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미군 주둔, 미국 국익에 도움 되지 않아”
(76) 나는 여객기 승무원이다! S. Macho CHO [email protected]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느낄 수 있는 꿈의 직업!” 한국 내 한 승무원 전문학원의 홍보문구다. ‘승무원(乘務員)’은 비행기, 기차, 버스, 선박 등 대부분의 탈 것에 탑승해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칭한다. 성차별 문제로 플라이트 어텐던드(Flight Attendant), 캐빈 크루(Cabin Crew)라고 부르기 전, 20여 년 전까진 남성은 스튜어드(Steward), 여성은 스튜어디스(Stewardess)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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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트럼프 미 대통령은 상황의 반전이라는 전개보다는 현상이라는 봉합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정치분석가인 Tom Fowdy는 CGTN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서 트럼프의 아젠다 리스트에 우선 순위가 북한에서 중국과 중동으로 확실하게 이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남북한 당국이 합심하여 미국의 의도와 별개로 민족사적 관점에서 대북제재를 뚫고 한반도의 상황을 주도해 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최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 협상과 관련된 진행 상황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트위터를 통해 게시했다.
“서두를 필요 없다,” 혹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들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하여 최근 몇 달간 진척이 없음을 비판하는 미국 내 여론을 일축했다.
그가 언급한 말들을 보면, 작년까지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가 평양의 문제에 대해 취했던 조급한 접근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워싱턴은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면 선제적 군사행동을 취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시적인 정치적 맥락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일련의 언급들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우선순위가 변화되었음을 점점 더 확실하게 알리고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목표들은 바뀌거나 버려지지 않았겠지만,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더 큰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대중, 대이란 이슈에 목을 걸고 있는 상태다.
결과적으로, 제재만 유지한다면 평양에 대해 한 수 앞서 가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종국에는 미국과 거래를 성사시키려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판단으로 미 대통령은 행정부 내 매파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북한과의 협상에서 기꺼이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트럼프 당선자로서 대통령 집무실을 넘겨 받을 때, 그는 북한문제를 대외정책 이슈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정한 임무란 무엇인가? 그건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제조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는 트윗을 남겼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급격히 확대되어, 워싱턴 내 기류가 바뀐 것을 인식한 평양 측에서 핵 능력을 최대한 빠르게 발전시키는 최고점의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결국 모든 일은 트럼프가 스스로 언급했던, 북한을 “화염과 격노”로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현재의 지경(북한의 ICBM 성공)에 이르렀던 것이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는 처음부터 트럼프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 중국이라는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2018년이 되자, 상황은 악화됐던 것만큼이나 급하게 변했다. 전쟁 위협과 끝없이 진행되었던 미사일 실험은 서울의 중재로 이루어진 워싱턴과 평양 양측의 대화로 인해 중지된 상태이다. 두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 트럼프는 “핵 위협은 끝났다”는 말로 서슴없이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토록 빠르게 북핵 문제가 봉합된 만큼, 다른 문제가 부상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중국과 무역전쟁이었다. 4월이 되기가 무섭게 트럼프는 북핵 위기가 끝났음을 직감했고, 이제 더 어렵고 정치적 의미가 큰 안건을 손볼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제로 2017년 한 해 동안, 트럼프는 북한 문제를 가장 우선시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베이징의 성실한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는 트럼프가 북한 공격이라는 적극적인 전술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더라면 불가능 했을지 모를, 서로간 선의에 기반한 협조였다. 그리곤 북한이 대화의 장에 들어서고 있음이 명확해지자, 우선 순위는 자동적으로 즉시 바뀌었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해 관세를 곧바로 꺼내든 것이다.
그 이후로, 트럼프의 정책 리스트에는 중국에 대항하는 요소들이 급부상했고 평양은 이제 그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의 트윗 협박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적 군사행동이 아닌 중국과의 관세 확대와 전면으로 확장된 경제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매달, 트럼프 행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로 정책과 대만 문제를 언급하면서 Huawei에 대한 공격을 확대하고 있으며, 대중 강경책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북한 이슈는 멈춰서 버렸다. 미국이 협상의 수단으로 평양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진척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일들을 거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트럼프는 2017년에 적용된 경제제재가 김정은을 결국 무릎 꿇게 만들 우월한 영향력의 협상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북한이 일방적으로 약자의 위치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잘못 되었다.
