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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명예훼손 심의규정 개정에 반대하는 네티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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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명예훼손 심의규정 개정에 반대하는 네티즌 선언

익명 (미확인) | 수, 2015/08/19- 11:47
요약문: 
네티즌 입 막는 방심위의 사이버명예훼손심의규정 개정시도, 막아야 합니다. 네티즌 선언에 함께 해 주십시오.

 

사이버 명예훼손 심의규정 개정에 반대하는 네티즌 선언

 

네티즌 입 막는 방심위의 사이버명예훼손심의규정 개정시도, 막아야 합니다. 네티즌 선언에 함께 해 주십시오.

발표일자: 
2015/08/19
방심위 심의규정 개정 반대 네티즌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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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는 여덟 명의 여성에게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이야기하고 싶은 여성 인물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SF 칼럼리스트 심완선님은 한국의 여성 문인 지하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Amnesty International X 자선

지하련(池河蓮)은 1940년대 일제 말기에서 해방 직전까지 작품을 발표한 한국 여성 문인이다. 짧은 활동 기간과 적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워낙 문예 창작이 어려웠던 시기에 탁월한 글을 써서 이름이 남았다. 지하련의 대표작 <도정>(1946)은 뛰어난 완성도와 당대 지식인을 묘사한 작품 중 유일하게 양심의 가책을 다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하련의 소설은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그녀의 글에서는 자유연애와 ‘신여성’이라는 개념이 새로이 전파된 근대 조선에서 실제 여성들이 겪었던 혼란과 내적 투쟁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하련은 결혼제도를 둘러싼 허위의식과 그 붕괴, 새로운 자아를 향해 꿈틀거리는 여성들의 내적 욕구와 갈망, 이를 절망적으로 감내하거나 암시적으로 갈무리해야만 했던 시대상 등을 단편 안에 담았다.

한편 지하련은 임화의 부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아내의 이름은 종종 남편에게 부수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지하련 역시 임화의 유명세로 덩달아 이름을 알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유명한 남편 때문에 지하련이 제 평가를 못 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하련을 마냥 수동적으로 희생한 아내로 보기는 어렵다. 집안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자를 택하고, 그에게 인생을 걸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하련은 도쿄 유학을 거친 신여성으로, 남편과 함께 월북한 사회주의자로, 여성을 관찰하고 여성에 대해 쓴 여성 예술가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지하련의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지난 격동의 세기에 삶을 마친 뛰어난 여성을 다시금 알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여성 소설의 여백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파시즘과 해방: 시대적 배경

지하련의 작품 수가 적은 이유는 그녀가 늦게 등단한데다 오로지 한국어로만 작품을 발표하길 고집했기 때문이다. 지하련이 등단한 1940년대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식민 통치가 가장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내려 ‘사상범’으로 지목된 사람을 강제 수용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노동력을 강제로 징용하며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그 해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으로 인해 1944년에는 수많은 이들이 군인으로 강제 징집되고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받았다.

국내 문학계도 암흑기였다. 1939년에 일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조선문인협회의 취지는 문인들이 군국주의적 정책에 이바지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두룩한 잡지가 폐간되어 글을 발표할 곳이 마땅찮아졌고, 이름 있는 문인들이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당시 평론가들은 신인들의 소설이 내용보다 기교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추상적으로 침잠하며 암시와 은유 위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지하련의 소설에서도 과거가 없어 정체가 불분명한 지식인들이 조소, 방관, 윤리적 결벽증을 내보인다. 그러나 지하련의 <도정>은 유일하게 당대 지식인의 양심의 문제를 다뤘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의 화자는 옥살이를 했을 정도로 충실한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소 부르주아’라고 결론짓는다. 지하련 작품집 [도정]에 신간평을 쓴 정태용은 화자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과정의 묘사가 극히 정확하며 지하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지하련의 냉정한 관찰력은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한 고뇌를 꿰뚫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는 남성의 허위의식을 간파하는 여성의 시선이 공존한다. 지하련이 발표한 단편소설 6편 중 3편은 당시 ‘아내’로 살아야 했던 여성들을 조망한다. 그럼에도 지식인의 초상만이 문학사적으로 가치 있는 주제라는 양 바라보는 것은 식상한 일이다.

