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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공허한 제도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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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공허한 제도 개혁론

익명 (미확인) | 월, 2015/09/07- 13:51

박상훈포트레이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동칼럼] 공허한 제도 개혁론

공존과 협력의 시민 문화 내지 인간적 정서가 깊고 넓어지는 변화 없이 제도의 형식에만 의존해 실천되는 민주정은 군주정이나 귀족정보다 못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럴 경우 사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고 개개인은 사나워지기만 할 텐데, 이런 조건에서 누가 ‘목적 있는 좋은 삶’의 전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잘 알다시피 1987년 민주화 이후 28년째를 지나는 동안 선의를 앞세운 수많은 제도가 개혁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좀 더 자유롭고 평화롭고 건강하고 평등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만들어지는 순간 작동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진 ‘죽은 제도들’만 무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제도 대안을 찾고자 하는 열정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제는 제도만큼이나 제도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 내지 토양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도의 선택과 변화가 어떤 선험적 보편 원리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을까? 어느 나라에나 적용될 수 있는 최선의 제도가 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모든 국가들이 유사한 체제로 수렴되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무정부 상태의 국제관계를 종식시킬 세계정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강조했듯이, 그건 현실이 될 수 없다. 나라마다 특정의 사회구성체를 역사적으로 다르게 발전시켜왔고 그런 조건 위에서 서로 다른 의도와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이 갈등하기에, 선거제도만 하더라도 나라마다 정말로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가진다. 유사한 제도 같지만 만들어지는 효과도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국민공천제)’와 ‘독일식 선거제도’를 둘러싼 정치개혁 논란이 당파들 사이의 협소한 이해다툼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사회적으로는 공허한 이런 제도 개혁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게 된다.

정치의 역할이 법-형식을 둘러싼 갈등으로 치환되면 필연적으로 국가 관료제의 영향력만 커지게 마련이다. 이번 선거제도 논란 역시 정치 규제기관으로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위신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이란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존립할 수 있는 추상적 주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회적 존재이자, 일정한 시간적 구속 하에서 공통의 기억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이다. 나아가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유산에 의해 규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조건을 형성하고 개선해 갈 수 있는 집합적 결정의 주체라는 점에서 정치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도 개혁이 의미를 가지려면 시민적 삶의 정서적 토양을 풍부하게 만드는 전망과 동시에 정치의 가능성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부수고 짓기 바쁜 우리의 도시 공간처럼 되기 쉽다.

개발과 재개발을 반복해서 무엇이 좋아졌을까? 지난해 기준으로 영국의 건축물 평균 연령이 141년이고 역사가 짧다는 미국도 103년이나 되는 반면, 한국은 25년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한국은 세계에서 새 건물이 가장 많이 지어지는 나라이니 건축물 연령은 계속 낮아질 텐데, 이런 조건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공동체적 기반은 과연 성숙될 수 있을까?

절반에 가까운 도시민이 2년에 한번 이사를 다녀야 하고, 휴일이면 거주지를 떠나야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듯 교외로 빠져나가는 자동차들이 줄을 잇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려는 사람들마저 자신이 사는 마을을 떠나 대형 종교기관을 찾는 통에 주일에도 주차난으로 번잡한 속에서 마을 공동체의 전망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마을 만들기’조차 정부 예산과 공무원이 주도하는 관료제적 기반 위에서 실천될 수밖에 없는 ‘사업’이 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적 정서 내지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건축물과 도시 재개발을 통해 행복할 수 없듯,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당파 간 유·불리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제도 논란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시민들의 언어 세계 속에서 공명될 수 없는 법-형식적인 용어들로 가득한 제도론이 과연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가질지에 대해서도 필자는 회의적이다. 그런 제도 논란 속에서 시민과 사회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남는 건 무책임하게 강한 국가뿐이다. 사회적 내용 없이 공허한 제도 논란은 정치와 시민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2015-09-07일자 경향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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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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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서울시 청년수당, 그 산고의 시간들
김경미 | 정치발전소 이사

‘웅~’ 하고 전화기가 진동했다. 서울시 청년정책과 주무관 전화다. “됐어요. 됐어요. 협의 통과했어요!!!” “아! 정말요? 진짜 축하드려요. 정말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아. 뭐 저희들이 했나요. 청년들이 했지요. 그런데 진짜 기뻐요. 하하하하.” 보건복지부 반대에 부딪혀 지급되지 못하고 있던 청년수당이 잠금 해제되는 소리였다.

