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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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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익명 (미확인) | 목, 2015/09/10- 14:40

 

백두산 통일기행을 다녀와서

- 통일위원회 양승봉 변호사

 

천지는 푸르다.

천지는 맑고 넓다.

그리고 천지는 슬프다.

 

2015. 8.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 동안 민변 통일위가 주관한 통일기행 백두산 탐방을 천낙붕, 이광철, 서중희, 양창영, 설창일, 김용민,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7명의 단촐한 식구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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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모토는 “가보자 북녘땅, 만나자 북녘동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을 시작할 즈음은 남북이 극단적 대치를 한 후 협상을 막 시작한 때로 통일 기행 내내 우리는 인터넷을 확인하며 협상 결과를 주시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한창 교류를 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공유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 온 양쪽 수뇌부의 퇴행적인 행태가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21일-송강하를 향하다.

 

말로만 듣던 백두산 천지를 간다는 설렘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약 1시간 10여 분에 걸친 짧은 비행시간 후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비자심사를 마친 후 가이드를 만나 심양공항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백두산을 오르는 전초기지, 송강하라는 곳을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자랑하는 59살의 조선생님이라는 조선족이었습니다. 조선생은 해박한 지식으로 여행내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선생과 나눈 대화는 여행의 또 다른 맛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출신이라고 하였고 조선생은 딸 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큰딸은 중국에서 판사를 하고 있고 작은 딸은 한국의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가이드를 낀 여행이 그렇듯이 조선생도 버스에 타자마자 간단히 심양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심양의 옛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봉천으로 현재 1,2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중국 5-6위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한동안 달려도 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양에서 송강하까지 약 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여 본격적인 도로주행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의 구멍가게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맛난 칭따오 10병과 안주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무려 75위안!! 우리 돈으로 약 15,000원 정도에 불과해 돈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가 중국시간으로 오전 10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으니 우리는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을 점심 먹기 전부터 시작하는 소박한 호사?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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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었지만 의외로 속도를 크게 내지 않아 약간 더디게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양쪽에 옥수수밭을 지나 달리고 또 달려도 계속 옥수수밭,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지루하고 따분했을텐데 여행이 주는 설레임은 지루함을 못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많이 살아 어쩌면 우리 땅이 되었을 수도 있는 만주벌판을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3시 40분 경 늦은 점심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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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조선생은 이제부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달린다 하면서 약 60km가 남았는데 세 시간 정도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기껏 60km를 세 시간에 간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막상 도로를 달려보니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달린 길은 편도 1차, 왕복 2차선으로 된 좁은 도로였는데 그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은 흡사 곡예를 하듯이 달렸고 여러 번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로 곳곳에 경운기가 다니고 소를 비롯한 가축을 싣고 가는 트럭들, 그리고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량으로 도로의 모든 차량은 가다서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가장 압권인 장면은 터널 내부임에도 양쪽 차선을 꽉 채워 일방도로처럼 3대씩 줄지어 달리는 광경이었는데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송강하는 백두산 등정을 하는 관광객이 머무는 곳으로 이름도 왠지 멋지게 느껴집니다. 송강하를 거의 도착할 즈음 조선생은 1년에 약 300여 명의 중국인들이 백두산에 송이나 산삼, 약초 등을 채취하러 들어가 실종이 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해주었습니다. 백두산을 부산모수(父山母水)라고 칭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한다는 데 그 산에서 해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생이 말했던 것보다 약 1시간 일찍 우리는 숙소인 그린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이동하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연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오는 유가려 가족을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유가려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의 여동생입니다. 여동생 유가려는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2주 뒤 결혼을 할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유가려는 국정원 합동심문센터에서 2013년 4월 26일 석방된 후 오빠의 재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 조작 과정을 자세히 밝힌 후 2013년 7월 초 추방이 되었습니다. 반가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다음 날 점심때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22일-천지를 보다

 

