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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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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익명 (미확인) | 목, 2015/09/10- 14:40

 

백두산 통일기행을 다녀와서

- 통일위원회 양승봉 변호사

 

천지는 푸르다.

천지는 맑고 넓다.

그리고 천지는 슬프다.

 

2015. 8.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 동안 민변 통일위가 주관한 통일기행 백두산 탐방을 천낙붕, 이광철, 서중희, 양창영, 설창일, 김용민,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7명의 단촐한 식구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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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모토는 “가보자 북녘땅, 만나자 북녘동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을 시작할 즈음은 남북이 극단적 대치를 한 후 협상을 막 시작한 때로 통일 기행 내내 우리는 인터넷을 확인하며 협상 결과를 주시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한창 교류를 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공유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 온 양쪽 수뇌부의 퇴행적인 행태가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21일-송강하를 향하다.

 

말로만 듣던 백두산 천지를 간다는 설렘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약 1시간 10여 분에 걸친 짧은 비행시간 후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비자심사를 마친 후 가이드를 만나 심양공항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백두산을 오르는 전초기지, 송강하라는 곳을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자랑하는 59살의 조선생님이라는 조선족이었습니다. 조선생은 해박한 지식으로 여행내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선생과 나눈 대화는 여행의 또 다른 맛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출신이라고 하였고 조선생은 딸 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큰딸은 중국에서 판사를 하고 있고 작은 딸은 한국의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가이드를 낀 여행이 그렇듯이 조선생도 버스에 타자마자 간단히 심양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심양의 옛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봉천으로 현재 1,2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중국 5-6위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한동안 달려도 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양에서 송강하까지 약 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여 본격적인 도로주행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의 구멍가게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맛난 칭따오 10병과 안주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무려 75위안!! 우리 돈으로 약 15,000원 정도에 불과해 돈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가 중국시간으로 오전 10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으니 우리는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을 점심 먹기 전부터 시작하는 소박한 호사?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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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었지만 의외로 속도를 크게 내지 않아 약간 더디게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양쪽에 옥수수밭을 지나 달리고 또 달려도 계속 옥수수밭,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지루하고 따분했을텐데 여행이 주는 설레임은 지루함을 못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많이 살아 어쩌면 우리 땅이 되었을 수도 있는 만주벌판을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3시 40분 경 늦은 점심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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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조선생은 이제부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달린다 하면서 약 60km가 남았는데 세 시간 정도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기껏 60km를 세 시간에 간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막상 도로를 달려보니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달린 길은 편도 1차, 왕복 2차선으로 된 좁은 도로였는데 그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은 흡사 곡예를 하듯이 달렸고 여러 번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로 곳곳에 경운기가 다니고 소를 비롯한 가축을 싣고 가는 트럭들, 그리고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량으로 도로의 모든 차량은 가다서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가장 압권인 장면은 터널 내부임에도 양쪽 차선을 꽉 채워 일방도로처럼 3대씩 줄지어 달리는 광경이었는데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송강하는 백두산 등정을 하는 관광객이 머무는 곳으로 이름도 왠지 멋지게 느껴집니다. 송강하를 거의 도착할 즈음 조선생은 1년에 약 300여 명의 중국인들이 백두산에 송이나 산삼, 약초 등을 채취하러 들어가 실종이 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해주었습니다. 백두산을 부산모수(父山母水)라고 칭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한다는 데 그 산에서 해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생이 말했던 것보다 약 1시간 일찍 우리는 숙소인 그린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이동하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연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오는 유가려 가족을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유가려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의 여동생입니다. 여동생 유가려는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2주 뒤 결혼을 할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유가려는 국정원 합동심문센터에서 2013년 4월 26일 석방된 후 오빠의 재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 조작 과정을 자세히 밝힌 후 2013년 7월 초 추방이 되었습니다. 반가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다음 날 점심때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22일-천지를 보다

 

