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아비는 메이지유신 벤치마킹, 딸은 아베정부 벤치마킹
대전 현충원 가보니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지난 10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김창룡의 묘 앞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애국지사 묘역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오른쪽).
백범 어머니·아들 묘역에서600m 떨어진 곳에 김창룡 묘
시민들, 이장 촉구만 20년째
“법 개정안, 국회 통과 안돼”
“저 너머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묻혀 있습니다. 자식과 아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인물과 같은 곳에 계신 셈이죠. 역사적 단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민족사가 국립묘지에 그대로 응축돼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0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김창룡의 묘 앞에서 산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창룡의 묘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장군1묘역 상단 두 번째 열에 자리 잡고 있다. 홍 국장은 “장군1묘역은 현충원 안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도록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해방 후 소련군정에 전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교해 육군 장교로 임관하면서 군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기무사령부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장을 지내며 소장까지 진급했고, 1956년 암살된 후엔 중장 계급이 추서됐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죽기 전 “김창룡으로부터 강한 암시를 받았다”며 그를 사실상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김창룡이 묻힌 장군1묘역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애국지사 묘역이 나온다. 직선거리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가 나란히 묻혀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이런 ‘기막힌 동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민중당 대전시당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전현충원에는 2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돼 있다.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4명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도 수록됐다. 28명 가운데 22명이 장군 묘역에 안장된 군 장성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엔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등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옷을 갈아입고 한국전쟁기 등을 거치며 군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애국지사 묘역을 지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군2묘역에도 이들 중 5명이 묻혀 있다.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000년부터 매년 현충일이면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시위’ 등을 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 이장을 촉구하고 있다. 벌써 20년째다. 이들의 공허한 외침 속에 대전현충원에는 되레 친일파의 묘가 18기나 늘어났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이유로 군 장성 등의 묘를 강제 이장하려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하지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충일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수록된 자에 한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그마저도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홍 국장은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친일파 후손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법 개정이 어려운 이유”라며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인 올해를 놓치면 법 개정도 친일 잔재 청산도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종섭 기자 [email protected]
<2019-04-11> 경향신문
☞기사원문: “백범 가족과 백범 암살 배후가 한자리 묻혀 있어서야…”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소사리 만세운동’과‘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 발굴 첫 행사
부천시민연합• 부천민예총•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주관

▲ 홍보 전단지<사진=이정성 기자>
[KNS뉴스통신=이정성 기자] 부천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지난 24일 부천 중앙공원과 시청 잔디광장에서 ‘소사리 만세운동’과 ‘계남면사무소 습격 의거’를 발굴하여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부천시 시민단체가 의지를 모아 추진한 3.1절 기념 첫 번째 행사로서 의미가 크다.
이날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은 대회사에서 “부천에서는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는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한 각종 문서를 태웠으며, 소사리 6개 마을 사람들은 밤 중에 산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부른 날이 3월 24일이었다”라고 상기했다.
박 지부장은 이어 “지난 100년간 부천 시민에게 3.1 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부천의 독립운동가인 남광욱, 변영로, 이연형 지사 등도 알려지지 않았다”라며 “부천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 걸립패가 풍물을 치며 앞장서고 대형태극기가 뒤따르며 남녀노소 시민은 얼크러져 만세를 제창했다<사진=이정성 기자>
장덕천 부천시장은 축사에서 “100년 전, 그날의 꺼지지 않던 횃불에서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국 독립을 외치던 그때 우리는 하나였다. 시민주권의 역사를 같이하는 한 뿌리였다. 이제 계층과 이념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던 3.1 운동의 정신을 되살려 부천시의 희망찬 미래 100년을 우리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격려했다.

