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 여성노동포럼 3강 ‘남녀임금격차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가?’
익명 (미확인) 님|목, 2015/10/08- 13:08
지상중계]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여성노동포럼 3강 ‘남녀임금격차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가?’
김혜진 교수는 ‘오늘 강의 제목의 답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나 남녀임금격차 문제는 평소에도 관심 갖고 고민하는 주제여서 오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소통하는 자리로 삼고 싶다’는 얘기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남녀임금격차 현황을 살펴보았는데 전체 임금구조에서 남녀임금격차 상황을 살펴볼 것을 주문했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2006년 남성의 월 급여는 2백3만원인데 여성은 1백2십4만8천원으로 남성임금 대비 여성 임금은 64.3%를 차지한다. 2014년에는 남성 임금은 2백7십6만1천원이고 여성은 1백7십4만2천원으로 67.7%를 차지한다. 8년 동안 남녀 임금 격차 해소는 불과 3.3%p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해 보면 다르다. 정규직 남녀 임금격차는 2006년 65.4%이고 2014년에는 68.5%이다. 비정규직은 2006년 75.4%이고 2014년 74.8%이다. 즉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남녀임금격차가 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녀임금격차를 줄인다는 것이 비정규직 확대와 임금 하향평준화로 남녀임금격차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비정규직 확대와 임금 하향평준화가 고착화되는 상황 속에서 남녀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김혜진 교수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해왔지만 이제는 그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주장인가를 검토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자본은 국제화되어 금융자본의 형태로 국가 장벽을 쉽게 넘나들며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화고 있는데 노동은 이런 자본의 국제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비정규직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자본주의 발달단계에 따라 노동조합은 ‘노동의 가격, 노동 단가’를 올리는 것으로 자본의 이윤 착취에 대항해 왔는데 자본의 국제화에 노동운동의 대응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의 국제화에 따른 아웃소싱 확대로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조차 별 의미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을 직시하자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여성은 유급 시장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의 이중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저임금구조를 지탱해주는 지지대로써 착취당하고 있다. 가정 내 돌봄 부담은 줄어들지 않아 여성의 비정규직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이 상황을 변화시킬 대안은 무엇인가? 비정규직이 만연한 상황에서 정규직화를 외칠 것인가?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어 정규직, 비정규직 별 차이가 없고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고용안정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화를 외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여성노동운동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김혜진 교수는 여성노동운동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첫째 여성 고용이 저임금 구조를 지탱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당연히 여성이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아도 된다는 인식은 자본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여성노동운동의 목표는 정규직화보다는 저임금 해소를 목표로 해야 하며 남녀임금격차 해소는 최저임금 인상 등을 통해 밑으로부터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현재의 경제주의적 노동조합들보다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여성노동운동의 존재 기반은 훨씬 유리하니 사회적 결정구조에서 여성노동 대표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여성노동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김혜진 교수는 자본이 절대적으로 우위인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가 축소되어 가는데 이제 노동의 대응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라는 방향보다 ‘최저임금 인상’ 등 아래로부터 일자리의 질을 끌어올리는 방향에서 대안을 찾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문이었다. 질의응답을 통해 이런 방향 고민이 일자리 하향평준화를 받아들이거나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4년으로 확대하자는 정부 노동개악안을 수용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했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을 여성노동운동이 주도적으로 해야 함에 대해서는 공감하였다.
남녀임금 격차 누가 이득을 보고 있나? 뻔한 답이지만 자본이며 자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국가권력이다.
가사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및 4대보험 적용을 위한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안(2016.2.4)」 한국여성노동자회 · 전국가정관리사협회 이인영의원 통해 발의.
전 세계적으로 가사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는 117개국, 5,260만명으로 전체 고용의 7.5%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가사서비스 종사자는 약 50만명~70만명으로 노인요양, 산후조리, 장애인활동보조, 간병, 아이돌봄, 가사서비스 등에 종사하고 있다.
2011년 6월 제100회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을 채택하였다.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페인, 베네수엘라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7일 48시간 노동시간 제한, 초과노동 임금지급, 매년 휴가와 병가, 모성권 보장을 하고 있다. 또한 브라질은 초과노동 임금지급, 실업보험, 퇴직연금 자격 부여를 하고 있으며 스페인은 최저임금 보장, 매주 및 매년 휴가와 모성권을 보장을 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는 1주 1일의 유급휴가와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가사노동자는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가사 노동이 사적공간인 개별가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 제11조 1항 ‘가사사용인 적용제외’ 조항에 묶여 있다. 가사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 조항으로 인해 가사노동자들은 고용불안, 임금체불, 부당한 대우, 장시간 노동, 초단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다. 4대보험 역시 제외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지난해 초 고용노동부는 ‘비공식부문 노동시장 공식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하반기 입법을 거쳐 2016년에는 가사종사자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을 본격적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발표와는 달리 매번 법안 발의를 연기하여 결국 발의하지 않았다. 법률안 내용 또한 ‘가사노동자 보호’가 아닌 ‘가사서비스 시장 활성화’가 핵심이었다.
이러한 고용노동부의 행태에 가사노동자 3단체(전국가정관리사협회, 한국가사노동자협회, 한국YWCA연합회)는 지난해 11월 6일 국회앞에서 「가사노동 입법화, 공갈뻥! 이제 그만! 가사노동 입법화, 늑장추진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을 가져 가사노동자들이 분노를 표출하였고 가사노동자 보호 입법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호소하였다.
