도에 도입했던 시기가 1987년, 1988년 즈음이었어요. 굉장한 환경파괴, 어장파괴를 불러왔죠. 해녀를 비롯해 근해에서 조업하는 사람들이 근해를 계속 잃어가는 거에요. 당시 제주 땅의 60% 이상이 외지인에게 잠식당했고 그 외지인은 대재벌들이었어요.”
1988년에 경험한 해녀들의 투쟁을 통해 그는 ‘지역운동’에 눈뜨게 됐다. 민중중심, 현장중심, 계급중심을 지향했던 홍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제주의 농산물가공업체에 취업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애썼다. 당시 제주의 당근과 양파를 주재료로 하는 농산물가공업체에서 남성들은 대부분 정규직으로, 여성들은 거의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제주의 토지잠식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홍 대표는 농민운동에 발을 들여놨다. “민중, 현장, 계급이라는 키워드에 지역운동을 결합해서 내린 결론은 ‘농민운동’이었어요. 제주도 입장에서는 바다도 ‘바다토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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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리리 대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은 활동가의 상당한 열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후반 제주여민회에서 여성폭력 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홍 대표는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여성폭력 근절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그는 제주 여성정책연구원 설립을 ‘오랫동안 희망했었다’고 말했다.
“현장의 실태조사뿐만 아니라 심층적인 연구나 정책개발이 필요했어요. 여성단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해줄 연구기관요. 제도가 확충되어가는만큼 정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굵직한 일들, 제도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조금 진행하다가 정권이 바뀌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많잖아요. 지속적으로 전문성을 유지하려면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정책 현장에서 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대표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홍리리 대표는 다음 세대 후배 활동가들의 재생산과 지속적인 성장에 대해서 ‘열정’을 강조했다.
“예전에는 운동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대의명분이 분명했고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해줬어요. 지금은 운동의 이슈가 굉장히 다차원적이고 다양화되어 있죠. 이미 제도권 안에 만들어진 부분도 많고요. 대의명분을 성취한 다는 것,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활동가의 열정을 상당히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제주여성인권연대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과 차별에 반대합니다.
여성들이 존엄한 인간으로서 일상에서 평화롭고
타고난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소통과 연대를 통해 인권향상과 성평등한 대안사회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 웃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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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합 '온콘'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

2014년 시즌1을 진행한데 이어 2015년 시즌2

전국의 여성운동가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우리 사회 통념을 바꾸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만들어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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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10/1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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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_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_시즌2]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50년 운동의 원동력은 ‘거룩한 분노’”


1996년 남편과 민중교회 통해 이주노동자 운동 시작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 개척자로 제도화 기틀 마련
“집착하지 않고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는가 질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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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며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그마치 50년. 반세기 동안 삶의 모퉁이 모퉁이에서 그는 질문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발걸음의 이정표가 됐고, 길이 됐고, 역사가 됐다. 20여년 전에 남편과 함께 서울 창신동에서 민중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답은 ‘이주노동자’였다. 그렇게 이주노동자 운동에 뛰어든 한국염(68)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후 ‘이주여성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을 이끌어 왔다.
“1996년에 성남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다 도망쳐 나온 중국 한족 출신 이주노동자 8명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지. 임금체불과 성추행을 겪다 도망 나온 노동자 8명 중에 7명이 여성이었어요. 그렇게 남편이 사역하던 청암교회에서 서울이주노동자센터를 만들었고, 나는 낮에는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주여성노동자들 상담을 했지요.”
한 대표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이라 소위 민주화 개념은 있었으나 젠더의식은 굉장히 약했다”며 여성을 위한 시설과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가장 절박했던 것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였다. 당시 이주여성노동자를 위한 쉼터가 전무한 상태인데다 기존의 쉼터들도 열악한 처지라 남성들이 입소하면 여성들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한 대표는 독일의 세계기독위원회에 편지를 써 이주여성노동자 쉼터 마련을 위한 기금 3천만 원을 요청했고, 2년만에야 돈이 도착했다. 하지만 2년 동안 건물 한 층을 임대할 수 있는 전세금은 3천만 원에서 5천만 원으로 훌쩍 올라버려 모자란 돈 2천만 원은 따로 모금을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집’이라고 이름붙인 쉼터를 마련했고, 그렇게 이주여성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쉼터를 마련할 때 외국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니 아무도 집을 안 발려 주는 거에요. 부동산에서는 ‘그러지 말고 그냥 집을 하나 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순전히 배짱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돈을 모아 해마다 한 층씩 전세 들어 있는 사람들을 내보냈죠. 건물 한 채를 온전히 마련하는데 7년 쯤 걸린 것 같아요.”
15년 전 이주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쉼터는 2003년 ‘이주여성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쉼터에서 다양한 이주여성을 만났어요. 결혼이주여성과 성매매로 유입된 여성도 만나게 됐어요. 실제로 만나보니 성매매로 유입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가장 심각했는데 그들을 위해서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두레방이나 새움터같은 전문가들이 있었어요.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는 이들이 24시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주여성노동자들은 퇴근하면 그래도 사생활이 있는데 폭력 피해를 당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그럴 수도 없는 거에요. 그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서 활동의 중심을 결혼이주여성으로 옮기고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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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여성운동 후배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사는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민중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학위 포기