조선생은 백두산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늦게 출발하면 기다리다 지친다며 최소한 6시에는 일어나서 식사를 마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찍 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지런한 한국관광객들이 한꺼번에 식당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제일 단촐해 우리는 제일 일찍 백두산을 향했습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도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곳곳에 작약나무가 부러져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예쁜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조선생은 백두산을 우는 아기 얼굴이라고도 부른다면서(언제 어떻게 표정이 바뀔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로..) 은근히 천지를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하였습니다. 길 옆 곳곳에 늪처럼 보이는 웅덩이, 그리고 무성한 숲은 남한 땅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는 그 곳이 바로 개마고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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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분을 달려 백두산 입구 매표소에 도달하였는데 가지고 간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 공안은 백두산 인근에서는 한글로 된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이드가 드는 안내 깃발에 사용된 한글도 현출시키지 못하게 한답니다. 중국은 백두산에서 한글이 현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강한 제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을 포함한 인근의 땅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나만의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조상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해 멋진 땅을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다시 들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 후 또 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데 입장료와 버스표 가격이 무려 4만 원이 넘는 고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이 모두 중국의 주머니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참 아까왔습니다.

 

드디어 천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달립니다. 작약나무 숲을 지나고, 잡목을 스치고…나지막한 풀숲과 오밀조밀 이쁜 야생화를 굽이굽이 지나치면서 달렸습니다. 30분 정도 달린 후 우리는 드디어 천지를 향해 걷습니다. 일찍 서둘렀는데도 벌써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습니다. 1,441개의 계단을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갑니다. 날씨가 흐렸고 곳곳에 안개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천지를 보기는 글렀구나하고 내심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에 보면 되지…근데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흠흠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본 순간, 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아 천지… 멋진 장면에 입이 다물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순간 뭉클하고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스칩니다. 우리 일행 모두에게 감동의 물결이 스치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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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안 가본 사람들이 여행자랑을 하면 말을 섞지 말자고 하였습니다.–천지도 안가봤으면서–좋은 책을 일독을 권하듯이 저는 천지에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천지를 권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권합니다. 앞으로 2-3년 내에 송강하에 직항이 생길 예정이라고 하니 훨씬 편하게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에 뛰어 내려가 직접 물을 만지고 싶었지만 접근을 금지시킵니다. 직접 접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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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을 가면 두 번을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한다던 농담부터 시작해서 3대의 덕이 모여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참 다양한 말들이 천지를 더 신비롭게 합니다.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순간부터 해맑은 천지까지 멋진 모습을 모두 관찰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우리 일행 모두 천지를 보는 순간 참으로 들떠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오르는 방향에 따라 서파, 북파, 남파…라고 일컫는데 우리는 서파로 올랐습니다. 서파에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비가 서있고 비록 북녘 동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지에서 허용된 북녘 땅만 조금 밟아보았습니다.

 

천지가 주는 웅장한 경관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통일을 원하는 우리 동포의 염원을 모두 담을 만큼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천지를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땅을 통해 구경을 해야만 하고 여전히 우리는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조선생의 채근에 아쉬움을 가득 남기고 천지를 떠납니다. 또 언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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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서 내려와 용암이 쓸고 간 흔적인 금강대협곡을 구경하였습니다. 백두산 바닥은 용암이 굳은 곳에 나무가 자라 뿌리가 야무지게 뻗지 못해서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을 빼고는 주변이 울창해 호랑이라도 튀어 나올 듯 합니다.

