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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문제로서의 동성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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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문제로서의 동성혼’ 후기

익명 (미확인) | 금, 2015/09/25- 10:25

 소수자인권위원회 활동소식

한상희 교수 초청 동성결혼 변호인단+민변 소수자인권위 간담회
‘헌법문제로서의 동성혼’ 후기

 

기존의 지배적인 법리에 도전하는 소송에는 어떠한 등장인물들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눠주는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 운동 의제를 잘 연결시키고 관련자들을 조직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운동 주체들이 필요합니다. 또 법리를 연구하고 실무를 준비하는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리를 제공하는 연구자, 학자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이 법리를 수용하는 사법부의 노력이 있어야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겠지요. 역사적인 사법적 결정의 뒤에는 언제나 각자의 역할을 한 다양한 관계자들 사이의 협업이 있었습니다.

지난 9월 10일 소수자인권위원회 28-3차 회의에서 있었던 동성결혼 변호인단+민변 소수자인권위 간담회 ‘헌법문제로서의 동성혼’은 소송 실무를 준비하는 변호사들이 전문가적 법리를 제공하는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한상희 교수님과 견해를 나누고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차별과 배제의 정당화
지금은 이미 옛날이야기지만 70년대 처음 등장하였던 동성결혼소송에서는 동성 커플의 결혼권리에 대한 원천적 진입 배제는 크게 2가지 이유로 사법적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① ‘원래부터’ 성별특징적이었던(gendered) 결혼의 ‘정의(definition)’상 포함될 수 없다는 논리와 ② 이성커플, 동성커플 두 집단 간 차등대우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이유들, 특히 ‘생물학적 재생산(procreation)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기반한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기존의 가족법의 태도, 판례를 지켜볼 때, 논리적으로 성립되기는 어려운 지형입니다. 생물학적 재생산이 결혼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혼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은 아닙니다. 불임부부, 노령부부, 옥중결혼의 경우를 보아도, 출산가능성이 적법한 혼인신고의 요건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 외의 이유에 대해서도 차등 대우에 대한 정당화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예전의 기각 논리에서는 ‘혼인의 정의’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70년대 미국의 1세대 결혼소송 Singer v. Hara, Jones v. Hallahan, Baker v. Nelson 등이 그렇습니다.

항소인이 결혼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켄터키주법이나 제퍼슨 카운티의 서기의 거부 때문이 아니라, 결혼이 정의된 방식대로 진입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무자격 때문이다. It appears to us that appellants are prevented from marrying, not by the statutes of Kentucky or the refusal of the County Court Clerk of Jefferson County to issue them a license, but rather by their own incapability of entering into a marriage as that term is defined.
켄터키 항소 법원Kentucky Court of Appeals: Jones v. Callahan, November 9, 1973

하지만 혼인의 정의는 일의적이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동성 간의 결합(same-sex union)을 법적 문화적으로 인정한 역사는 상당히 많습니다. 따라서 과연 해당 관할의 혼인법상 혼인의 정의가 과연 이들을 배제하고 있는지, 만일 그러하다면 그 정의가 유지되는 것이 헌법적으로 합당한지 하는 헌법적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생각지도 않게 저 2가지 쟁점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헌법 혼인 조항의 문언을 둘러싼 논의입니다. 비교법적으로 헌법에 혼인의 권리가 등장하는 것은 흔한 예는 아닙니다만, 보통 이렇게 등장하게 된 이유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고 대체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선택을 보장하는 기본권적인 측면이 강조됩니다. 예를 들면 독일기본법은 독일사회가 나치와 제3제국의 참상을 목도하였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혼인이 권리가 있는 제6조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치는 “인종적으로 건강한” 아이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사적인 영역인 혼인과 성행위를 적극적으로 제한하였고, 기본법 제6조는 혼인과 가족생활에 대한 이러한 국가의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하여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제6조는 주로 혼인과 가족생활 안에서의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표상하는 조항입니다.