“우리 가사노동자들은 너무 힘이 듭니다!! 발바닥이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숨 돌릴 틈 없는!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일을 해도 변변히 어디 앉아서 점심밥 먹기도 힘든! 화장실 천장을 청소하다 떨어져서 갈비뼈에 금이 가면, 석 달 동안 일도 못하고 치료비까지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어느 날 고객으로부터 ‘오늘은 우리 집 오지 마세요‘란 막무가내 해고를 당해도! 때로는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해도! 치매 걸린 할머니가 물건이 없어졌다며 도둑년으로 몰려도! 고객의 집에 일하러 갔다가 고객의 남편이 자다 일어나서 속옷 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는 민망한 경우에도! 다른 직장인들은 1년이 되면 연차유급휴가라고 휴가가 생기는데, 십년을 일해도 우리 가사노동자에게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 가사노동자들은 어디에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가정관리사협회는 가사노동 당사자들, 돌봄노동 전문가들과 함께 정부 법안의 문제점을 논의하고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한 대안을 마련하기로 하여 지난 1년간 이인영 국회의원(더불어 민주당, 환경노동위원회 간사)과 함께 가사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호를 위한 법률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인영 국회의원의 대표발의로 2016년 2월 4일 국회에「근로기준법의 가사사용인 배제조항을 삭제하는 개정안」과 함께「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안」을 동시 발의하였다.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안」은 총 7장 33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사근로자의 근로조건과 공익적 제공기관 육성 등에 관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가사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권익향상을 도모하고 일자리 창출 및 일자리 질 제고를 통하여 국민의 일과 가정양립, 삶의 질 개선에 이바지 하는 것(제1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핵심내용은 ▲가사노동자 노동자성 보장 및 4대보험 적용 ▲한부모, 저소득 맞벌이가정 등에 가사서비스 공적지원 및 일자리 창출 ▲제공기관 인증 및 관리감독 규정 ▲공익적 제공기관 육성 및 지원 등이다.
지난 2월 20일 전국가정관리사협회는 대전광역시 근로자종합복지회관에서 전국의 12개 지부 대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제12차 대의원대회를 진행하였다. 가사노동자 당사자들과 이번에 발의한「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안」내용을 중점으로 공유하였다.
2016년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가정관리사협회는「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에 관한 법률안」제정과 함께 근로기준법 11조 1항 삭제도 동시 추진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예정이다.
● 전국가정관리사협회(이하 전가협, 2004년 11월 창립, 전국 12개지부)는 한국여성노동자회가 1998년 이후 중장년 여성들의 가사서비스 영역 일손 연결 사업의 성과를 모아 창립한 가사노동자들의 경제공동체입니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가정부, 파출부 등으로 불리우는 가사노동자의 이름을 ‘가정관리사’ 호칭 확산 운동을 통해 가사노동자의 사회인식개선에 앞장서 왔습니다. 또한 가사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가사노동자 보호 입법 활동(토론회, 기자회견, 캠페인 등)과 그동안 그림자노동으로 불렸던 가사노동을 비공식노동에서 공식노동으로 정부의 대책을 이끄는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올해 전가협은 가사노동기준을 만드는 ‘계약서 쓰기’ 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908년, ‘빵과 장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던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억한다.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각종 유해 환경으로 건강을 해치는 작업장, 남녀차별…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은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생존권인 ‘빵’과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상징하는 ‘장미’를 요구하며 싸워나갔다.
108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오늘,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여성노동자들은 아직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800만 여성노동자 중 56.11%가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노동자 임금의 35.4%에 불과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한 전체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성별 월평균 임금격차도 40.14%에 달해, 남녀임금격차는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가장 크다. 성별 근속년수, 종사하는 사업체 규모, 고등교육, 직업훈련, 업종 및 직종 차이, 노조가입 여부 등을 감안한 임금격차 요인이 37.8%에 불과한 반면, 성차별에 따른 임금 격차가 62.2%에 달한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생산성보다 더 임금을 많이 받는 프리미엄이 3.9%, 여성이어서 생산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손실이 58.3%에 이르는 등 합리적인 이유가 아닌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저임금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여성 경력단절 및 여성고용을 늘리겠다며 고용률 70% 로드맵과 시간제 확대를 추진하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의 질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자녀 양육을 여성에게 전담시키며 저임금을 감내하게 하고, 여성의 일을 보조적인 것으로 고착시키며 차별임금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하여, 더이상 ‘여성은 싸구려 노동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자 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임금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최저임금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그 이하의 임금을 주면 안 된다는 최저선을 마련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사실상 임금 결정의 기준선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항상 최저임금 선에서 결정되고 있다. 임금노동자중 남성 저임금 계층이 13.2%임에 반해 여성은 39.1%에 이르고 있으며, 최저임금 미달자의 62%가 여성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은 최저임금 현실화 운동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최저임금이 현실화되어야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적, 사회적 위험에 처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최저임금 현실화’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에서는 노동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자들, ‘싸구려 노동’으로 여겨지는 돌봄 노동자들,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음에도 온전한 생계부양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이외에도 다양한 성차별에 신음하는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거리행진을 진행한다. ‘여성을 싸구려 노동자’로 취급하는 이 사회에 싸다구를 날리며, 여성노동자의 생존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쟁취해 나가고자 한다.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여성노동자 거리행진> 프로그램
– 일시 : 2016년 3월 3일(목) 오후 3시 ~ 4시
– 시작하는 곳 : 홍대입구역 교차로 ‘서교타워 오피스텔’(SC은행이 있는 건물) 앞
– 거리행진 : 홍대입구역 인근
*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 홍대입구역 8번 출구~홍대입구역 교차로,
홍대입구역 2번 출구~홍대입구역 교차로, 홍익로 6길 등
– “싸구려 임금에 싸다구를 날려라” 퍼포먼스
* 가사노동자, 돌봄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급식노동자, 알바 노동자 등의 노동현실의 문제와 변화의 바람을 전하는 ‘싸구려 임금에 싸다구를 날리는’ 퍼포먼스
직장 내 성희롱, 2년 사이 2.5배 증가 40세 이상 비정규직 여성, 임금체불, 부당해고, 직장 내 성희롱 등에 취약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최근 2015년 전국 9개 지역(서울, 인천, 부천, 수원, 안산, 전북, 대구, 마산창원, 부산) 평등의전화에서 상담한 사례를 분석하여 「2015년 평등의전화 상담사례집」을 발간했다. 분석기간은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1월까지로, 총 2,487건(재상담 제외)의 상담이 진행되었다. 이중 여성 2,307건(92.8%), 남성 180건(7.2%)이었으며, 여성노동자들의 상담 경향과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남성 상담과 재상담은 제외하여 통계 분석하였다.
