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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책임자 불기소처분… “박근혜 정부 4대강 문제 해결 의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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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책임자 불기소처분… “박근혜 정부 4대강 문제 해결 의지 없어”

익명 (미확인) | 월, 2015/12/07- 16:36

4대강복원범국민대책위원회와 4대강조사위원회는 오늘(7일) 서울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4대강 사업 책임자 고발 건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검찰을 규탄했다.

지난 2013년 10월, 3만 9천 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4대강사업국민고발인단은 ‘22조의 혈세를 낭비하고 4대강의 생태계를 파괴했다’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종환 당시 국토부장관 등을 포함한 57명을 서울지검에 배임죄로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며 고발장이 접수된 지 2년 만인 지난 11월 23일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4대강범대위와 4대강조사위는 증거가 없다는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감사원 감사 결과가 4대강 사업이 대운하를 염두에 둔 사업이고 결과적으로 총체적 부실 사업”이라고 지적한 것을 강조하고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결국 박근혜 정부가 4대강 사업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며 검찰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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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에 참여한 이영기 변호사는 “4대강 사업이 대운하 사업이었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검찰 스스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라며 “범죄가 성립하고 안 하고는 법원에서 판단할 문제” 라고 검찰 불기소 결정을 비판했다.

황인철 녹색연합 평화생태국장도 “4대강 사업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단순히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처벌 뿐만 아니라 이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3년, 4대강 마스터플랜 수립의 총괄 책임자였던 김창완 박사는 “당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낙동강에 최소 수심 2.5미터를 유지하는 1안을 올렸으나 청와대로부터 수정지시가 내려와 최소 수심 4-6미터로 수정했다”고 뉴스타파 측에 밝힌 바 있다.

※ 관련기사 : 뉴스타파 스페셜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2’

검찰의 이번 불기소 결정에 대해 4대강복원범국민대책위원회와 4대강조사위원회는 항고 및 재항고를 통해 이명박 전 대통령 등 4대강 사업의 책임자에게 끝까지 형사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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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6/01/0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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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특수 검사를 가리키는 ‘칼잡이’라는 말이 있다. 언론과 검찰은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이상적인 검사를 그리며 ’칼잡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들의 ‘칼’이 유독 정치권력에 무디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지키는 ‘방패’가 되는 모습을 국민들은 자주 봐왔다.

10월30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첫 수습책으로 청와대 수석 비서관 일부를 교체하며 민정수석 자리에 또다시 ‘칼잡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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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위기에 몰린 박근혜가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하면서 가장 먼저 임명한 사람이 최재경 민정수석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검찰을 쥐고 가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한 축으로 주목받고 있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사 시절 ‘칼잡이’로 불렸는데, 후임자 역시 당대 최고의 칼잡이로 불렸던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54·사법연수원 17기)을 내정한 것이다. 

박근혜의 승부수

‘사태 해결을 위한 적임자’와 ‘정치 검사’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 연루 의혹이 제기된 ‘비비케이(BBK) 사건’을 수사하면서 관련자 대부분을 무혐의 처분한 이력 탓에 ‘박 대통령이 MB에 손 내밀었다’는 호사가들의 반응까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김병준 책임 총리 카드’ 이전에 ‘최재경 카드’라는 수를 던진 것은 (두 차례의 사과와 상관없이) 앞으로의 검찰 수사를 컨트롤하고 국정 주도권을 계속 쥐고 가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에 대부분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민정수석은 검찰 등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자리인데 또다시 검사를, 그것도 검찰 내부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 ‘칼잡이’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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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5일 광화문광장에는 20만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최재경 신임 민정수석은 검찰을 콘트롤함으로써 위기에 몰린 박근혜를 지켜야 할 위치에 있다. (사진 출처: http://tadream.tistory.com/16311)

11월5일 20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박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가운데 최 신임 민정수석의 행보는 앞으로의 정국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중 하나다. 

최 신임 민정수석이 박 대통령의 ‘칼’이 돼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할지, 아니면 박 대통령을 지키는 ‘방패’가 될지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TK성골로 승승장구…BBK 무죄 준 정치검사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최 수석은 대구고를 나와 검찰의 TK(대구·경북) 인사로 꼽혀왔다. 친박 핵심인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그는 198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뒤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87년에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김수남 검찰총장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1년 후배다.