 

금강대협곡까지 돌아본 후 아쉬움을 두고 하산을 합니다. 매표소를 거쳐 강원도 식당이라는 곳에서 한국식으로 된 식사를 합니다. 그 곳에서 어제 약속했던 대로 유가려를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제 통화로 향합니다. 통화로 가는 길도 약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서둘렀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백산이라는 곳을 지나기 전에 본 석탄촌은 곳곳에 석탄이 쌓여 있었는데 아침에 석탄을 캐서 바로 성냥불로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연자원은 재생이 안되니 후손에게 자연자원을 물려주자며 될 수 있으면 개발을 늦춘다고 합니다. 백산이라는 곳은 석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데 지금은 북한에서 석탄과 철광을 수입을 하고 있고 북한의 무산 철광을 수입해 철판으로 가공하여 돈을 버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요타에서 50년간 5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고 철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화는 제약과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통화 중심부에는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수는 부여와 고구려의 경계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몽을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백두산부터 오랜 시간을 달려왔던 그리고 내일 달려갈 모든 땅이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통화에서는 저녁에 북한식당인 “묘향산”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을 가기 전 일행은 발맛사지를 받고 백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던 발에 호강을 시켜주었습니다.

 

북한 식당은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음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술값이 너무 비싸서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맥주 1병에 1만 원, 소주 1병에 4만 원, 설창일 위원장님이 기분좋게 한 턱 쏘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중국인 관광객도 제법 있었고 흥에 겨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북한 가수들의 노래에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도 정겨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푼 후 아쉬운 마음에 비류수, 통화의 강가를 7인의 낭인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통화는 상당히 깨끗하였는데 비류수 주변도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있어 운치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도 아쉬움에 호텔 옆 가게에서 양꼬치를 시켜 기어코 맥주를 한 사발씩 먹고 들어갑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주문을 할 수 없었는데 우리 7명이 주문한 양꼬치보다 옆자리에 앉은 대륙의 남녀 2명이 주문한 음식이 훨씬 푸짐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비스하는 남자가 우리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23일과 24일

 

백두산을 본 뒤라 비교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천낙붕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일정에 없었던 양정우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 가는 도중 10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는데 엄청난 폭죽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우리들을 향해 조선생은 결혼식 축포라고 하면서 적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씩 비용을 들여 폭죽을 쏜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양정우는 동북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중국에서는 기념관과 무덤을 둘 정도로 유명한 항일투쟁가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36세에 일본군과 대치하다 사살을 당하였는데 그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 중 조선인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잘 꾸며서 후손들이 기리고 있는 모습은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영화를 안겨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대접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정우 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내일 비행기를 탈 심양을 향해 갑니다. 다시 4시간의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맛난 맥주를 사서 낮술을 먹습니다. 비교적 한가한 일정이라 버스 안에서 변호사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훌륭하신 판사님과 검사님에 대한 초보적인 뒷담화를 시작해서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과 제도에까지 소재를 넓혀가면서 맛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재미난 이야기와 맥주로 배를 채우다 보니 저절로 생긴 뇨의는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버스기사님은 벌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코 정차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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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도착하여 서시라는 시장의 양념파는 곳을 짧고 산만하게 구경하고 조선생님이 극찬을 하는 로벤교자라는 만두집으로 향합니다. 만두집이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만두와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었지만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합니다. 피곤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각종 서면이 기다린다….

 

시내에서 한가롭게 배회를 합니다. 인도가 참 널찍하니 사람이 많아도 산책하기가 수월합니다. 음악소리가 어찌나 크던지…..군것질도 하면서 산책을 합니다. 호텔로 복귀 후 친철하고 영리해보이는 아가씨가 서빙을 하는 대로변 양꼬치집에서 소박하고 즐겁게 맥주를 마셨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북릉이라는 곳을 방문합니다. 북릉은 황태극의 무덤으로 황태극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로 청이라 국가이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1592년에 태어나 1643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었던 해에 태어나 자신은 우리에게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때 앉은 채로 사망하여 청에서 새긴 용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우리와 좋은 인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비교적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북릉을 가면서 생각보다 교통이 덜 혼잡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출근시차제라는 것을 적용하여 직장의 아침 출근 시간을 조금씩 조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중국의 모습을 수탉의 모습이라고 묘사를 하면서 동북삼성은 닭의 모가지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보니 성격도 급하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도 기마민족이어서 성격이 급하고 우리나라의 버선코가 위로 굽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기마족이 말을 달릴 때 유용하도록 신발을 만든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북릉을 구경하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식당에서 하였습니다.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에 한식을 주는 것은 만족을 느끼고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이동을 하였지만 막상 휴관을 하여 구경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박물관에는 삼부인과 청동단검과 비파형동검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물건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문을 열지 않았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조선생과 헤어졌고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공사에서 무작위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서비스에 우리 일행이 모두 비즈니스석을 배정받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비즈니스석을 배정받고도 이를 모른 채 언제 이런 자리에서 편하게 여행해보나..하는 생각으로 지나쳤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돌아올 줄이야…..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참 편합니다. 무지 편합니다. 잠이 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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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우리가 3박 4일간 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고 중국 땅, 그것도 길에 뿌린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천지가 준 감동은 오래 남았습니다.