2015년 상담유형 중 근로조건 관련 상담이 36.5%(834건)로 가장 많았으며 모성권 관련 상담도 31.4%(725건)에 달했다. 2015년 상담결과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의 급속한 증가이다. 2013년 8.9%(236건)이었던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이 2015년에 22.0%(508건)으로 2.5배 증가하였다.(직장 내 성희롱 상담비율의 증가로 근로조건이나 모성권 상담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의 증가는 여전히 여성노동자들이 직장 내 권력관계의 하위에 위치하며 남성중심적 작업장 문화에서 여성노동자가 성희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현실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이나 정관계 인사나 기업 고위임직원 등의 직장 내 성희롱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공론화하는 여론의 영향 등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진 여성노동자들의 예전에 비해 문제해결을 위해 상담실을 활용하고 있는 측면 또한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직장 내 성희롱, 정규직은 25~34세, 비정규직은 40세 이상에서 높은 상담 비율,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중 34.0%가 불이익 조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25~29세에서 37.2%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외의 연령대에서도 10% 정도로 나타나고 있어 직장 내 성희롱이 나이와 무관하게 일하는 여성 모두에게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용형태에 따라 직장 내 성희롱 내담자의 연령분포에 차이를 보인다. 정규직의 경우, 30-34세가 26.1%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25-29세가 20.3%, 35세 이상 연령대에도 비슷한 비율을 보이는데 반해 비정규직의 경우에는 50세 이상의 연령대에서 31.7%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그 다음 높은 비율이 20.7%로 40-49세 연령대에서 나타나고 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현실에서 고용안정성이 떨어지는 일자리에서 사업장 내 지위 또한 취약한 중고령층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에 더욱 쉽게 노출되어 고통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3세 용역직 신분으로 청소를 하고 있는데 관리소장이 어느 날부터 옆구리와 배를 찌르고 도망가는 등 신체접촉을 한다. 유방을 만진 적도 있다. 따지면 일적으로 괴롭힌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동료도 당했다. 그런데 다들 나이가 많아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정식으로 문제제기 하면 해고시킬 것 같다.
위의 사례처럼, 해고의 두려움으로 문제제기를 주저하거나 직장 내 성희롱 문제제기 후 다양한 불이익을 받는 등 직장 내 성희롱 피해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이후 발생하는 또 다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고 있음에도 피해 여성노동자들이 직장 내 성희롱 발생에 대해 문제제기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 내 성희롱 내담자 중 34.0%(155건)이 피해자 유발론에서 해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직장 내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등 이중 삼중의 피해에 노출되고 있다. 불이익 조치 금지와 관련된 법조항이 있음에도 현실에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실효성 있는 법제도로 변경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 근로조건 상담 중 임금체불 상담이 가장 높고, 모든 근로조건 세부상담에서 40세 이상 연령대의 상담 많아
근로조건 항목의 세부상담내용 중 임금체불 관련 상담이 34.8%(294건)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임금체불 관련 내담자 중 86.2%가 30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나 임금체불이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령별 근로조건 상세 항목 분포를 살펴보면, 모든 항목에서 40대 이상이 높은 상담 비율을 보이고 있다. 임금체불은 60.8%, 부당해고 71.9%, 직업병 및 4대보험 76.5%, 부당행위 70.0%, 휴가 및 휴게시간 66.7%, 기타 51.2%로 모든 항목에서 압도적 비중을 나타내었다. 이는 중고령층 여성노동자일 수록 노동시장 내에서 다양한 불이익에 노출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모성권 상담 중 출산휴가, 육아휴직 상담이 높고, 정규직은 육아휴직, 비정규직은 출산휴가 상담비율 높아
모성권 상담 중에는 육아휴직 상담이 292건(39.9%), 출산휴가 상담이 290건(39.6%)로 거의 비슷하였고, 임신출산불이익 및 해고가 137건(18.7%)의 상담 비율을 보였다. 내담자의 고용유형에 따라 모성권의 구체적인 상담 내용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정규직의 경우, 육아휴직관련 상담비율이 41.6%로 가장 높았으나 비정규직은 출산휴가 사용 관련한 상담이 55.0%로 나타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는 출산전후휴가 조차 사용하기 어려운 현실임을 알 수 있다.