대선정국에 묻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다. 서울시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최대 6개월까지 매월 50만원씩 지급하려던 청년수당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복지부 협의를 얻어냈다는 소식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작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로를 탐색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작은 버팀목이라도 대어주자며 시작한 청년수당이 드디어 시행 가능하게 되었다. 크게 보면 촛불정국 때문이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청년수당을 처음 제안했던 청년들, 이것을 서울시 정책으로 적극 받아안은 박원순 시장, 정책적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전문가들 등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이 17개월을 함께 버텨낸 사람들 중에서도 서울시 청년정책담당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거버넌스에 대해 요즘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청년수당을 놓고 서울시와 복지부 간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청년과 과장이 속내를 꺼내놓았다. “청년수당을 놓고 청년들이랑 협의를 하는데 사실 너무 어렵더라고요. 매번 논의하지만 자꾸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고. 우리가 조금 양보해서라도 이 정책이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청년들은 너무 이상적인 모델만 이야기하는 것 같고. 청년들과 협의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어요. 그런데 문득 우리 논의가 한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마치 용수철의 나선형처럼요.”

“용수철의 나선형요?” “네! 용수철요. 청년수당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는 말 있었잖아요. 청년이면 쇠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왜 돈을 주냐고. 솔직히 말해 저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청년들이랑 한 달, 두 달, 석 달 그렇게 몇 개월을 계속해서 만나고 토론하다 보니까 청년들이 말하는 ‘인간 존엄이 지켜지는 방식으로의 청년수당’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지난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청년들과의 토론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았던 것이 아닌, 사실은 촘촘하게 용수철이 감겨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요. 단단하고 탄력있게 잘 감겨진 용수철은 멀리 날아가잖아요. 저는 그래서 우리 청년수당 잘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같이 있던 청년과 사람들이 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는 촛불정국도 아니었고, 복지부와의 협의도 잘될지 예측할 수 없었던 때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보자라는 이야기를 그는 그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었다.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청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해볼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에 대해 회의를 하던 때였다. 회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 1면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19세 청년 김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김군, 우리 청년수당 지급 대상자였는데….” 누군가 회의 중 이 말을 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청년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 제목으로 ‘너는 나다’가 정해졌다.

그냥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 이야기하겠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그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남긴다. 이런 정성들이 알알이 배여 있는 서울시 청년수당이 단단하고 탄력있는 용수철처럼 우리 청년들의 삶을 오래오래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것, 매일 아침 옹기종기 모여 인사하던 그 구호로 이 글을 마친다. “청년이 미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272036045&code=990100#csidx999a9cc40d8030eb02e394b9a84969d

금, 2017/04/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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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오후 7시 30분부터 정치발전소에서 회원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같이 보려합니다.
투표가 8시에 끝나고 늦은 시간까지 개표가 진행되므로 결과를 확인하는 것보다 회원들이 모여 이번 대선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근황을 이야기하는 ‘아무말 대잔치’를 목적으로 합니다.

별도의 회비를 공지하는 대신 당일 참가하는 분들과 갹출하여 부족한 술과 안주를 현장조달할 예정입니다.
각자 혹은 함께 먹을 술과 안주를 가져오시는 것도 매우매우 환영합니다.