그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 대검 수사기획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등 특수수사의 요직을 거치며 검찰 최고의 ‘칼잡이’로 불려왔다. 

최 민정수석을 설명하는데 빠지지 않는 말은 ‘뛰어난 수사능력’, ‘판단력’, ‘후배들의 신망’이다. 검찰을 출입하는 기자들도 대체로 이러한 평가에 동의한다.

‘TK 성골’이라는 배경과 상관없이 실제로 그는 특별수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날렸다. 2006년 대검 중수1과장 때 현대·기아차 비자금 사건 수사를 맡아 정몽구 회장을 구속했고, 론스타 사건 주임검사를 맡았다.

대검 수사기획관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을 구속하며 노 전 대통령 직접 수사의 밑돌을 놓기도 했다. 정치인·공직자·재벌 등 권력을 가진 이들을 겨냥하는 특별수사의 특성상 강직한 성품과 외압에 굴하지 않는 강단이 밑바탕을 깔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는 소탈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검찰 내부 후배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온 것도 눈에 띈다. 이에 검찰 안팎에서 그를 예비 검찰총장으로 꼽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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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4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BBK 사건’과 관련해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해 ‘BBK 사건’ 수사지휘 검사였던 최재경 중앙수사부장이 한상대 검찰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전후로 그의 이름 앞에 ‘정치 검사’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2007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재직 당시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에게 면죄부를 준 BBK의 사건 수사로 그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검찰 TK 라인이 요직을 독점하며 민간인 불법 사찰, 내곡동 사저 사건 등에서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는 수사를 진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의 행보 역시 이러한 흐름과 같이 묶여 평가됐다.

특히 2010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의 민간인을 불법사찰 사건을 수사하며 정치 검사라는 비판을 거세게 받았다. 

2013년 1월 <한겨레> 보도 ( “최재경 중수부장, 사찰 핵심물증 틀어쥐고 시간끌었다” )를 보면 당시 대검 중수부장을 맡고 있던 최 민정수석이 민간인 사찰이 정권 차원의 조직적인 범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핵심증거(USB)의 수사팀 전달을 막은 의혹에 휩싸였다. 

이런 그의 ‘변신’에 대해 당시 한 검찰 관계자는 “비비케이 사건 뒤 야당의 정치적·감정적 비난을 받고 방어 심리 탓인지 생각 자체가 여당 쪽으로 가버린 것 아닌가 싶었다”고 바라보기도 했다.  (‘최재경 지검장, 한때 ‘특수통’ 명성…요직 거치며 승승장구’)

한상대 검찰총장과 충돌…검찰 내 신망 높아

물론 그는 2011년 대검 중수부장 시절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핵심 측근으로 꼽힌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구속하는 등 칼잡이의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검찰 내분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대검 중수부장을 맡고 있던 2012년 12월 중수부 폐지에 맞서 한상대 검찰총장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결국 전주지검장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하기도 했다. 그를 따르는 검찰 후배들이 두터운 신망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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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한상대 검찰총장은 수뢰검사와 성추문 검사, 그리고 중수부 폐지를 둘러싸고 자신에 맞섰던 최재경 중수부장에 대한 ‘보복 감찰’ 논란으로 집단 항명을 받아 사임했다. 한 총장이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떠나는 모습을 최재경 중수부장이 지켜보고 있다.

차기 검찰총장으로 꼽힌 그였지만 그는 2014년 인천지검장을 끝으로 검찰 옷을 벗었다. 세월호 참사 뒤 검경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검거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진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다소 엉뚱한 데서 발목이 잡힌 셈이다.

박근혜의 검찰 될까?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능력에 인격을 더하면 최재경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전설의 특수통’은 ‘의뢰인 박근혜’를 구할 수 있을까”)로 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든 민정수석의 자리에 오를 만한 자격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청와대행은 의미심장하다. 대통령의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고 전국 3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그는 검찰 등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을 맡았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11월2일 <한겨레TV>의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수사능력이 탁월한 검사였다. 아주 훌륭한 검사다. 여러 가지 혈연, 학연, 또 검찰에서 맺어왔던 인간관계, 그런 인연들에서 과연 자유롭게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결국 그의 청와대 입성은 검찰 수사와 국민들의 분노를 막아내는 박 대통령의 방패가 되기 위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수, 2016/11/0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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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옷을 녹조에 담근 뒤 줄에 매달아 놓았다. ⓒ 권우성