45여년 전 한국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던 시절 한국염 대표는 ‘여자 목사’가 되고자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직자의 길을 택한 데는 어린 시절 죽을 고비를 넘나들었던 개인적 체험도 한 몫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이 운영하던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이었던 병원에서 한 대표처럼 위독한 환자가 들어와 살아나간 게 처음이었단다. 주변 사람들 모두 죽는다고 했던 13살짜리 소녀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 경험은 그를 자연스레 신학교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한국에 여자 목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신학교에 갔어요. 그 때만 해도 나는 여자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목사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 제도 때문인 걸 몰랐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는 거야. 학교를 그만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리 학교에 여자 교수가 있는 걸 보고는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남았죠.”
1969년 한신대학교에 입학한 한 대표는 대학시절 기장여신도회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위해 교단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자진해서 찾아다녔다. 해당 교단에서 여성목사 안수제는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한 해 앞둔 1974년 통과됐다. 한국염 대표의 여성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대표는 대학원 졸업 후 기독교 잡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기독교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신문 기자였던 남편 최의팔 목사는 주요 일간지에서 싣지 않았던 ‘인혁당 사건’을 신문에 실었다가 안기부에 의해 해고를 당했다. 그 후 한 대표 부부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고, 여성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한 대표는 체류 3년 만에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독일 가기 전 민중신학을 하시던 교수님들의 삶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존경하지만, 교수라는 위치 때문에 민중처럼 살지는 못하시더라고요. 민중 지향성을 갖고는 있지만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안되는 거에요. 내가 공부를 더 해야하나 고민할 때 그 생각이 나면서 나도 교수가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 학위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50년 운동을 돌아볼 때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가 학위를 포기한 것이에요. 기득권 자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 돌아온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운동에도 결합한 한국염 대표는 수 년 째 정대협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차 아시아연대회의의 실무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1996년부터 실행위원을 시작하는 등 20여년 간 정대협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정대협 운동은 성, 계급, 인종 문제가 다 녹아들어 있는 거에요. 당시 한국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거든. 거기에 계급 문제가 있고, 일본 제국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니 제국주의 문제가 있고, 여성이 겪는 성폭력 문제이면서 민족과 인종 갈등까지도 포함된 문제이지요.”
한 대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군 위안부’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행 당한 베트남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일본처럼 국가가 모집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이 베트남 피점령지 여성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지요. 정대협 운동이 자국의 여성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시 하 체제 여성 문제로 끌어안고 가는 것에 대해 의미부여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민족이기 때문에 한국인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진짜 민족주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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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1회 한국여성대회 '퍼플워킹'에 이주여성들과 함께 참여한 한국염 대표. 앞줄 소녀상 왼쪽 의자에 앉아있는 한 대표.>