2015년 상담 중 눈에 띄는 점은 남성의 배우자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사용 관련한 상담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 상담 중 육아휴직이 23.3%(42건)으로 가장 높게 나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려는 남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산휴가 관련 상담 비율도 13.3%(24건)을 보이고 있어 부성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남성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의 배우자 출산휴가는 5일이내(3일 유급)로 상대적으로 기간이 짧고 사회적으로도 수용적인 분위기로 변화하고 있어 점차 남성들의 사용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나 이 조차도 사용이 용이하지 않아 상담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상세한 상담통계 분석 결과와 사례는 한국여성노동자회 홈페이지 공개자료실 「2015년 평등의전화 상담사례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한국여성노동자회 산하 전국 10개 평등의전화 상담실에서는 근로조건, 직장내 성차별, 성희롱, 모성권 등 여성노동자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6년 전국대표번호를 신설하여 전국 어디서 전화를 해도 가장 가까운 지역 상담실로 연결되어 상담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87) 할머니가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지급받던 생활지원금, 알량한 60만∼70만원이 없어진다 한다. 보건복지부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중복 지원 사업을 중단할 계획이라 통보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무능으로 야만의 시간을 통과한 이들 앞에서 정부는 주판알만 열심히 튕기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살아남는 것이 ‘죄’가 되는 나라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난다. 피해자 지원과 추모를 위한 활동을 돕기 위해서다. 정부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추모하는 데 기본이 없어, 접할수록 놀랍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 완전 황무지다. 전문가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세월호 피해자들이 호구 조사하듯이 관공서와 관련 기관, 전문가들을 이 잡듯이 찾는다.
지난 세월호 인권 실태조사 과정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생존자는 이런 말을 공무원에게서 들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살지 않았습니까?” 이후 그는 세월호와 관련된 말을 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것이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계 수단이 모두 바다에 빠져버린 화물기사들에게 돌아온 대답도 차가웠다.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만 지원 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희생자 주검을 직접 수습했던 민간 잠수사와 피해자들 곁에서 고통을 함께 나눈 자원봉사자들은 피해자 지원 특별법 대상도 되지 못했다. 실태조사 당시 25명의 민간 잠수사 중 7명은 각종 어려움으로 생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한 잠수사는 “만약 이런 일이 또 발생하게 되면 누가 나서서 돕겠느냐”고 물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곳곳에서 일하던 자원봉사자들도 범정부사고대책본부 해체 뒤 지원체계 없이 흩어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구조와 주검 수습에 참여한 전남 진도 어민들의 생계도 참혹했다. 그러나 정부는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입은 정서적·신체적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참사 이전, 당시, 그리고 이후에도 국가는 없었다.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순간 온갖 종류의 모욕에 2차, 3차 피해를 입었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은 정부와 여당 주도의 혐오와 모욕을 줄기차게 당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재난이고 참사다.
위안부 할머니, 징용 피해자,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과거의 상처를 현재까지 오롯이 안고 산다. 정부가 나서서 하는 게 없거나, 나쁜 쪽으로만 일하고 있어서다. 인권 피해는 어느 시대, 지역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사후 대책을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고 제대로 지원하고 기억할 때, 유사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피해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운 나쁘게 피해자가 된다면, 뼈저리게 느낀다. 이건 국가가 아니다.
다른 사회를 준비하는 4·16 선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세월호 피해자와 희생자 가족들에게도 희망이 있었다면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눌 줄 아는 선하고 정의로운 이웃들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딛고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4·16 인권선언이 준비되고 있다. 풀뿌리 토론을 통해 집단적 지혜를 모으고 있다.