[투명카약-낙동에 살어리랏다⑬]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의 성원으로 '김종술 투명카약 선물하기' 프로젝트 목표액을 훨씬 초과 달성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지난 8월 24일부터 2박3일동안 진행한 '낙동에 살어리랏다' 현장 탐사, 기획 보도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낙동에 살어리랏다' 현장 기획 기사를 통해 모금한 후원금은 김종술 기자의 4대강 취재비로 전달합니다. 이번 기획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환경운동연합의 공동 프로젝트였습니다. [편집자말]    [caption id="attachment_153046" align="aligncenter" width="600" class=" "]▲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팀이 24일 오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앞 낙동강에서 투명카약을 타고 녹조 탐사활동을 벌였다.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낙동강 녹조 위를 지나고 있다. ⓒ 권우성 ▲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팀이 24일 오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앞 낙동강에서 투명카약을 타고 녹조 탐사활동을 벌였다.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낙동강 녹조 위를 지나고 있다. ⓒ 권우성[/caption]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 취재 첫날부터 열받았습니다. 지난 8월 24일 아침, 도동서원(대구 달성군) 앞은 녹조 곤죽이 된 채 시궁창 냄새를 풍기면서 죽고 있었습니다. 제 차로 달려가서 플라스틱 양동이를 가져왔습니다. 양동이에 한 가득 녹조를 채워서 선착장 바닥에 냅다 패대기쳤습니다. 이 한 컷의 사진은 'MB여, 라떼 받아라!'라는 제목으로 SNS를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 1000만 원 넘게 후원금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10만인클럽 회원인 김종술입니다. '김종술에게 투명카약 선물하기' 캠페인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지난 보름 동안 많은 독자분들이 제게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게 쪽지를 보내 "카약 한 개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한 조선소 사장님도 계십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초 300만 원을 목표로 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362%의 달성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430명이 1085만 원의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동안의 많은 분들의 성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기획한 2박 3일간의 낙동강 탐사보도를 마쳤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10만인클럽 회원인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에게도 투명카약을 선물했고, 그 투명카약을 타고 그와 함께 돌아본 낙동강 탐사는 지금까지 4대강에서 보아왔던 것과 비교할 때 최악이었습니다. 썩은 강물은 죽처럼 변했습니다. 거미줄을 쳐 놓은 듯 끈적거리는 녹색 끈끈이들은 강의 생명들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어부의 그물은 물고기 대신 큰빗이끼벌레와 죽은 물고기로 가득했습니다. 보에 물을 가두는 바람에 집단으로 죽은 버드나무 군락은 한여름 공포 영화에서나 봄직한 괴기스런 세트장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6월에도 최근 20여 명의 대규모 취재단을 꾸려 '금강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큰빗이끼벌레는 발에 채일 정도로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았습니다.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무등산 수박만한 이끼벌레부터 가로막힌 강물과 지천을 가득 채웠던 녹조, 앙상하게 뼈만 남아 버린 죽은 나무들, 시꺼먼 펄흙에서 꿈틀거리며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실지렁이와 깔따구 유충까지... 3년만에 온 강의 변화치고는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53047" align="aligncenter" width="800" class=" "]▲ 초대형 큰빗이끼벌레, 합친 몸체의 크기가 무려 3m50cm, 공주보 상류 1킬로미터 지점에서 발견. ⓒ 이희훈 ▲ 초대형 큰빗이끼벌레, 합친 몸체의 크기가 무려 3m50cm, 공주보 상류 1킬로미터 지점에서 발견. ⓒ 이희훈[/caption] 그렇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금강에서만 살아가는 저는 지치고 힘들 때면 나들이하듯 낙동강, 영산강, 한강을 찾곤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 투명카약 펀드 제안을 받고 '설마 가능할까'하는 생각에 몇 번을 망설였습니다. 