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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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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익명 (미확인) | 일, 2012/10/07- 15:14

 

정부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논란이 뜨겁습니다. 

여기에 법원도 최근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지난 9월 15일, 서울고등법원은 한국사 교과서 6종의 집필자 12명이 교육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수정명령 취소소송에서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과연 국가권력은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우리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지, 판결의 쟁점을 짚어보며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광장에 나온 판결]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수정명령 항소심 적법 판결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 2015. 9. 15. 선고. 2015누41441 수정명령취소
판사 지대운(재판장) 강영훈 박창제 

 

 

김선휴 간사

김선휴 참여연대 시민감시팀 간사, 변호사

 

 

 

현재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용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아닌 검정교과서이다. 국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직접 또는 위탁하여 편찬하고 모든 학교가 이를 반드시 사용하여야 한다. 반면 검정교과서는 민간에서 집필한 도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일정한 절차를 거쳐 검정합격을 결정하면, 각 학교가 합격된 검정도서 중 해당 학교에서 사용할 도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는 다양하고 탄력적인 내용의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고 다양한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며 교사와 학생의 교재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교육부장관이 검정에 합격한 6개 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하여 내용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를 들면, 국군의 거창양민학살을 서술한 부분에 대해 ‘균형 잡힌 서술을 위해 북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례도 제시하라’, 북한의 주체사상을 소개한 부분에 대해 ‘학생들이 잘못 이해할 수 있으므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 노선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대내통합을 위한 체제유지전략이었음을 서술하라’,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 운동’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다’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다니’를 ‘극단으로 치닫는 강압정치’로 수정하라는 것 등이다. 

 

이에 위 교과서의 집필자들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적 근거가 없고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므로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고 인정하였고,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도 1심판결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면서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을 정당화해주었다.

 

이미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의 내용을 교육부장관이 수정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또한 국가권력의 교육내용 개입에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면,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요건이 필요한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국가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 규정한 헌법에서부터 찾아보자.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 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31조 제4항)

 

헌법의 위 규정은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의 기초인 만큼 외부세력의 부당한 간섭에 영향 받지 않도록 교육자나 교육전문가에 의하여 주도되고 관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행정권력에 의한 교육내용의 개입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요구 또한 위 헌법규정에서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헌법재판소도 “국정교과서제도는 정부의 행정관료에 의하여 교과내용 및 교육내용이 영향을 받을 소지가 있어 교육의 자주성을 보장하는 위 헌법규정과 모순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헌재 1992. 11. 12. 89헌마88 결정).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나타내는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이와 같은 기본 관점을 전제로, 이 사건 판결이 과연 이러한 헌법정신에 충실한 판결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쟁점 ① 법률유보원칙 : 검정 권한이 있다면 수정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다?

 

첫 번째로 살펴볼 쟁점은 법률유보원칙 위반 여부, 즉 교육부장관의 이 사건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를 둔 것인지 여부이다.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26조 제1항은 교육부장관에게 검정도서의 ‘수정’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령의 근거가 되는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은 교과용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 사정(査定)’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교과용 도서의 ‘수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때문에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한 것인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검정권한’에는 본질적으로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쉽게 말해 ‘검정은 수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검정’의 근거규정인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수정명령’의 근거조항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 사건 수정명령은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표현상의 잘못이나 기술적 사항 또는 객관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수정명령권한까지도 검정권한에 포함된다는 해석은,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를 너무 확대해서 해석한 것은 아닐까. 검정교과서제도를 채택한 취지는 헌법이 천명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하고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다(대법원 2011두21485 판결 참조). 그렇다면 국가의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는 국가의 교육내용에 대한 개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향(내용의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확대 해석하기보다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쟁점 ② 절차적 적법성: 검정절차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가? 

 

행정부와 법원의 판단대로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교육부장관의 검정권한에 포함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수정명령이 적법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 이 사건 수정명령은 그와 같은 절차를 거친 것인지 여부가 두 번째 쟁점이다.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에 대해서는 2013년 대법원에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역시 검정을 마친 교과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내린 수정명령을 다툰 사안이었는데, “(수정명령이)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새로운 검정절차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므로 검정절차상의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판시하였던 것이다(대법원 2013. 2. 15. 선고 2011두21485 판결 참조). 
 