아내의 서사

지하련이 그린 여성들의 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녀관계의 양상을 알 필요가 있다. ‘연애’는 국내에서는 1920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1910년대 일본 메이지 문학의 ‘고상하고 신성한 연애’가 유입되고, 자유연애를 칭송하는 20세기 초 연애담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시인 노자영이 엮어 1923년 출간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은 사회와 가족이 맺어주는 중매결혼에 맞서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충실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여성의 자유연애는 여성 자신이 근대인이라고 자각하고 구시대적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신여성 문인들은 마음으로 교류하는 평등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추구했다. 나혜석의 일생은 물론이고, 잡지 <신여성>의 편집자였던 김원주는 “정조는 사랑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라며 평생 지키는 게 아니라고 선언하는 글을 발표했다. 경성에는 분명 뾰족구두를 신고 모피를 두르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여성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정치 및 사회 변화와도 궤를 같이 했다.

신여성과 교육, 자유연애의 조합은 구여성 및 중매결혼과 대척점에 서는 것처럼 보인다. 배명훈의 소설 [고고심령학자](2017)는 근대 조선에 있었던 일본 여성 인물을 묘사하며 이런 말을 한다. “신식 교육을 받은 구식 여자가 되거나, 신식 교육을 받은 못돼먹은 여자가 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신여성과 구여성 같은 이분법은, 성녀와 창녀, 개념녀와 된장녀라는 비교에서 보이듯 실제로 여성 집단을 둘로 나눈다기보다는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의 역할을 대비시킨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여성과 구여성의 모습을 조합한 이상적인 ‘양처’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며 여성에게 이중의 족쇄를 씌웠다. 여성과 똑같이 근대적 개념을 받아들인, 구습에서의 해방을 추구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아동을 존중하여 어린이라 부르자던 방정환은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통속소설을 연재하며 신여성의 ‘괘씸함’을 탓했다. 여성 작가 김명순의 독신주의는 처녀가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더군다나 연애 개념은 남성의 외도를 합리화하는 핑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도시로 상경한 여러 남성 지식인이 고향에 본처를 두고 신식 여성을 첩으로 맞이했다.

지하련의 소설은 연애를 다루지만, 연애감정에서는 한 발 물러나 결혼제도라는 틀에서 비어져나오며 불협화음을 내는 여성에게 주목한다. 지하련 전집을 엮은 서정자 교수는 지하련의 소설을 “아내의 서사”라고 말한다. <양>(1942)에서, 여학교를 나왔음에도 신여성 차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정인은 작중 성재가 아니라 양품점 청년과 결혼하겠다는 이유로 “하천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을 꼽는다. ‘연애’ 담론이 찬양하는 열린 교류나 평등한 관계는 없다. 지하련의 데뷔작 <결별>(1940)의 형예는 남편이 잠든 곁에서 벌레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것” 깨닫는다. 친구 정히네 부부가 늦게 결혼했어도 연애관계로 맺어진 것과 달리 형예의 남편은 형예를 아내 역할을 할 사람으로 볼 뿐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반대로 아내의 친구에게 연모를 받는 남편 입장에서, <산길>은 자신의 친구와 남편이 연애관계에 빠진 것을 지켜보는 아내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성이 보는 여성의 모습이 있다. 행실이 어떠니 살림이 어떠니 하는 남편 입장의 평가가 아니라, 날카로운 농담을 하며 까르르 웃는 새댁들이나 결혼보다 연애를 말하며 곧고 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시대를 압도하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하 결혼제도로 인한 신산함은 폄하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내’된 여성의 내적 갈등은 한층 복합적인 양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한국근대문학사는 이 모두를 중요치 않은 일로 폄하해온 감이 없지 않다. 국어 교과서에서 여성 소설을 보기 힘든 이유가 정말로 여성 문인이 드물었기 때문일까. 여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만큼, 우리 세상에 존재했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에게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지하련의 삶