사람들이 4대강 사업을 잊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3차례 거절하다 마지못해 수락했습니다. 태풍 불어도, '비밀 병기' 들고 찾은 낙동강 그런데 하루반나절 만에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00만 원 목표가 순식간에 채워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안 될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저의 등짝을 죽비로 후려쳤습니다. 펀드의 모금액은 날이 갈수록 쌓였고, 제가 알지 못한 분들도 문자와 전화로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낙동강 취재를 기획하고 <오마이뉴스> 상근 및 시민기자로 취재단을 꾸렸습니다. '비밀 병기' 투명카약 두 대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탐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낙동강으로 떠나기 직전에 남북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또 중형급 태풍 고니가 300mm 이상 폭우를 동반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지 않았기에 강행했습니다. '낙동에 살어리랏다' 취재 첫 포인트였던 도동서원은 2013년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의 현장리포트인 <오마이리버-자전거 탐사> 때에도 상근기자와 시민기자들과 함께 묵었던 곳입니다. 수려한 풍광, 사적 제488호이자 김광필 나무로 통하는 400년 된 은행나무는 지친 자전거 취재단의 몸과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그 앞 주차장에서 텐트를 치고 밤늦게까지 주민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방문한 그곳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서원의 비경에 빠지기도 전에 도동나루터 강물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투명카약을 타고 들어간 강물은 더 심각했습니다. 노를 저어도 배를 움직이기가 힘이 들 정도로 곤죽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으로 놀러 오라는 정부도 밉지만 낙동강을 찾았던 MB조차 이런 강물을 먹으라고 했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 옷 입으면 피부병 걸려" [caption id="attachment_153048" align="aligncenter" width="600" class=" "]▲ 흰옷을 녹조에 담근 뒤 줄에 매달아 놓았다. ⓒ 권우성 ▲ 흰옷을 녹조에 담근 뒤 줄에 매달아 놓았다. ⓒ 권우성[/caption] 흰 바지와 티를 강물에 던졌습니다. 천연염색을 하듯 금세 녹조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녹조물 속에 들어가 녹조를 양동이에 퍼담았습니다. 물에서 나왔더니 흰옷이 녹조로 물이 들었습니다. 투명카약은 심각한 녹조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카약 바닥이 온통 녹색으로 훤히 비쳤습니다. 심지어 강에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도 녹조로 염색이 됐습니다. 그 죽음의 강에서 우리나라 고유종이자 멸종위기 1급인 흰수마자 현수막을 카약에 매달고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잠시 뒤에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5마력짜리 선박이 나타나 강물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배의 머리를 둔치에 처박고 모터보트 스크루를 이용해 녹조를 흐트러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자원공사에 고용되어 녹조를 밀어내는 제거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금방 녹조 염색을 마친 옷을 보며, "저 옷 입으면 피부병 걸린다"고 걱정까지 하셨습니다. 첫째날 오후에는 구미보 상류 선산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간다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배를 타고 건져 올린 그물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죽은 물고기와 이끼벌레, 외래종인 블루길과 베스 등이 그물에 간간히 따라 올라왔습니다. 1시간 넘게 어부의 작업을 지켜봤는데, 역시 강은 죽어 있었습니다. 1급수였던 그곳에 녹조가 끼고 낙동강의 최대 쏘가리 어장이라는 곳에서 큰빗이끼벌레와 외래종이...  '이명박근혜'를 위한 녹조 레시피   [caption id="attachment_153049" align="aligncenter" width="600" class=" "]▲ 지난 24일 오후 낙동강에서 구한 녹조와 큰빗이끼벌레로 MB를 위한 특별한 ‘국밥’을 만들었다 ⓒ 권우성 ▲ 지난 24일 오후 낙동강에서 구한 녹조와 큰빗이끼벌레로 MB를 위한 특별한 ‘국밥’을 만들었다 ⓒ 권우성[/caption] 뒷산의 가랑잎보다도 많았다던 그 많은 물고기는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1급수였던 물속 그물에 더덕더덕 붙은 큰빗이끼벌레를 따서 '녹조 국밥'을 만들었습니다. 