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327] 교과서 전쟁, 야권이 놓치고 있는 것은… :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필요하다
익명 (미확인) 님|수, 2015/10/28- 12:36
교과서 전쟁, 야권이 놓치고 있는 것은…
[시민정치시평]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필요하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정부와 여당이 뜬금없고 어처구니없는 '역사 전쟁'을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정치적 합리성도 기본적인 양식도 없다. 역사학계 전체를 좌파라고 매도하질 않나, 자신들이 검정한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친다고 생떼를 쓰지 않나, 막가파도 이런 식의 막무가내 몽니는 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전쟁이 시작된 데 대해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이건 그냥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신원(伸冤) 투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지극히 위험한 정치와 교육의 사사화(私事化)다. 나라 꼴이 이게 뭔가 모르겠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권이 저항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어쩐지 길거리에 나온 어린 학생들만도 못한 인식으로 이 사태에 대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뜸 '역사 왜곡'이 문제란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교과서가 역사 왜곡을 할 것이라서 반대한단다. 일단 논리적 허점부터 너무 분명해서, 당장 반박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이 친일을 했던 사실을 덮자고 이 모든 사단이 났다는 둥 하면서 열을 올린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모종의 음모론 이상이 되기 힘들 텐데도 자꾸 집권세력의 이념전쟁 프레임에 갇히려고만 한다. 어찌 이리도 무능한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신원투쟁을 멈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교과서 국정화를 막을 마땅한 제도적-정치적 수단도 없는 것 같다. 야권은 '노동 개악' 같은 다른 중요한 의제들을 제쳐 놓고 마냥 이 문제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일 터인 데다 제대로 싸움을 이끌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우리 시민들이 나서 정부 여당이 국정화 방침을 철회하도록 계속 압력을 가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반대의 초점을 좀 더 예리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뜬금없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집권 세력이 이번 전쟁을 시작하면서 가지고 들어가는 강한 교육적 시각이 하나 있다. 바로 교과서를 통해 어린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근본 시각이다. 그 올바른 역사가 무엇이든, 이런 시각이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배우는 학생들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그저 교과서와 교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사고와 지식을 주입받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전제된다. 학생들이 아직 미숙하기는 해도 온전하게 존엄한 시민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 야권이나 시민사회의 일부처럼 계속 역사 왜곡이나 '친일 미화' 따위에만 반대의 초점을 설정한다면, 이는 사실 집권 세력과 동일한 근본 시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린 학생들이 국정 교과서 따위를 통해 기성세대가 원하는 방향의 생각을 갖도록 하겠다는 그와 같은 '주입식 교화 교육'에 대한 발상은 사실 집권 세력이 가령 전교조가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로 학생들을 좌경화시킨다고 비난할 때에도 바탕에 깔고 있는 교육관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발상은 결국 교육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근본에서 학생들을 저마다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생각의 참된 주인이 되고, 그리하여 참된 시민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 역사 전쟁의 격렬한 외양 뒤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서 진짜로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역사 왜곡이나 친일 미화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자라나는 학생들의 '민주적 시민성'을 왜곡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미래의 시민들을 저마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세력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면화한 '신민(臣民)'으로 길러내겠다는 은폐된 정치적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이는 결국 우리 학생들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그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때 수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갔던 그 '가만히 있으라' 교육을 더 강도를 높여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싸워야 한다.
교육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한 가지 시각만을 강요하고 대안적 관점들을 숨기는 것은 결국 피교육자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조작 가능한 '사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어리더라도 우리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교육은 역사 문제든 다른 사회 문제든 다양한 시각과 논점을 제시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그 기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소모적인 역사 전쟁이나 이념전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이라도 민주공화국에서는 역사 문제처럼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이견이 분분한 문제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구성원 모두가 신뢰할 만한 원칙을 찾아내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다. 통일 전의 분단국가 독일에서도 교육 문제를 두고 우리와 비슷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 좌우 진영은 서로에 대해 '의식화' 또는 '우민화' 교육을 그만두라며 날 선 이념전쟁을 치렀더랬다. 이 와중에 1976년 독일의 한 소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좌우 진영을 망라하는 정치가, 연구자, 교육자가 함께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우리나라에서는 '민주 시민 교육'이라고 부르는 '정치 교육'의 원칙을 합의해 내었다.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협약)'다.