여기 우리가 버릴 나라가 있다면, 또한 우리를 버티게 하는 이웃들이 있다. 토론하고 모이고 꿈꾸고 연대할 자유를 버리지 않은 시민들이다. 당신 입장에서 ‘혼조차 비정상’이라 폄하됐지만 당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그들 말이다.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혼’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그러기에 국가는 죽음의 정치를 벌인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고 또 살린다. 북한 붕괴론을 암시하며 공멸의 위험도 불사하려는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나,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극단으로 몰고 갈 사드의 배치, 지진대 위에 자리한 핵발전소 등은 이를 대변한다.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라고 국민을 강박하는 것은 국가 혹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차용할 권리를 확보한 정부다. 국가에 국민의 삶과 죽음은 절대 가치가 아니라 절대 수단이다. 살림을 볼모로 국민을 겁박하며 죽임을 핑계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것이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실체다.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죽음의 정치를 재차 되살린다.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는 민중 총궐기가 있었고, 경찰은 이를 대공비 작전을 펼치듯 강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인은 경찰의 직사 살수에 타격받아 사망하였다. 사실은 이렇게 명료하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은 엉뚱한 곳으로 이끌린다. 한 병원의 신경외과 과장이 궤변이나 다름 없는 이유를 대어가며 내린 병사 판정 때문이다. 민중 총궐기와 그것이 비판하고자 한 정부의 실정과 그것을 강제 진압했던 경찰의 폭력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한 생명이 아니라, 참 구질구질하게 만들어진 그 사망 진단서가 대중의 관심을 호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망 진단서는 의사의 전문성보다는 국가의 생체 권력이 앞서는 영역이다. 무엇을 사망으로 간주하며 무엇을 그 원인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뿐 아니라 죽음 자체를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관계의 틀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까지 그 모두가 의학에 선행하는 국가법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기에 '외인사'는 국가 폭력의 결정체인 수사권이 발동되는 예후가 되며, '병사'는 이제 장례와 애도가 허용된다는 국가의 처분이나 다름 없다. 죽음에 관한 신의 영역을 국가가 가로채고 나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국가 형벌권의 대상이 되어 버린 오빠(혹은 삼촌)의 주검을 두고 번민하여야 했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법의학은 의학이기 이전에 법학이자, 동시에 세심한 통치술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왜?"라는 법적 인과 관계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이 법의학의 이데올로기다. 거기서는 어떻게 죽었는가는 묻지 않는다. 쌀값 인상의 공약을 저버린 대통령의 식언에 항의하다, 불법적인 차벽을 앞세운 국가 폭력에 저항하다, 혹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라는 자신의 기본권을 행사하다 과잉 경비에 나선 경찰의 살수차에 피격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폐 정지와 급성신부전과 급성경막하출혈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것처럼 가장한다. 총체적인 정책 실패와 죽임까지 불사한 국가 폭력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가, 한 전문가의 자의적 사망 진단이라는 개인의 문제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고인의 시신에 대한 부검 영장을 발부한 사태는 정확하게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주검을 해부함으로써 죽음을 해부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죽었는가의 문제를 왜 죽었는가의 문제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법원은 1차 부검 영장 신청은 기각하였다. 경찰은 검찰 지휘하에 또 영장을 신청하였다. 그러자 법원은 추가 소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약간의 어색함을 다스리고는 곧장 전대미문의 조건부 부검 영장이라는 것을 발부했다. 부검 장소와 부검 절차, 참관인 등을 유족과 협의해서 정하고 부검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라는 조건이 달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장 발부 행위는 그 자체 심각한 하자를 가진다.
우선, 부검 영장의 발부 요건이 어떻게 충족되었는가가 의문스럽다. 부검은 언제나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고인과 그 유족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기존의 증거나 자료들에 의해 외인사라는 점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으면 부검이라는 추가적인 강제 수사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역으로 부검을 실시하려면 외인사가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야 한다. 즉 경찰-검찰이 기존의 증거에 대하여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거나 소명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병사"로 기재된 사망 진단서에도 불구하고 제1차 결정에서는 영장 청구를 기각하였다. 법원은 이미 "진료 기록 내역을 압수해 조사하는 것을 넘어 사체에 대한 압수 및 검증까지 허용하는 것은 필요성과 상당성(타당성)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진료 기록만으로 외인사임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며 그 사실을 뒤엎을 만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결정에서는 자료 보완을 요구한(사실 보완 요구 자체도 이례적인 것이다) 후 기다렸다는 듯이 부검 영장을 발부하였다. 사실 관계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부분에서 되려 우리가 법관의 판단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검찰-경찰이 어떤 용빼는 재주가 있어 순식간에 법관의 판단까지 바꿀 만큼 그렇게 중대한 자료를 만들어 소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둘째, 이 부검 영장은 가해자에게 증거를 찾아내도록 한다. 주지하듯 경찰은 살수차 운용 경관에서부터 당시 현장지휘부, 그리고 전현직 경찰총수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이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해 왔다. 살수도 지침대로 했고 지휘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민중 총궐기에 대한 집회 관리도 전혀 잘못된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 경찰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래서 경찰은 내부적인 감찰도 중단하고 검찰은 검찰대로 수사에 손을 놓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나 자료, 증언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한통속이 되어 자신들의 결백을 강변한다.
여기에 정부‧여당까지 나아가 보수 논객들까지 편들고 나선다. 설상가상격으로 부검을 담당하게 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의조차 부검이 필요하다고 공식 선언을 하였다. 누가 봐도 외인사인 것을, 누가 봐도 직사 살수에 의한 죽임인 것을, 그 부검의들은 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하면서 가해자인 경찰의 편을 들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부검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장담하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경찰에게 부검을 맡길 때 그 부검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절차에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 법관은 가해자인 경찰과 그의 한 손인 부검의에게 고인의 시신을 맡겨 버렸다.