어부의 탄식이 흘러나오는 강가에 앉아서 밥 말아먹듯이 거짓말을 해 온 '이명박근혜'의 국밥을 퍼포먼스 했습니다.  그날 밤, 오전 4시가 되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온몸이 가려웠습니다. 화가 치밀어 녹조물에 들어갔던 대가였습니다. 무릎에도 파스를 붙였습니다. 손발이 뜨거워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찬물 찜질을 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날은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아침에 바깥으로 나와보니 태풍 고니가 몰고 온 비가 차량 위에 묶어 놓은 투명카약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차가 신호등에 멈춰설 때마다 카약 속 빗물은 차의 유리창을 때렸습니다. 그렇게 구미보 하류 1.5km 지점의 감천 합수부를 찾았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 가려고 30kg 가까이 되는 카약을 들고 1km 넘게 걸어서 강물속에 집어넣었는데, 이번에는 수공 직원이 가로막았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수문을 개방할 수도 있기에 위험하다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1km가 넘는 길을 카약을 들고 철수해야 했습니다. 괴기영화 세트장 같이 검게 죽어있는 버드나무들 [caption id="attachment_153050" align="aligncenter" width="600" class=" "]▲ 강정고령보 담수 이후 물이 차올라 버드나무들이 집단으로 수장되었다. ⓒ 이희훈 ▲ 강정고령보 담수 이후 물이 차올라 버드나무들이 집단으로 수장되었다. ⓒ 이희훈[/caption] 경북 왜관 하빈 양수장 앞에 갔더니 바다에서처럼 파도가 쳤습니다. 무섭기도 했습니다. 버드나무 집단 고사지였습니다. 보에 물을 채워서 낙동강의 수위가 올라가서 벌어진 일입니다. 푸른 옷을 입고 있어야 할 버드나무들은 물 위로 목만 내민 채 검게 죽어 있었습니다. 물속은 더 참혹했습니다. 두려움에 도망치듯 괴기영화 세트장같은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마지막 날, 감천 합수부를 다시 찾았습니다. 모래밭을 1km쯤 걸어 들어갔습니다. 3년 전 MB가 수심 6m로 준설을 했던 곳입니다. 낙동강 본류의 과도한 준설로 지천의 모래가 빨려들어가면서 합수부는 모래섬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는 대자연의 포용력 앞에 선 우리들. 그곳에 뛰어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삼강전망대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낙동강, 그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투명카약을 띄웠습니다. 강의 유속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랐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노를 저었지만 카약은 자꾸만 뒤로만 밀립니다. 무릎 정도의 수심에 강물로 뛰어들어 카약을 밀며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물장구도 치고 한바탕 뒹굴었습니다. 낙동강 지킴이의 뜨거운 포옹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노을 지는 강물은 시시각각 변하다가 황금빛을 띠었습니다. 마지막 햇살에 모래사장도 온통 황금 덩어리였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름다운 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2박 3일간의 낙동강 탐사 취재를 마쳤습니다. 제 잔소리에 시달리던 정수근 처장이 저를 살짝 안아줍니다. 제가 금강을 혼자 거닐 때 낙동강을 묵묵하게 지켜온 그의 품이 참 따뜻했습니다. 저는 지금 금강으로 돌아와 강변을 걷고 있습니다. 투명카약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카메라와 취재수첩이 제가 가진 무기의 전부였습니다. 이제 국민 성금으로 만든 비밀병기가 생겼습니다. 제 차의 지붕에 매달린 그 녀석을 힐끗힐끗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MB 4대강'에 맞설 무기이지만, 또 수백 명의 격려와 응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전 이제 금강을 혼자 걷는 일이 없을 겁니다.  조만간 투명 카약 한 개를 들고, 아니 수백 명의 독자들과 함께 세종시부터 서천하굿둑까지 탐사 취재를 하려고 합니다. 투명 카약의 품속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금강의 생생한 모습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혼자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성금을 보내주시고 지켜봐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예전보다 훨씬 화력이 막강해진 비밀병기를 타고 금강에서 '4대강 전투'를 계속하겠습니다.   
목, 2015/09/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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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박근혜와 비선실세 최순실이 만들어낸 사상초유의 국정농단에 온 국민은 분노했다.

