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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가해자는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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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가해자는 너와 나

익명 (미확인) | 목, 2016/02/04- 10:3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고통의 기억이 잊혀지면 좋겠다. 밑바닥 어딘가에서 올라와 웃통을 훌렁 까고 찬물을 끼얹어도 식지 않는 것일수록, 죽도록 지우고 싶은 것일수록, 못된 상처는 종래 떠나주지 않는다. 그 앞에 타인이 하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따위의 말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 서툰 위로라도 그렇다. 의도가 있는 강요라면 어떨까. 원래 상처보다 치명적이다. 그때, 나는 바닥없이 추락한다. 아… 하… 이제 치유조차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겪어본, 말할 수 없도록 독한 상흔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정부가 했다는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합의’라 불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6살 밀양 소녀 김상희는 친구와 함께 사진관에 다녀오다 강제로 트럭에 실렸다. 중국 가는 수송선에 태워졌다. 상하이, 쑤저우, 난징, 싱가포르 등지로 끌려다녔다. 10년이었다. 후유증으로 심장병, 신장병, 고혈압을 얻었다. 광복 60주년이던 지난해 1월 둘쨋날 돌아가셨다. 13살에 평양에서 끌려간 길원옥 할머니는 “가자마자 성병에 걸렸어요. 그런데도 계속 약 먹으며 일본군들을 받아야 했지요. 한 번도 바깥 구경을 못했어요. 가만히나 있나요. 술 취하면 칼로 여기저기 찌르고 후벼 파고….” 어려도 너무 어려, 초경조차 시작하지 않았던 몸에 강간과 폭행이 끊이지 않았다. 15살에 연행되어 이 나라 저 나라 끌려다니다, 해방 후 미군 포로가 된 김복동 할머니. 전쟁 끝 무렵 일본군 간호사가 되어야 했다. 다친 일본군에게 피가 모자라면 할머니 몸에서 피를 뽑아 댔다.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됐던 1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다른 전범들이 교수형 당했으나 예외였다. 심지어 일본 총리를 지냈다. 지금은 야스쿠니신사에 있다. 현 총리가 정치적 아버지라 부르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다. 이번 ‘합의’라는 것은 펜타곤(미국 국방부)의 말대로 ‘자위대의 해외 파병이 가져올 미국 방위산업체에 굉장히 좋은 뉴스’의 전제로 보인다. 한·미·일 정부가 놓고 벌이는 ‘역사적’ 주판 위다. 계산서에 전쟁범죄 사죄, 할머니들의 눈물, 일본 군사 재무장이라는 위험은 빠졌다.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와 침묵을 깬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들. 지금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증명조차 되지 못한 수십만 여성들. 그들의 원혼은 사라졌을까. 그들 앞에, 지난 70년 동안 단 하나 노력도 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자격은 무엇일까. 무슨 자격증을 발부받았기에 피해자들이 전세계를 다니며 써 내려온, 수치심을 불사했던 증언들을 뒤집으려 하는가.


얼마 전 ‘합의’라는 것의 폐기를 촉구하는 어느 집회에 참여했다. 참석자들이 ‘욱일승천기’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의아했다. 일본 국가만의 문제인가, 아베만의 문제인가. 피해자는 할머니들뿐 아니라, 모든 것을 지켜본 역사 속의 너와 나, 모두다. 가해자는 한국 정부가 포.함.된. ‘국가들의 연합’이다. ‘박근혜는 아버지 대를 이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대를 이은 불가역적 배신이다. 돌아가신 김상희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돌아온 나에게 한국 사람들이 던지는 말이었어….”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군인들이 입을 막고 고함도 못 지르게 했던, 사지 떨리는 기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그것은 꿈에도 그리워 울며 지새웠던, 고향 땅, 그곳에 돌아와 맞은 돌팔매였다.


*이 글은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의 강연과 <주간경향> 기사의 내용을 발췌, 재구성했습니다.


2016.2.2 한겨게 21(노땡큐)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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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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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4·16 생명안전공원과 기억의 백지화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체코 수도 프라하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단연 비셰흐라드 공원묘지였다. 묘지라는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저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의 공원이라 여겼다. ‘고지대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비셰흐라드 언덕은 야경과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무엇보다 프라하 시민들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시내 가까운 곳에 있다.