이 사건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교육부장관은 새로운 검정절차를 다시 거치지는 않았고, 대신 ‘수정심의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하여 심의를 진행한 뒤 수정명령을 내렸다. 법원은 이 ‘수정심의위원회’의 위원 선정방식, 위원구성, 소집절차와 심의방식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라고 인정하였다. 심의기간이 비교적 단기간이라거나 수정심의회의 심의사항 및 수정심의회 위원의 인적사항이 비공개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절차적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있어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는 것은 그 절차의 보장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위 2011두21485 판결에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요구하는 이유가 “그렇지 않으면 행정청이 수정명령을 통하여 검정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거나 잠탈할 수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절차와 ‘유사한 외관’을 갖춘 절차를 거쳤다는 점만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여야 한다. 따라서 법원은 단순히 수정심의회의 의사/의결정족수, 기초심사와 본심사의 분리운영, 위원의 분리구성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와 거의 유사하게 이루어졌다는 외관의 판단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수정심의회 절차의 투명성, 수정심의회 구성원의 다양성, 교육행정권력으로부터의 일정한 독립성, 심의회 내에서의 충실한 토론과 의견 개진 및 이를 위한 충분한 기간 등이 확보된 절차였는지, 그래서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지를 더욱 면밀하게 판단했어야 한다. 재판이 있기 전까지 수정심의회 및 그 사전절차에 대해 거의 공개되지 않았고, 재판과정에서도 그 절차의 부실함, 불투명성이 드러났음에도 절차적 적법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판단에 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쟁점 ③ 재량 일탈·남용: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 수 있는 재량?

 

이 사건 판결의 마지막 쟁점은 재량의 일탈·남용 여부, 즉 이 사건 수정명령이 교육부장관에게 주어진 재량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판단이다. 

법원은 검정권한에 포함된 수정권한을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수정명령은 ‘교육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적합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 범위에서만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이 사건 수정명령들이 “오해 또는 오인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없애거나 고치도록 한 것”, “중요한 사안에 대한 서술의 비중을 다른 쟁점과 균형이 맞는 수준으로 늘리기 위한 것”, “학생들에게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재량의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르면 법원은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해 검정도서로서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정도라고 본 것은 아니다. 다만 법원이 보기에는 수정명령이 서술의 균형을 맞추고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향이기 때문에 수정명령대로 고쳐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읽힌다. 사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한 정도라면 불과 3개월 전 더욱 엄격하게 진행된 검정절차에서 합격했을 리도 만무하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A)과 수정명령의 내용(B)에 대한 선호나 가치평가를 떠나서, 만약 A와 B 모두 검정교과서로서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면, A를 반드시 B로 바꾸도록 강제하는 수정명령은 ‘교육적합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A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B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검정교과서 제도 하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바와 같이 헌법정신과 검정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교육적합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서술의 순서나 분량, 자료의 취사선택, 세부적 표현 등은 역사학자이자 교육전문가인 저자들에게 맡겨진 자율의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명백하게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도 아닌 검정합격도서에 대해, 교육부가 지엽적인 서술 순서나 세부적인 표현까지 고치도록 명령하는 것을 재량의 이름으로 허용한다면, 이는 결국 검정교과서 제도를 수정명령을 통해 국정교과서와 같이 운영할 수 있는 재량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바람직한 해결을 기대하며 

 

사실 문제의 발단은 첫 번째 쟁점인 법률유보원칙 위반에 있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교과서제도에 대해 법률단계에서 전혀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대통령령에 백지위임하고 있다 보니, 수정권한의 존부와 범위, 필요한 절차가 모두 해석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행정권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교과서제도의 중요한 내용들을 법률의 단계에 구체화시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와 같은 입법적 개선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면, 법원은 존재하는 법령을 최대한 헌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해석함으로써 행정권의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에 제동을 걸어야 할 책임이 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는 보다 현명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해본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판결비평]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법률가 층에만 국한되는 판결비평을 시민사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눔으로써 법원의 판결이 더욱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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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5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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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총독과 용산총독관저의 전경이 배경도안으로 묘사된 조선총독부 발행 ‘시정7주년기념엽서’(1917)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엔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중략)
50만이라고 하는 국탕(國帑, 나랏돈)을 낭비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의 결과로 이를 이궁(離宮)으로 삼으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은, 국민이 단호하게 이를 힐책하지않을 수 없고, 20년 전의 50만 엔은 오늘날 2백만 엔에 필적할 거금으로 이를 낭비하고 그 후 처지가 곤란해져서 부적합한 곳에 이궁을 둬야 할 필요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대건축물을 일컬어 늘 불충관(不忠館)이라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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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0)에 수록된 ‘데라우치통감 신임피로회장 약도’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 건너편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등진 자리에 포진한 통감관저의 위치 관계와 삼각도(三角道, 삼각지) 쪽에서 연결되는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방궁이라고 일컫는 곳은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이다. 흔히 총독관저라고 하면 남산 왜성대 인근에 자리한 옛 통감관저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과는 별개의 관저가 또 하나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의 소재지 변동에 관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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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의 용도로 세운 건축물(1907년 6월 기공, 1910년 4월 준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통감관저’로 용도변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총독부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이것과 맞교환하는 형태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정작 이곳이 총독관저로 바뀐 이후에는 아무도 이곳을 집무공간으로 삼았던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2년 8월에 우가키(宇垣) 총독이 자기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20여 일 남짓 이곳에 기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누구도 이곳을 거처로 정한 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컸고, 서울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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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1930)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 일대의 전경사진. 왼쪽 위에 지붕이 드러난 건물은 조선군사령부(옛 한국주차군사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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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의 대문 쪽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은 그저 역대 통감이나 총독이 주관하는 연회와 접대가 드문드문 벌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어 1910년 7월에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당시 축하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곧잘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간혹 식민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인 까닭에 그때마다 대대적인 건물수리와 조경공사가 벌어지곤 했다
용산총독관저가 이처럼 시설과 규모는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이러한 처치곤란의 신세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 바로 이궁(離宮) 건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을 지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와 같은 이는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1915)를 통해 이를 조선에 있어서 천황 이궁의 하나로 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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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실린 미나미 총독 주최 제3회 고령자 초대회 관련보도.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대신에 용산총독관저를 증축 개조하여 새로운 관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자못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이후 194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노인(長壽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하여 이곳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정신 작흥과 경로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다음과 같은 미나미 총독의 인사말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미나미 총독이올시다. 오늘 고령자 제씨가 이 같이 다수히 참석하여 주신 것을 충심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장로를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지정이오 또 도덕의 근원인데 특히 동양에서는 경로의 좋은 습관이 깊이 사회에 침윤되어 왔고 조선도 고래로 이 미풍이 성황하였는데 이것을 민중 전반에 궁행실천시키고 싶어서 총독된 이후로 매년 고령자 위안회를 개최하고 지방에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터입니다.(중략)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 아래 용맹과감한 황군장병의 분투와 열렬한 총후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여러분도 아다시피 지난번 항일의 제2수도인 한구(漢口)도 함락하고 적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변은 결코 이로써 끝나지 않고 금후 국민은 일층 공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터이니 여러분은 장로의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편달하여 주어야 합니다.