셋째, 이 과정에서 사망의 이유와 원인이 교착되어 버린다. 고인의 사망에 이른 일련의 과정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살수차 운용 경관과 그 현장 지휘부, 경찰 총수까지 그 행위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벽과 살수차, 막대한 경찰력 등의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의 입과 귀를 막게끔 지시한 통치권력과 그에 부종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책임추궁이다. 혹은 우리의 삶을 이토록 옥죄고도 우리들을 "개돼지"라고 명명하기에 스스럼이 없는 일단의 지배 세력들에게 이 세상은 국민이 주인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경찰이 부검의 논란을 일으킨 것은 경찰관 몇 명의 문책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건이 이렇게 정치화되어 현 정치 권력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민중총궐기의 정치를 부검의 정치로 되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검 영장을 발부한 법관은, 그리고 그가 속한 이 땅의 사법부는 이런 정치적 소명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지나치게 법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가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기를 자처한다. 사법관의 지배(juristo-cracy)라는 것은 이렇게 발생한다. 정치의 문제를 법의 문제로 환원한 채 모든 것을 경직된 법교리 속에 매달아버리는, 저 권위주의 체제가 행사하던 탈정치화의 패악이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죽음과 주검까지도 철저하게 도구화하고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그 엄청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망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정희진의 질문은 이 지점에서 아주 적절해진다. 고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국가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려 퍼진다. 그의 죽음과 그의 함성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망자의 몸'을 부검이라는 이름으로 탈취하고자 온갖 힘을 다한다. 그의 몸에 부착된 그의 목소리를 떼어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함성이 부검의의 칼날에 갈가리 헤쳐져 우리의 귀에까지 와 닿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 법관의 영장 발부 결정은 너무도 무모해진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붙인 조건들 때문에 가뜩이나 빗나간 문제의 해결 고리조차도 더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부검 영장의 경우 집행장이 아니라 허가장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만큼, 그가 힘을 실어 제시한 조건들은 영장의 중요 부분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영장 자체가 효력을 상실하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법리는 사족처럼 초라하다. 고인의 사망은 누가 보더라도 물대포의 타격에 의한 외인사이며, 그 배경에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적대하며 전투적으로 지워버리고자 하는 폭력적인 정권이 존재함 또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부검 영장을 발부하는 법관의 치졸한 법리로는 도저히 가리지 못하는 그 엄중한 우리들의 정치가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검 영장이 진정으로 가리켜야 하는 곳은 따로 있게 된다.
그것은 고인의 시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시신과 벌써 부패의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 땅의 통치 권력이 죽여버린 민주주의의 시신이다. 백남기 특검법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은 그래서 의미 있어 보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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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정당 정부에 기초를 둔 책임정치 실현’을 약속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아닌 민주당 정부라 부르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아울러 국가와 정부라는 용어 사용도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국가’보다는 ‘민주정부’가 잘 어울리듯, 민주주의는 정부라는 개념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다. 자주국가, 독립국가, 주권국가라 쓰듯 국가 역시 꼭 있어야 할 정치 용어지만 민주주의와 관련된 진술에서는 절제하는 게 옳다.
정부를 뜻하는 ‘government’는 ‘키를 잡고 배를 조종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쿠베르나오(kuberna´o)’의 라틴어 옮김 말인 구베르노(guberno)에서 유래했다.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 리더십 혹은 그런 리더십의 조직체라는 의미를 갖는다. 반면 국가를 뜻하는 ‘state’는 라틴어 ‘status’에서 유래한 말로 애초에는 ‘지위’나 ‘상태’를 뜻했으나 16세기로 들어서면서 ‘배타적인 영향력의 범위를 가리키는 통치의 단위’라는 의미가 덧붙여졌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는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가진 국제법적 주체로 발전했고, 그에 따라 통치자도 애국과 충성의 맹세를 해야 하는 윤리적 실체로 격상되었다.
주권(sovereignty) 개념을 기준으로 봐도 다르다. 국가는 주권의 대외적 측면을, 정부는 주권의 대내적 측면에 가리킨다. 대외적으로 주권의 부재가 ‘무국가 상태’ 혹은 ‘식민지 종속국’을 뜻한다면, 대내적으로 주권의 부재는 ‘무정부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와 짝을 이루는 주권자는 국민(nation)이라 하고 그들의 정체성은 법률적 근거를 가진 국적(nationality)이 기준이 된다. 국가는 국민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고 간첩죄나 내란죄를 적용할 수 있다. 반면 정부와 짝을 이루는 주권자는 시민(citizen)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가진 권리는 시민권(civil rights)이라 한다. 정부에 대해 시민은 자발적으로 지지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비판하고 반대할 수도 있다. 정부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시민에게만 자유와 권리를 허용한다면, 이를 반대하는 시민과의 내전(civil war)은 피할 수 없다. 시민권에는 (정부조차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를 가리키는) ‘자유권’도 있고, (정부 선출에의 평등한 참정권을 가리키는) 정치권, 나아가 (정부에 사회경제적 분배 책임을 요구할 권리를 가리키는) 사회권 등이 있다.
비민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가를 신성화하고 국가안보와 국가이익, 국민의 의무, 국민교육 등을 강조한다. 시민 주권을 부정하면서 그로 인한 정당성의 결핍을 늘 외부로부터의 안보 위협으로 채우려는 권위주의 체제일수록 더 그렇다.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민주화의 요구를 억압하려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이해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반공을 국시(國是)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정부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반공국가라는 의미를 담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쓴다. 정부 행사라는 표현 대신 국가의 공식 행사라고 규정하길 좋아하거나,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조차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안 되고 꼭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국가에 대한 맹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일 때가 많다.
국가가 아닌 정부라는 말에 친화적인 사회가 되어야, 시민은 그야말로 ‘갑’이 되고 주권자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정부는 ‘시민에 의해’ 선출되고, ‘시민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를 안게 된, ‘시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의해 우리가 국민이 아닌, ‘동료 시민 여러분(My fellow citizen)’으로 호명되는 일이 많아야 민주주의일 것이다.