묘지가 공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 전까지 내게 죽은 자들의 무덤이 모인 곳은 ‘전설의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공포 체험이거나 거룩한 추모의 대상이 되어 도시 바깥으로 멀리 밀려난 것이었다. 비셰흐라드 공원묘지에는 체코의 국민 작곡가 스메타나와 신세계 교향곡의 작곡가 드보르자크, 화가 알폰스 무하, 소설가 얀 네루다 등 체코를 빛낸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묻혀 있다.

비석과 묘가 모두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방문자들은 묘지의 주인을 찾고, 그 주인이 살아온 내력을 읽었다. 매력적인 일이었다. 죽음을 삶의 가까운 곳에 둔 그들이 그 후로 오랫동안 부러웠다.

비셰흐라드 공원묘지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는 홀로코스트 기념비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에 충격을 받았다. 2711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도심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기념비는 국회의사당 가까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프리드리히 거리 등이 가까운 것을 보니 시민들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기념비 안에 들어서자 밖에서 볼 수 없던 압도적인 규모와 세심한 동선에 놀랐다.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음에 충격을 받았다. 가해자였던 자신들의 가장 가운데에 피해자들을 위한 죽음의 기억을 거대하게 세워둔 독일 시민들에게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안간힘을 쓰며 살기에, 삶이 이렇게 아비규환인 건 아닐까? 죽은 자들의 어제와 산 자들의 오늘이 연결되었음을 배울 방법은 없을까…. 적어도 6·13 지방선거를 앞둔 안산지역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후보들은 ‘납골당 반대’ 프레임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다. 심지어 “나는 다른 공약 없다. 오로지 납골당 백지화만이 공약이다”라고 떠드는 후보도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4·16 생명안전공원’이 마치 화랑유원지 17만평 전부에 들어서는 것처럼 속이고, ‘납골당’이란 말로 폄훼한다. 혐오는 공포와 함께 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등에 업고 안산이 우울한 도시가 될 것이라는 쓸모없는 예단을 정치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다.


맙소사, ‘엄마의 마음과 눈으로 출마했다’는 한 후보의 공보물에는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100년 살아가야 할 도시 한복판에 추모공원은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쓰여 있다. 그들에게 드보르자크 동상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맺힌 빗방울의 장엄함을 설명해주면 알아들을까? 아니면 방문자들이 품게 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함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나마 여행객들이 남기는 경제적 가치 정도에만 고개를 주억거리겠지….

홀로코스트 기념비 지하에는 희생당한 유대인에 관한 기록을 보관한 박물관이 있는데 거기 한쪽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이 점이 우리가 꼭 말해야 하는 핵심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4·16 생명안전공원’이 시민들 곁에 세워져야 하는 이유다. 그곳에 희생자들을 모시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8년 6월 4일/ 한겨레신문/ 세상읽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7643.html#cb#csidx3aee5dad80ff57a802c9d920f55ef08 


목, 2018/06/0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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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포토뉴스, 한국 학생들, 전쟁 성노예 여성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사과 요구–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 정부에 요구– 한국과 일본 정부, 질문 회피수요일(28)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전쟁 성노예 여성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 사진을 보도했다. 특히 이 시위는 한-중-일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양국 외교부는 ...
토, 2015/10/3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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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크, 중국과 한국의 생존 ‘위안부’ 여성들 조명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의 얼굴에 그려진 전쟁의 유령들 -‘위안부’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곤 해 -잊혀진 역사가 아니라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할 ‘위안부’ 여성들 더 위크 지는 한국과 중국에 생존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성적노예로 고통을 받은 ‘위안부’ 여성들의 현재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잔인한 전쟁의 유령이 70년이 ...
수, 2016/06/0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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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에 모금과 서명으로 함께 하세요!
 
작년 12월 일본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시도했고 한국정부도 합의를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의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하며 한살림을 비롯한 400여 단체와 시민들이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을 발족하였습니다. 한살림서울은 조합원들과 한 달 동안 모금 및 서명운동을 펼치고자 하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 기간
2월15일~3월15일
 
▶ 참여방법

1. 100억 국민모금 참여

1) 매장에서 모금함에 기금 후원
2) 계좌 입금 (우리은행 1005-201-750558 한살림서울소비자생활협동조합)
3) 장보기에서 기부금물품 [일본’위안부’100억 국민모금] 구입으로 참여
(전화, 인터넷으로 물품 주문시 물품명 [일본’위안부’100억 국민모금]을 선택, 1만원 기부)
4) 공급 포인트(적립금)를 국민모금 기금으로 전환
(장보기 로그인 ▶ 나의장보기정보 ▶ 적립금내역조회 ▶ 적립금사용신청 ▶ [일본’위안 부’100억 국민모금] 선택 ▶ 신청
* 기금은 [일본군위안부정의와 기억재단설립추진위원회]에 전달합니다.
장보기 기금 참여 바로가기
 