원활한 행사 준비를 위해 참가의사가 있으신 분은 메일([email protected])이나 카카오톡(@정치발전소), 페북 댓글 혹은 사무국장에게 미리 참가여부를 알려주시면 준비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목, 2017/05/0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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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을 폭넓게 대표하는 적정한 의원 규모는 민주주의 체제의 오랜 고민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민주주의란 ‘시민이 만든 법에 시민이 복종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소수의 귀족이나 군주가 정한 법에 따르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듯이, 정치체제 유형을 구분함에 있어서 ‘누가 입법자인가’ 하는 기준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시민이 입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자신들 가운데 누구를 입법자로 선발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경우 시민 누구나 입법자가 될 수 있었지만, 실제 그 자유를 행사한 시민은 6분의 1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민회에서 다룰 의제를 미리 준비하는 500명의 평의원을 사전에 선발해 운영해야 했고, 다양한 형태로 시민 대표를 뽑아 행정과 법정을 맡겼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입법자 혹은 체제 운영자로서 시민 대표를 선발하는 문제는 모든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도 입법자의 규모, 즉 국회의원 정수 문제는 늘 논란이 되었다. 지난 대선에서도 안철수 유승민 후보에 의해 의원 수 축소 주장이 어김없이 제기되었다. 국회의원의 수는 몇 명이 적당할까? 너무 많은가 혹은 너무 적은가? 지금 우리는 ‘대표의 규모’, 즉 의원의 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초창기 민주주의 시대에는 고민의 초점이 달랐다.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한 명의 의원이 몇 명의 시민을 대표해야 하는가, 즉 ‘피대표자의 규모’를 둘러싸고 논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걱정했던 것은 대표(입법자)와 피대표자(시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어쩌나 하는 데 있었다. 주권을 가진 시민의 이익과 열정을 입법자가 대표해야 하는데 그들이 대표하는 시민의 규모가 너무 크면 ‘시민의 지배’가 아닌 ‘정치가의 지배’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표의 원칙으로서 ‘시민과의 유사성 내지 닮음(closeness/resemblance)’을 강조했고, 한 명의 입법자가 시민 10만 명 이상을 대표하게 된다면 그 원칙은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 5000만 시민을 300명의 입법자가 대표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시민의 다양한 감각을 담기에는 입법자 수가 지나치게 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혹자는 정치가를 줄일수록 민주적이 된다거나, 정치가 대신 시민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니냐며, 초창기 민주주의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대개 그런 논법은 정치가를 시민의 대표가 아닌 ‘시민에 반하는 지배자’ 혹은 정치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추구하는 특권계급으로 치환해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초 독일을 대표한 정치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이해 방법은 흥미롭다. 그는 민주주의를 가리켜 시민 대표들이 정치라는 일을 통해 경제적 소득을 얻는 체제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란 ‘직업 정치가들에 의해 통치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정치하는 일이 직업이 아닌 부업이 되는 체제, 정치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치가 개인 혹은 그 가문이 감당하는 체제는 귀족정이라고 정의했다. 정치하는 일이 세비 없는 명예직이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 정치는 돈과 시간적 여유를 갖는 자들에 의한 ‘신종 금권정’이 된다고 베버는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정치하는 일을 ‘세비도 특권도 없는 봉사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경멸하면서, 민주적 과업이란 정치를 생업으로 삼는 정치가들이 수많은 윤리적 도전을 딛고 직업적 소명 의식을 발휘하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직업 정치인들이 입법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관료제를 지휘해 정부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가져야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20대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시작되는데, 이번에도 의원 수 문제는 선거제도의 향배를 결정할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다. 어떤 토론이 전개될까. 의원 한 사람이 대표하는 적절한 시민의 규모를 고려하는 민주적 기준이 중시될 수 있을까. 시민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양을 폭넓게 대표할 수 있는 적절한 규모에 대한 것으로 의원 수 문제가 토론될 수 있을까. 정치가(시민 대표)에게 민주주의를 맡길 수 없다거나 ‘누구 좋으라고 의원 수를 늘려!’ 등의 비민주적 논리가 이번에는 절제될 수 있을까.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718/85401440/1#csidx6b7e00a1effad2d8a64b3a8c2536d98

화, 2017/07/1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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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석수 기준 법제화 입법청원 기자회견

의원 1인당 인구 14만 5천명으로! 
비례대표 의석수, 지역구 의석수의 절반 이상으로!  