조선생은 백두산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늦게 출발하면 기다리다 지친다며 최소한 6시에는 일어나서 식사를 마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찍 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지런한 한국관광객들이 한꺼번에 식당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제일 단촐해 우리는 제일 일찍 백두산을 향했습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도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곳곳에 작약나무가 부러져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예쁜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조선생은 백두산을 우는 아기 얼굴이라고도 부른다면서(언제 어떻게 표정이 바뀔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로..) 은근히 천지를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하였습니다. 길 옆 곳곳에 늪처럼 보이는 웅덩이, 그리고 무성한 숲은 남한 땅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는 그 곳이 바로 개마고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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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분을 달려 백두산 입구 매표소에 도달하였는데 가지고 간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 공안은 백두산 인근에서는 한글로 된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이드가 드는 안내 깃발에 사용된 한글도 현출시키지 못하게 한답니다. 중국은 백두산에서 한글이 현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강한 제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을 포함한 인근의 땅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나만의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조상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해 멋진 땅을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다시 들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 후 또 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데 입장료와 버스표 가격이 무려 4만 원이 넘는 고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이 모두 중국의 주머니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참 아까왔습니다.

 

드디어 천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달립니다. 작약나무 숲을 지나고, 잡목을 스치고…나지막한 풀숲과 오밀조밀 이쁜 야생화를 굽이굽이 지나치면서 달렸습니다. 30분 정도 달린 후 우리는 드디어 천지를 향해 걷습니다. 일찍 서둘렀는데도 벌써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습니다. 1,441개의 계단을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갑니다. 날씨가 흐렸고 곳곳에 안개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천지를 보기는 글렀구나하고 내심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에 보면 되지…근데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흠흠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본 순간, 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아 천지… 멋진 장면에 입이 다물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순간 뭉클하고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스칩니다. 우리 일행 모두에게 감동의 물결이 스치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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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안 가본 사람들이 여행자랑을 하면 말을 섞지 말자고 하였습니다.–천지도 안가봤으면서–좋은 책을 일독을 권하듯이 저는 천지에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천지를 권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권합니다. 앞으로 2-3년 내에 송강하에 직항이 생길 예정이라고 하니 훨씬 편하게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에 뛰어 내려가 직접 물을 만지고 싶었지만 접근을 금지시킵니다. 직접 접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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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을 가면 두 번을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한다던 농담부터 시작해서 3대의 덕이 모여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참 다양한 말들이 천지를 더 신비롭게 합니다.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순간부터 해맑은 천지까지 멋진 모습을 모두 관찰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우리 일행 모두 천지를 보는 순간 참으로 들떠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오르는 방향에 따라 서파, 북파, 남파…라고 일컫는데 우리는 서파로 올랐습니다. 서파에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비가 서있고 비록 북녘 동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지에서 허용된 북녘 땅만 조금 밟아보았습니다.

 

천지가 주는 웅장한 경관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통일을 원하는 우리 동포의 염원을 모두 담을 만큼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천지를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땅을 통해 구경을 해야만 하고 여전히 우리는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조선생의 채근에 아쉬움을 가득 남기고 천지를 떠납니다. 또 언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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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서 내려와 용암이 쓸고 간 흔적인 금강대협곡을 구경하였습니다. 백두산 바닥은 용암이 굳은 곳에 나무가 자라 뿌리가 야무지게 뻗지 못해서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을 빼고는 주변이 울창해 호랑이라도 튀어 나올 듯 합니다.

 

금강대협곡까지 돌아본 후 아쉬움을 두고 하산을 합니다. 매표소를 거쳐 강원도 식당이라는 곳에서 한국식으로 된 식사를 합니다. 그 곳에서 어제 약속했던 대로 유가려를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제 통화로 향합니다. 통화로 가는 길도 약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서둘렀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백산이라는 곳을 지나기 전에 본 석탄촌은 곳곳에 석탄이 쌓여 있었는데 아침에 석탄을 캐서 바로 성냥불로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연자원은 재생이 안되니 후손에게 자연자원을 물려주자며 될 수 있으면 개발을 늦춘다고 합니다. 백산이라는 곳은 석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데 지금은 북한에서 석탄과 철광을 수입을 하고 있고 북한의 무산 철광을 수입해 철판으로 가공하여 돈을 버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요타에서 50년간 5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고 철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화는 제약과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통화 중심부에는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수는 부여와 고구려의 경계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몽을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백두산부터 오랜 시간을 달려왔던 그리고 내일 달려갈 모든 땅이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통화에서는 저녁에 북한식당인 “묘향산”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을 가기 전 일행은 발맛사지를 받고 백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던 발에 호강을 시켜주었습니다.