▲ 부천시‧도의원(시의원 28명, 도의원 8명)은 흰 적삼과 검정 치마, 흰 두루마기(남성의원)를 입고 당시의 분위를 재현했다.<사진=이정성 기자>
김동희 부천시의회 의장은 축사에서 “전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대중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일어난 비폭력 평화시위로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숨은 영웅이 많을 것이다. 부천의 3.1 운동의 역사를 알리고 이 지역의 숨은 영웅들을 재조명하게 될 이번 행사가 부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시민에게 큰 감동의 한 마당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참여단체(22개)는 홍보부스(10)를 설치하고 시민에게 활동사업을 설명했다.<사진= 이정성 기자>
김허원배 남북평화재단 공동대표는 “100년 전 3.1 운동은 각지에 분산되었던 독립운동세력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3.1 운동 비폭력 평화시위가 2016년 촛불시민 혁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민주 정부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를 고문하고 탄압했던 세력의 뿌리가 남아 통탄할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광복과 조국통일을 완수하는 일과 민주주의, 민족정신을 계승할 소중한 가치로 삼아 훼손된 독립정신과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장덕천 부천시장의 축하 인사<사진=이정성 기자>
이정성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25> KNS뉴스
☞기사원문: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재현행사 열려
파비앙 살비올리 유엔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특별보고관
19일 ‘한국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 참석 지원 의지 피력
[미디어제주 이정민 기자]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제주4.3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피력했다.
파비앙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19일 제주칼호텔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최 ‘국제 인권 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열린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이날 기조강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제주4.3과 우리나라 과거사 청산 노력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19일 제주칼호텔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기조강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우선 과거사 해결에 대해 “과거 모든 심각한 인권침해는 반드시 제기돼야 하고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한다”며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등 이 네 가지가 반드시 지켜지면서 이야기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알게 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제주4.3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문제(4.3)를 해결하고 피해자들이 만족할 때까지 해결이 이뤄지는데 있어 모든 협력을 제공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국가폭력(방지)에 대한 유엔 차원의 접근(지원)에 대해 “다양한 활동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에 대한 기술적 지원”이라고 답했다.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전환기적 정의에 있어서 정부의 협력이 중요하고, 정부의 협력이 없다면 어렵다”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진실과 정의, 배상을 피해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의해 반드시 제공해야 할 의무”라고 역설했다.

▲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19일 제주칼호텔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6년 첫 방문때는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아니라 시민적정치적관리규약, 자유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방문했다.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첫 방문을 회고하며 “당시 시민적정치적규약에 관한 좋은 보고서, 좋은 보고서를 냈고 동시에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관련 사례, 여호와증인 병역법 위반 관련 사례를 진정 사례로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기조강연에 들어가며 기자들에게 “여기 활동가들, 시민사회,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진실과 정의를 찾기위해 이제까지 싸워온 이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은 이날 심포지엄에서 ‘전환기적 정의 조치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을 주제로 기조강연했다.
다음은 이날 심포지엄 섹션별 주제 및 발표.
◇세션 1 한국의 과거사 청산 한계와 성과(사회 이상희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청산되지 않은 대일과거사 문제와 피해자들의 인권(조시현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그 후 9년(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 ▲과거사 사건 관련 재판거래-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을 중심으로(김세은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세션2 일제 식민지기 전쟁 동원과 인권 피해(사회 이상희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무력분쟁 성폭력 피해자의 진실, 정의, 배상실현, 재발방지를 위하여-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중심으로(윤미향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대표)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야스쿠니에 갇힌 조선인들(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세션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회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제주4‧3문제의 현황과 과제(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4.3위원회 전문위원) ▲한국전쟁 전후 100만 민간인 학살사건(이성번 한국전쟁유족회 사무국장) ▲증언 (이계성 한국전쟁유족회 대전형무소 유족)
◇세션4 군사독재시기 국가 폭력과 인권침해(사회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군부독재 정권의 고문과 국가폭력(이사랑 진실의힘 간사) ▲국가에 의한 배제와 감금-수용소: 형제복지원 사건 등(여준민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증언(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
<2019-03-19> 미디어제주
☞기사원문: “제주4.3 깊은 인상…피해자 만족하는 해결까지 모든 협력”
※관련기사
☞헤드라인제주: “제주4.3은 냉전 산물, UN이 학살책임 미국 사과 노력해야”
業報(업보)
歿後成何物(몰후성하물)
祈求化犬豚(기구화견돈)
今生貪食甚(금생탐식심)
後世我當呑(후세아당탄)
업보
죽어 버린 이후에는 무엇이 될까
개나 돼지로 化하길 빌고 바라네
이승에서 탐내 먹는 일 심했으니
다음 세상에선 내가 먹혀야 하리.
<時調로 改譯>
죽어 무엇이 될까 개돼지 되길 바라네
저들의 肉 탐식함, 이승에서 심했으니
다음에 올 세상에선 내가 먹혀야 하리.
*歿後: 죽고 난 이후. 사후(死後). 신후(身後) *何物: 무슨 물건 *祈求: 원하는 바가
실현되도록 빌고 바람 *犬豚: 개돼지 *今生: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이승 *貪食: 음식
을 탐냄. 탐내어 먹음 *後世: 다음에 오는 세상. 또는 다음 세대 사람들. 내엽(來葉).
<2019.4.4, 이우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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