이 합의에 따르면, 정치 교육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하며(강제 또는 교화의 금지),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논쟁성에 대한 요청),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분석능력 및 학생의 이해관계 중심) 해야 한다. 이 합의는 단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민주 시민 교육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영국에서는 아예 교육법 안에 유사한 원칙들을 담았다.
이 합의는 그 핵심에서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교육을 지양하고,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쟁을 교실에서 재현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끔 성장시키겠다는 정신의 표현이다. 정치보다 교육적 관점이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의 표현으로, 우리 헌법에 명기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도(흔히 정치적 사안에 대한 회피의 원칙으로 오해되지만) 바로 이 점을 지시한다고 해야 한다.
정치권, 특히 야권에 권고하고 싶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는 단호히 반대하되, 엉뚱한 역사 전쟁 프레임에 말려 허우적거리지 말고 올바른 프레임을 설정하여 시민사회 및 학계 등과 함께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 같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초정파적 합의기구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앞장서라고 말이다. 핏대 서린 이념전쟁에 계속 휘말리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야권이 우리의 소중한 미래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진정성과 성숙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가졌음을 입증하는 더 나은 길일 것이다. 솔로몬 재판에서 진짜 아기 엄마는 아기를 반 토막 내서 나누어 갖자는 제안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진짜임을 증명했다. 자칫 나라를 죽일 수도 있는 이 치졸한 역사 전쟁의 프레임은 따르지 않고 조용히 거부함으로써 진짜 '애국 세력'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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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지역 일부 기초자치단체들이 시를 대표하는 ‘시가(巿歌)’ 사용 중단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 시가는 친일인명부에 등록된 김동진씨가 모두 작곡한 것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산시는 시가인 ‘안산시민의 노래’를 사용중단하기로 했다고 7일 밝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다.
‘안산시민의 노래’ 작곡자는 김동진씨로 1930~40년대 만주작곡연구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 건설을 찬양하는 ‘건국 10주년 경축고’ 등을 작곡한 바 있다. 이같은 사실이 확인돼 민족문제연구소가 1989년 개정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됐다.
이 노래는 1989년 10월 안산시가 시(巿)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곡으로 당시 김씨가 직접 작곡했다고 한다. 시는 작사가는 친일행적이 없는 만큼 가사는 그대로 곡만 바꿀지, 가사와 곡 모두 바꿀지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 친일파 작곡가인 김동진씨가 작곡한 ‘안산시민의 노래’ 악보. 안신시 홈페이지 캡처
앞서 지난달 28일 여주시와 포천시가 시가인 ‘여주의 노래’, ‘포천시민의 노래’ 사용을 각각 중단한 바 있다. 이들 곡 역시 김씨가 작곡한 것이다.
경기도내에서는 이들 3곳 외에 △의정부(의정부시 시가) △동두천(동두천시민의 노래) △고양(고양시의 노래) △오산(시민의 노래) △안양(안양시민의 노래) 등 5곳이 더 있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뜿깊은 해”라며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시가 사용을 중단하고 우리 시의 자랑과 비전을 담은 새로운 노래를 제정해 친일잔재 청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제주4·3 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4·3 희생자유족회는 오는 3월 19일 제주 KAL호텔에서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 ⓒ일간제주
특히, 이번 행사에는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참석해 과거사 해결에 대한 국제 기준 및 전환기적 정의 조치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의 민주화와 과거사 정리에 대해 발표를 진행해 나가게 된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와 성과를 짚어 보고 향후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에 행사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일본군 성노예제, 일제 식민지기 강제동원,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군부독재 정권의 국가폭력, 형제복지원과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수용 문제가 다뤄질 예정”이라며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계성 한국전쟁유족회 대전형무소 재소자 유족, 강종건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 등이 참석해 피해자 증언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어 “특히, 무엇보다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소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이를 환기시키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나갈 계획”아라고 덧붙여 피력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4·9평화통일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제주다크투어, (재)진실의 힘,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공동 주관한다.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편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7일 (목요일)
■ 대담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입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부터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역사를 되짚어 볼 건데요. 첫 시간에 해볼 얘기는 만세운동을 막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친일파 박중양과 ‘자제단’에 대해서 도움 말씀 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권시용)> 네, 안녕하세요. 권시용입니다.◇ 이동형> 3.1절 특집을 시작하면서 예민할 수 있는 친일 문제를 먼저 꺼낸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흔히 그럽니다. 우리 민족은 민족반역자를 한 번도 처단해 본 역사가 없다. 동의하십니까?