 

용산총독관저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가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이곳은 다시 ‘조선총독부지도자연성소(朝鮮總督府指導者鍊成所)’의 용도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이소(小磯) 총독이 반도통치의 세 가지 큰 방침의 하나로 내세운 ‘수양연성의 철저적 실천’을 구현하기 위해 1943년 3월 1일부터 용산총독관저를 이용하여 개설한 기관이었다.
황도수련원(皇道修鍊院)의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육군중장 출신의 사이토 야헤이타(齋藤彌平太)가 소장을 맡았고, 총독 자신을 포함하여 총독부의 각 국장과 도지사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성회가 진행되었다. 또한 총독부 고등관은 물론이고 판검사, 부윤, 군수 등을 집결시킨 수련회도 곧잘 이곳에서 실시된 바 있었다.
『매일신보』 1944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30명이 참가한 합숙훈련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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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8월 29일자에 실린 총독부지도자연성소 입소식 관련 보도내용.

 

중추원 참의 30명의 합숙연성이 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의 총독부지도자연성소에서 5일간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참의들은 지난 4일부터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결전하 반도 민중의 전의앙양(戰意昻揚)과 황국근로관 확립에 관한 열성스러운 의견을 개진하였고 또 고이소 총독의 훈시를 듣고 금후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공할 결의를 굳게 한 터인데 연 2일간 계속된 회의로 자못 피로한 터임에도 불구하고 연성에 참가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연성소에 집합한 전원은 처음 신체검사를 받고 연성소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 설명을 들은 다음 오후 6시부터는 신배(神拜)로부터 시작하여 열성스러운 연성을 시작하였다.

 

이곳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시기에 반파(半破)된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아무도 이 건물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용산 ‘아방궁’ 역시 일제침탈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라는 점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금, 2018/04/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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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어렵고 딱딱한 판결문을 시민의 눈높이에서 
함께 읽고 얘기하는 <판결문 읽기 모임>을 10월부터 12월까지 격주 목요일마다 총 

6회 진행합니다.

* 모임 후기① http://bit.ly/1RCCaDt

 

판결문읽기모임② 역사교과서 수정명령 적법 판결, 여러분은 공감하세요?


지난 10월 22일, 판결문읽기 두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참가자를 두 조로 나누어 A조는 한상희 건국대 교수가,  B조는 김종철 연세대 교수

가 진행을 했습니다.

함께 읽은 판결문은 2015년 4월 2일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수정명령이 적법하다

고 선고한 1심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문입니다. 

이 사건은 교육부장관이 이미 검정에 합격한 6개 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내

용을 수정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집필자들이 수정명령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

한 사건입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원고의 청구가 기각돼서 현재 대법원 상고심

이 진행 중입니다. 

 

20151022_판결문읽기

 

 

'법률유보의 원칙?' 

'가치창설적, 형성적 행위'라는 게 무슨 말이죠?


 
판결문이 별지를 제외하더라도 40쪽이나 됩니다. 다 읽진 못하고 주요 부분만 읽어

야 했어요.

그런데 판결문엔 목차가 따로 없습니다. 차분히 읽지 않으면 지금 이 부분이 누구의 

주장인지, 원고의 주장인지 법원의 판단인지 헷갈립니다.