우리 헌법 제36조 제1항도 독일기본법 제6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문언을 통하여 결혼의 권리의 자유권적인 측면과 평등권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이 문언에서 결혼과 가족제도가 절대적으로 이성異性성(dual-gendered)을 갖추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문리적으로, 연혁적으로, 기본권 해석 측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이 논리의 위험한 함의는 ‘헌법의 문언상 안 된다’는 쉬운 결론이 더 이상의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기 일쑤입니다. 관계를 인정받고 사회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 권리입니다. 이러한 부정의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호인단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헌법 제36조 제1항의 문언은 사실은 맥거핀(MacGuffin)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인은 고래부터 이성간의 결합이었고 그렇게 남아야만 한다는 ‘무형적인’ 심리적 저항과 ‘끈질긴 직관’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유형적인’ 문언에서 애써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성결혼 비교법례를 소개하는 논문의 결론에서 간혹 보이는 ‘동성결혼은 시기상조이며, 파트너십이 적절하다’는 주장을 볼 때도 이러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혹시 이러한 결론이 ‘다수의 선호를 반영한’ ‘법감정’의 발현이라면, 사실은 이는 더 이상 다수의 의견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헌법이 부여한 가능성의 현실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 것인지 겸허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법제화된 21개국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두려워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불합리한 차별이 구제되는 조금 더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려하지 않는 것은 수십 년간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며 살아온 법 바깥 커플들의 차별과 고통입니다.

‘성숙한 헌법(a mature constitution)이란 헌신과 협력에 의존하는 것이어야 하지, 배제와 박해에 조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윌리엄 에스커릿지 교수의 말을 기억합니다.

변호인단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우리 헌법이 부여한 불평등과 부정의를 구제할 가능성과 의무를 현실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한상희 교수님이 곧 발표하실 논문을 기대하며 이날 간담회를 마무리했습니다. 학자님들 파이팅입니다! 한국에도 동성결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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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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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권고안에 대한 입장

시민참여단의 뜻을 이해하고 존중

지속가능한 사회 위해 약자의 편에서 언제나 함께 할 것

문재인 정부, 탈원전에너지전환본격추진해야

부족했던 공론화 과정 평가해 숙의민주주의 밑거름 삼아야

오늘(20)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시민대표참여단의 설문조사 결과를 포함한 종합 권고안을 발표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하되 안전기준을 강화해야하고 원전은 축소해야한다는 권고안이다. 짧은 기간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숙의과정에 참여한 471명 시민대표참여단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설문조사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며 존중한다. 국가 중요 정책을 시민들의 숙의과정인 공론화를 통해 결정한다는 진일보한 참여 민주주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편파적인 언론 환경과 진영논리, 정부 출연기관과 공기업의 건설재개측 참여, 기계적인 중립과 무능함을 보인 공론화위원회, 당사자인 부산울산경남지역의 부족한 의견청취, 미래세대 배제, 불충분한 자료검증, 상호토론 부족과 숙의 과정 부족 등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애초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한계를 보여준 결과라고 평가한다.

시민참여단의 59.5%가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53.2%가 원전을 축소해야한다고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원전산업은 사양산업이고 에너지효율과 재생에너지 산업이 대세가 되고 있는 시대다. 과거의 원전확대 정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신고리 5,6호기에 발목잡혀서는 안된다. 시민참여단의 설문결과에서도 확인했듯이 원전을 축소하는 것이 에너지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한다면 부산, 울산 일대에 몰려있는 원전의 총 갯수를 그만큼 줄여야 한다. 여전히 사용후핵연료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상대적인 위험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가동 중인 원전들은 조기 폐쇄해야 한다. 노후화된 고리원전 2,3,4호기와 내진 보강이 불가능한 월성 1,2,3,4호기가 그 대상이다. 시민참여단도 제기하고 있는 다수호기 안전성 평가, 활성단층을 포함한 최대지진평가를 통한 신고리 5,6호기 안전성 강화조치는 필수적이다

나아가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에너지전환 정책을 본격 추진해야 한다. 지난 40여년간 원전 확대 정책을 추진해온 영향이 한국사회에 만연해있다. 원전산업을 중심으로 한 뿌리 깊은 이해관계 세력들이 한국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국민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는 현실을 이번 공론화과정을 통해서 직시하게 되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2% 정도밖에 되지 않은 현실에서 에너지전환에 대한 온갖 마타도어를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컸다.