 

비록 중국 땅에서 본 천지지만 언젠가 우리 땅에서 오르리라.. 통일이 되는 날 천지에 한 번 더 오르리라…우리 일행은 천지에 많은 다짐을 남기고 왔고 천지에 그런 다짐을 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즐겁고 가치있었습니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3박 4일가 어울린 것 역시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비록 북녘땅과 북한동포를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천지에 담은 희망으로 내일을 기약하면서 여행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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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위] 한미FTA 협상문서 정보공개청구소송 최종 승소

국제통상위에서는 지난 2015. 6. 26. 한미FTA 서문 중 ‘대미 한국투자자가 한미FTA 효과를 누리는 것을 제약하는 조항을 추가하기 위하여 한미 양측이 교환한 문서’에 대해 정보공개청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6. 12. 29. 최종적으로 민변의 정보공개청구가 정당하고, 산업자원통상부의 비공개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사건번호 대법원 2016두51962】.

한미FTA 체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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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FTA 일지 (출처 : 한미FTA공식홈페이지)

한미FTA 체결과정을 보면, 2007. 4. 2. 한미FTA가 협상 시작 약 2년 2개월만에 타결되었고, 같은 해 5. 25. 타결된 협상문 원문이 공개되었으며, 2007. 6월 추가협의가 2차례 진행된 후 같은 해 6. 30. 양국 대표단이 한미FTA에 서명을 하였는데, <2007. 5. 25. 타결된 협상문>과 <2007. 6. 30. 서명된 협정문>이 상당부분 서로 다른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단 1개월만에 협상의 결과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특히 협정문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추가되었습니다.

국내법에 따른 투자자 권리의 보호가 미합중국에 있어서와 같이 이 협정에

규정된 것과 같거나 이를 상회하는 경우, 외국 투자자는 국내법에 따른 국내

투자자보다 이로써 투자보호에 대한 더 큰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받지 아니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서문에 추가된 위 조항은 미국에서의 한국 투자자 대우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조항이 삽입된 사실을 알리지도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해당 조항은 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한국 기업에 미국법 이상의 FTA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문구는 미국 무역법 조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이미 미국법이 충분히 미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으므로 FTA를 통해 더 큰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제통상위의 정보공개청구 과정

외교관계에서 협상이 일단락되었다가 다시 수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또한 왜 이렇게 이상한 문장이 FTA에 들어갔는지, 그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례적인 수정 과정에서 변변한 문서 하나 없이 한미 양측이 의견을 교환하고 타결된 협상문을 변경하지는 않으므로 국제통상위는 정부에 협상 과정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것을 청구하였습니다. 2007년 변경 당시에도 정보의 공개를 청구하였으나 정부는 한미 간의 비밀유지협정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한미FTA 발효 후 3년간의 비밀유지협정을 고려하여, 비밀해제일(2015. 3. 15)에 맞추어 30개 분야의 협상 서류 공개를 청구하였으나 정부는 다시 공개를 거부하였고 위 소송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위 소송과정에서 1심 서울행정법원과 2심 서울고등법원은 해당 정보 비공개로 인하여 보호되는 국가의 이익이 ‘국민의 알권리 보장, 국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국정운영의 투명성 확보’라는 정보공개로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이익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산업통상자원부는 해당 정보가 공개될 경우 다른 나라와의 교섭 정보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으며 외교․통상 관계에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그 근거가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6. 12. 29.「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제4조에 해당하여 심리불속행으로 산업자원통상부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정보 비공개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는 대법원의 판결 이후에도 즉각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측에 통보해야하며 내부적으로도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 측에서 재판 과정에서 계속하여 주장하였던 내용에 불과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엄연히 사법주권을 보유하였으므로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과 별도의 협의 없이 대법원 판결을 조속히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금이라도 한미FTA 협상 과정에 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제통상분야에서 당연시해왔던 밀실행정의 관행을 타개하기를 기대합니다.