◆ 권시용> 네, 불행하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일 큰 이유는 반민특위의 실패겠죠?
◆ 권시용> 그렇죠. 첫 번째 기회였는데.
◇ 이동형>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요?
◆ 권시용> 그래도 최근에 또 역사적인 처벌, 이런 것들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을 불가능할 거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이었으면 그때가 딱 한 번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좌절된 것도 역시 친일파들, 민족 반역자들의 방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권시용>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이 그들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부합해서 친일 반역자, 친일 협력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이죠.
◇ 이동형> 미군정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독립 역사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 권시용>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요.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효율성을 따졌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 친일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고유 명사는 친일파로 굳어졌으니까요.
◆ 권시용> 그 용어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요. 그 속에는 매국노, 매국적, 반역자, 일제 협력자, 반민족 행위자 등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됐기 때문에 나름의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이동형>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처벌을 위해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요. 2005년 노무현 시기에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또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 이 모든 게 친일파 처벌, 혹은 역사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처벌할 것이냐.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어디까지를 우리가 친일이라고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은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굳이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이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거물급 친일파, 대표적인 친일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이들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적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어떤 행적이 친일 반민족 행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거기에 대한 합의, 이런 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한 사람이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넘어간 사람도 있고, 다양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박중양인데, 박중양이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권시용> 박중양은 일찍 일본 유학을 갔던 사람이에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에 러일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을 위해서 복무했던 경력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1906년 무렵부터 강제 병합되기까지 대구 군수를 지냈고, 평안북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이런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기간 동안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들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던 행적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강제 병합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지사, 중추원 찬의, 중추원 부의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탄탄대로 출셋길을 달렸던 인물입니다.
◇ 이동형> 협력의 대가로 그런 것을 받았겠죠.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3.1운동도 비난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리고 4월 6일 자제단을 대구에서 처음 조직했다고 하는데, 이 자제단은 어떤 조직입니까?
◆ 권시용> 자제단은 말 그대로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던 3.1운동, 만세시위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인들로 조선인들을 막자, 이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만세시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던 것이죠.
◇ 이동형>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에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거네요?
◆ 권시용> 네. 그때부터. 처음으로 대구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거죠.
◇ 이동형> 박중양은 당연히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당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요?
◆ 권시용> 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체포당할 때, 조사받을 때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기록도 있고요. 체포당할 때도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다, 할 테면 해봐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여기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던 박중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서 박중양은 이렇게 강변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나는 시대의 변혁의 희생양으로 무능력한 조선 왕족보다야 문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였어. 한일 병합을 주도하는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요. 어차피 이완용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책임졌을 뿐이오. 만국을 맞이하여 자살했던 순국자들의 의거는 사상계에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망정, 부국제민의 방도로 보기에는 힘든 것 아니오?
◇ 이동형> 네, 순국자들의 의거까지 폄하하는 이런 일을 벌였는데, 이미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반민특위가 조직돼서 체포당하고, 조사받고, 재판받는데, 아직도 일제인 줄 알았을까요? 왜 이렇게 뻔뻔하죠?
◆ 권시용>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당시에 경험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근대화. 그런 것에 대한 좋은 기억?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융성은 실로 불이 난 것 같았다. 드디어 삼대 강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한국이 백인의 식민 지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일본 제국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그리고 본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절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무능력한 조선보다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고,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에서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념형 친일파,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 권시용> 저도 동의합니다.
◇ 이동형> 조금 더 설명해주시죠.