그래서 판결문을 읽을 땐 전체 목차를 한번 써보는 게 좋아요.

간혹 어려운 법률 용어들이 튀어나와 판결문을 읽는데 방해가 됐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을 들어가며 읽었습니다.

 

20151022_판결문읽기

 


판결문에선, 수정명령의 절차적 하자, 내용상 하자에 대한 원고의 주장이 먼저 소개

되고, 이에 대해 법원이 조목조목 판단을 했습니다.


자, 판결문을 읽고 난 후, 과연 얼마나 이 판결에 공감했을까요?

총 14명 참가자들의 설문 결과입니다.



내가 판사라면! '교육부의 수정명령 취소하라고 했다(인용)'라고 다들 답했지만, 

법원의 판결 결과, 이유, 논리에 대해서는 수긍할 만한 부분도 있다는 분들도 계시네

요.

월, 2012/10/2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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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4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4월 3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4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박OO의 교육공무원자격증, 이수증, 이력서, 호적부 등 개인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자료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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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6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3월 6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 대참해 실황엽서,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이야기, 윤봉길 총살의 기사가 실린 『호치신문』(1932.12.20) 등 총 52점이다.

 

재일동포의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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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0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하였는데, 4월 9일 직접 연구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보며 재일동포로 살아온 삶의 흔적을 설명하였다. 박정화 씨는 1938년 충남 영동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후쿠시마 조반(常磐)탄광으로 강제징용되면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증자료는 후쿠시마 생활 당시 학교 관련 문서와 앨범 등 재일동포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카즈히코 씨가 청일전쟁 다색판화 2점, 「일본만세(日本萬歲) 백찬백소(百撰百笑)」(청일전쟁기 풍자화선집) 1점 등 총 3점을 기증했다.
• 3월 20일 즈시 미노루 씨가 긴조 미노루(오키나와의 평화운동가) 씨의 작품 ‘나한(羅漢)’(1994)과 오우라 노부유키(일본 미술가) 씨가 쇼와천황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제작한 14부작 판화 ‘원근을 품고’(1982~85년) 중 한 작품 등 총 2점을 기증했다.
• 3월 10일 최영배 회원(창원)이 ‘유림단사건’ 발생 당시 사망한 조부(최해윤, 달성 원대동 거주)의 장례 때 공성학(孔聖學, 개성 거주, 친일인명사전 수록자)이 부친(최백) 앞으로 보낸 위문엽서(1928년 2월 26일 발송) 한 통을 연구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며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東京裁判????(1962)3권을기증했다.
• 3월 24일 유동성 회원(경기북부지부)이 1994년 흥사단 금요강좌 녹음테이프 10개와 각종 도서 등 총 20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8/04/2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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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을 보낸다. 급한 서류나 물건을 보내고 받을 때 퀵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 늦은 밤 안전을 위하여 종종 대리운전을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소비를 할 때 내가 지불한 금액의 일정 금액이 자동으로 좋은 단체에 기부된다면 어떨까? 평소에 마음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원하지 못했던 마음에 위안이 될 듯하다. 이른바 ‘착한 소비’다.
‘기부금 확산을 위한 착한 소비, 마음까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모토로 150여 개 단체에 기부하고 있는 〈착한콜〉의 정한섭 대표와 연구소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마트폰 앱, 웹사이트, 전화를 통해 꽃배달, 퀵서비스, 대리운전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착한콜〉은 이용금액의 5%를 고객이 원하는 단체를 직접 지정하여 기부할 수 있고 고객이 지정 하지 않는 경우에는 〈착한콜〉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기부한다. 〈착한콜〉은 연구소와 2017년 1월에 협약을 맺었으며 작년 한 해 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약 960만 원을 기부했다. ‘촛불혁명’이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과 함께 ‘세계 3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는 여대생 쌍둥이 아빠, 정한섭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 : 연구소에 회원가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답 : 대학시절 역사연구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부 문화에 관심이 생겨서 직접 기부를 시작했고 결국 사업도 하고 기부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창업 초기에 일부 이용객이 연구소에 기부해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2~3만 원을 기부했는데 연구소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통 그 정도 액수를 가지고 직접 연락하는 단체가 없는데 그런 연락을 받아서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6년 11월 뉴스를 통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소식을 보고 꼭 기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00만 원을 기부했고 작년 1월에는 연구소와 협약도 맺게 되었습니다.

 

문 : 기부하는 회사를 설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 : 저는 87학번이라 뜨거운 여름을 보낸 시대입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1992년까지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1995년 졸업 후 일반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5년간 부산 민주공원에서 시민사업팀장을 역임했습니다. 민주공원 회원사업을 경험하면서 우리나라 시민사회단체에서 회원관리 사업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회원을 모으고 회비를 받는 것이 조심스러웠나 봅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일반 사회생활을 하다가 2014년 9월에 〈착한콜〉을 설립하였습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근무여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소비도 하고 기부도 할 수 있는 회사를 기획했습니다.