2015년 8월 20일(목), 오전 9시 20분 / 국회 정론관

 

20150820_국회 의석수 기준 법제화 입법청원 기자회견 (1)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는 오늘(8/20), △국회 의석수 기준을 의원 1인당 인구 14만 5천 명으로 법제화하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지역구 의석의 절반 이상으로 확대하는 공직선거법 개정 입법청원안을 정의당 박원석 의원 소개로 제출했다.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는 현재 의석수가 인구 규모에 비춰보거나 국회 기능의 충실화 차원에서 보더라도 적은 규모이고, 54석에 불과한 비례대표 의석수로는 제도적 효과도 내기 어려워 의원 정수를 확대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는 국회 정개특위 여야 간사 의원들이 의원 정수 300명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는 것과 관련해, 의원 정수를 확대하지 않고는 비례대표 확대라는 선거제도 개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두 정당이 비례대표 확대 방안은 없이 정수만 유지하는 합의를 본 것은 선거제도를 개혁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유권자의 표가 고르게 반영되도록 해 사표를 줄이고,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 없이 득표한 만큼 의석을 갖는 선거제도 개편이 국민들의 요구임을 강조했다.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는 국회가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정수를 원칙과 기준 없이 정하는 관행과 비례대표 의석을 편의적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입법청원을 제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현행 법률에 국회의원 정수를 정하는 방식과 기준,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 비율 등이 명시되지 않아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정수와 지역구, 비례대표 의석 규모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선거제도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도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국회의원 정수 산정 기준과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법제화를 국회 정개특위가 심도 깊게 논의할 것을 촉구했다.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는 비례대표 확대, 국회 의석수 기준 법제화, 유권자 표현의 자유 보장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정치권에 제안(2015-06-30, 전국 174개 단체 발표, http://bit.ly/1JqX5Z4)한 정치개혁방안을 입법화하기 위해서 서울, 강원, 인천, 대전, 충남, 충북, 대구, 부산, 울산, 경남, 전남, 전북,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이 구성하고 있는 정치개혁 연대기구입니다. 공식적인 발족 행사는 8/25에 있을 예정입니다. 

 

 

<국회 의석수 기준 법제화 입법청원 기자회견> 

 

의원 1인당 인구 14만 5천명으로! 비례대표 의석수, 지역구 수에 절반 이상!

 

○ 일시와 장소 : 2015년 8월 20일(목) 오전 9시 20분, 국회 정론관
○ 주최 :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준)

 

○ 참석자  
 - 정문자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 좌세준 변호사 / 민변 정치개혁TF 
 - 신장식 변호사 / 민변 정치개혁TF 

 

○ 공직선거법 청원안 주요 내용  
 - 국회의원 정수는 인구 14만 5천 명 당 의원 수 1명으로 산출한다. 
 -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수는 지역구 국회의원 정수의 100분의 50이상으로 한다.

 

※ 청원안 원문은 첨부파일 확인하세요. 

 

목, 2015/08/2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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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지도자는 ‘경상도사투리 쓰는 남자’ 몫인가?

 