4개월에 걸친 검찰과 특검 수사로 박근혜 정권의 민낯이 드러났다. 수사결과, 대통령은 최순실의 영업사원에 불과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 문제로 불거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목사 최태민으로 시작된 관계가, 대통령 박근혜와 최태민의 딸 최순실의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박근혜는 마지막까지 의혹을 부인했다. 

뉴스타파는 지난 두 달간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관계를 추적했다. 이들의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했고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모았다. 그 결과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가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얽히고 설켜 살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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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육영수 숭모회’ 회장을 지낸 이순희(89)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자다. 1937년 문경보통학교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에도 참여했던 그는 스승인 박정희의 공적을 기리고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90년에는 박정희 지지자 등을 모아 숭모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씨는 박정희의 자녀들과는 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1990년에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을 재단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이 씨가 스승의 딸에게 등을 돌린 건 모두 최태민 목사 때문이었다. 그는 최태민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했다. 이 씨에 이어 숭모회 회장을 맡았던 이영도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1980년대 최태민은 육영재단에 아방궁을 차려놓고 전횡을 일삼았다.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 육영재단을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태민을 박근혜로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숭모회를 만들었다.”

(이영도 / 전 숭모회 회장)

박근혜를 육영재단에서 쫓아내기 1년 전인 1989년 11월, 이순희 씨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에게 최태민의 전횡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큰 영애님’으로 시작하는 6장 분량의 편지에는 박정희 유가족의 생활과 육영재단 문제를 걱정하는 이 씨의 간절한 마음이 빼곡히 담겼다.

“최 회장(최태민) 님에 대하여,

최 회장님이 큰 영애(박근혜)를 진실로 위하신다면, 표면에 나서서 누구하고든 큰 영애와 화합을 해 협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최 회장님이 큰 영애(박근혜)님의 막후인물로서 큰 영애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으로 (육영재단 직원들은) 생각들을 하고 별에별 말들을 다하고…”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의 편지 / 1989년 11월)

전 박정희 숭모회장이 남긴 4시간 30분 육성증언

초등학교 시절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또 그 자녀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순희 씨는 2012년 대선 직전, 4시간 30분 분량의 육성 증언을 남겼다. 이 씨가 보고 들었던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 육영재단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고스란히 담겼다. 처음 공개되는 이 증언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 씨는 1989년 경 최태민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육영재단에서 같은 방을 썼다. 그 방에서 최태민을 처음 만났다. 방에 들어가니 최태민은 다리를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자빠져 있었다.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육성 증언)

이씨의 눈에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절대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박근혜는 최태민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했다. ‘최태민이 대체 뭐냐’고 따져 물었더니, 박근혜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육성 증언)

이 씨는 경북 문경에 소재한 박정희 기념관 ‘청운각’ 문제로도 박근혜, 최태민과 갈등을 빚었다. 청운각은 1930년대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하숙했던 집이다. 1983년경 이순희 씨가 사비를 들여 사들여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과 제단을 설치한 뒤 일반에 개방했다.

 그런데 1989년 8월, 박정희 육영수 추모사업회가 보낸 한 장의 통고문이 갈등을 일으켰다.  통고문을 보낸 사람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였다. 통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청운각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정과 제단을 철거하고, 이 통고를 무시하면 청운각에 대한 폐문조치를 하겠다.”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 통고문/ 1989년 8월)

박근혜는 왜 기념관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을 치우라고 했을까. 통고문을 받은 뒤 화가 난 이순희 씨는  박근혜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놀라웠다. 박근혜는 모두 최태민의 뜻이니,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우상숭배이니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최태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이순희 씨는 느꼈다.

“(박근혜가 하는 말이) 저기 최태민이 기분이 상해가 있으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고 했다. 최태민의 기분이 좀 좋아지면 다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우상숭배니까 하지 말라고…”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증언 / 1989년)

이 씨의 주장은 다른 육영재단 관계자의 증언과도 유사했다. 겉으로는 박근혜가 이사장이었지만, 육영재단이나 박정희 추모사업회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 건 최태민이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이사장은 아무 것도 몰랐어요. 최태민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조OO 전 육영재단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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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서울 신당동의 박정희 대통령 자택. 5.16 쿠데타가 기획됐고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 일가가 살았던 집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청와대를 떠난 20대의 박근혜는 두 동생과 함께 이 집으로 돌아왔다. 1982년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이 집에 살았다. 그런데 그 후 이 집을 지키고 관리한 건 최태민이었다. 최태민은 조카인 최용석 씨에게 관리를 맡겼다. 최용석 씨는 1989년 4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신당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86년, 최용석 씨는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영남대에서도 일했다. 역시 큰아버지인 최태민이 시킨 일이었다. 그가 맡았던 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품 관리. 대부분 박근혜가 영남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박근혜에게 최태민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까지도 맡길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최태민과의 관계 때문에 여러번 곤욕을 치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때는 최태민과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박근혜는 발끈했다.  