지하련은 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으로, 1912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해 마산에서 성장했다.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녀는 부유한 대지주 집안에서 자라 당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근방의 학교가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학업을 마쳤다. 오빠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지하련도 일찌감치 사회주의를 접한 것으로 보인다. 임화가 마산에서 요양 중일 때 만나서 1936년에 그와 결혼했다. 아이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큰오빠에게 뺨을 맞았지만, 혼인신고 4일만에 아들을 낳았다. 1940년에 <<문장>>에 단편 <결별>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임화가 동지 박헌영을 따라서 월북을 결심하자 1947년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임화를 따라 월북했다.

월북한 예술가들의 흔적은 남과 북 양쪽에서 말소됐다. 임화는 그나마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 등 비교적 기록이 있지만 지하련의 삶은 그녀가 발표한 작품 일부와 다른 여성 문인들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만주에 머물러 있었고, 그래서 북에 남았던 임화가 박헌영 계열의 몰락과 함께 김일성 계열에 간첩 혐의로 처형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하련은 임화의 사망을 알고 실성하여 헤매다니다 평안북도 희천의 교화시설에 수용당했다가 병사했다고 추정된다.

글. 심완선
그림. 구자선

목, 2018/03/0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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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는 지난 7월, 오랜만에 <퀴어토크>와 <퀴어문화축제> 등 대중행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공교롭게 두 행사를 치른 날 모두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는데요, 행여나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스태프들의 마음은 침수됐지만, 다행히도 행사는 성황리에 끝이 났습니다. 반가운 얼굴도 많이 만났고요!

이 자리에 아쉽게 함께 하지 못하신 분들은 기사를 통해서라도 꼭 확인해보세요!

퀴어토크 3부 패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손미나, 나비, 봉레오, 지미, 김도훈

퀴어토크 3부 – 「미운 우리 “퀴어” 새끼」

<퀴어토크>  3부 – 「미운 우리 “퀴어” 새끼」 셀프 영상


 

<퀴어문화축제> 이야기 보기 – 허프포스트코리아

올해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스에서는 하트타투와 스티커, 자선 작가의 일러스트 엽서 그리고 야심 차게 준비한 깃발을 나눠드렸어요. 장대 빗물에 젖어 금세 너덜너덜해졌고, 스태프들의 마음도 추적추적 젖었습니다만, 이후 의외의 곳에서 앰네스티 하트 스티커를 확인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뿌듯했습니다. //ㅅ//

SBS 『그것이 알고 싶다』작가 노트북에 붙은 여러 스티커 중 우측 상단에 앰네스티 하트 스티커가 떡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교육을 진행하고 계신 한 선생님의 책상에 앰네스티가 나눠드린 일러스트 엽서와 스티커가 붙어있다.

 


 

행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자리를 빌려 행사 치를 때마다 스태프들끼리 하는 하소연을 살짝 공개합니다.

해외에서 악명높다는 한국인의 ‘NO SHOW’ 현상은 정녕 NGO 행사도 예외가 아닌가 봅니다. 제한적인 현장 시설과 물품 준비, 행사 진행시간 등의 흐름 때문에 참가자 규모 예측은 행사 진행에 있어 아주 중요한데요, 그런데.. 참가비 없는 행사 신청자의 참석률을 어떤 행사이건 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50% 내외입니다. 오죽하면 참석률을 높이고자 보증금 형식으로 참가비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일단 신청하고 보자 하신 분들, 참석이 어려울 때는 꼭 취소 연락을 주세요. 다른 누군가에게 그 기회가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무작정 찾아오시기 보다는 사전에 꼭 신청을 해주세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마음은 좋지만, 이런 상황 역시 당일 행사 진행에서 저희를 난감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감된 행사일 경우에 거절당한 분들도 많으니까요. 가벼운 메일이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저희는 선선해진 날씨와 함께 더 좋은 행사로 찾아오겠습니다. 또 만나요!