목, 2017/01/1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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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북지부 지부소식

 

민변전주전북지부 회원들이 2015년 3월부터 2016년 1월까지 활동한 내역을 간략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1. 회원 역량강화 사업 및 꾸준한 회원의 증가

 작년 3월 이후 신규 회원들이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고종윤(변시4회), 김용빈(변시4회), 노혜성(변시2회), 박계성(변시4회), 박기봉(연수원43기), 우아롬(변시2회), 김원욱(변시4회) 회원이 새로 가입하였고, 박일지(변시2회), 전경령(변시4회), 최영호(변시1회) 회원이 본부에서 지부로 소속 변경을 하여, 종전 16명에서 26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회원증가는 2014년도에 법학전문대학원생들과 지속적인 관계형성을 한 것에 비롯한 것이라고 보고, 작년 5월에는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과, 작년 10월에는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과 각 간담회를 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지부에서 우리 지부 회원들과 지역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인권감수성을 향상시키고자 1박 2일 동안 자체 워크샵을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강사진으로 통일운동가 한상렬 목사, 민주노총전북지부 이창석 사무처장,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김영기 대표께서 영역별로 깊이 있는 말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낮에는 강의로 밤에는 밥과 술과 함께 못다한 이야기로 회원들과 학생들의 인권 감수성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도 허물없이 연대할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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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대사업

 작년초부터 전주에서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 단체 연대사업이 진행되었고, 우리 지부도 동참하여 8월경에 위안부 할머니를 모시고 제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전북교육청은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교육부와 갈등을 빗고 있고, 이에 전북지역에서도 교육재정운동본부를 출범하였으며, 우리 지부도 동참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북겨레하나가 전북지역에 통일교육센터를 건립하고자 하여 우리 지부도 건립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 한 해 신규 회원들이 증가하여 지부에서 ‘1시민단체 1민변변호사’ 연계 사업을 진행하였고,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전북여성의 전화,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무원노동조합 등에 5년차 미만 회원들을 연결하여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3. 변론활동

 작년 6월에는 전주시내버스 회사들이 2012년도 위법한 직장폐쇄에 대한 임금청구 사건에서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엠대우 하청업체의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에 따른 원청 근로자 지위 확인의 소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농협노조 지부장이 부당감사에 대해 규탄한 것에 대해 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사건에 대하여 지부에서 변론하여 무죄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얼마전 전주지방검찰청은 전북교육청 김승환 교육감에 대하여 교육부가 학교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사실을 지시토록한 것에 대하여 감사거부 및 자료제출 거부를 지시하였다는 사실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기소하였고, 이에 지부 차원에서 공동 변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부 회원님들께서 크고 작은 다양한 변론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4. 상담 지원 활동

 지부 회원들이 민주노총전북본부, 전주여성의 전화, 소비자정보센터,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공무원노동조합 등에 정기적으로 무료 법률상담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5.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작년 한 해 가장 큰 수확은 회원들이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입회원들과 워크샵도 하고 시민단체와 연결해 주기도하며 회원들의 역량강화에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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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작년 총회 때 우리 지부도 군산 송전탑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기존에 지원하시던 다른 변호사님들께서 수고해 주시고 계셔서 현재까지 특별한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는 지부회원들이 모여 송년 모임을 하였습니다. 맛과 멋의 고장에서 흥이 빠질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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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이번 달 25일에 신년 모임을 하였습니다. 작년 사업도 돌아보고 올 한 해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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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부 회원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계신 모든 민변 회원분들 모두 작년 한 해 고생하셨습니다. 이상 전주전북지부 소식을 마칩니다.