“(최태민과의 사이에) 만약 애가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그 애를 데리고 와도 좋습니다. 제가 DNA 검사도 다 해 주겠어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그러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계속됐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의심을 살만한 관계를 가져왔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모두 1980년대 후반,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던 때의 증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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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 청문회에서 박근혜는 최순실과의 관계도 부인했다. 최순실 씨가 소유한 수백억원 대 재산이 육영재단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자, “천부당만부당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와 최순실이 공모한 국정농단이 확인되면서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와의 끊을 수 없는 40년 인연은 결국 베일을 벗었다. 지난 1월 16일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최순실은 대통령과의 관계를 묻는 재판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한때는 대학시절에 (박근혜 대통령을) 존경했고, 많이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옆에 있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순실 헌법재판소 증언 / 2017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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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최태민이 처음 만난 건 1975년경이다.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직후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 돼 대한구국선교단이란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이후 이 단체를 모태로 구국여성봉사단(새마음 봉사단)이 만들어졌다. 박근혜와 최태민은 총재, 명예총재 같은 직함을 가지고 활동했다.

이들이 같이 움직일 당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이었다. 박근혜가 총재로 있던 구국여성봉사단 본부가 있던 곳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은 이 곳에 노인전문병원인 새마음종합병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폐쇄등기부 등본을 확인해 봤더니, 1977년 구국여성봉사단이 이 땅을 증여받은 걸로 나왔다. 증여한 사람은 최태민. 최태민은 증여 한 해 전인 1976년 이 땅을 매입했다. 당시 이 부동산의 감정평가액은 10억 2천만원이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300억원이 넘는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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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여성봉사단에 기증된 이후 이 땅의 소유주는 여러번 바뀌었다. 하지만 모두 박근혜, 최태민이 지배, 운영하는 법인이었다. 이 땅을 최종적으로 매각하면서 생긴 자금은 1985년 최태민의 딸인 최순실이 유치원을 설립할 당시 초기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공동 소유한 거액의 자금은 최순실 재산 형성의 종잣돈이었던 셈이 된다. 박근혜-최태민-최순실로 이어진 경제공동체를 설명해 줄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구국여성봉사단 자금이 최순실 재산의 시드머니?  

그렇다면 박근혜와 최태민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해 구국봉사단을 만들고 부동산을 사들였던 것일까. 그 단서는 1979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의 일명 ‘최태민 보고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던 이 보고서에는 최태민이 돈을 모은 과정과 방법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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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최태민 보고서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여 구국선교를 빙자, 매사 박근혜 명의를 매명하여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금품징수 등 이권단체로 치부.”

1978년 7월 14일 운영비 조달목적으로 대한통운 (주) 회장 최원석 등 10명의 실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 운영위원회를 발족한 이래 계속 증원하여 1979년 10월에는 국내 재벌급 실업인을 거의 망라한 60명선에 육박, 1인당 입단찬조비 2000~5000만원에다 매월 200만원씩 운영자금을 조달.”

(중앙정보부 ‘최태민 보고서’ / 1979년)

최태민의 비서였던 채병률 씨의 증언도 최태민 보고서 내용을 뒷받침한다. 채 씨는 최근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구국봉사단을 만들던 1975년 경, 최태민이 기업 대표들에게서 7억원이 넘는 거액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재벌기업을 협박해 700억 원 넘는 돈을 뜯어내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을 설립한 뒤, 최순실이 운영케 해 막대한 이권을 챙겨준 것과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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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박근혜를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몰아낼 당시, 이순희 숭모회장은 전국을 돌며 최태민 일가의 재산을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최태민이 육영재단 이사장인 박근혜를 좌지우지하면서 육영재단 자금을 빼돌려 부를 축적했다고 의심했다. 이 씨는 최태민의 호적등본을 단서로 가계도를 만들었고, 등기부등본을 일일이 확인해 가며 최태민 일가의 재산형성 과정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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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든 이 보고서는 최태민 일가의 재산관계를 추적한 첫 민간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씨가 만든 보고서에는 최태민과 부인 임선이 소유 부동산은 물론 최순득, 장석칠 등 최태민의 딸과 사위 명의의 재산목록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이 씨는 보고서 말미에 “최태민 일가가 뚜렷한 소득원이 없이 강남 요지의 주택과 빌딩을 취득했다”고 적었다.