결국 트럼프는 이러한 판단 때문에 대외정책 분석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비판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진 않다. 미국 국내를 향해 그는 아직 자신이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점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가 정해두었던 기준선은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 능력을 김정은이 갖추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었고, 기준선은 이미 충족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을 주창하는 국수주의적 기준과 “핵의 비확산”이라는 두 개의 국제적 의제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미국우선”의 이익 만을 중요시하고, 후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비록 북한과 협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며 내년 초에 있을 정상회담이 교착상태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음에도 트럼프는 급할 것이 없다. 그는 오히려 편한 상태에 있다. 더 큰 우선 과제라는 승부수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매파 각료들을 멀리할 수 있는 정치적 여유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그의 판단대로 여유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77)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7 – 3․1운동, 3․1 혁명 100주년 S. Macho CHO [email protected] 국경일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적인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법으로 정하여 온 국민이 기념하는 날’이다. 대한민국 5개의 국경일 중 하나인 3․1절은 3․1운동이 우리 역사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3․1운동 결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은 국내, 해외를 막론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로 나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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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학계,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3.1절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연일 부각시켰다. 같은 해 9월 개최되었던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남북공동행사와 관련한 합의를 해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위해 그해 12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장소와 규모 등이 담긴 계획안을 북측에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그 주 내용으로는 기념 음악회 및 축하공연 개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남북 주요 역사유적지 상호 방문, 남북 공동 학술회의 및 특별전시회 등을 남북 공동행사로 치뤘으면 하는 그런 내용이었고, 2주 정도 남은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이 가운데 일부만, 혹은 축소,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일정변경이나 공동행사의 불발까지 예상해야 되는 그런 의미의 공식발표가 지난 2월 14일에 있었다.
“3·1절이 약 2주 남았지만, 우리측의 제안에 대해 아직 북측의 구체적인 답이 온 게 없다”며 사실상 3·1절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를 규모 있게 치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공식 밝힌 것이 그것이다.
‘사실상’의 무산발표회견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중간 중간 브리핑을 통해서 “현재 정부 입장에서는 실현 가능하고 내실 있게 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설명하는 등 분위기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거짓위장 브리핑이 되어버렸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통일부가 이런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결정적 요인에 다름 아닌, 대한민국정부의 공식태도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북측의 태도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북측의 문제이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왜 그렇게 바라봐야만 하는가? 3.1운동은 우리역사에 있어 꼭 통합적인 남북의 공통인식이 필요한 그런 역사의 큰 물줄기이다. 공산주의독립운동을 했건,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했건 3.1운동을 빼놓고서는 일제독립 운동사를 얘기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런 의미를 갖는 역사가 100주년을 맞이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의 상징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공동행사를 치를 데 대한 합의를 했고, 그렇다면 우리정부로서는 그 의미와 합의정신에 걸맞게 100주년을 공동으로 치를 데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야만 했다.
그것도 우리정부의 일방적인 노력과 구상만이 아니라, 즉 우리정부의 독자적인 100주년 기념행사가 아니었기에 상대가 있는 그런 공동행사로 100주년을 치르려고 했다면 그 상대방인 북쪽의 3.1절에 대한 역사적 인식,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3.1절에 대한 그들의 평가, 북의 항일역사 중에서 차지하는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등등을 면밀히 따져 그들의 역사학자와 충분히 협의하고, 상의하며 북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했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러한 노력은 없이(노력이 있었다면 미흡했다는 말이고), 즉 북과 합의된 남북공동 행사중심의 기획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우리정부의 일방적인 기획안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행사, 그것도 이벤트 중심의 행사로 북을 움직이려 했다면 이는 정말 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했는지, 했다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든지에 대한 궁금증만 증폭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3.1절 100주년이라는 그 역사적 사실과 당위의 중요성과 함께, 남북의 두 정상이 합의한 만큼, 그 행사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뭔지, 그것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면 토론하고, 북과 남이 3.1절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면 서로 치열한 토론과 그 인식에 대한 공통성과 차이성을 토대로 행사를 기획하고 ‘미완의 숙제’는 이후 남북의 학술교류 및 역사학자 교류 사업을 통해 지속적인 남북교류협력 사업으로 승화시켜 나갔어야 했다.