목, 2016/01/2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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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광주전남지부 소식 (2015.06~10.)

 

 올해 5월 민변 정기총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광주전남지부가 살아온 주요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 5.18 역사왜곡 대응 (지만원 고소, 뉴스타운 발행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8월 3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1987년 제작‧배포한 5‧18 사진자료집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을 북한과 내통해 만든 자료라고 주장한 지만원씨를 상대로, 당시 5‧18 사진자료집 제작과 배부에 참여한 신부님 5명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등으로 고소하였습니다. 민변 광주전남지부 16명의 변호사님들이 고소대리에 참여하였습니다(총 33명 중). 이후 10월 20일, 지만원씨가 북한군인으로 지목한 당시 시민군 4명을 대리하여 2차 고소를 진행하였습니다.

 

한편, 민변 광주전남지부는 독자적으로 팀(임태호, 이소아, 김현무, 홍지은 변호사)을 구성하여 뉴스타운에서 발행‧배포한 호외 1~3(당시 시민군 사진과 북한 군인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5‧18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주장이 실린 신문)에 대해서 9월 22일 발행‧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고, 인용 결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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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공동성명서

10월 14일, 광주전남 문화예술인, 전문가, 지식인 405명은 정부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대한 반대 공동성명서를 5‧18 민주광장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이번 공동성명서 발표를 계기로 광주전남지역 변호사, 교수, 의사,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앞으로 시국‧지역현안 등에 대해 공동대응활동을 펼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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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민변 소개마당 & 변론경험 나누기

매년 10월, 신입 변호사분들을 초청하여, 민변을 소개하고 변론경험 노하우도 공유하는 ‘민변 소개마당 & 변론경험 나누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고 있으며, 10월 21일 저녁에 광주지방변호사회관에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20여명의 신입변호사 분들과 민변 회원 20여명 총 40여명이 참석하였고, 뒤풀이는 맥주와 함께 즐겁게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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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구경기 단체관람

7월 1일, 김정호 회원사업단장님 덕분에 민변 회원 20여명이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 스카이박스에서 야구경기 단체관람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월례회의 및 신입회원 가입승인(장은백 변호사님)을 위한 임시총회의 자리이기도 해서, 모든 회의진행을 마치고 야구관람을 하였습니다. 이날 기아는 한화에 여유 있게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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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름 야유회

7월, 상반기에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신 회원분들을 위해 담양 파라다이스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가족 동반으로 총 35명이 참석하였고, 족구‧발야구‧신발 멀리던지기 등의 체육대회를 통해서 각 회원과 가족분들의 운동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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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립 16주년 기념

매년 9월 월례회의는 1999년 9월 3일 민변 광주전남지부 창립기념일이 있는 달인 만큼 조금은 특별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충장로 소고기 샤브샤브뷔페에서 25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김용채, 임선숙 변호사님의 말씀을 듣고, 홍지은‧문호세 변호사님에게 신입회원 선물증정, 그리고 민변 광주전남지부 4~5대 지부장을 엮임 하셨던 정채웅 변호사님에게는 공로패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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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광주전남지부 소식이었습니다~

목, 2015/11/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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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입회원 환영회, 그 두 배의 기쁨에 대하여

조미연 변호사

 

2018년 상반기 민변 신입회원 환영회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석입니다.

 

서둘러 길을 나섰는데도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었고

지각의 아쉬움과 동시에 작년 이맘때 즐거움을 떠올리며 기대를 안고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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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키워드를 적어 넣은 종이를 보이며

그 중 한 가지를 통해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민변 사람들

한껏 들뜬 기분으로 꾸벅 무언의 인사부터 드립니다.