“앞으로도 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는 걸음이 곧 길이 되길”


한국염 대표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함께 활동한 지 15년, 정부가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다.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가정폭력방지법 개정, 이주여성 쉼터 마련, 콜센터 개설 등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한 제도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한 대표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제도는 좀 나아졌지요.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을 전업주부로 상정하고 입국시키기 때문에 이혼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법무부에 체류법 변경을 요구해서 일반인은 5년이 지나야 영주권이나 국적을 신청할 수 있는데 결혼이주여성은 2년 만에 신청할 수 있게 바뀌었어요. 이혼 시 혼인 파탄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면 체류할 수 있게 됐죠. 또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취업을 못했어요. 친정집에 돈 보내는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여성들의 자존심이 다치니까 일자리를 줘서 여성들이 떳떳하게 자기가 번 돈을 고향에 보내게 하자고 설득했죠. 그렇게 결혼이주여성들의 취업권이 열리게 됐습니다. 누군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은 걸음이 곧 길이 됐다’고 얘기를 하는데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고 말하는 한국염 대표는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낮은 곳에서 힘들지 않으셨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나 이름 많아. 명예도 있고. 상도 여러개 탔어”라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없이 살았어.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생활했냐고 물어보는데 하루 세끼 밥 먹고 살았어요. 결국 집착을 안하면 쉬운 것 같아요. 우리 센터도 돈이 없어 언제까지 버티겠나 생각하다가도 이거 오래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욕심이다, 시대적 사명을 다하면 접는 거지 뭐. 문제는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느냐 하는 질문이에요.”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외국인이주여성의 인권보호와 권익신장,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을 통한 이주여성과 자녀들의 생명존중,
성인지적 관점에서 이주여성을 위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통한 한국사회의 적응지원,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지구촌 사회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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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6/0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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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기획기사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1회 한국여성대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 ‘전국가정관리사협회’


“가사노동자도 노동자다”


가사노동자의 사회적 인식 개선 성과
법적지위 확보해 노동자성 인정 시급
‘업무 매뉴얼’ ‘계약서 작성’ 등 전문성 확보


“정부는 가사노동자 보호입법 즉각 추진하라!”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지난 6월 16일 정오를 막 넘긴 시간, 서울 국회 앞에서는 수 십 명의 여성들이 앞치마에 머리두건까지 쓰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은 전국가정관리사협회(이하 전가협), (사)한국YWCA연합회, 한국가사노동자협회 회원들로 ‘국제노동기구(ILO) 가사노동자협약 채택 4주년 및 제3회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기념’ 캠페인을 펼치는 중이었다. 이들은 가사노동자의 노동권 인정을 위한 입법 추진과 함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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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국제가사노동자의 날을 맞아 전국가정관리사협회, (사)한국YWCA연합회, 한국가사노동자협회 회원들이 서울 국회 앞에서 ‘ILO 가사노동자협약 채택 4주년 및 제3회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기념’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사진:한국YWCA연합회>


6월 16일은 국제노동기구가 정한 ‘국제가사노동자의 날’이다. ILO(국제노동기구)는 2010년 총회에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Decent work for Domestic Workers)를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2011년 가사노동자협약(Domestic Workers Convention)(No.189)과 권고안(No.201)을 채택했다. 공식적인 집계로만 전 세계적으로 117개국, 5천2백60만 명에 이르는 가사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약 30여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국내의 가사노동자는 아직도 법적인 ‘노동자’가 아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서 가사사용인이 제외되면서 지금까지도 가사노동자는 법적인 보호 바깥에 존재하고 있어 고용불안과 산업재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집 안’에서 여성이 주로 담당해왔던 무급노동에 대한 저평가가 가사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가치폄하로 이어진 것이다.