 

북한 식당은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음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술값이 너무 비싸서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맥주 1병에 1만 원, 소주 1병에 4만 원, 설창일 위원장님이 기분좋게 한 턱 쏘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중국인 관광객도 제법 있었고 흥에 겨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북한 가수들의 노래에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도 정겨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푼 후 아쉬운 마음에 비류수, 통화의 강가를 7인의 낭인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통화는 상당히 깨끗하였는데 비류수 주변도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있어 운치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도 아쉬움에 호텔 옆 가게에서 양꼬치를 시켜 기어코 맥주를 한 사발씩 먹고 들어갑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주문을 할 수 없었는데 우리 7명이 주문한 양꼬치보다 옆자리에 앉은 대륙의 남녀 2명이 주문한 음식이 훨씬 푸짐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비스하는 남자가 우리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23일과 24일

 

백두산을 본 뒤라 비교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천낙붕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일정에 없었던 양정우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 가는 도중 10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는데 엄청난 폭죽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우리들을 향해 조선생은 결혼식 축포라고 하면서 적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씩 비용을 들여 폭죽을 쏜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양정우는 동북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중국에서는 기념관과 무덤을 둘 정도로 유명한 항일투쟁가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36세에 일본군과 대치하다 사살을 당하였는데 그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 중 조선인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잘 꾸며서 후손들이 기리고 있는 모습은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영화를 안겨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대접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정우 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내일 비행기를 탈 심양을 향해 갑니다. 다시 4시간의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맛난 맥주를 사서 낮술을 먹습니다. 비교적 한가한 일정이라 버스 안에서 변호사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훌륭하신 판사님과 검사님에 대한 초보적인 뒷담화를 시작해서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과 제도에까지 소재를 넓혀가면서 맛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재미난 이야기와 맥주로 배를 채우다 보니 저절로 생긴 뇨의는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버스기사님은 벌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코 정차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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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도착하여 서시라는 시장의 양념파는 곳을 짧고 산만하게 구경하고 조선생님이 극찬을 하는 로벤교자라는 만두집으로 향합니다. 만두집이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만두와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었지만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합니다. 피곤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각종 서면이 기다린다….

 

시내에서 한가롭게 배회를 합니다. 인도가 참 널찍하니 사람이 많아도 산책하기가 수월합니다. 음악소리가 어찌나 크던지…..군것질도 하면서 산책을 합니다. 호텔로 복귀 후 친철하고 영리해보이는 아가씨가 서빙을 하는 대로변 양꼬치집에서 소박하고 즐겁게 맥주를 마셨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북릉이라는 곳을 방문합니다. 북릉은 황태극의 무덤으로 황태극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로 청이라 국가이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1592년에 태어나 1643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었던 해에 태어나 자신은 우리에게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때 앉은 채로 사망하여 청에서 새긴 용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우리와 좋은 인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비교적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북릉을 가면서 생각보다 교통이 덜 혼잡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출근시차제라는 것을 적용하여 직장의 아침 출근 시간을 조금씩 조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중국의 모습을 수탉의 모습이라고 묘사를 하면서 동북삼성은 닭의 모가지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보니 성격도 급하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도 기마민족이어서 성격이 급하고 우리나라의 버선코가 위로 굽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기마족이 말을 달릴 때 유용하도록 신발을 만든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북릉을 구경하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식당에서 하였습니다.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에 한식을 주는 것은 만족을 느끼고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이동을 하였지만 막상 휴관을 하여 구경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박물관에는 삼부인과 청동단검과 비파형동검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물건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문을 열지 않았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조선생과 헤어졌고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공사에서 무작위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서비스에 우리 일행이 모두 비즈니스석을 배정받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비즈니스석을 배정받고도 이를 모른 채 언제 이런 자리에서 편하게 여행해보나..하는 생각으로 지나쳤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돌아올 줄이야…..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참 편합니다. 무지 편합니다. 잠이 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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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우리가 3박 4일간 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고 중국 땅, 그것도 길에 뿌린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천지가 준 감동은 오래 남았습니다.