 

문 : <착한콜> 로고의 글씨체가 익숙한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 〈착한콜〉의 로고는 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1년 전 즈음에 찾아뵙고 글씨를 받아왔습니다. 기존에 쓰던 로고가 있었지만 선생의 글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로고를 바꾸었습니다.

 

문 : <착한콜> 사업의 홍보는 어떻게 하시나요?

답 : 사업 초창기에는 라디오와 신문 광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비싼 홍보비에 비해 효과는 미비했고 경쟁업체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대안언론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팟캐스트를 보고 마케팅 타깃도 정확하고 팟캐스트 제작에도 서로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팟캐스트를 통한 광고를 시작했는데 그게 〈착한콜〉이 알려지게 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 : 꽃배달, 퀵서비스 그리고 대리운전 업계 상황은 어떤가요?

답 : 사실 업계는 하락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꽃배달은 최근 합리적인 소비와 ‘김영란법’을 계기로 화환 배달이 줄었고 대리운전도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2차, 3차 음주문화가 줄어들고 역시 ‘김영란법’ 이후로 접대문화가 사라지면서 많이 줄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율주행차량이 상용화되면 대리운전은 완전히 사라질 테고 시대가 지나면서 아마 화환 배달도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월호, 최순실 국정농단,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이슈와 함께 팟캐스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착한콜〉의 영업이익은 상승했습니다. 마케팅 타깃을 잘 잡기도 했지만 촛불시민들의 도움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문 : 기부하는 단체들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 : 현재 기부처는 150여 개 정도 되고 한 달에 약 700~800만 원을 기부합니다. 창업 후 3년 반 동안 누적 기부금은 약 2억 2천만 원 정도입니다. 반 정도는 고객 지정 기부금이고 나머지 반 정도는 고객 미지정 기부금입니다. 고객 미지정 기부금의 경우 〈착한콜〉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기부하는데 주로 시민사회단체에 기부합니다. 기부시장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기부금이 복지단체에 할당되고 시민사회단체는 배제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데 정작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문 : 연구소 외에 기억에 남는 기부단체가 있나요?

답 :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이라는 공제조합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돕는 단체입니다. 선진 국가들에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공제조합이 많은데 우리나라엔 별로 없습니다. 〈마당극단 큰들〉이라는 단체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마당극이 운영이 어려워 점차 쇠퇴하고 있는데 이 극단은 단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공동체 운영을 하면서 단원들은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삶을 책임져 주고 회원사업도 참 잘하고 있습니다.

 

문 : 큰들은 연구소와 인연이 깊은 단체인데 도움을 주신다니 더욱 고맙네요.

답 : 기부 외에 다른 사업 아이템이 있나요? 저희 말고도 기부를 내세우는 회사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회사들을 하나로 모아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또 ‘사랑의 열매’와 같이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시민사회단체 대상의 모금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현재 아름다운 재단이 일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촛불시민을 중심으로 더 창조적인 일을 하는 모금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 : 최근 시민사회단체의 회원 수가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답 : 1987년 6월 항쟁에는 학생운동이 밑바탕이 되었고 이번 촛불혁명은 SNS, 팟캐스트 등을 통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의 자체 역량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유기적인 협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문 : 작년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으로 큰 액수를 기부하셨는데 박물관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답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전 당시 양민학살에 대해 사과하니 고엽제전우회 등에서 반발하였는데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일본과 다를 게 없지 않나요? 민족의 역사가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픈 과거를 잘 알아야만 미래를 준비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근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항일운동과 관련된 식민지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하는 박물관이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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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다른 회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답 :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에서 연구소가 차지하는 역할은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학술단체를 총망라하더라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이정표를 남길 만큼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소는 민족의 명운을 걸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단체에 기부하게 된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위에 많이 알려주시고 사명감을 가지고 기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아닐까요?

금, 2018/04/2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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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지난 2017년 12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발주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의의 및 기념사업 추진 방향’이라는 제하의 연구용역을 수행했다. 이 연구과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의의, 기념사업의 추진방향과 체계, 기념사업 관련 사회 분야별 활동방안, 새로운 100년을 위한 대한민국의 비전 만들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보고서>는 ‘지난 100년을 정리하고 다가올 미래 100년을 준비한다.’는 취지 아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망과 제도 개선까지 제시하고자 했다.
연구소는 이번 연구에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의를 ‘시간과 공간과 정신의 확장’이라는 세 차원에서 새롭게 정리했다. 시간의 확장에서는 과거 100년, 미래 100년을 함께 고민하고, 공간의 확장에서는 3.1운동 기념을 한국만의 행사가 아닌 국제적인 행사로 확대하고, 정신의 확장에서는 3.1운동의 이념을 국내적으로는 민주공화제, 국제적으로는 ‘자기결정권’에 기초한 독립정신, 그리고 인권과 평화, 연대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방향과 이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보고서>는 대한민국 100년 기념사업의 체계와 방법, 사업 등을 추진할 민관공동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기왕의 정부 주도 기념사업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촛불혁명에서 확인된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바람을 담아내고자 시민참여사업을 크게 확대하도록 요구했다. 중점사업으로 독립의 언덕 조성사업, 미래비전 국민대토론회 및 연관사업, 남북공동사업, 재외동포사업, 3·1운동재현사업, 임정 청사 등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사업, 대한민국 100년 사료집 편찬사업, 한국 민주주의 역사 정리사업, 과거사정리사업, 역사·인권·평화·미래 엑스포 등 10대 과제를 제안했다.