그렇게 그 과정과 정확히 비례하여 공동행사가 준비되어졌었어만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결과가 2월 14일 통일부의 발표였고, 더 나아가 남북공동행사를 우리정부가 주도해서 준비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너무 앞서서 일방적으로 이런, 저런 행사 하자 그렇게 접근했다면 절대로 남북공동행사는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보는 남북 공동행사의 필요충분조건은 분명하다.
우선은, 남북 공동행사(기획안)의 그 삼빡함보다는 3.1절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같이 할 데 대한 노력이 부족하지 않냐싶다.
이유는 생각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남은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 항일해방운동사를, 북은 김일성중심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의 항일해방운동사를 각각 그 역사적 사실로 인식·이해하고 있으니 3.1절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위상이 전혀 다르게 위치지어 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이 인식의 간격을 어떻게 메꿀지에 대한 작업이 선행되어졌어야만 했던 것이다.
둘째는, 첫 번째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으로 위의 그러한 문제의식이 그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번 3.1절 공동행사는 북이 지난 2월에 발표한 <전체 조선민족에 보내는 호소문>에서 담겨진 그 4항 “4.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자!”였는데, 이에 대한 화답으로 3.1절 기념 공동행사를 남북해외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상상하고, “가칭) 3.1절 100주년 기념 전민족인 단합과 단결을 내올 데 대한 남북해외 공동행사”와 같은 그런 전민족대회를 기획해낼 수 있어야만 했고, 그 결과도 “가)3.1절 100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호소문”과 같은 것이 발표될 수 있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남북이 각각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위상을 달리 설정하고 있는 만큼, 그 역사적 인식의 통합과 통일을 위한 “가칭)남북역사학자대회”와 같은 그런 것을 열어 통합된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위상확립을 해내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셋째는, 정부와 관료들의 태도 및 자세문제를 짚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과연 통일부를 비롯한 관련부처와 기관, 여당에서 3.1절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실제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제대로 있었냐 하는 그런 문제에 우린 좀 천착해야만 한다.
이유는 3.1절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가 부처 차원이거나, 또는 민간차원의 그 정도의 그런 합의사항 정도가 아니라 두 국가의 두 정상이 만나 합의한 최고위급 합의사항이다. 그렇다면 그 합의에 따라 각급의 집행단위는 이를 이악스럽게 달라붙여 실현시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와 여당이 그러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고,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해서 얻는 교훈 또한 명확하다.
남북공동행사의 ‘사실상’무산은 남북의 두 최고지도자가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산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앞으로 우리 민족이 함께하고, 하나 되고, 통일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상징하고 있다.(부차적으로는 관료들의 태도와 자세변화 없이는 남북이 제아무리 좋은 의미에서 합의해내더라도 참으로 어려운 이행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면 교사한다.)
어떻게?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 고집만 부린다면 정말 통합되고 통일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 되는’과정이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각인시켜 주고, 단일민족이라는 그 ‘준엄한’ 역사성외에 지금은 체제, 역사이해, 삶의 형태, 사고방식, 생활방식 …. 등등 모든 분야에서 차이가 있는, 그래서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단 1m도 전진하기 쉽지 않음을 안내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다시 말해 그러한 사실적 인식을 바탕 하지 않으면 하나 된다는 의미에서의 통합과 통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비록 두 정상이 합의했더라도, 또 남북이 조약과 협정, 선언 등으로 합의하고 약속해내었더라도 열 백번 더해 반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 말이다.