좀 더 둘러보니 종종 마주치는 익숙한 눈빛의 신입회원들이 보여 설렘을 갖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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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자리에 착석해서 종이컵에 와인이 채워지니

급한 걸음에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

그제야 차분히 진행되고 있는 신입회원의 자기소개가 들리고 함께 자리한 분들의 모습이 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마치 친한 지기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 피어올라 왔습니다.

 

그래도

자기소개 시간은 왜인지 항상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면이 있어

최대한 원래 쌓여있던 가마니였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는데

역시 뛰어난 사회자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세 가지 키워드는 아니더라도 부랴부랴

겨우 ‘민변과의 첫 인연’ 하나 적어놓은걸 들어 올리고는 무대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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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전문대학원 재학 중 인권법학회 활동을 하면서 전주전북지부와 활발한 교류를 했었고 인권법학회 연합(약칭 인:연) 겨울캠프 기획팀으로 민변을 방문했던 바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의 공식적인 첫 인연이라는 키워드에 작년 신입회원 간담회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간담회에서의 즐거움이 생생한데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부득이 1년 동안의 활동이 유예될 수밖에 없었던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환영회에서 보자며 두 배로 기쁘다고 표현해주신 백주선변호사님의 답신, 노동위원회 모임에서 김선수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신 ‘머릿수 채우기’의 중요성과

제가 외쳤던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라는 건배제의를 차례로 상기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민변과의 첫 인연을 생각하며 항상 그때의 열정으로 머릿수부터 채우면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스스로의 당찬 포부를 밝히는 것으로 소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자기소개인지 스스로에 대한 다짐소개인지 모를 정신 산만했던 저의 말이 끝나자 따뜻한 박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존에 가입했던 회원팀, 노동위원회, 여성인권위원회을 비롯해

부족한 제게 관심이 있다면 함께하자고 제안해 주신 아동인권위원회, 민생경제위원회 등 그저 인권과 민주사회를 위한 행동하는 변호사모임에 함께할 수 있음에 소소한 인연의 즐거움을 누리며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자리할 수 있어 행운입니다.

 

차근차근 머릿수를 채우는 일부터 같이하겠습니다.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늦장부리다 민변의 길에서 멀어지지도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민변 세 번째 신입회원 환영회 자리를 맞이하여 세 배의 기쁨을 안고

이 자리에서 느꼈던 온기와 공감에서 오는 즐거움을

제가 다른 분들에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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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5/0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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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사태 연대 활동 후기

 