문재인 정부는 원전 적폐 세력을 정리하고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 확대 중심의 에너지정책을 현실화시키는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원전안전성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 세계적 수준의 원전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다.

한편, 이번 공론화 과정에 대한 엄밀한 평가를 통해 향후 한국사회 숙의 민주주의가 한층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는 지난 촛불혁명과정에서 확인했다. 시민들이 정부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주권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부족한 숙의과정, 기계적인 중립으로는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이번 공론화과정을 밑거름 삼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한층 성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원전 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과정에서 원전 없는 한국사회, 탈원전 사회가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시민참여단의 상당수가 확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전은 가동 중이고 건설 중이며 원전 주변에서, 원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살고 있다. 우리는 원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원전없는 한국사회가 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17년 10월 20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권태선 장재연 사무총장 염형철

문의: 양이원영 처장 010-4288-8402 [email protected]

      안재훈 탈핵팀장 010-3210-0988 [email protected]

금, 2017/10/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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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0722

화, 2015/07/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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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진 환경상 시상식 및 환경연합 23주년 창립기념식

2016 환경운동연합 홈 커밍데이

따뜻한 봄날, 회화나무 아래서, 젊은 날, 열정의 시절, 추억을 부르는 ...

일시 : 2016년 4월 1일(금)
임길진 환경상 시상식 18:00~18:30
환경연합 창립기념식 19:00~20:00
* 식사는 18:30부터

장소 : 환경연합 마당(우천시 까페 회화나무)
문의 : 환경연합 시민참여팀(02-735-7000)
* 조금 일찍 참석하시어 임길진 환경상 수상자에게 따뜻한 축하 보내주세요.

금, 2016/03/1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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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22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사회적 참사법' 통과를 환영한다.

이제라도 가습기살균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제대로 규명하고, 유사 사건 재발 방지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간절히 호소

여야협의로 수정된 조항들이 이후 진상규명의 발목을 잡을 우려 존재해 국민적 관심이 지속되어야 진실 밝힐 수 있어

16:33:22 ○ 오늘(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사회적 참사법)’이 통과됐다. 그 동안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는 사회적 참사법이 국회에서 제정된 것을 환영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1319일 3년 7개월만이고,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지 6년 3개월 만이다. ○ 2017년 11월 17일 현재 정부에 신고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5,918명이고 이 중 21.6%인 1,278명은 사망했다. 지난해 20대 국회가 첫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활동을 수행한 바 있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피해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았고, 당시 정부와 여당의 방해와 비협조로 90일간의 국정조사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 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 오늘 국회가 통과시킨 ‘사회적 참사법’ 제정은 안전 사회 구축을 위한 기초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첫걸음만을 뗐을 뿐 앞으로 풀어야 할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모두 찾아내는 ‘피해자 찾기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 둘째, 제조·판매 기업의 책임을 밝히는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 셋째, 지금까지 파악하고 있는 43개 제품, 998만개 판매량의 모든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성분, 독성, 판매량 등을 조사해야 한다. ▲ 넷째, 정부 책임을 낱낱이 밝히는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 다섯째, 지금까지 나온 피해 대책의 문제점을 규명하고 올바른 대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 여섯째,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발생을 막기 위한 재발 방지 대책을 점검하고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우리는 오늘 제정된 사회적 참사법을 통해 상당 부분의 세월호와 가습기살균제 두 참사의 진상이 규명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여야 합의과정에서 중요한 법안 초안의 내용들이 변경되어 실질적인 진상규명을 이뤄내는 데 제한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특히, 조사 대상과 내용을 제한 할 수 있는 특례조항문제, 특위구성의 문제, 특위 가동 기간의 축소, 특검 결정 기간의 연장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향후 지속적인 국민적 관심과 오늘 국회 표결에서 찬성한 여야의원 및 정부가 관심을 집중하고 지원해야 만이 법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면 제2의 세월호 참사, 제 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른다. 이제라도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목숨을 잃고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정부가, 국회가 여야 구분 없이 최선을 다해주길 간절히 호소한다.