 

비록 중국 땅에서 본 천지지만 언젠가 우리 땅에서 오르리라.. 통일이 되는 날 천지에 한 번 더 오르리라…우리 일행은 천지에 많은 다짐을 남기고 왔고 천지에 그런 다짐을 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즐겁고 가치있었습니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3박 4일가 어울린 것 역시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비록 북녘땅과 북한동포를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천지에 담은 희망으로 내일을 기약하면서 여행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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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평화기행 기행문

- 박종훈 회원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인권팀이 기획한 베트남 평화기행단은 15. 7. 26.부터 15. 8. 1.까지 베트남을 방문하여 일정을 소화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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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변명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도 몇 번이나 글을 썼다가 지우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야 고백하건데, 난 (다른 평화기행단 팀원들과는 달리)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떠났고, 현장에서도 알 수 없는 찝찝함을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만 했으며, 아직도 베트남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이 글을 쓴다면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친 경험담일 뿐일 터이고, 반면에 (베트남의 아픔을 공감하는 듯하면서) 심각하게 글을 써야만 한다면 결국 이 글마저 찝찝하게 남을 것 같아서 고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이동화 간사님을 비롯한 팀원들과의 계약에 의해) 쓰여 져야만 하고, 또 (이유진 간사님께) 제출되어야만 한다. 결국은 없는 글재주에 거짓말을 할 재능은 더욱 없어서 솔직하게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행여나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 같은 (불량) 팀원을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베트남을 다녀왔기에 부디 오해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2. 어제가 오늘이 되기까지

  영남에서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나로서는 광주의 아픔을 오롯이 알지 못한다. 어디 그 뿐인가, 만점 받을 수 있던 시험을 실수로 하나 틀렸다고 슬퍼하는 동기의 아픔도, 소주잔을 앞에 두고 문득 1년 전 헤어진 애인이 생각나서 아프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아픔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하기가 힘들다.

  이야기를 들으면 슬펐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오월 광주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이 내 가슴에 멍울로 남아 있지 못했다. 공감하는 척 했지만, 나에게는 오늘이 더 소중했다. 그런 나도 현장에 서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그들의 어제가 나의 오늘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28만명과 117만명,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남베트남 연합군과 북베트남 연합군의 수다. 무려 4배가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역사는 북베트남이 승리한 전쟁, 그리고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에게는 베트남 또한 어제의 일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일도,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민간인 학살도, 다 어제의 일이었다. 난 그 세대가 아니니까, 그냥 기억으로만 남겨두면 되는 일이었고, 오늘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베트남에서 전쟁박물관, 구찌 땅굴 등 전쟁을 기록한 곳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지역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미라이(손미) 마을을 시작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빈호아, 퐁니·퐁넛, 하미, 투이보 마을을 방문하였고, 생존자들과의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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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대면해야만 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숙연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베트남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간담회에서의 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오늘, 이 곳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3.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학살이 있었던 마을들을 방문하면서 위령제를 지내고, 아시아인권팀 팀장인 성상희 변호사님께서 축문을 낭독하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아이러니한 평화였다. 그곳의 오늘은 너무나도 고요해서, 마치 학살과 관련한 모든 일들이 거짓말인 듯 했다. 고즈넉한 평야 앞에서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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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난 여전히 베트남의 어제를 온전히 느끼는 데는 실패했다. 현지의 생존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인은 평화를 사랑한다. 미군과 한국군을 용서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 공동체로서 서로 발전해가야 한다.” 생존자들은 이미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들이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오늘은 그들이 생각하는 오늘과는 같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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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아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감정을 잘 다스려 아픔을 승화시켰다는 미담을 듣고 싶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자본’을 탐하여 베트남에 파병했던 우리와 ‘자본’을 탐하는 베트남이 손을 움켜잡고 있는 오늘은… 한국이 베트남에 대한 최대 투자국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날의 참상을 묘사하며 울먹이는 생존자를 앞에 두고 대화하면서도, 더없이 평화로운 평야를 뒤에 끼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것뿐이었다. 내가 만난 베트남은 오늘의 베트남이었다.