• 조한성 출판팀장

금, 2018/04/2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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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에서 제작한 청년체력검사 실시에 관한 안내문이다. 침략전쟁이 장기화되자 일제는 조선 청년들도 전쟁에 직접 동원하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1938), ‘해군특별지원병령’(1943), ‘학도특별지원병령’(1944) 등을 차례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8월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조선에도 청년체력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체력검사에 관한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작성하여 애국반을 통해 회람하도록 만들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징병제 실시를 내선일체의 실현으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징병을 독려하였는데 애국반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이었다. 전장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으며, 마을마다 역마다 죽음의 환송식이 애국부인회,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름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애국반 회람청년체력검사 전 조선 일제히 실시

질문> 조선청년체력검사는 무슨 까닭으로 합니까?
답변> 아시는 바와 같이 대동아전쟁은 빛나는 전과를 내고 있으나 미영(米英)을 철저히 정토(征討) 격멸하여 광대한 대동아를 개발하고 경영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경우에 일본 인구의 1/4을 가지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힘에 응하여 맡은 직업에 힘을 다하는 것이 이번의 전쟁 완수에 기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실력이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자 이번의 체력검사를 행하는 바입니다.

질문> 검사의 범위는
답변> 조선인 남자로서 만 18세와 19세(대정11년(1922년) 3월 2일생에서 대정13년(1924년) 3월 1일생까지)의 전체 청년이올시다.

질문> 몇 시 어디에서 행합니까?
답변> 3월 상순에 각자가 거주하는 부군(府郡)에서 행합니다만 그 일시와 장소는 부읍면에서 애국반장의 손을 거쳐 2월 15일경 본인에게 전달되는 「조선청년체력검사고지서」에 쓰여 있습니다. 먼저 애국반장은 그 반 내의 수험자를 조사하는데 위에서 말한 연령의 청년은 자진해서 애국반장에게 신고하고 한 사람도 누락되지 아니 하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질문>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습니까
답변> 다음의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생각해 두시오.

학력, 청년훈련소 종료상황
지원병을 지원한 일이 있는 사람은 그 연도와 체격등위, 자기가 가진 특별한 기능 또는 신체를 청결하게 하고 훈도시(褌 : 속옷)나 사루마다(猿又 : 속옷 하의)를 착용할 것

질문> 그 외에 주의할 일은?
답변> 이번의 검사는 전 조선에서 모두 행하는 것으로 대단히 큰 사업이니까, 수험자는 물론이요, 애국반 전원이 협력하여 훌륭한 성적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수험자는 수험 실시 기간에는 여행 등 이동을 중지하고 당일 불참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또한 공장, 광산 기타 사업장은 물론 관청, 은행, 회사 등에서는 적령자가 본 검사에 참가하기 때문에 결근이나 사사로운 여행 등이 되지 아니하도록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편의를 보아주기를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