“일터는 전쟁터”

가사서비스노동은 7대 영역의 70가지 세부 업무를 단 4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전문적인 노동이다. 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허락된 시간은 고작 3분 정도.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가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시간 내에 업무를 마칠 수 있다. 숙련된 전문 기술이 뒷받침 되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업무 시간을 초과해 일하기도 다반사다. 고되고 반복되는 노동에 근골격계 질환 발생이 빈번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심지어 일하다 다치는 경우에도 법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받을 길도 요원하다.


오랜 시간 이처럼 ‘그림자 노동’으로 저평가되던 가사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1년 전 전가협이 창립됐다. 2004년 한국여성노동자회 부설로 만들어진 전가협은 당사자 조직으로 지난 10년 동안 가사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향상과 노동자성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다. IMF 이후 여성 실업자들을 위한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만들어진 전가협은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가사노동자들의 권리확보에 주목했다. 2004년 11월 한국여성노동자회의 5개 지부에서 시작된 전가협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조직, 운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해 가며 경제공동체조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가협은 업무매뉴얼과 교육 시스템을 갖춰 가정관리사가 직업교육과 인성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다. 가사서비스의 노동 기준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계약서 쓰기’ 캠페인도 진행중이다. 고객과의 주먹구구식 관계 속에서 하던 일에 기준을 세우고 기본업무와 추가업무 등으로 구분했다. 가사서비스 이용계약서는 노동자의 노동권과 건강권이 보장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업무에 대해 상호 근거가 되기 때문에 양자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이러한 전가협의 업무에 대한 체계화는 가사노동의 전문성을 드러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가협은 몇 년 전 ‘식모들’ ‘수상한 가정부’ 등 가사노동자를 폄하하는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제목에 대해 변경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드라마 ‘식모들’은 ‘로맨스 타운’으로 제목이 변경됐고, ‘수상한 가정부’의 경우 제목이 변경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방송국에서 최근 방영하는 드라마에서 ‘가정관리사’라는 이름과 더불어 고객과의 관계에서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전문 직업인으로 가정관리사가 그려지고 있다. 파출부나 가정부 등으로 불리며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가사노동자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윤현미 전가협 협회장은 “그 드라마를 회원들과 돌려보았다”며 “조금은 (인식이) 달라지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뿌듯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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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협 수원지부 사무실에 만난 윤현미 전가협 협회장. 윤 협회장은 당사자로서는 처음으로 올해 초 협회장이 됐다.>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으로 인정받은 것 같았어요”

가사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전가협의 이러한 노력은 올해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1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제27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선정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가협은 ‘출범 이후 10년 동안 가사노동자의 권리보장과 사회적 관심 촉구를 통해 가사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고 법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부 대책이 발표되는데 기여’했다. 윤현미 협회장은 “협회원들이 많이 좋아했다”며 “수상으로 모두가 고무됐다”고 늦은 소감을 이야기했다.
“좀 지칠 때였어요. ‘이걸 계속 해야 하나’, ‘계속 하면 될까’, ‘뭐가 바뀌긴 하나’ 이런 생각들이 들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상을 받으면서 ‘우리만의 목소리가 아니었구나’, ‘좀 더 하면 되겠구나’,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을 위한 제도 마련도 진행중이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2월 24일 ‘가정내 돌봄서비스 가운데 가사관리서비스에 관한 제도화방안’을 발표했다. 정부가 인정하는 정식 업체를 통해 가사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특별법 형식으로 제도화가 마련될 경우 가사노동자도 4대 보험 가입과 퇴직금, 실업급여 등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한국 정부는 2011년 국제노동기구에서 통과된 가사노동자협약에 찬성표를 던졌으나 아직 비준하지는 않고 있다. 같은 해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다음해인 2012년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오랜 논의 끝에 가사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요구했다.
지난 6월 16일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성명서를 통해 전가협과 (사)한국YWCA연합회, 한국가사노동자협회는 “제도화 발표 이후 입법예고 등 정부의 가시적인 움직임이 없다”며 가사노동자 고용개선에 관한 법을 즉각 발의하고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할 것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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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협 수원지부 사무실 곳곳에는 회원들의 활동 사진(위)과 시낭송 소모임에서 회원들이 함께 나눈 시가 전시되어 있었다.>