4. 그리고 내일

  베트남 평화기행단의 최종 평가자리에서도 아쉬움을 뒤로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베트남의 어제는 현재도 유효한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베트남의 오늘, 그리고 내일에는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고, 고문을 비롯한 인권침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문제 삼는 인권 변호사들은 국외로 망명을 당하고 있다.

  결국 베트남에도 오늘을 사는 이들이 있고, 이들은 우리의 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베트남을 다시 찾게 만들 것 같다. 그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 곳을 방문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해서 너무 좋았던 베트남 평화기행단의 팀원들에게 한 마디씩만 남기면서 기행문을 마친다.

  미친 존재감의 김남주 변호사님, 제 누이가 된 김자연 변호사님, 여행 내내 말 못할(그러나 모두가 알았던) 아픔으로 힘들어했던 김하나 변호사님,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던 박진석 변호사님, 말 안 듣는 팀원들 통솔하느라 너무나도 수고하신 팀장 성상희 변호사님, 그리고 성상희 변호사님의 남자 배광열·임재성 변호사님, 본인은 좋다고 하지만 표정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오지은 간사님, 모든 실무를 도맡아서 책임졌던 팀원들 모두가 감사해하고 있는 이동화 간사님(통역님), 선물 고르는데 놀라운 안목을 보여주신 마사지 이상희 변호사님, 김하나 변호사님에 의해서 만두가 되어버린 이종민 자원활동가님, 새로운 권력 이준형 변호사님, 물에 가장 먼저 뛰어든 물개 조영선 변호사님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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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8/1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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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봄을 알리는 입춘이 지난 2월의 어느 날, 민변 가족들에게 전북지부의 소식을 알리게 되어 매우 반갑고 또 영광입니다. 2016년은 민변전북지부의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습니다. 민변 전북지부 창립 최초로 회원수가 30명(특별회원 2명 포함 31명)이 넘는 양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8월에는 전북지부를 이끌어갈 새로운 임원단(지부장 : 김현승, 부지부장 : 김석곤, 사무국장 : 박재홍)이 선출되어 여러 운동들을 실행해보고자 하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준 인권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공감과 연대

지난 10월 29~30일 우리 민변회원들과 전북지역 로스쿨 인권법학생들이 “공감과 연대”를 주제로 함께 참여한 인권감수성 워크샵은 회원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기 좋은 완주군 리조트에서 인권 감수성, 가정폭력, 언론과 민변, 그리고 지역 사회의 통일운동과 민변이라는 주제로 전문적이고 열성적인 강사님들로부터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 후에 마련된 뒤풀이 시간은 민변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함께 세대를 뛰어넘는 고민을 나누며 회원과 인권법학생들 간의 돈독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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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목소리를 듣다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우리 전북민변회원들도 매주 토요일 5시 전주 한옥마을 앞 관통로 사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때론 비가 왔고, 때론 눈이 왔지만 민변의 깃발은 언제나 힘차게 펄럭였습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민변회원 뿐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의 외침에 우리 민변이 더욱 더 귀를 기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좋은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 집회 후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치맥을 하며 회원들끼리의 우정을 다졌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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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년을 떠나보내며 2017년 새희망을 보다

유독 국민들을 실의에 빠지고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많았던 2016년(병신년)을 떠나보내는 송년모임이 12월 14일에 있었습니다. 20명에 가까운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였고, 김현승 지부장님의 2017년 민변전북지부의 계획 및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민변전북지부가 많은 양적·질적 성장한 만큼 내년에는 소송 구조와 공동변론활동에 더욱 많은 참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부장님의 말씀에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워지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미리 준비된 식사와 음주를 하며 회원들 간의 덕담을 주고받고 사무국에서 준비한 송년 선물까지 한가득 받아 몸도 마음도 따뜻한 송년회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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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2016년 민변전북지부는 지부 공동 변론활동으로 김승환 교육감 사건, 한상렬 목사 보안관찰법 위반 사건 등을 수행하였으며, 소송구조로는 남원평화의 집 고소대리 사건, 자림원 사건 등 다수의 사건을 맡아 수행하였고 고종윤, 박일지 회원을 주축으로 시민법률학교 강연과 같은 외부활동에도 충실히 하였습니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전국의 민변회원 분들게 약속드리며 이상으로 민변전북지부의 2016년 하반기 소식지를 마치려 합니다.