뉴스타파는 이순희 씨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 씨를 찾아가 인터뷰했다.

최 씨는 최태민과 그의 넷째 부인 사이에서 1954년 태어난 사람으로 최순실의 이복오빠다. 그는 최태민이 박근혜와 함께 운영한 구국여성봉사단, 영남대 등에서 많은 돈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구국봉사단을 운영하던 1970년대 후반이 최태민 일가에게는 그야말로 꽃 피는 봄날이었다고 말했다. 이순희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구국여성봉사단에서 그 자산이 (우리집으로) 넘어왔다. 영남대학 같은 곳에서도 많은 돈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땅도 사기도 했다. 1975년도부터 우리 집은 잘 살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꽃피는 봄날이었다. 아버지가 가져온 돈이 족히 1000억 원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재석 / 최태민 아들)

 최재석 씨는 최태민이 살아 생전 그 많은 돈으로 박근혜를 대통령 만드는데 쓰려고 했다는 흥미로운 주장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만들기 프로젝트가 가동됐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금고에 쌓아놓은 돈, 외화, 금덩어리들을 보여주면서 ‘박근혜를 대통령 만드는데  선거자금이 1조 정도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많이 하셨다.”

(최재석 / 최태민 아들)

최태민과 가까웠던 전기영 목사의 증언도 비슷했다. 전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최태민과 10년 이상 교류했던 사람이다.  

“최태민 씨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됩니다. 전국에 있는 70만명 근화봉사단 단원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 겁니다. 목사님이 총책임을 맡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흥은행 안국동 지점에 13억이 있으니 그 돈을 쓰면 된다고 했다.”

(전기영 목사 / 최태민 지인)

최태민은 199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뒤인 1997년, 박근혜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뒤에도 박근혜 곁에는 언제나 최태민의 그림자가 있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그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선거를 도왔다.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 씨도 대구로 내려가 선거를 지휘했다. 선거 자금은 최순실 측이 마련했다. 임선이 씨의 운전기사였던 A 씨는 지난해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임선이의 지시를 받고 박근혜 쪽에 돈을 실어 날랐다. 2억5000만 원 정도를 가방에 나눠 들고 가지고 갔다. 박근혜와 임선이 씨가 같이 쓰던 아파트로 돈을 갖다 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들의 증언은 모두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가 사실상 한 몸처럼 경제공동체를 꾸려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1975년 구국선교단을 만들 때부터, 또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 사이의 재산공유가 계속됐음을 확인시켜 준다.  

대통령 박근혜는 최태민의 딸 최순실에게 국가기밀을 유출했을 뿐 아니라, 서로 공모해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박근혜가 주도한 미르와 K스포츠 두 재단에 200억 원 넘는 돈을 출연하고, 추가로 최순실 측에 236억 원을 갖다 바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제3자 뇌물) 혐의로 구속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의 경제공동체 문제는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뇌관이었다. 사건의 본질을 관통하는 혐의일 뿐 아니라,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결정적인 혐의가 됐다. 특검이 수사기간 내내 이 문제에 매달려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최순실은 여전히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마치 입을 맞춘 듯 움직였다. 지난달 25일, 박근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 헌재에 제출한 서면 최후변론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희한하게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특검이) 만들어 냈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엮어도 너무 어거지로 엮었다.”

(박근혜 대통령 / 1월 25일 정규재 인터뷰)

“최순실은 지난 40년간 옷가지 등 소소한 일 도와준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 등 치르며 저의 메시지를 전했다.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 2월 27일 헌법재판소 최후변론)

그러나 박근혜가 최순실과 공모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대통령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었다.

이제 남은 건 뇌물을 받은 사람, 즉 대통령 박근혜를 처벌하는 것이다. 수사기간의 한계로 특검이 못했다면, 검찰이 다시 해야 한다. 박근혜-최태민-최순실로 40년 간 이어져 온 기괴한 혹세무민과 사상 초유 국정농단의 뿌리와 그 비호세력도 철저히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 다시 정의가 설 수 있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취재·연출 : 한상진 강민수

내레이션 : 안종덕

촬영 : 최형석 김기철 신영철

편집 : 박서영

수, 2017/03/0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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