◆ 권시용>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근대화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가는 길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동형> 어쨌든 이 사람도 반민특위가 실패함으로 해서 당연히 풀려날 수 있었고요. 그리고 59년에 사망했는데, 이때가 86세였어요. 천수를 다 누렸다.
◆ 권시용> 다 누렸죠.
◇ 이동형>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19세 때, 20대에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천수를 누리면서, 그것도 86세 때도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한 번도 이분은 심판이랄까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요?
◆ 권시용>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신문 기사를 보면, 70이 다 된 일본인 아내가 찾아와서 우리 영감이 추운 데 떨고 있으니까 이불을 조금 넣어달라,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게 신문 기사에 실려 있거든요.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맞는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동형> 네, 박중양은 일기와 해방 후에는 ‘술회’라는 회고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의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 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 시대의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 이동형> 그런데 최근 들어서도 박중양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때문에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 권시용>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죠.
◇ 이동형> 참 안타깝네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자제단 살짝 이야기했는데요. 1919년 4월 6일에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박중양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게 퍼졌겠네요?
◆ 권시용> 그렇죠.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4월 6일에 대구 자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어서 경북에서는 4월 10일에 안동, 11일에 성주, 16일에는 군위, 의성, 영일, 영천, 칠곡, 김천, 선산, 이렇게 곳곳에 자제단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도, 평안북도에서는 4월 8일, 함경남도에서는 4월 10일, 그다음에 전라남도에서는 4월 11일, 강원도에서는 4월 13일, 경기도에서도 4월 13일, 충북에서는 4월 15일부터 전라북도에서는 4월 20일부터 자제단, 자성단, 자위단 등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곳곳에서 만들어졌고요. 작년에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어요. 이양희 선생님의 논문인데요. 거기 보면, 전국에 138개 군이 넘는 지역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는 연구를 하셨고요. 면 단위에서도 그런 자제단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 이동형>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을 감시하겠다, 이런 거잖습니까? 서글픈 일이었는데, 이런 자제단을 박중양이 만들었다, 그리고 다그치고 설득했다는 건데요. 특히 경북 지역을 누비면서.
◆ 권시용> 네, 아까 쭉 경북 지역에 만들어진 자제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만드는 데 박중양의 역할이 컸어요. 먼저 대구 자제단을 만들고 나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역을 누비면서 설득, 다그치는 역할, 이런 역할들을 했거든요. 그 결과 이렇게 곳곳에서 자제단이 만들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만세운동도 하지 말고, 독립운동도 하지 마라.
◆ 권시용> 일본의 통치가 좋은 거다.
◇ 이동형> 방금 박중양이 경북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자제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가 있습니다.
◆ 성우> 백작 데라우치 원수 각하. 소생은 지난 15일, 대구를 출발하여 김천, 개령, 선산, 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잘 타일러 이르고, 어제 21일 대구로 돌아와서 도청에서 순회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현재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병사가 곳곳에 산재하여 총칼로 다스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계속 불량자들을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를 설득하여 양민을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불량자를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는 설득하겠다. 어떻게 보면 충성 편지처럼도 보이고요.
◆ 권시용> 충성 편지에요.
◇ 이동형> 자랑 편지인 것 같아요.
◆ 권시용> 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에 있었어요. 거기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 이동형>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도 했잖아요?
◆ 권시용> 맞아요.
◇ 이동형>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알아봐 달라?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래요. 불량자를 청소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무서운데, 결국은 3.1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이잖아요?
◆ 권시용>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자제단은 만세시위를 억압, 탄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 권시용>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자제단 규칙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 전라북도, 함경북도, 황해도 것이 남아 있고요. 군 단위에서도 남아 있는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구 자제단 규약도 남아 있어요. 이 규칙, 규약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동형>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서 서로서로 감시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만약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신고를 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포상이 있을 테고요.
◆ 권시용> 네, 밀고해라.