2017년 11월 24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문의 : 환경운동연합 정미란 팀장 010-9808-5654

# 201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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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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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11/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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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는 밤섬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 처음 만난 한강 이야기 3 ]

밤섬은 폭파되었습니다.

김준성  (물순환팀 인턴)

[caption id="attachment_179441" align="aligncenter" width="564"]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는 밤섬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는 밤섬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1968년 2월 10일, 한강의 밤섬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습니다. 섬 한쪽에 솟았던 바위산은 산산이 부서져 여의도의 둘레 둑을 쌓는 데 쓰였습니다. 여의도가 개발되는 대신 밤섬은 한강 아래로 잠기고 말았죠. 이후 밤섬의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고향 밤섬을 잃고 도시로 이주한 실향민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적으로 복원되어 한강 생명들의 쉼터가 된 람사르 습지 밤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1998년 실향민들이 밤섬으로 귀향하는 행사가 열리면서 30년 만에 재회합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9442" align="aligncenter" width="700"]폭파되기 전의 밤섬ⓒ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폭파되기 전의 밤섬ⓒ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밤섬은 본래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죠. 한강을 오가는 목조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뛰어난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한강에 떠다녔던 배의 95%는 거진 밤섬에서 만들어진 거라고 합니다. 밤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밤섬에서 태어나 폭파되기 전까지 사셨던 유덕문 밤섬보존회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준성: 밤섬이 폭파될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살고 계셨어요?

실향민: 원래는 한 150가구 정도였는데, 을축년 장마랑 6/25 동란으로 줄어서, 우리가 이주할 적에는 62가구 정도였지. 인원은 한 440명 정도였어. 지금은 그때 적 웃어른 양반들이 거의 다 돌아가셨다고 봐야 하고 어린 사람들이 지금 남아있지. 밤섬서 나올 적에 내가 스물아홉 정도였어.

준성: 어르신 어릴 때 밤섬 생활은 어땠나요?

실향민: 그때는 밤섬서부터 노량진 근처까지는 다 백사장이었단 말이야. 거기서 늘상 놀고 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수영들은 다 했거든. 강 건너서 학교에 다니고 그랬지. 내가 서강 국민학교(현재 서강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는 학교서 뛰어 내려오면 한 오 분이면 될까? 강가에 도착했다고. 옷을 머리에 묶고는 헤엄쳐 섬에 들어가 밥 먹고, 다시 강 건너서 오후 수업 듣고 그랬지.

  [caption id="attachment_179443" align="aligncenter" width="700"]얼어 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얼어 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준성: 초등학생이 수영을 할 수 있는 한강이라니 상상이 안 가요.

실향민: 그때는 물도 깨끗했어. 배 타고 강 가운데서 물 떠먹고 또 밤섬 모래땅을 파 놓으면 거기 샘물이 스며서 나온다고. 그걸 마시고 그랬지. 그리고 늘배라고, 강화도 쪽에서 과일이랑 채소를 가득 싣고 배가 올라와. 이제 수영하면서 손들고 “수박 주세요~!”, “채미(참외) 주세요~!” 그러면 던져줬다고. 그걸 안고 헤엄쳐 나와서는 애들이랑 먹고 그런 생각이 아주 그립지.

준성: 밤섬 폭파되고 이주하실 때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실향민: 그때는 밤섬 사람들이 순진하다고 그럴까? 정부 시책이 그러니 따라갈 수밖에. 지금 같으면 머리띠도 두르고 으쌰으쌰하고 그랬겠지. 정부에서는 봉천동에 가서 살아라 그랬어. 근데 고향에서 가깝고 고향 터라도 보이는 곳으로 가겠다고 해서 와우산 꼭대기로 간 거야. 근데 나중에 그 일대가 아파트로 재개발이 된 거야. 거기에 못 들어가는 밤섬 사람들도 있으니 그렇게 또 흩어졌지.