이렇듯 ‘지나칠 수 없는’ 공동행사의 무산이고, 그런 만큼 여기서 얻어야 할 교훈은 너무나도 깊고 큰 것이어야 한다.
비록 두 정상이 합의했더라도(역설적으로 두 정상이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질 수 없다는 것에서 정말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북을 진정성 있게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통 크게 하나 되는 연방연합의식과 민족대단결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말 분단극복과 하나 된 남북통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뼈 속까지 각인되어져야만 한다.
특히, 정부와 관료는 정말 진정 함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깨닫고, 심각한 교훈을 그렇게 찾았으면 한다. 민간도 절대 예외이지 않다.
통일뉴스, 2019년 2월 15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와 협의하여 일부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그가 달리기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던 지난해 9월만 해도 한반도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미국과 북한은 전면전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남북평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겠다는 그의 계획은 무모해 보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발해 1만6000km의 유라시아 대륙을 두 다리만으로 달려서 육로로 북한을 가로질러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로 돌아오겠다는 계획 자체도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거짓말 같았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그가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로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거친 전운의 바람은 가라앉고 따뜻한 평화의 기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평화 마라토너’ 강명구씨(61) 얘기다. 지난 15일, 1년 2개월에 걸친 그의 도전은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16개국을 지나왔지만 정작 압록강변을 앞에 두고도 북한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동해항으로 들어온 그는 “앞으로 반드시 남겨 놓은 마지막 구간을 달리겠다”고 했다.
마라톤 풀코스에 맞먹는 40~50km의 거리를 매일 달렸던 그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이미 강씨는 201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부터 뉴욕까지 5200km의 나 홀로 대륙 횡단 마라톤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 ‘전무후무’ 그런 찬사는 어쩌면 의미가 없다. 평범한 한 사람의 개인은 본인의 표현대로 ‘어지간한 철새의 이동 거리보다도 긴 거리’를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작든 크든 변화와 행동을 이끌어냈다.
자신을 ‘러너’라 칭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트럭 가득히 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강명구씨가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그 ‘적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평범한 개인이 ‘평화 마라토너’가 되기까지
강명구씨는 1957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다 1990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샌드위치 가게 점원, 쇼핑몰 계산원, 식당일, 가발 영업 등 안 해 본 일 없이 살았다고 했다. 자동차 부품상을 하며 제법 안정된 삶을 누리기도 했다.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9년이다. 30여 차례 공식 마라톤 완주를 했고 두 차례 50마일 산악마라톤을 달리기도 했다.
2015년 2월 운영하던 식당이 어려워지자 그는 일을 그만두고 느닷없이 짐을 꾸려 미국 대륙 횡단 마라톤에 나섰다. 이민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다른 인생을 설계하고 싶기도 했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의 갖고 싶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팔순의 노모와 느지막이 결혼한 아내에게도 오랜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
혼자서 뛰어야 했기 때문에 텐트와 취사도구, 캠핑 장비와 여벌 옷 등 최소한의 물품을 실을 특수 유모차를 마련했다. 아기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달리는 조깅족들을 위해 생산되는 특수 유모차다. 그냥 뛰는 것만도 어려운데 이 유모차를 끌고 뛰어야 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배터리 충전을 위해 휴대용 태양열 축전 패널도 마련했다.
거기까진 ‘평범한 개인의 일탈’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마라톤 기록을 글로 빼곡히 남겨 두었다. ‘마라톤 문학’을 지향하는 문학도이기도 하다. 인터넷 매체 ‘뉴스로’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출발 당시 한 기자가 “美50대한인 ‘나홀로 대륙횡단 마라톤’ 첫 도전”라는 기사를 써 준 것이 가슴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여정은 ‘아시안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일이 된 것이다. 인터뷰할 때 그는 “올해로 분단 70년이 되었다. 점점 잊혀져 가는 통일이라는 화두를 미 대륙을 가로지르며 남북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일상생활로 끌어내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그가 ‘통일마라토너’로서 첫발을 내딛은 계기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모하비 사막을 뚫고 로키 산맥과 애팔래치안 산맥을 넘었다. 유모차를 보고 아동 학대를 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기도 했다. 야생 동물에 맞서 등산용 삽 하나를 들고 진땀을 빼기도 했다. 석달만에 뉴욕에 도착하자 다시 또 그 기자가 물었다.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다고 했던 그는 막연하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미 대륙보다 큰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또 새로운 출발의 씨앗이 됐다.