◇ 이동형> 일제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것인데요. 이런 활동의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제단 서명에 날인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신문 제26호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세계는 인도와 정의로서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고, 일본은 위력과 잔인함으로써 우리는 종속한다. 아! 우리가 적의 폭력 아래 노예의 치욕을 인내한 게 10년이라. 일본은 죄 없는 우리를 포살과 방화와 감금과 자치단 등 가지가기의 악계로서 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소위 자제단이라 거짓으로 칭하여 강제적 위력적으로 협박 시행하여 날인을 받으나 날인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에게 가당키나 할 것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여,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분발하여 적의 압박에 굴복하지 말라. 일시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날인하면, 수십의 구속자가 장래에 화를 면할 수 없다. 일시의 평화는 영구의 화인 것을 자각하여 면면촌촌의 단천을 배척하는 것은 독립자의 합당한 행위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공화국 정부를 세계가 용인하였다. 대사업이 빨리 성취하지 않는 것을 낙담하지 말라.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임을 기억하라.
◇ 이동형> 네, 가슴 뭉클한 그런 내용인데요. 조선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이었죠?
◆ 권시용> 조선 독립신문은 지하 신문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유인물 같은 거예요. 만세시위 열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이죠.
◇ 이동형> 박중양을 처단해야 한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요?
◆ 권시용> 혜성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런 모임이었는데, 대구 지역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혜성단에서 자제단 설립에 앞장섰던 박중양에게 경고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도 물론이고, 이렇게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과 또 레지스탕스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힘으로 해방이 안 됐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패망했으니까요. 아쉬운 게 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지금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고,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년이나 지난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았다는 것은 많이 안타깝네요.
◆ 권시용> 그렇죠. 해방된 공간에서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기회를 잃었죠. 미군정 시기에 친일 관련한 경찰과 군인들을 등용했고, 첫 번째 기회였던 반민특위에서 실패를 맛보았고요. 그리고 이후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도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뿌리 깊은 친일 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요. 현실적으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도록 구속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파가 서훈을 받는 일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각종 친일파에 대한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고요.
◇ 이동형> 동상도 서 있죠?
◆ 권시용> 네, 그렇죠. 다행히 김정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씩 역사적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인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과 함께 만세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저희가 자제단 이야기를 하면서 박중양 한 명만 얘기했는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자제단에서 어떤 사람이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는지요. 그것은 우리 청취자분들이 한 번 검색해서 살펴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부천지역 3.1운동 100주년 2] 홍난파, 현제명 등 친일파 작품 위주… 항의 받고 급히 변경
▲ 친일음악회 논란에 휩싸인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 포스터 ⓒ 부천시립예술단
오는 15일 부천시 주최로 열리는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가 친일음악회 논란에 휩싸였다.
부천시립합창단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로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공연하는 신춘음악회에선 ‘나물 캐는 처녀'(현제명 작사·작곡), ‘봄 처녀'(이은상 시, 홍난파 작곡), ‘봄이 오면'(김동환 시, 김동진 작곡), ‘가고파'(이은상 시, 김동진 작곡), ‘수선화'(김동명 시, 김동진 작곡), ‘산유화'(김소월 시, 김성태 작곡), ‘꽃구름 속에'(박두진 시, 이흥렬 작곡) 등의 한국 가곡을 부를 예정이었다.
신춘음악회를 주관한 부천시립예술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문화도시 부천이 동아시아 최초로 세계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된 기념으로 ‘신춘음악회 : 한국 가곡, 봄을 노래하다’를 마련하였다”고 밝혔다. 부천시는 지난 2017년 11월 세계에서 21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됐다.
부천시립예술단은 “이 음악회는 우리나라의 고풍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시에 아름다운 음율(음률)을 담은 주옥같은 한국 가곡들”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선곡한 가곡들은 우리나라의 고풍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시와 아름다운 음률을 담은 주옥같은 가곡들일까. 아니다. 이 가곡들은 현제명, 홍난파, 김동진, 김동환, 김성태, 이흥렬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친일 예술인들이 작사·작곡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등 친일음악인 위주로 선곡
▲ 젊은 시절의 현제명.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족 음악인들은 홍난파와 현제명을 대표적인 친일 음악인으로 꼽고 있다.
홍난파는 1937년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 위원으로 활동, 1938년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 일본의 제2국가로 불리는 ‘애국행진곡’ 지휘,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각각 선임돼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등을 작곡했다.