  [caption id="attachment_179444" align="aligncenter" width="700"]밤섬 실향민들이 이주했던 와우산 자락ⓒ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밤섬 실향민들이 이주했던 와우산 자락ⓒ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한편, 폭파되어 수면 아래로 잠겼던 밤섬은 1980년대 중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회복했습니다. 지금은 원래 밤섬보다 더 커졌습니다. 강이 옮기는 모래와 펄이 밤섬에 쌓이고 떠내려온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워 초목을 이뤘습니다. 되살아난 밤섬은 새들의 쉼터가 되었고 99년에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2012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79445" align="aligncenter" width="700"]자연적으로 되살아난 밤섬 ⓒ 뉴스토마토 자연적으로 되살아난 밤섬 ⓒ 뉴스토마토[/caption]

준성: 밤섬이 되살아난 걸 보시면 마음이 어떠세요?

실향민: 밤섬 백사장 풍경은 진짜 아름다웠어. 모래알이 깨끗하고 희고 윤이 나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도 밤섬 들어가서 살겠느냐 물으면, 한강물 먹고 호롱불로 살았어도 거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지.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전부가 그래. 만나면 옛날 밤섬에 살았을 적 이야기들 하면 시간이 금방 가.

 준성: 그런데 밤섬이 폭파되고 30년 만에 밤섬 귀향 행사를 하셨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밤섬에서 나오신 지 50년 가까이 됐는데, 어떻게 아직도 유대가 이어지는지 사실 궁금해요.

실향민: 그건 밤섬 부군당굿 역할이 커. 아무래도 밤섬은 강 옆이니까 홍수 나면 죽을 수도 있고 허니 무사안일을 비는 마을굿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그게 밤섬 부군당굿이야. 밤섬에 있을 적엔 오후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다음 날 아침까지 마을 사람들 다 같이 했지. 그 부군신(神)을 모신 사당이 밤섬에 대대로 있었다고. 그게 우리 집 근처에 있었는데, 어릴 적엔 그 사당에 걸린 그림들이 참 무섭더라고.

준성: 지금도 부군당굿을 일 년에 두 번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주하실 때 사당도 옮기신 거예요?

실향민: 그렇지. 밤섬서 나올 적에 사당 기둥이랑 무신도(무속 신앙에서 받드는 신을 모신 그림)를 갖고 오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가 문화재 이런 거에 생각이 깊지를 못했다고. 그래서 갖고 나올 때 간수를 잘 못해서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참 속상하지. 부군신 모신 사당은 여전히 처음 이주했던 와우산 자락에 있어. 거기서 지금도 굿을 해.

[caption id="attachment_179446" align="aligncenter" width="700"]밤섬보존회 회장님과 밤섬부군당 사당ⓒ김준성 밤섬보존회 회장님과 밤섬부군당 사당ⓒ김준성[/caption]

밤섬 사람들은 왜 살던 곳에서 나와야 했을까요?

1차 인터뷰를 마치고 보름 뒤에 회장님께 부탁을 드려 사당을 함께 찾았습니다. 와우산 가파른 언덕 중턱에 자리 잡은 사당은 비밀스러워 보입니다. 마을굿과 사당이라니 참 생소합니다. 사당 한쪽에서 어렵게 모은 고향 사진들을 보여 주시니 긴장이 풀립니다. 고향 집이 어디쯤이라고 사진을 짚으시는 걸 볼 때는 마음에 작게 동요가 입니다. 밤섬 사람들은 왜 살던 곳에서 나와야 했을까요? 한강 개발과 와우산 자락의 재개발로 마을은 자꾸 흩어져야 했습니다. 개발로 얻는 것은 쉽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기념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잃는 것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또 한강이 개발된다면 누가 무엇을 상실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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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6/1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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