며칠전 광주의 지인들과 대선 후 호남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리가 파할 무렵 한 지인은 “지난 대선에 나온 유력후보 4명이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라며 “DJ 이후, 호남 출신의 좋은 정치지도자는 이제 씨가 말라버린 것 아닌가 싶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처음에는 지인의 그런 생각이 좀 생경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지인의 의문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의 중요한 문제와 연관된 것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만 예외적으로 경기도 출신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을 뿐, 유력한 대선 후보들은 전부 영남출신이었다. 대선을 당대 정치지도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정치 경쟁의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자도자의 평균적 인물상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라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다.
호남은 민주화 이후 민주파와 진보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적 기반이자 정치적 자원의 화수분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호남 지역구를 상당부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소속 현역의원의 다수는 호남 출신이다. 국민의당은 소속의원의 거의 대부분이 호남이다.
우리 민주주의에서 호남이 가진 중요성과 역할은 쉽게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의미 있는 호남 출신 정치지도자가 어느 당이냐를 떠나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물론, 정치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출신 지역이 어디냐 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의 내용과 비전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정치지도자의 이와 같은 지역적 편중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호남에서 왜 변화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성장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다보니 지난 총선과정에서 만난 한 전주 시민의 말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지난해 4.13 총선은 호남에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경쟁함으로써 기존 민주당 일당 체제가 경쟁적 정당체제로 전환된 계기였다. 지난 총선과정에서 만난 한 전주 시민은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가 불러온 변화를 다음과 같이 ‘자신의 언어’로 표현했다.
“과거 민주당만 있을 때는 정치인들이 위만 바라봤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인들이 아래를 보기 시작했다.”
말인즉, 공천만 받으면 작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1당 지배체제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 지도부나 지역 유지들만 쫒아 다녔지만, 유력한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는 정당체제에서는 표를 주는 유권자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정치지도자인 사람은 없다. 정치지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던 간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가치를 위해 일관되고 완강하게 투쟁하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진다. 일정한 시간, 경력, 고난과 단련의 과정을 통과하며 대중의 신뢰와 지지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다른 정치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개인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를 조직적으로 체화한 정당에 기반해 다른 정당의 정치인과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권자 속에서의 정치적 경쟁이 정치지도자를 만드는 단련의 과정이라 한다면, 경쟁적 정당체제야 말로 정치지도자 형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 전제이자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호남의 정치가 지도자 없는 정치로 정체되고 있는 것의 문제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호남에서 경쟁적 정당체제가 형성되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깊다.
호남에서 경쟁을 배제했던 과거 민주당 일당체제는 중앙에 의존하고, 중앙만 바라보는 참모형 정치인들에게는 기회의 장이지만, 다른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새로운 정치적 목표와 가치를 위해 유권자들 속에서 분투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미래의 정치리더에게는 매우 가혹한 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유권자 없는 정치가 지도자 없는 정치를 낳았다.
호남 유권자들은 이제 경쟁적 정당체제가 주는 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총선이 민주당 일당체제에 대한 호남 유권자의 심판이었다면, 이번 대선은 과거 민주당과 다를 바 없이 호남에서 군림하고자했던 국민의당식 낡은 정치에 대한 심판인 면이 있다.
또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지만, 호남에서의 득표율은 민주화 이후 집권한 역대 어느 민주파 정부보다 낮았다.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며, 호남은 무조건 민주당이라거나, 될 사람 밀어주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는 식의 통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호남도 사람 사는 곳이다. 호남 역시 어느 사회와 똑같이 기득권 질서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과 고통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호남에 경쟁적 정당체제가 자리 잡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시민들의 이해가 다양한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안정화될 수 있다.
앞으로 어느 정당이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될 수 있을까? 호남 유권자들이 다시 국민의당에게 기회를 줄까? 그것은 불분명하다. 국민의당은 대선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에 대한 선언적 강조 외에 민주당과 구별되는 정치적 가치나 대표하고자 하는 사회경제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기존 체제와는 다른 선택지를 주지 못하는 정당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존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민의당은 호남을 대표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국민의당이 우리 사회에서 왜 있어야 하는지에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만들어가는 주역은 이제 호남만의 정치에 침잠하거나 호남의 충성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호남이 가진 보편적 고통에 주목하는 정치인이자 정당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의 demo는 민중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방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지방, 역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이며, 정당이 지방에 뿌리내리지 않고는 민주정치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호남이 경쟁적 정당체제를 수용한 것을 계기로 지금과 같은 5당체제 내지 다원적 정당 체제가 형성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 스스로 새로운 선택지가 되어 그동안 적대적 양당체제에서 대표되지 못했던 유권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에게 종류가 다른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모처럼 주어진 다원적 정치질서의 가능성도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수 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호남이 다시 한국 정치에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었다. 기회는 어느 정당, 정치인에게나 있다. 다만 누가 무엇을 통해 분투하고, 헌신할 것인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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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6/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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