자부심 넘치는 당사자 조직

전가협의 전국 지부에는 다양한 소모임이 있다. 등산 소모임을 비롯해 양초 등 생활 소품 만들기, 오카리나 배우기, 건강을 위해 함께 운동하는 모임 등 다양한 모임들이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가사노동은 개별화된 노동이라 조직원들이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소모임 시작의 이유다.
윤현미 협회장은 “서로를 좀 알자는 게 제일 컸다”며 소모임에 대해 소개했다. “일하면서 힘든 부분을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나누고 공감하는 자리죠. 일 끝내고 저녁에 모여야 하지만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분들은 협회 소속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어요.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수원지부에서 처음 시(詩)모임을 시작했을 때 협회원들 다수가 싫어했다. 5,60대 여성들이 대부분인 협회원들에게 시 낭송은 익숙치 않아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고. 윤 협회장은 간부회의에서 반 강제적으로 각자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와 낭송하고 느낀 점을 말하게 했더니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더니 나중에는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잠재되어 있는 감정들이 올라오는 거에요. 이제는 미리 준비도 많이 하고, 외우기도 잘해요. 처음엔 강제적이었지만 나중엔 자발적이 됐죠.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시도 다시 한번 보게 되더라고요.”

2008년 4월에 전가협 수원지부에 입사해 그 해 수원지부장이 되고 올해 전가협 협회장이 된 윤현미 협회장은 첫 당사자 협회장이다. 당사자 조직에서의 당사자 리더로서 협회원들과 가장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이유다. 정문자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전가협 지부장들의 90%가 당사자”라며 “여성들이 리더로 성장하는 여성운동의 실천 현장”이라고 평가했다.

“당장은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을 위해 특별법 만들어서 통과시키는게 목표에요. 법 통과하는 것보다 어떤 내용이 담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간담회나 토론회 등에 부지런히 다니면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여러 어려운 점이 있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꼭 법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윤현미 협회장)


참조 : 한국여성노동자회ㆍ전국가정관리사협회, 『가사서비스 노동기준을 세우자 계약서를 씁시다!』


글/사진 : 김수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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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5/06/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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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아시나요?^^
    1908년 3월 8일, 생존권과 참정권 확보를 위해 일어섰던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는 '세계여성의날'.

    세계여성의 날은 특히 일하는 여성들의 안전한 노동환경, 단결권 인정을 내세워 여성 인권신장의 기폭제가 된 날로서, 세계 각국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쳐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85년 전국 14개 여성단체들의 '제1회 여성대회'를 시작으로,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창립된 후 지금까지 여성연합 주관으로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2016 제32회 한국여성대회, "희망을 연결하라! - 모이자 행동하자 바꾸자”
  • 3월 5일 토요일 오후 1시, 광화문 광장에서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며 성평등한 우리 사회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32번째 여성대회가 열립니다.

    [3.8 샤우팅!]
    #샤우팅, 하나! 여성운동 발전에 공헌하거나, 성평등에 기여한 개인 및 단체에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여합니다.
    #샤우팅, 두울! 2015년 한 해 동안 성평등에 기여한 사람, 사건에 '성평등 디딤돌'을, 성평등을 저해한 사람, 사건에는 '성평등 걸림돌'을 수여합니다.
    #샤우팅, 세엣! 성평등 이슈에 대한 여성대회 참가자들의 힘 주고, 힘 받는 발언을 나눕니다.

    [3.8 퍼레이드!]
    - 다양한 차림새로 성평등 메시지를 알리며 서울 도심을 함께 걸어요~

    [3.8 무브먼트!]
    - 춤과 행진을 통해 성평등 가치 실현과 여성폭력근절 세계연대 등 여성대회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환기시키는 참가자 전원의 즐거운 퍼포먼스!

