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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제14기 모금전문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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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제14기 모금전문가학교

익명 (미확인) | 월, 2016/02/01- 16:59

 

550여 명의 모금가 배출, 한국 최대의 모금가 네트워크 구성, 13개의 이론 교육과 워크숍, 실습과 멘토링이 결합된 한국 유일의 통섭 교육 프로그램 <모금전문가학교>는 한국 모금교육의 기준을 만들어 갑니다. 2016년 제 14기를 맞아 최초로 교육생 소소단체를 위한 모금실습으로 전환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예비 모금가 동료들과 11주 동안 ‘모금가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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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심각해지는 현대사회에 대한 문제의 대안으로 ‘마을만들기’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만들기가 성공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지가와 임대료가 상승하고 마을만들기의 주체가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인해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수, 2015/12/1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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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대에 ‘일제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낸 사실이 지난주 ( 관련 기사 보기 – 김무성 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새롭게 나온 가운데, 김용주가 일제에 군용기 헌납 모금 대회에 동참했다는 기록이 또 확인됐다.

뉴스타파 취재결과, 1943년 김용주가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 전 조선 공직자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비행기 <전선공직자호>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도회 의원의 경우 50원을 갹출하기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전선 공직자호>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이 같은 내용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중 친일파 서병조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자료에 나온다. 또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전선공직자대회기록에 자세히 나온다.

서병조는 대구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로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또 김용주와 함께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로, 같은 해에 경상북도 도회의원(관선)으로 선출됐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 40명(관선, 민선 포함) 가운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한 조선인 의원은 단 두 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로 서병조와 김용주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전선공직자대회 기록문건 겉표지와 당시 대회 사진

김용주가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는 1943년 10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다.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말 그대로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징병제 실시를 감사하고,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는 궐기대회였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이 대회에는 고이소 조선총독부터 정무총감까지 대거 나선다.

김용주는 이 대회에서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이라는 표현까지 하는 등 강도높은 친일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관련 기사 –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특히 뉴스타파가 확인한 당시 자료를 보면 대회 참석자들은 ‘전선공직자호(公職者號)’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의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정한다.

아래 글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보고서가 1943년 10월 3일 자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매일신보 기사 내용 발췌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그리고 비행기 헌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별도의 실행위원을 선출하는데, “전선(全鮮)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도회의원의 경우 50 원을 내는 등 모든 공직자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하는데 앞장 설 것을 결의한다. 김용주는 당시 경북도회 의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아래의 글은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이 작성한 당시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전략)

一 비행기헌납에 대해어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전선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각 공직자는 다음의 기준에 의하여 갹출하는 것으로 한다.

도회의원 부회의원 읍회의원 면회의원 학교 조합의원 학교 협의회원
50원 50원 30원 10원 20원 20원
671명 421명 1,456명 22,704명 5,760명 2,325명
33,550원 21,050원 43,680원 227,004원 115,200원 46,500원 487,020원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 작성 전선공직자대회기록 1944년

▲사진설명 :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당시 결의사항, 전선공직자호(군용기) 헌납을 위해 도회의원, 읍회위원 등으로 분류해 할당량을 제시하고 있다.

또 김용주가 참석했던 전선공직자대회 둘째날인 1943년 10월 2일 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공직자 맹서 (公職者 盟誓)”를 특별위원에 위촉해 제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석자들은 폐회 직전 이 맹서를 제송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했다고 돼 있다. 아래는 당시 제정된 맹서의 전문이다.

一. 우리들 공직자는 천황폐하에게 모든 것은 받들어 바친다.

二. 우리들 공직자는 솔선궁행(率先躬行) 바르고 명확하게 일하려고 한다.

三. 우리들 공직자는 협력일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낼 것이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이밖에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참석자 만장일치의 결의로 두 개의 감사전문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각각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와 일본군에 대한 감사였다. 이 감사전문의 수신처는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해군대신 등이었다.

아래는 감사전문을 발췌한 내용이다.

徵兵制施行感謝決議電文 (징병제시행감사결의전문)

본 대회는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오랫동안 대망하고 있던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성의를 표하는 동시에, 어디까지나 이 성과를 擧揚(거양)하는 데 협력할 것을 맹서한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황군(皇軍)에 대한 감사결의전문(感謝決議電文)

본 대회는 이에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황군의 위훈(偉勳)에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意(뜻)를 표하는 동시에 오등(吾等)은 어디까지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내기를 맹서한다. (중략)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김용주는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광고를 아사히 신문이 조선에 배포하는 ‘남선판’과 ‘중선판’에 게재한 사실이 드러난데 이어,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서도 <전선 공직자호> 4대 헌납 운동에 동참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0년 이후, 즉 일제 강점 말기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사실을 또 다시 보여주는 사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1937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벌인 각종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전쟁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바 있다.

 

월, 2015/09/2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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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병점동 구봉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환경을 위해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환경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자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녹색연합에 기부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일, 2015/11/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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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7일 희망제작소는 ‘21세기 실학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발했다. 순수한 민간재정으로 움직이며 남이 잘 하고 있는 일보다는 아무도 관심이 없거나 소홀히 다루는 일들을 먼저 하는 시민의 싱크탱크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굳게 다지며 첫 걸음을 시작했다.

그 후로 3년, 2009년 연례보고서에 당시 박원순 상임이사는 ‘이름을 잘못지어 웬 고생이람!’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다.

“처음 희망제작소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신이 났다. 그냥 OO연구소나 OO재단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따분했을까. 이제 ‘희망’의 ‘제작’은 우리의 운명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시민의 희망을 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니 이제 어쩔 수 없이 그 운명을 따를 수밖에.”