현제명은 조선총독부 지원으로 결성된 조선문예회, 대동민우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실내악단 등에 참여한 친일 음악인으로 친일 성악곡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발표하고 친일 행사인 ‘국민음악의 밤’에서 독창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전국 순회 가창지도대에 참가하는 등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현제명은 친일 음악인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음악가다.
가곡 ‘가고파’ 작곡가인 김동진은 1930년~1940년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과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한 ‘건국10주년찬가’와 ‘건국10주년 경축곡’과 관현악곡 ‘양산가’ 등을 작곡한 친일 음악인이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동환은 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시인이자 친일연설문 모음집 ‘애국대연설집’ 등을 편집하고 발간한 친일 문인이다.
작곡가 김성태는 친일음악단체 ‘경성후생악단'(이사장 현제명) 지휘자로 이 실내악단을 통해 국민음악정신대를 내세우면서 공장과 학교 등에 국민음악을 보급한 친일 음악인이고, 이흥렬은 경성후생악단과 함께 음악으로써 나라(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음악보국'(音樂報國) 운동을 주도한 친일 음악인이다.
‘친일 예술인들을 사후에까지 종횡무진하게 만들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는 지난 2015년 9월 20일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세웠다. ⓒ 장명진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 운영위원
일제에 부역한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시류에 편승하면서 교수가 되고 음악단체 대표를 지내면서 예술 권력을 행사했다. 생전과 사후에 문화훈장과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했다.
현제명은 1945년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위원회 문교부 위원, 1946년 서울대 예술대 음악학부 초대 음악부장,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4년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65년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홍난파는 일제 강점기인 1941년 8월 뇌결핵으로 사망했다. 사후인 1965년 10월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김동진은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 교수, 1974년 경희대 음대학장, 1974년 제15회 3.1 문화상 예술상 수상, 1982년 제2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음악부문을 수상했다. 김성태는 서울대 음대교수,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고 문화훈장 모란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이흥렬은 1960년 서울시 문화위원, 1963년 숙명여대 음대학장, 1967년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노래 작곡 및 음악감독을 맡았던 류형선(54) 전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은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 친일 논란을 어이없어 했다. 그러면서 ‘음악인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친일 예술인들을 사후에까지 종횡무진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 감독은 12일 인터뷰에서 “음악의 공공적 가치 구현을 위해 기획과 프로그램 구성 등 주도적인 결정권을 쥔 분들이라면 친일 음악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 “(친일 예술인 작품 위주로 선곡한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에 대해)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친일 음악인들을) 모르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류 감독은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천시립예술단) 그분들이 정녕 모르고 이 음악회를 기획했다고 판단한다. 알고는 이럴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그 무지가 친일 음악인들이 해방 이후 오늘까지 종횡무진 할 수 있었던 오욕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성찰해야 한다”며 부천시립예술단 음악인들과 관련 공무원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고양시는 지난달 26일 김동진이 작곡한 ‘고양시의 노래’ 사용 중단, 여주시는 지난달 28일 김동진이 작곡한 ‘여주의 노래’ 사용 중단, 안산시는 지난 7일 김동진이 작곡한 ‘안산시민의 노래’ 사용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부천시는 친일 예술인 위주의 신춘음악회를 열려고 했다. 만일 시민단체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부천 시민들은 친일음악을 주옥같은 음악으로 착각할 뻔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지난 8일 신춘음악회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부천시에 항의하면서 피켓 시위 등을 계획했다. 시민단체가 거세게 반발하자 부천시립예술단은 신춘음악회를 나흘 앞둔 12일 프로그램을 급히 변경했다. 문제의 친일 예술인 곡은 빼고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작시, 작곡) ‘님이 오시는지'(박문호 작시, 김규환 작곡) ‘내 마음의 강물'(이수인 작시, 작곡) 등의 가곡을 부르기로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종선(42) 부천지부장은 12일 “부천시가 친일음악회나 다름없는 신춘음악회를 기획한 것은 친일청산에 대한 무관심과 친일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서 “부천시는 앞으로 추진하게 될 각종 문화사업과 행사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찬양하고 기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촉구했다.
시민들의 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