대통령이란 명칭도 냉정하게 말하면 문제가 있다. 통령(統領)이란 의미도 대단한데, 이를 더 크고 위대하게 높여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을 담는 듯하다. 시민의 공동체를 주관하는 의장 내지 시민 가운데 으뜸 자리임을 뜻하는 좀 더 자연스러운 용어가 있었으면 한다.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1. 국내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방문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과 연속 회담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등 한반도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단계적, 포괄적 접근’과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관계의 회복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정책의 운전대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핵 등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gye.com/)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전, 그리고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베를린 평화구상’(2017.7.6.)을 발표해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추진,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등 핵심 정책방향과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비상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뒤 신속하고 광범위한 개혁 의제 선점을 통해 초기 높은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위기 상황의 한반도 국제정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협상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는 물론 의회 내 다수의석을 점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개혁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등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쉽지 않은 국제, 국내 정치의 조건 속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수립과 합의적 민주주의 구현 등 핵심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100년 전 독립을 이룬 핀란드는 100년 만에 복지국가와 중립적 대외정책을 확립했다.
20세기 동안 내전과 대외적 전쟁,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핀란드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의 삶과 행동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립 100주년, 핀란드인들이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의 죽음
2017년 5월 12일(금) 21시 15분, 핀란드 제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Mauno Koivisto)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음날 핀란드 전역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제9대 핀란드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초상화. 그는 올해로 독립 100주년을 맞은 핀란드에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이었다.
현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뙤(Sauli Niinistö)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공영방송 YLE는 하루 종일 추모 방송을 특집으로 편성해 내보냈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꼬이비스또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2회 연임). 전후 25년간 장기 집권했던 중앙당(Keskusta, The Centre Party)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Urho Kekkonen, 1956-1981년 재임)이 기력이 쇠해 사임할 당시 그는 사민당(SDP)-중앙당 연합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폭넓은 지지로 당선되며 향후 30년간의 사민당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소련 붕괴, 경제위기, 유럽통합 등 대전환기에 핀란드를 이끈 그는 지혜롭고 합리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994년 퇴임한 뒤 부인 뗄레르보 꼬이비스또(Telervo Koivisto) 여사와 함께 시골집에서 숲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한편, 후임 아흐띠사리(Martti Ahtisaari, 1994-2000 재임), 할로넨 (Tarja Halonen, 2000-2012 재임) 대통령과 정부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등에 관해 조언하며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가 실용적 리더이자 독립적 지성인이면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던 정치인으로 진실로 ‘전 국민의 대통령’(koko kansan presidentti)이자 ‘나의 대통령’(minun presidentti)이었다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평생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작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국제관계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는 것이 몸에 밴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철인왕’(philosophy king)에 종종 비유될 정도였다.
평생 배구를 즐겨한 그의 두 손은 노동과 사유 둘 다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꼬이비스또는 핀란드가 내전과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냉전 질서가 부과한 국제정치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적 국제관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20세기 핀란드의 현대사 굽이굽이를 지나온 뒤 독립 100주년인 2017년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신생 민주공화국 핀란드의 첫 세기를 증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목수, 참전군인, 철학박사,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삶
마우노 꼬이비스또는 1923년 핀란드 남서부 항구도시 뚜르꾸(Turku)의 한 가난한 조선 노동자(배 목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치하의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지위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었다. 독립 직후인 1918년에는 좌우 내전이 발발해 약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는 핀란드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열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항만에서 여러 일을 익히느라 꼬이비스또의 유년기는 짧게 끝났다.
16세이던 1939년에는 소련의 침공으로 이른바 ‘겨울 전쟁’(Talvisota, 1939-1940)이 시작됐다. 어린 꼬이비스또는 소방의용군에 편입된 뒤 전방 부대에 배치돼 ‘계속전쟁’(Jatkosota, 1941-44)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생사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그는 정신적(종교적) 전환을 경험한다. 전쟁은 또 그가 세계정세에 눈뜨도록 만들었다.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 꼬이비스또는 16세였다(왼쪽 사진). 전쟁은 어린 청년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게 했고,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후 대학생이 된 꼬이비스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로 전역한 꼬이비스또 앞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는 1947년에 핀란드 사민당에 가입했고, 항만 노동조합에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공산당 활동가들로 진영이 갈려 파업 전략 등을 두고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사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꼬이비스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꼬이비스또는 1947년부터 야간 학교를 다니며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이후 대학에도 입학했다. 교직 활동을 병행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1956년 ‘뚜르꾸 항만의 사회적 관계들’을 주제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역 후 노조와 직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꼬이비스또는 공부를 계속해 1956년 뚜르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에는 향후 65년 간 평생을 함께 하며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준 부인 뗄레르보(Telervo Koivisto)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학위 취득 후 꼬이비스또는 1957년 헬싱키노동자저축은행(Helsingin Työväensäästöpankki)의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헬싱키로 이주한다.
이후 12년간 저축은행 대표 역할을 맡은 그는 경제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1966년에는 재무장관에 발탁됐다.
1968년 핀란드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직후에는 총리로 다시 임명됐다.