 

2. 세계 1억인 서명운동 참여

1) 한살림서울 매장에서 서명
2) 온라인 서명- 세계 1억인 서명 사이트 https://www.womenandwar.net/100million
서명바로가기

 
▶ 문의

02 3498 3737 조직활동지원팀

 

한살림서울 홈페이지
화, 2016/02/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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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그 남자의 소멸

그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상주들이 손님을 맞았다. 영정사진 속 남자도, 눈가가 붉어진 동료들도 이른 나이였다. 상가 안에도 바깥에도 이 죽음이 완전한 타인의 것이 아닌 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김정우 전 지부장(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은 말했다. “(한겨레) 기사 보고 전화했지. 만나서 술 한잔하자고 했어. 그러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이미 마음을 먹은 다음이더라고.” 부질없는 소리겠지만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말렸더라면… 속울음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10년 전 그날들이 없었더라면 평범하게 오늘을 살아냈을 특별해진 삶이 서른번째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그 남자는 며칠 전 <한겨레>에 등장했었다. ‘진압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의 ‘나’ 중 하나였다. 2009년 여름은 잔인했다. 어제까지 한솥밥 먹던 형과 아우가 산 자와 죽은 자가 되어 대치했다. 그들을 먹여 살렸던 볼트와 너트는 무기가 되어 서로를 공격했다. ‘오 필승 코리아’는 동료의 아내가 목숨을 끊은 참혹한 날도 귀를 찢도록 울려 퍼졌다.

2009년 8월5일 옥상 위 8분은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을 심어주었다. 감옥에 끌려갔고 폭도로 불렸다. 갈 곳은 없었다. 받아주는 직장도 없었고 빚은 쌓였다. 가족들의 불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경찰 방패를 막고 있던 것처럼 몸을 말고, 말고, 또 말아도 당신이 있을 자리는 없다고 밀려났다.

얼마 전 경찰 대상 인권교육에서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특공대원을 우연히 만났다. 10년 전 일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타고 내린 옥상 위는 노동자들이 발라놓은 윤활유 그리스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노동자들과 대치했는데 미끄러운 옥상 위에서 넘어진 순간에도 몸을 직각으로 세우는 초능력이 나오더라며 살아남기 위해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다. 감정은 10년 전 것이 아니었다.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아직도 밉다’고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경찰 당국이 10년 동안 당신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는 치유해주었는지를.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떠나간 남자와 경찰 모두에게 10년 전 8분은 과거가 아니었다.

<한겨레> 기사에 달린 어지러운 댓글들을 보았다. “죽을 힘으로 살지 그랬어.” “귀족노조 노동자 말고는 하기 싫었나 보지?” “누구나 사는 게 지옥이야.” 비아냥과 욕설이 뒹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여겼을 것들이다. 도망칠 수 없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책망의 말들에서 징그럽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내는 또 다른 그 남자가 보였다.

어쩌면 농성자였고 경찰이었고 사측의 구사대거나 댓글을 달고 있는, 역할은 달라도 A씨, B씨, C씨…. 정작 책임지는 자들은 아무도 없는 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의 살을 대패로 미는 사람들. 그의 소멸에 책임 있는 자들은 얼굴이 없는데, 얼굴을 숨기려 몸을 동그랗게 말아도 피할 길 없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 그는 없는데 죄책감이 남았다. 고통을 미리 보듬지 못한, 더 투쟁하지 못했나 하는, 어쩌면 외면했던… 그를 인터뷰한 기자 역시 기사화한 것을, 그의 얼굴과 이름 담은 것을 죄스러워했다. 10년 전 옥상 위에도 국가가 없었는데, 오늘도 그렇다.

그러나 언젠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다한 다음, 마지막에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는 사회가 당신 덕분에 왔다고, 인사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을 만들어야지.

김주중씨 잘 가요. 당신 고통을 보살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영면에 드시길.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한겨레 세상읽기 (2018.7.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594.html#csidx243bf9f767a671a9fe8bb2a87c492aa 

화, 2018/07/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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