2009년 ‘희망’이 위기를 만났을 때

3년 동안 희망제작소는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면서도 조금씩 성과를 쌓으며 시민의 싱크탱크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불만합창단, 시민창안대회 등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혁신을 실험하고, 작은 기업을 지원하고 청년 사회적기업가를 발굴하며 사회적경제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서 활동했고, npo경영학교, 소셜디자이너스쿨 등 시민사회가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전문교육을 진행했다.

애초에 작정한 대로 ‘남이 하지 않은 일’만 골라서 하느라 고생이 심했지만 이런 것이 바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갔다.

작은 성공의 경험을 더 큰 희망으로 확장하려는 즈음에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무언의 압력이 희망제작소가 하고 있고, 하려는 일들을 모두 막아섰다. 당시 행안부와 3년간 위탁운영 협약을 맺고 시작했던 지역홍보센터는 1년 만에 하루아침에 협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지방자치단체와 맺었던 여러 사업계획도 모두 취소되었다. 밤샘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연구원들은 하나둘 일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출범 3년 만에 철저히 고사될 위기에 처했다.

희망을 품고 시작한 실험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좌초할 것인가. 과연 희망제작소는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시민’이었다.

‘시민의 힘을 믿고 가자!’

이 위기를 시민의 후원금으로 돌파하자고 결의를 하고 모든 연구원이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당시 후원회원은 약 5백여 명이었다.

0505 0202 0404 0101 0303


희망에 투자하실래요?

목표는 시민 후원회원 1만 명을 모으는 것이었다. 시민 1만 명이 후원한다면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탄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 시민참여라는 희망제작소의 취지에도 걸맞은 일이었다.

계획했던 사업이 엎어진 빈 시간은 후원회원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선뜻 지원을 약속한 시사 주간 잡지에 매주 다양한 콘셉트로 희망제작소 상황을 알리는 지면광고를 만들어서 실었다. 상임이사와 연구원들은 전국을 돌면서 강연을 하고 후원을 요청했다. ‘희망제작소를 아름드리나무로 키워 주세요!’라는 후원캠페인도 시작하면서 ‘희망’에 투자해달라고 호소했다.

5백여 명에서 시작한 후원회원은 시민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서 2009년 말에는 약 6천여 명에 이르렀다. 계획한 1만여 명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연구원들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시민과 함께 했던 어떤 사업보다도 시민의 힘을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이제 희망제작소 곁에는 우리가 제대로 하는지, 나태하고 방만하지 않는지 지켜보는 6천여 명의 후원회원이 있다. 과연 ‘희망’의 이름값을 제대로 해낼 것인가. 묵직한 책임감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도록 했다.


여전히 희망이 절실하다

2016년이면 희망제작소는 창립 10주년을 맞이한다. 1004클럽HMC, 강산애 등 희망제작소를 지키는 열혈 후원회원 그룹, 희망탐사대, 문화나눔, 감사의 식탁을 통해서 꾸준하게 만나 온 후원회원이 있어서 늘 든든하고 감사하다.

다사다난한 고비마다 시민 후원회원은 희망제작소를 지켜주는 다정한 벗이었고, 바른 길을 가도록 꾸짖는 준엄한 스승이었다. 가장 좌절했던 시련의 시기에 선뜻 손을 잡아주었던 시민 후원회원이 있었기에 지난 10년을 걸어올 수 있었다.

아직도 희망은 불안하고, ‘희망’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때로는 ‘도대체 희망을 어떻게 만든다는 것이냐’며 의문이 날아오고, ‘희망이 없는 시대에 제발 희망을 보여 달라’고 질책받기도 한다.

헤어날 줄 모르는 수렁에 빠진 경제와 불평등하고 불안한 사회는 점점 후원회원들의 발걸음을 돌아서게 한다. 2010년에 8천여 명에 이르렀던 후원회원은 약 5천여 명까지 줄었다.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재정 안정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는 희망제작소는 지난 10년이 그랬듯이 시민 후원회원의 힘으로 움직이는 싱크탱크라는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걸어 갈 희망의 길을 닦으려고 한다.

희망제작소는 시민 후원회원과 함께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힐 구체적인 정책으로, 더 깊이 있는 시민참여 활동으로, 후원회원과 밀착해서 소통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희망은 여전히 절실하다. 밤하늘의 별이 그렇듯이 어둠이 짙을수록 희망은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다. 희망을 원하는 사회에 답은 여전히 ‘희망’이다.

우리 시대 희망이 간절한 분들께 한번 더 묻고 싶다. 희망에 투자하시겠습니까?

글_ 이원혜(시민사업그룹 연구위원 / [email protected])

화, 2015/08/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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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까? 나에게 맞는 좋은 일의 기준은 무엇일까? 좋은 일이 많아지려면 어떤 사회가 돼야 할까? 나에게 좋은 일, 우리 사회의 좋은 일 기준을 보드게임으로 찾아보자! 100%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에 의해 개발된 보드게임 ‘좋은 일을 찾아라’는 좋은 일의 다섯 가지 유형 중 내가 추구하는 유형을 알아보는 1부, 좋은 일이 많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을 알아보는 2부로 구성됐습니다. 청소년/취업준비생 진로교육, 직업 전환 교육, 노동인권교육, 평생학습, 시민교육 및 워크숍 등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보드게임 판매 수익금은 전액 희망제작소의 공익사업에 다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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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5/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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