께꼬넨 대통령 집권 시기에 성립된 사민당-중앙당 연합정부에서 총리(1968-1970, 1979-1982)와 재무장관(1966-67, 1972)직을 두 차례씩 역임한 그는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립적 사유와 숙고된 판단을 중시하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로 정치적 도전자를 잘 용납하지 않는 께꼬넨 대통령과 오래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에도 핀란드 중앙은행장으로 계속 활동했고, 이 시기 그가 획득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전문성은 경기 과열과 대소 무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경제 전문가였던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위기가 발생, 심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련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환율 정책에 신중한 나머지 1980년대 후반의 인플레 현상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이끌다
그가 처음 총리로 임명된 1968년, 은 20세기 후반 핀란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임 빠시오(Rafael Paasio) 총리 때부터 추진된 협상은 꼬이비스또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결실을 맺었다.
1930년대부터 3자 합의에 바탕해 보편적 복지국가로 이행한 스웨덴, 덴마크와 달리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이면서도 내전과 대소 전쟁 등의 여파로 같은 경로의 발전이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사용자들은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자주 총파업 등 물리적 투쟁으로 맞섰다. 내전 뒤에도 좌우 대립은 계속됐다. 나아가, 각 진영 안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이 벌어졌고, 정국은 자주 소용돌이쳤다.
대소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용자단체와 노조 간의 단체 협상이 개시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께꼬넨 대통령이 첫 취임한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1968년 노사정 합의를 계기로 핀란드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다. 사진은 당시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노사정협의회 회의 장면.
그렇다면 1968년의 제도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중도우파로서 안정된 대러시아 관계 구축과 국내 사회통합에 역점을 둔 께꼬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경기 인플레 등에 기인한 환율 재정위기라는 외부요인이 부과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196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사민당의 주도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조합주의(neo-corporatism)적 3자 이익 협상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일시적 중단 사례가 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제도가 지속되면서 핀란드 노동시장 및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가 되고 있다.
노사관계의 안정과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고용, 주거,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의 영역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복지국가 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완비할 수 있었다.
꼬이비스또가 각료와 총리로서,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시기에 핀란드 사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목도했던 것이다.
의회주의와 현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
핀란드가 또 하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열과 대결을 특징으로 하던 ‘캠프 정치’(camp politics)의 시스템과 문화가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로 전환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과 선거제도의 영향 등으로 핀란드의 정치 체제는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정당 시스템과 ‘진영 정치’의 양상을 보였다. 준(準)대통령제 시스템 속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내각과 의회를 해산했고, 정치적 교착으로 인해 관료 내각이 들어서는 경우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된 적록연정(punamultahallitus, 사민당-중앙당 연정)과 중앙 노동조합 조직들의 통합,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상의 제도화 등에 힘입어 핀란드 정치 시스템은 점차 안정돼 갔다.
특히 1982년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대통령 취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입헌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전임자 께꼬넨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부터는 소련의 반대 등으로 27년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당(Kokoomus)이 사민당과 ‘블루-레드 연정’(sinipunahallitus)을 통해 집권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이른바 ‘무지개정부’로 불리는 초다수적 연합정부 (super-majority seeking coalition government) 수립이 일반화되었다.
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에 헌법개혁위원회가 출범해 바람직한 헌법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제안했고,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동안 300명의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전환돼 시민 참여가 대폭 확대됐다.
둘째, 대통령의 임기 제한 규정을 마련해 6년씩 2회(최대 12년)만 역임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맞추어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전면 개정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개정 헌법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 주권 원칙에 기반한 시민권 모델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권 원칙을 헌법과 기본권 보장의 기본 원리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기존의 부분적 개정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나아가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전면적 헌법 개혁이 단행됐다. 회기를 달리한 두 차례의 의회 동의를 거쳐 2000년부터 발효된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 핀란드는 의회주의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헌법 전면 개혁이 단행됐다. 사진은 1980년대 이후 핀란드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그 배우자들이 2012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모습.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리 인선과 내각 구성의 권한이 대통령으로부터 의회로 이양된 것이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의회에서 선출, 구성되고, 총선 결과를 반영해 원내 정당들 간의 협상을 거쳐 다수결로 선출되는 총리는 내각과 행정부의 운영에 대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지도록 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대통령은 여전히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형식적 절차의 차원으로 국한됐다.
대통령의 정부 정책에 대한 통제, 특히 께꼬넨 이래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 영역으로 인식되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중요한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외교 정책에서도 정책 주도권이 총리와 내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 헌법 개정 이후 핀란드의 헌정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이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표준적 형태의 의회주의(parliamentarism)로 전환되었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최근 2012년의 헌법 개정은 의회주의적 권력 구조 개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권자 5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경우 의회가 그 입법 정책안을 심의하도록 하는 시민발의제도(citizens’ initiatives)를 도입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 자신 한 번도 국회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던 꼬이비스또가 의회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당 내부에서 커리어를 쌓아간 기성 정치지도자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장관과 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대통령과 달리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권력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았고, ‘올드보이들’ 간에 벌어지는 폐쇄적 권력 투쟁 성격의 정치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의회와 제 정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퍼져있었고, 이는 의회주의적 헌법 개혁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합의와 추동력을 제공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대외정책 편은 다음에 계속)
(이 글의 저자인 서현수 박사는 지난 5월 핀란드 땀뻬레대학에서 핀란드의 의회정치와 시민참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여기(☞Reaching Out to the People)를 클릭해 다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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