국민총력경기연맹

• 강동민 자료팀장

금, 2018/04/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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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사진 등 주요 자료가 화면에 표시됩니다.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 당시의 제도와 문화를 생동감있게 풀어내고 오늘 우리의 모습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합니다. 미식가 2회 “파이팅은 일제잔재인가?”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금, 2018/04/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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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금, 2018/04/2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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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친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금, 2018/04/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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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박창봉 아산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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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산시 조 아무개 시의원의 소개로 전화하게 됐다며 자신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아산 유족회장이라고 밝힌 뒤 유해발굴의 어려움을 말하며 아산지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을 알기에 도와드리겠다고는 했지만 정작 아산지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을 공동체에서 상영한 것,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충남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것, 홍성유해발굴에 몇 번 참석, 한국전쟁기 아산지역 학살지를 유족과 증언해 주실 분을 모셔다 다시 확인하고 증언들을 추가로 수집한 것 등이 전부다.
그러던 중 아산지역 유해발굴에 필요한 조례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성, 진주에 이어서 마침내 이곳 아산에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배방읍 폐금광 학살지를 발굴하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발굴공동조사단으로부터 유해발굴계획을 듣고 아산대책위를 별도로 구성하고 우리 연구소 아산지회가 적극 지원하기로 하고 유해발굴작업에 들어갔다.
2017년 11월 16일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는 가운데 제를 올린 뒤 시굴의 첫 삽을 떴다. 첫 삽을 뜬 이곳은 그때 당시 어린 나이지만 학살현장을 직접 목격한 자리라고 증언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유해가 나오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평범한 노인의 무덤이었다. 당시를 증언해주시던 분들은 그때 너무 어렸고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을 틀렸을지 모른다는 말씀이 전부였다
뭔가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불안해하며 여기저기 산을 파고 뒤지다가 3일을 모두 보내고 말았다. 논의 끝에 하루를 더 찾아보자고 했던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유해를 찾지 못하던 우리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시작해서 혈세만 낭비한다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시굴 마지막 날이다. 오후 들어 마지막 한 군데만 더 파보고 없으면 철수하기로 하고 굴삭기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던 중 ‘중지’라는 외침소리에 모두가 멈췄다. 검은 흙이 보이고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살피다가 누군가 “사람 뼈예요” “유해입니다”라고 외쳤다. 그 순간, 우연일까? 하늘에서 하얀 꽃가루 같은 눈이 하얗게 내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인가. 68년의 어둠이 빛을 만나는 이 순간, 거짓말처럼 소리도 없이 하얀 눈이 한참을 내렸다. 이렇듯 어렵사리 학살당한 피해자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2018년 2월 22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애타게 기다리던 유해들이 어둠속에서 밖으로 한 구 두 구 나오기 시작했다. 켜켜이 쌓여 얽히고 일그러진 불탄 유해 앞에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아이였다. 열 살도 안 된 코흘리개가 어떻게 인민군에 부역을 했단 말인가. 어미의 등에 업힌 젖도 못 뗀 갓난아기는 대체 무엇 때문에, 치아가 모두 닳아버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어떻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는 것인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를 두 눈으로, 두 손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거늘 이곳 저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바로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3월 31일 40여 일을 발굴한 끝에 바닥에 맨땅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발굴 종료를 선언했다. 마지막 유해를 수습한 뒤 밝은 곳으로 모시기 위해 유족이 함께한 가운데 제를 올렸다. 어느 유족이 술을 따르다 마침내 오열하였다. “아버지… 아버지… 왜…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무엇 때문에… 아버지.” 제를 지내던 발굴터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버지를 68년 동안이나 참혹한 어둠 속에 있게 한 것도 모자라 빨갱이 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자기 자식에게조차 숨긴 채 한평생 한을 품고 살아오다 이렇게 처참하고도 허망한 유골로 만났으니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설화산 산기슭 골짜기에 천년을 두고 울어줄 한맺힌 절규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유족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내서 유해 발굴에 참여했던 자원봉사자들, 열일 제쳐놓고 발굴에 매달린 발굴공동조사단, 산으로 점심을 준비해 날라주던 아산대책위, 발굴이 끝날 쯤 발굴장비 철수와 감식장으로 유해를 옮기는 힘든 순간에 기꺼이 달려왔던 연구소 천안지회 회원들과 멀리 부천지회 회원들, 본부 상근자들, 심지어 카메라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었던 영상팀과 기자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40여 일을 함께했기에 유해발굴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직 아산에는 학살지가 여러 곳이 더 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산의 모든 학살지가 발굴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고 발굴이 마무리되면 추모관을 건립하여 아산의 아픈 흑역사를 잊지 않도록 알리고 교육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전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라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규정하여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전면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진달래 피는 봄이 남녘과 북녘에 함께 왔다. 그토록 그리던 봄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이 우리를 옥죄던 이념의 깊디깊은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고 함께 치유하는 시작점이 되어 우리 민족의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를 손 모아 기다린다.

금, 2018/04/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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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회원

 

망국의 수난 그 피해자 안점순님 이승을 떠나시다

북상한다는 벚꽃은 오는 길이 더디지만
그래도 개나리는 노랑 치맛자락으로 기찻길 치렁치렁 치장하였네
아직은 이른 봄날 3월 30일
서둘러 떠나시는 님 붙잡지 못하는 우리 서러운 봄날입니다.
언젠가는 헤어짐이 필연이라지만
끝까지 풀지 못한 매듭이 있어
떠나고 보냄은 너무 아쉬운 작별입니다.
“가해자 전범국 일본은 나에게 잘못했다 말하라”
이승을 지키는 우리가 님을 기억하고 풀겠습니다.
편하게 가시고 편안하게 쉬세요.
일본제국 침략전쟁범죄 일본군 강제연행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안점순, 나라 없는 백성이라
납치와 강제연행, 감금과 폭행으로 목숨보다 소중한 정절을 짓밟히어
여성의 순결을 상실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박살났네
망국의 수난사를 온몸에다 새기고 천신만고 찾아오니
그리던 살붙이도 손사래치고 정다운 이웃들도 외면했네
전사는 죽어도 훈장이라도 남지만
살아 돌아온 ‘위안부’는 손가락질 따돌림이라
끌려가고 짓밟히고 버려지고 외면해도
죽지 못해 사는 질긴 목숨은 웬수보다 더 미운 네 팔자였네
아―! 누가 나보다 더 서러운 사람 있겠는가!
그토록 힘든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신 안점순 님의 숭고한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이승을 지키는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정직한 과거청산 정의로운 역사화해를 위하여