목, 2017/02/0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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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인권위원회 소개 및 소식

김영주 변호사

 

숨을 쉬지 못할 만큼 더워도 너무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끝이 없을 듯한 폭염 속에서도 우리 아동인권위원회는 매일 일어나는 아동학대 사건들, 판례들 등 아동인권에 대한 제반 문제들을 논의하고 연구하였습니다.

2016. 7. 4.부터 민변에서는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일방적인 조기해산에 반대하고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기간 보장을 요구하며 “법대로 하자” 릴레이단식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아동인권위원회의 김희진 변호사는 2016. 7. 10. 광화문에서 단식을 진행하였으며, 많은 위원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더욱이 김희진 변호사는 단식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108배까지 하는 등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항의하고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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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위원들도 많이 함께 해주셨으나 지면관계상 김희진 변호사와 김혜림 변호사의 사진만 올린다. 기꺼이 단식을 함께 하고 108배까지 한 김희진 변호사와 이에 함께 한 위원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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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을 하면서도 108배를 한 김희진 변호사(그 오른쪽 옆은 서채완 변호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런 정성, 이런 마음, 이런 사랑.. 설마하며 윗분들에게 기대했던 내가 사회부적응자이지 싶다.

2016. 7. 19. 우리 위원회는 민변 회의실에서 제17차 월례회를 진행하였고, 이 날 보건사회연구원 류정희 박사님을 모시고 “아동보호체계의 현황과 제도개선 방향”에 대한 간담회를 하였습니다. 어디서도 듣기 힘든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소중한 강의였고, 우리 위원들은 아직도 갈 길이 너무도 멀다는 생각에 답답해하면서도 우리가 해내야만 한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습니다.

또 우리 위원회는 2016. 7. 25. <사드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에 대한 무단결석처리는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조치이다>라는 성명을 내고, 헌법과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인정하는 아동의 표현의 자유, 아동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2016. 8. 30. 경북 성주교육지원청에서는 무단결석처분을 철회하고 기타결석으로 처리하기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모두가 사드도입의 찬반에 대해서만 주목할 때 우리 위원회는 그 집회에 참석한 아이들의 인권까지 세심한 감수성으로 챙겼고, 그로 인해 위처럼 의미있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2016. 8. 16. 이주민지원센터 평화&인권 카페 ‘친구’에서 제18차 월레회를 ‘무비데이’로 진행하였습니다. 이 날 우리 위원회는 다과를 함께 하면서 레몬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이스라엘 정부와 법정투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몬트리”를 감상하였고, 이후 우리 위원회의 월례회 방향과 모니터링에 관한 개선책을 심도있게 논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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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영화를 봤다고 기재하였는데, 왜 화면은 “안녕! 난 데드풀이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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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회 방향과 효과적인 모니터링 방법을 논의하는 위원들,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월례회가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인다.

이외에도 우리 위원회 내부의 청소년팀과 아동팀이 각 소모임을 진행하였고, <추적60분> 아동학대 사건 및 출생신고반려 사건 등에 조력하여 사건을 해결하거나 학대양부모들이 구속되게 하는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동인권 분야는 해야 할 일은 많고 현실은 비루하기만 합니다. 아직 많은 연구와 활동이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 위원들 한명한명이 더욱 소중해집니다. 우리는 신입회원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관심있는 변호사님들의 많은 연락을 기다립니다. 저는 아동인권위원회의 친목, 개그,잡일을 담당하고 있는 총무변호사 김영주입니다(010-9881-5363).

월, 2016/09/1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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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연일 국민안전처의 폭염경보 안내문자가 울리는 대구입니다. 날씨만큼 그동안 대구지부의 활동도 무척 HOT했습니다.

민변 대구지부 활동 (2016년 하반기~ 2017년 상반기)

1. 박근혜 퇴진요구 대구시국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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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 17. 지부는 자체적으로 시국관련 좌담회를 열어 회원(18명)들이 모여 논의를 걸친 끝에 「박근혜 퇴진 대구시민행동」 소속단체로 활동하기로 결정, 이후 대구촛불집회에 총 17차례 참여하였습니다. 최봉태 변호사님께서는 12. 17. 광주시국촛불대회에 참가하셔서 광주시민들 앞에서 발언을 하셨습니다.