    2016년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캠페인 #희망연결 에 함께해주세요^^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2016년 우리의 희망에는 어떤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의 희망을 들려주세요^^ 그리고 3월 5일 여성대회에서 우리의 희망을 연결합시다!

    ‪#‎38여성의날‬ #희망연결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2016년 나의 희망은
    입니다! 3월 5일 광화문광장에서 우리의 희망을 연결해요!

    *참여방법: ↑위의 내용을 해시태그와 함께 빈칸을 채워 본인의 sns에 올려주세요^^ 추첨을 통해 문화상품권(3천원 상당)을 드립니다

    *캠페인 기간: 2016년 3월 8일(화) 까지

    *당첨자 발표: 3월 10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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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6/02/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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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_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_시즌2] 전영순 한국한부모연합 대표


'한’부모 가족은 '온전한' 가족입니다


‘편부모’에서 ‘한부모’로 대안명칭 찾아
‘양육비이행확보및지원에관한법률’ 제정 성과
법 이행 모니터링과 경제적 자립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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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사람을 ‘한부모’라고 합니다. 이혼이나 사별을 겪었더라도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한부모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아이를 얼마나 잘 키워내는가죠. 그러기 위해서 엄마들이 힘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 혹은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여전히 강력하다. 최근 결혼보다 이혼이 흔한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편견도 힘을 잃어가는 모양새이지만 십 수년 전부터 ‘한부모’(1990년대 후반 한부모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결손’의 의미를 담고 있는 ‘편부모’ 대신 ‘한부모’라는 대안어를 찾아 확산했다. ‘한부모’의 ‘한’은 ‘온전하다’ ‘가득차다’ ‘크다’는 뜻이다.)  가족에 대한 편견에 맞서온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한부모’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97년 한국여성민우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한부모 운동은 군포, 광주, 인천, 원주, 고양 등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2004년 한부모가족지원네트워크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기존 단체를 구심점으로 시작된 한부모 운동은 2010년 ‘한국한부모연합’(이하 한부모연합)이 창립하면서 당사자 운동으로 전환했다. 한부모연합은 현재 전국 11개 회원단체로 이루어진 연합체로 ‘한부모 가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허물고, 다양한 가족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또 한부모 가족이 독립적이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 사회적 권익보호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는 단체’다. 지난해는 한부모지원단체네트워크 결성 10주년, 한국한부모연합 창립 5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성과를 돌아보고 새로운 10년의 비전을 다시 세웠다.
   
“양육비이행지원법 제정됐지만 한계 많아”

“지난해에야 ‘양육비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올해 3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법 제정은 한부모 운동 초창기부터의 이슈였는데 이제야 만들어진 것이지요. 아이 키우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데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비양육자가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어요. 2013년에 관련 법안 4건이 발의됐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통과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국회의원들을 만나 압력을 넣었지요.”
전영순 한부모연합 상임대표는 한부모지원단체네트워크로 시작한 한국한부모연합의 지난 10년의 운동의 성과로 ‘양육비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짚었다. 2014년 3월 제정된 이 법은 미성년 자녀의 양육비 청구와 이행확보 지원을 위한 법률이다. 비양육자로부터 양육비를 받아야 하는 한부모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이 법률에 따라 올해 3월 양육비이행관리원이 개원해 업무를 시작했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은 채무 불이행자의 자산을 조사해 제재를 가하고 한시적으로 양육비를 지급한다.
하지만 양육비 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제재가 미약해 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 대표는 “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강력한 제재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2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한부모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성년 자녀를 둔 한부모 가족의 83%가 양육비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소송을 통해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후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77.4%에 달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양육비 지급을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제재 조치가 절실한 실정이다. 또한 전 대표는 “저소득층 한부모들 중 비양육자로부터 양육비를 받으면 그것이 소득으로 합산돼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우가 있어 차라리 양육비를 받지 않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한부모연합은 법이 올해부터 시행된 만큼 양육비이행관리원을 활용하는데 문제점이 무엇인지 사례를 모집하고 법 집행에 대해서도 모니터링 해 올해 연말쯤 보완대책을 세워 정부에 제안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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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모운동은 인생의 전환점