금, 2017/09/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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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알레포 동부에 갇힌 사람들은 끊나지 않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9월 19일 휴전 협정이 무산된 이후로 알레포 동부 지역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정부군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시리아 정부군은 반정부 무장단체를 노린 공격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공격을 당한 곳은 전선이나 군용 차량, 검문소와는 한참 떨어진 가정집, 병원, 학교, 시장, 모스크 등이었다. 명백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알레포에는 사람이 있다.

잿더미로 변해가는 도시 속에서 가족과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알레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나제브 파코리(Najeb Fhakoury), 구조요원

 

나제브 파코리(Najeb Fhakoury)

나제브는 가족들을 알레포 교외 지역으로 보내고 홀로 도시에 남았다.

“알레포 동부 알 안사리에 위치한 시리아 민방위센터에서 관리자로 일하고 있어요. 혁명 전에는 배관공으로 일했습니다. 알레포 동부에서 가족들과 함께 5년을 살았는데, 이 지역이 포위되면서 가족들을 알레포 교외의 오우렘으로 보냈어요. 그게 석 달 전 일인데,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리아시민방위대(Syrian Civil Defense)에는 고정된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요. 가끔 보상을 받는 정도예요. 제대로 된 장비가 없어서 파편 아래 고립된 사람을 보고도 구할 수가 없을 때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지금은 구조하기 쉽도록 좋은 장비를 갖춰서 다행이에요. 한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내고 나면 모든 피로가 사라져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 구조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죠. 신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모든 인류를 구하는 것’이니까요.


라나 알 할라비(Rana Al-Halabi), 기자

 

라나 알 할라비(Rana Al-Halabi)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교사였어요. 지금은 ‘하이버’ 신문사의 기자이자 교육시설을 관리하며 한 달에 미화 100달러 정도를 벌고 있습니다.”

“저는 기사를 통해 시리아, 특히 알레포 동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있어요. 자유와 평화, 인간다운 삶, 존엄을 위해 지금도 항의하고 투쟁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나셈 토툰지(Nasem Totounji), 학교 교장

 

나셈 토툰지(Nasem Totounji)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교사이자 교육기관 원장으로 일했어요. 지금은 알레포 동부의 한 학교의 교장이에요. 도시가 포위되고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더 이상 임금은 받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 세대에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해서 일을 할 힘을 얻습니다. 교육 과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웃고, 혁명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도록 돕고 싶어요.”


지아드 무라드(Ziad Murad), 혈액공급자

 

지아드 무라드(Ziad Murad)

남녀 쌍둥이 자녀를 둔 지아드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저는 의류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후 간단한 간호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혈액은행(Blood Bank)에서 일하며 카타르 적신월사(적십자사)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어려운 환경이지만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부상자들에게 혈액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위험하긴 해도 저는 제 일이 행복합니다. 부상자를 구조했을 때 더 행복합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한 알레포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 유엔 회원국들에게 시리아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에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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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
7 명 참여중
목표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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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라 나세르(Thawra Naser), 유치원 원장 겸 응급처치 트레이너

 

사우라 나세르(Thawra Naser)


“혁명 전까지는 옷가게를 운영하며 육아를 했어요. 지금은 유치원 원장을 하면서 여성을 위한 응급처치 교육과정과 인식 캠페인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폭격 전후 대처방법을 숙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유치원 일은 자원해서 하고 있지만 응급처치 교육과정과 인식 캠페인은 유료로 진행해요. 자원해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어요. 시리아 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떠올리며 힘을 얻어요. 그 가치는 우리가 승리하는 그 날까지 굳건할 것입니다.


마흐무드 노우르(Mahmoud Nour), 활동가

 

마흐무드 노우르(Mahmoud Nour)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학생이었고, 지금은 대중매체에서 일하면서 촬영을 하거나 때때로 연기도 하고 있어요. 한 달에 미화 100달러를 벌어요.”

“제가 지금도 알레포를 떠나지 않는 것은 혁명을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세대와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죠. 앞으로도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사진과 증언은 람바(Lamba) 프로덕션에서 국제앰네스티에 제공한 것입니다.