2. 지부 송년회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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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소년 선거권 확대를 위한 위한 토론회 및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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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부 봄 야유회 (2017. 4. 29./ 경남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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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에서 봄 야유회를 오랜만에 개최하였습니다. 4. 29. 회원13명, 가족 17명
으로 해금강, 외도 관광, 옥포해전 기념관 관람 등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5. 성주 소성리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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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 성주 소성리 수요집회 방문에는 지부회원과 함께 이용수 할머니께서 참석했으며, 주민들께서 정답게 맞아주셨습니다. 성주 소성리 주민들께 지부에서 준비한 물품(반찬)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6. 지부 총회 (2017.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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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창녕 정재형 변호사님 전원주택에서 지부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신입회원 백수범(변시 4회), 예현주 변호사님(변시 3회) 환영회도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회원들 간의 덕담이 오가고 멋진 노래가 어우러져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총회였다지요^^

7.「흉터의 꽃」 김옥숙 작가 북콘서트 개최 (2017.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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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태 변호사님(소송대리인단 단장)께서 중심이 되어 지부에서는 미국 정부와 원폭제조사, 한국 정부를 상대로 오는 8. 3. 대구지방법원에 원폭피해 조정신청서를 제소하고자 합니다.
이에 앞서 원폭피해자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과 공동주최로 여론 확산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지난 7. 6.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2층 상상홀에서 이번 조정신청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흉터의 꽃」 출간을 맞아 작가인 김옥숙씨를 모시고 북콘서트(대담: 예현주 변호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조정 신청을 시작으로 원폭피해자들의 치유와 권리구제를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하며 종국적으로 원폭 피해자에게 정의가 회복되고 나아가 핵무기 없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며 전국의 민변회원 분께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이상 민변대구지부의 2016년 하반기~ 2017년 상반기 소식을 마치겠습니다.

월, 2017/07/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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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평화, 너무 쉬운 통일> 김진향 교수님 강연회 후기

 

미군위‧통일위는 지난 연말부터 김진향 교수님 신년 강연회를 기획하여, 1월 7일 신년 첫 행사로 신년 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진향 교수님은 정치학, 북한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신 것은 물론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행정관(2003. 5 ~ 2004. 12),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2004. 12 ~ 2005. 5),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인사비서관(2005. 5 ~ 2008. 2) 등 풍부한 국정 경험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 부장(2008. 2 ~ 2011. 7)으로 개성공단에서 일하시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개성공단 사람들 –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을 공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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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향 교수님은 청와대에서 일을 하면서 정부 고위 관계자들도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인상을 받아 개성공단 업무에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개성공단에서 각종 분쟁 해결과 협상 업무를 보면서 느낀 북한, 그리고 통일에 관한 생각들을 책으로 기록하셨습니다. 특히 일상에서 맞부딪치는 남북의 사고방식, 문화 차이를 겪고, 좁혀나가는 과정에서 “틀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다름”이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교수님의 생생한 경험과 고민들을 이야기로 듣다 보니, 통일은 교류 협력의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 “너무 쉬운 통일”이라는 말이 더욱 와 닿았습니다. 흥미진진한 경험담 외에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분단 체제는 북한에 대한 사고와 인식을 어떤 방식으로 제약하여 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왜 중요한지에 관한 고민과 생각을, 북한의 최근 변화상에 관한 학자로서의 분석을 아낌 없이 나눠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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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여에 이르는 긴 강의 동안 “간단치 않아요”를 연발하시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 주시던 김진향 교수님은 뒷풀이 자리에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강연 주제에 대하여 보다 자유롭게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교수님의 민변에 대한 아낌 없는 애정 표현(!)에 더없이 훈훈한 분위기로 진행된 뒷풀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3차에 새벽 3시에 도달하고 말았는데요,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까지 따뜻하고 활기찬 신년 첫 행사였습니다. 김진향 교수님과 함께 해 주신 분들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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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6/01/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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