한일양국은 뗄 수 없는 가까운 이웃이다. 한일양국의 선린우호는 서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일본제국이 멀지 않은 과거에 불의한 침략전쟁을 벌여 이웃나라에 고통을 주었던 전범국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범국 일본은 피침략국이 당한 수난과 고통, 상처와 아픔, 수모와 치욕을 함께 기억하고 선린우호가 회복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악한 착상으로 피식민지 여성들을 전쟁터로 강제로 연행하여 감금 폭행한 반인륜적 반인권적 전쟁범죄를 국가가 주도하여 실행하였다.
패전 70년 만에 분명하고 성의있는 사죄도 없이 20만 피해자 1인당 5만원 정도 되는 10억 엔이란 돈을 내놓고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끝났다고 우기고 있으니 어찌 그들이 야만적 전쟁범죄를 반성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슬그머니 일본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시켜 놓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강행한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과거 불법 침략이 전쟁범죄로 판명났음에도 아직도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왜곡된 교과서로 차세대에게 왜곡된 역사교육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선린우호를 저해하고 분쟁을 야기하려는 오만무례한 행위로 즉각 중단돼야 한다.
침략야욕을 버리지 않는 것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일 양국의 정직한 과거청산과 정의로운 역사화해로 평화공존의 길을 함께 가면서 소중한 동반자로 동행하기를 기대한다.

2018.3.31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두손모음

금, 2018/04/2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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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연구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기능에 문제가 생겨 글쓰기 버튼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조속히 원상 회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연구소에 적대적인 일부 인사가 일시적인 기술적 사고를 왜곡하여 연구소를 비방하는 데 악용하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께서는 이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무국.

금, 2018/04/2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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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ㅇ경씨와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최종승리했다. 대법원은 2018년 4월 12일, 조희대 대법관을 재판장으로 한 대법관 4명의 전원일치된 의견으로 방ㅇ경씨의 상고에 대해 기각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내려진 “500만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이 확정되었다.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과 3심까지 모두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ㅇ경씨는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리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ㅇ경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ㅇ경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전 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ㅇ경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했다. 이후 대법원에 보낸 상고이유서도 연구소에 대해 “대한민국에 적대하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과 궤를 같이 하여 역사를 왜곡날조하는 단체에 불과” 하다고 주장하며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의 최종판결에 따라 방ㅇ경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한 형사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며 5월에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방ㅇ경씨는 얼마전 가수 겸 작곡가인 윤상씨를 비난하는 트위터를 날렸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방모씨는 “문보궐정권은 반 대한민국 세력들과 한편 먹는데 남북실무접촉 남수석대표로 윤상씨라면 김일성찬양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간첩 윤이상, 5·18광주폭동 핵심으로 보상금 받고 월북한 대동고출신 윤기권,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든 5.18영화의 주인공 윤상원 이들 중 누구와 가까운 집안입니까”라는 비난성 트위터를 날렸으나 윤상씨 본명이 이윤상 이란 것이 알려지며 역대급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금, 2018/04/2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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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부터 자유게시판 왼쪽 아래에 있던 글쓰기 버튼이 삭제되어 기능이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홈페이지 유지보수업체로부터 방금 원상 복구하였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원인은 해킹 또는 프로그램오류로 추정되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사무국

일, 2018/04/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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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雩南李承晩崇仰輩

 

雩南臨政敵(우남임정적)

國父可當耶(국부가당야)

問罪過完用(문죄과완용)

多功或莫誇(다공혹막과)

 

雩南 이승만을 崇仰하는 무리에게 고함

 

이승만은 임시 정부 敵이었느니

國父라 일컬음이 可當키나 한가

罪를 물은즉 이완용보다 더하니

功이 많다, 或 자랑 따위는 말라.

 

<時調로 改譯>

 

臨政의 敵이었느니 國父 호칭 可當한가

그의 罪를 물은 바, 저 이완용도 넘으니

공적이 多大하다며 혹 자랑하지는 말라.

 

*雩南: 이승만의 號 *崇仰: 공경하여 우러러봄 *臨政: ‘임시 정부’를 줄여

이르는 말  *國父: 나라의 아버지란 뜻으로, ‘임금’을 이르는 말. 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

*可當: 대체로 사리에 맞음 *問罪: 죄(罪)를 캐내어 물음.

 

<2016.9.26, 이우식 지음>

월, 2018/04/2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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