임준형 변호사

이번에 저희 교육청소년위원회에서 전해드릴 소식은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사태 연대 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서울대학교는 최근 학생들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시흥캠퍼스 설치를 추진하여 학생들과 갈등을 빚어 왔는데요, 저희 교육위원회에서는 서울대학교가 위와 같이 시흥캠퍼스 설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 대한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를 하였다고 판단하여 학생들에 대한 법률 조력 및 연대 활동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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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개요를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대학교는 지난 2016년 8월 학생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설치 계획을 발표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2016. 10. 10. 대학 본부에 시흥캠퍼스 추진 계획에 대한 학생 참여권 보장을 요구하며 학교 행정관을 점거하여 반대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학생들의 행정관 점거 시위는 2017년 3월까지 이어졌는데요, 대학 본부는 외부 용역 직원 포함 수백 명의 직원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폭행하고 물대포를 발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학생들의 행정관 점거 시위를 폭력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실신하여 응급실로 수송되는 등 학생들에 대한 상해의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는 적반하장격으로 점거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업무방해죄 등으로 고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교육위원회에서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학생들에 대한 법률 조력 및 연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활동에는 위원장 김영준 변호사 님, 하주희 변호사 님, 그리고 저 임준형 변호사가 참여하였습니다. 저희는 고소당한 학생들의 피의자 조사에 참여하고, 학생들의 규탄 집회에 연대하여 참여하였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서울대학교 측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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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2016. 6. 26.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진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취지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서울대학교 총장 및 교육부장관에 대하여, 시흥캠퍼스 설치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측이 학생들에 대하여 자행한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시정하라는 권고 결정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정이유는 첫째, 헌법이 보장하는 대학 자치는 그 실질적 실현을 위해 구성원의 참여가 필수적이나, 서울대학교 측은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시흥캠퍼스 설치를 추진하여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자치권 및 참여권을 침해하였고, 이는 헌법 제22조가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및 헌법 제31조가 보장하는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점, 둘째, 서울대학교 측은 학생들의 행정관 점거 시위를 폭력 진압하여서 다수의 학생들이 실신하여 응급실로 수송되는 등 학생들에 대한 상해의 결과가 발생하였고, 이는 헌법 제12조가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 및 헌법 제21조가 보장하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을 침해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희의 연대활동의 효과가 있었는지 서울대학교는 지난 7월 11일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관련 문제 해결과 신뢰회복을 위한 협의회'(이하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협의회’)를 발족하겠다고 발표하였고, 또한 행정관 점거 시위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에 대한 형사 고소도 취하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지금까지 시흥캠퍼스 문제에 대한 학생 참여권 보장을 요구해 온 것에 대하여 대학 본부 측이 이를 학생들과 대화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으로, 학생들의 노력과 투쟁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는 학생들에 대한 징계 절차는 계속 진행하겠다는 입장이었기에, 저희 교육위원회에서는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협의회 발족을 환영하며, 서울대의 학생들에 대한 고소 취하, 징계 철회를 촉구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여 서울대학교가 학생들에 대한 징계 역시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희가 연대한 결과 서울대학교 측이 어느 정도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고 학생들에 대한 고소가 취하되는 등 실질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정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고 그 학생들의 꿈을 도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더 보람이 있던 활동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학생들은 가장 순수한 열정을 품고 행동하는 반짝이는 보석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완전하여 어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저 자신이 방황하는 학생이었던 적이 있었기에 그런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것이 제 꿈이었고, 이번 활동을 통해 제 꿈을 이루는데 한 걸음 다가선 듯하여 무엇보다 가슴 벅찼던 경험이 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기본권으로서의 대학 자치에 있어 학생을 비롯한 대학 구성원들의 그 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한 바 있으며(헌재 2006. 4. 27. 2005헌마1047등), 대법원 또한 헌법 제31조 및 사립학교법령에 의거하여 총학생회에게도 학교운영 참여권이 보장된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15. 7. 23. 선고 2012두19496 판결). 위와 같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시에 따를 때 학생들에게도 학교운영에 대한 참여권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는 독단적으로 시흥캠퍼스 설치를 추진하여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였으며,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 투쟁에서 학생들은 대학 본부 측이 동원한 용역들에게 폭행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동료 학생들로부터 고립당하고 매도당하기도 하면서도 끝까지 자신들이 지켜야할 권리가 무엇인지 잊지 않았으며,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꿋꿋이 싸워왔습니다. 학생들의 이와 같이 치열한 투쟁을 지켜보며, 저 또한 자신의 권리를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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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7월 21일 서울대학교는 행정관 점거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 중 12명에게 무기정학을 포함한 중징계를 내렸는데, 이 징계는 서울대학교 학칙상 규정된 징계절차상 학생의 출석 및 의견진술권 조차 부여하지 않고 내려진 것으로 절차상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갈등을 초래한 서울대학교 측이 제반 사정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징계절차 조차 무시하며 지나치게 과중하게 의결한 이 징계는 부당한 것임이 명백하며, 현재 저희에게 이러한 징계를 철회시키는 것이 또다른 과제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서울대학교가 약속한 참여권 보장 또한 대학 본부 측이 언제 또 입장을 바꾸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반드시 학생들과 시민사회의 꾸준한 감시가 필요합니다. 학생들의 이 길고 긴 싸움이 꼭 승리로 끝날 수 있도록, 부디 끝까지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하여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월, 2017/07/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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