2015년 7월 그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이번에는 유모차 앞에 ‘남북평화통일 전국일주마라톤 1879km’라는 배너를 내걸었다.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임진각으로 올라간 뒤 휴전선을 지나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돌아 전국을 일주했다. 진도 팽목항을 거칠 때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기도 했다. 이후 사드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경북 성주 소성리 마을을 출발해 서울 광화문까지 뛰는 ‘평화 마라톤 순례’에도 참가했다. 제주 강정마을을 출발해 성주를 거쳐 시청 앞 광장까지 가는 평화 마라톤 행사에도 참가했다.
어느새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통일 마라토너’ ‘평화 마라토너’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의 유라시아 횡단 계획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와 함께 달리는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톤 조직위원회’를 만들어 후원을 했다. 30여개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송영길 민주당 의원과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도 후원을 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도 90여명의 시민들이 후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유라시아 횡단을 시작했던 지난해 9월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막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런 기류와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한 인터뷰에서 그저 이렇게 소박한 심정을 밝혔다. “14개월 동안 달리면서 여론을 모으고 재외동포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으면 북한도 나 하나 통과시켜주지 않을까. 북한도 자신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정권임을 알리고 싶어할 것이다.”
달리변서 변화하고, 주변도 바뀌었다
강명구씨도 본인의 글에 따르면 처음부터 “통일에 대한 열정이나 평화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심정”으로 달리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꿈과 희망이 필요했다고 했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에서 큰 세상을 만나보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달리면서 그는 변화했고, 또 주변에 변화를 전파했다. 그는 혼자 달렸지만 혼자 달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유라시아 대장정을 출발하면서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알리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웅변(雄辯)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고통스런 달리는 행위를 통하여 주장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미 대륙 횡단을 하면서도 그는 “목청에 힘을 주어 말하는 대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달리면서 사람들과 더 호소력 있게 소통을 할 수 있다는 하늘의 비밀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다고 했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 결심에는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강명구씨의 아버지는 실향민이었다. “두고 온 강 대동강은 내 핏줄에 흐르고 있다”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강씨는 “지독한 그리움은 시인에게는 훌륭한 양식이었겠지만 나와 어머니에겐 애정결핍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돌아가시고 난 뒤 지금까지도 화해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라톤을 통해 아버지와 화해를 하는 시간을 갖고 싶고, 아버지가 살아서는 가 닿지 못한 대동강에 발을 담그고 싶다고 했다.
하루키는 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이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강명구씨에게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통일은 꿈같은 얘기이고 올 수 없는 미래이겠지만, 강명구씨에게 통일은 마라톤 이상으로 험한 길일지라도 “첫 발을 내딛는 순간 훨씬 가까이 느껴지는” 과정일 것이다.
강명구씨는 처음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시작할 때 중국 단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압록강은 건널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했다. 신의주와 평양을 거쳐 판문점을 통과해 남으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바람은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었지만 언제든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달리기가 기대한 것이 나비효과이다. 그러나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한 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녀린 날갯짓에 수많은 가녀린 나비들이 동조하여 태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평화의 나무를 한그루 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심으면 숲을 이룰 터이고 통일은 그 숲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가녀린 날갯짓 한번하고, 나무 한그루 심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사소한 일을 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큰 꿈을 꾸는 것이다.” 참조로 그는 오는 12월1일 임진각에 도착예정이다.

■ 참고자료
[서울신문] 마라토너 강명구 “헤이그~서울 1만 6000㎞ 혼자 뜁니다”
[주간경향] 유라시아 대륙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통일 염원·인류 최초 마라톤 세계일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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