끝이 없는 전쟁

 

시리아 주민들의 앞날은 이보다 더 암울할 수 없다. 지난 한 해 도시와 마을에 폭격이 계속되는 동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를 보호하고자 계속해서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는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음은 물론 모든 당사자의 전쟁범죄가 처벌받지 않고 활개쳤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는 유엔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국제적 협상도 실패했다. 시리아 정부는 집단처벌과 강제이주 전략을 고집했다. 시리아의 시민 사회 모임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국가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유엔 시리아 독립조사위원회와 같은 인권조사단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권조사단은 모든 분쟁당사자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계속해서 감시, 보고하고 있다.

미군 주도 연합군이 ISIS와 무장단체를 대상으로 공습을 가하며 2016년에만 민간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는 러시아군의 공습으로도 수백 명이 숨졌다.

국제앰네스티는 국제 사회가 진정으로 시리아의 민간인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할 것을 촉구한다.

▼ 유엔 회원국들에게 시리아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에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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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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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03/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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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는 여덟 명의 여성에게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이야기하고 싶은 여성 인물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네21의 기자 이다혜님은 소설가이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다. 아프리카 문학을 이끄는 차세대 대표 주자라고 자주 말해지는 아디치에는, 첫 소설 <자주색 히비스커스>를 발표한 뒤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 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역시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등의 소설을 연달아 발표한 남성 작가 치누아 아체베와 연결짓는 것은 역시, 서구와 그 영향권에 있는 세계의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디치에는 아디치에다. 심지어 오늘날 아체베의 책보다 더 널리 그녀의 책들이 읽히고 있다.

소설가, 그리고 인기있는 강연자

소설가로 유명한 아디치에는 TED×Euston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로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만났다. 치누아 아체베의 ‘딸’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디치에가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활동하면서 팬‘이었다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질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가디언>은 아디치에와의 2017년 4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전한다. “지난 해, 워크숍 말미에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유명한 소설가인 그녀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나는 당신의 소설을 전부 읽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페미니즘 관련된 일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동성애자에 관련된 말을 시작하면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르겠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나같은 사람들의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생각입니까?”

그 남성의 질문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큰 성공에 기반하고 있었다. 2015년, 그 책은 스웨덴에서 16살이 된 ‘모든’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리고 비욘세의 <Flawless>에 책 내용의 일부가 가사가 되었다. “우리는 소녀들에게 말하지. 너희는 야망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너무 많이는 말고. 너희는 성공을 목표로 해야 해. 하지만 너무 성공적이면 안돼. 아니면 너희는 남자를 위협할 수 있으니까.” 크리스천 디오르와의 콜라보 작업으로 티셔츠에 새겨진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문장은 또 어떤가. 그리고 이런 점으로 그녀는 빠르게도 비판받았다. 페미니즘이 상업화되고, ‘구매’와 직결되는 분야에서만 마케팅 도구로 쓰인다고. 이 말에 대한 아디치에의 답을 듣기 전에, 아디치에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1977년 나이리지아에서 태어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여섯 아이 중 다섯째로, 아버지는 나이지리아대학교의 통계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같은 학교의 첫 번째 여성 교무과장이었다. 그녀는 나이지리아대학교에 진학했는데, 1년 반 정도 의학과 약학을 공부하며 교내 잡지 <컴파스> 편집자로 일하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필라델피아의 드렉셀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유학생활을 시작, 이스턴 코네티컷 주립 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2003년 존스홉킨스 대학교, 2008년 예일 대학교에서 각각 문예 창작과 아프리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디치에는 1997년 시집을, 1998년 희곡을 출간했는데, 2002년부터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한국에 출간된 단편집 <숨통>에서는 O. 헨리상을 수상한 <미국 대사관>을 비롯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첫 장면 <자주색 히비스커스>(2003)는 영연방 작가상, 허스턴 라이트 기념상을,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2006)로 주목할 만한 신인에게 주어지는 오렌지 소설상을 받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영어로 글을 쓰고 활동한다. 나이지리아의 공식 언어는 영어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가로서의, 또한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TED 강연 중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다. 이 강연은,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나이지리아인으로서 미국에서 살며 활동하는 그녀가 맞딱뜨리는 편견과 비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 나이지리아인들이 ‘나와 너무 똑같기 때문에’ ‘진짜 아프리카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비판을 들었다는 대목에 귀를 기울일 것. 왜냐하면 그 말은 어느 미국인 백인 남자 교수가 한 말인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에 대해 그 이름만으로 편견을 갖고 (선입견으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지 않는 독자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에 갔을 때) 룸메이트는 내가 스토브 사용법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나에게 동정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만나기도 전부터. 그녀는 나를 아프리카 사람으로, 악의 없는 동정심과 보호심으로 대했다. 내 룸메이트는 아프리카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만을, 재난의 이야기만을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아프리카 사람은 그녀와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소통도 불가능했다. 솔직히 미국에 가기 전까진 내가 아프리카사람이라고 생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프리카 얘기가 나오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나미비아 같은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음에도. 하지만 나는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많은 면에서 나는 나를 아프리카 사람으로 생각한다.