1999년 전영순 대표는 한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군포여성민우회를 만났다. 당시 한부모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었던 군포여성민우회에서 전 대표는 회원으로 참여해 상담소장을 거쳐 대표까지 역임했다.
“이혼하는 과정에서 민우회 발족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 때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이다보니까 여성운동이 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나 아닌 한부모가 또 있네’ ‘여기 오니까 지지받네’ ‘(한부모는) 나만의 문제이고 창피한 일이었는데 그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으로 출발했어요.”
20대 중반에 결혼해 전업주부로 십 수 년을 살아온 전 대표는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소송에서 양육비에 대한 판결을 받게 되어 두 아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양육비를 받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생계를 꾸려가야 할 일은 두려움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한부모운동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혼한 것 자체가 큰 변화였어요. 이혼하면서 민우회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무엇을 해보려고 했다면 지금의 이런 삶이 아니었을 수도 있죠. 그랬다면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을까. 그냥 전업주부로 살았다면 세상의 많은 경험을 하고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전 대표는 본인 스스로도 한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민우회를 통한 활동이 큰 힘과 지지가 되었지만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를 돌봐야 하는 한부모가 지속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부모 사업이 다른 사업보다 굉장히 힘들어요. 한부모들을 만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에너지 소진이 많지요. 활동가들이 열심히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말없이 안나와버린다거나, 교육을 거듭해도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던가 해요. 그래서 한부모운동을 하던 단체들이 사업을 접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부모운동의 조직화나 활동가를 키워내는 일이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운동을 지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당사자들이다보니 생계를 위한 일도 해야 하고 활동도 해야하는 어려움 때문에 열정을 가진 한사람이 사명감으로 버티는 경우가 많다. 전 대표도 초기 민우회에서 활동할 때 공부방 운영을 겸임했었다. 2009년 한부모연합 창립 준비를 위해 복귀하기 전 3년 간은 돈을 벌 요량으로 운동을 접고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돈 버는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엄마만 좋자고 이런 활동하러 다니고, 아이들에게 무책임한 엄마가 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그만 카페를 시작했는데 자꾸만 옆에 카페가 생기더라고요. 2년 여 만에 그만뒀는데 그나마 빨리 그만둘 수 있었던게 다행이었다 싶어요. 그때 저도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그걸 지켜봤던 딸도 매일매일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돌아와 운동하는 것에 대해 아마 대만족을 하고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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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립과 한부모운동의 외연 넓혀야”

서울 대방동에 위치한 서울여성플라자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부모연합에는 전영순 대표 혼자 상근 활동 중이다. 2013년 10월 이곳에 사무실을 차리기 전에는 사무국이 따로 없어 여력이 있는 회원단체에서 사무국 일을 맡아서 했다. 여성플라자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상근을 하게 된 전 대표는 요즘 돈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여성플라자에 최대 4년간 있을 수 있는데 앞으로 2년 남았습니다. 그 안에 경제적인 자립을 하는 것이 조직의 목표입니다. 다행히 여기에 정착하면서 프로젝트 사업도 회원단체들에게 나누게 됐고 물품후원도 받아서 나누고 있습니다.”
재정자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부모연합은 지난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회원단체로도 함께 하게 됐다.
“우리가 너무 한부모에 한정되어 활동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여성운동과 연결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운동이 확장되지 않는 거에요. 지난해 군대 관심사병 이슈처럼 한부모에 대한 이슈가 생겼을 때 다른 여성단체와 연대하고 힘도 받고 하는게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죠. 한부모 이슈가 결국 가족의 문제이고 양육의 문제이고, 이것은 전체 여성의 관심거리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여성단체들의 의견도 받고 참여도 이끌어내자는 생각입니다.”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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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7/3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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