단편적 이야기는 고정관념을 만든다. 그리고 고정관념의 문제는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고정관념은 하나의 이야기를 유일한 이야기로 만든다. 약자와 소수자, 비주류의 삶과 현실은 지금껏 그렇게 왜곡되어 왔다.

<숨통>에 실린 단편 <사적인 경험>에서 아디치에는 ‘다름’과 ‘연대’의 무대로 나이지리아의 시장 골목을 선택한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 충돌이 일어나자, 이보족 기독교도 치카는 시장에서 양파를 파는 하우사족 이슬람교도 여자와 함께 숨는다. 두 사람은 폭동 때문에 각각 언니와 큰 딸을 잃었음을 알게 된다. 표제작 <숨통>은 이런 이야기다. 한 나이지리아 여성이 미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숙부가 사는 미국으로 간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에서 손님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가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를 이해하는데는 역부족이다. <숨통>의 이야기는 정서적인 면에서 <아메리카나>의 도입부와 이어진다.

아프리카 출신 여성을 ‘선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악의가 없다 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근사했지만 천국은 아니었어”라는 <아메리카나>의 주인공의 말 속에 숨은, 아메리칸 드림을 꿀 자격이 출신지나 피부색에 따라 주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자신이 오랫동안 자문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정의되는 정답은 없다

“페미니즘을 정의해 주세요.” 페미니즘 강연을 위한 사전미팅에서 이 질문을 받고 연사 셋이 다 고민에 빠진 기억이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적, 경제적, 정치적, 성적 권리와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페미니스트는 여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부터 숙고하게 된다.

아디치에가 <엄마는 페미니스트> 출간 직후 있었던 영국 ‘채널4’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트랜스 여성들도 여성인가요?’라고 물을 때 내 대답은, 트랜스 여성은 트랜스 여성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일이 논란이 되었다. “많은 트랜스 여성이 성전환을 결정하기 이전에는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길러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시스젠더 여성(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과는 달리 트랜스 여성들은 근원적으로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받아왔다고 믿는다”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계속해서 세상을 배워나간다. 페미니스트 완전체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 속에서 차이를 인지하고 차별에 눈뜨고, 더 많은 이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한다.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이 즐거운 이유라면, 이것이 완성되어 박제된 분야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갈수록 모르는 게 많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다름에 눈이 뜨인다. 논란이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서로의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고 선생님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아디치에는,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상업화로 이어진다는 말에 이런 답을 했다.

페미니즘이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싫다. 이것이 바로 왜 그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특히 유색인종인 여성들이 서구의 주류 아카데미 페미니즘으로부터 유리되었다고 느끼는 이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류가 되고 싶지 않은가? 나에게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지는 것이다. 아카데믹한 페미니즘은 경험에 언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중략) 나는 사람들의 결혼생활이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 나는 여성들이 직업을 갖기 위한 면접 자리에서 페니스를 가진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중략) (저소득층의 여성들을 돕는 것과 관련된 운동에 쓰인 문구가 부유한 회사가 돈을 벌게 하는 데 쓰인다해도) 해가 될 것은 뭔가?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는 답변이지만, 이 또한 아디치에가 경험한 현실에 기반한 말이었음을 간과할 순 없다. 주류가 된다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여성에게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페미니스트는 해낸 것에 대해 인정받는 대신, 하지 않은 것으로 비난받는 일이 더 많다. 아디치에는 (미국출신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해 찬사를 받기 무섭게, 그녀가 충분히 목소리를 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적받고 비난당했다.

아디치에의 말은, 최근 한국에서도 출간된 <페미니즘을 팝니다>(앤디 자이슬러)같은 책에서 비판하는 ‘상업화된 페미니즘’이다. 비판의 요지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이 처한 삶의 모습은 천양지차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이 마케팅 수단에 머무는 일을 경계하는 일이 필수적인 동시에, 페미니즘은 지금보다 더 대중화되어야 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둘러싼 애정과 논란은 이런 페미니즘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글. 이다혜
그림. 구자선

목, 2018/03/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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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터키대사관 앞에서 타네르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레네 크리스텐센(Lene Christensen), 국제앰네스티

지난 2018년 4월 5일은 슬픈 기념일이었다. 국제앰네스티 터키지부 명예 이사장 타네르 클리츠가 차가운 철창 안에 갇힌 채 300일을 보냈다. 그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 전 세계의 앰네스티 활동가들이 거리로 나와서 모두 같은 내용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어느 누구도 인권 옹호 활동을 이유로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 우리의 동료이자 인권옹호자인 타네르 틀리츠는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감옥 안에서 300일을 지냈다. 300일은 너무 길다.”

 

온라인액션
터키: 다시 체포된 앰네스티 이사장 타네르를 석방하라
288 명 참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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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게릴라 액션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활동가들이 터키 대사관 앞에 큰 벽을 설치해 숫자세기 기호를 그리며 게릴라 액션을 펼쳤고, 같은 시간 앰네스티 포르투갈지부는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분필을 나누어 주었다. 이 활동들은 모든 앰네스티 활동가와 회원, 그리고 지지자들이 타네르가 석방될 때까지의 날들을 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포티스 필리포(Fotis Filippou) 국제앰네스티 유럽사무소 캠페인국장은 “300일 동안 전 세계의 활동가들은 타네르의 석방을 위해 끈질기게 캠페인을 벌여왔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계속해서 타네르가 감옥 안에 갇혀있는 날들을 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 고 밝혔다.

 

베냉에서 한국까지

서울 주한 터키대사관 앞에서 타네르클리츠 이사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철창시위가 열렸다.

서울 주한 터키대사관 앞에서 타네르클리츠 이사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철창시위가 열렸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서울에 위치한 주한 터키대사관 앞에서 침묵 철창시위를 진행했다. 가까이서 경찰이 주시하는 가운데, 활동가들은 돌아가며 타네르의 석방을 요구하는 플랜카드를 들었다. 앰네스티 베냉지부도 같은 내용의 요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시위를 벌였다.

베냉의 앰네스티 활동가들이 ‘타네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베냉의 앰네스티 활동가들이 ‘타네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연대의 중요성”

앰네스티 네팔지부가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사진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타네르를 석방하라’라는 요구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네팔지부가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사진. 수십 명의 사람들이 ‘타네르를 석방하라’라는 요구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타네르와 그 가족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답하며 타네르는 감옥에서 편지를 통해 연대의 중요성에 대해 전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빗속에서, 그리고 추위 속에서 펼쳐진 연대 행동이 저의 정신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인권을 위한 투쟁에 있어 국제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전 세계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타네르의 석방을 요구하며 국제앰네스티의 탄원에 참여했다. 지난 해 6월, 타네르가 부당하게 수감된 이후, #FreeTaner 해쉬태그는 소셜미디어 상에서 수만 번 이상 쓰였다.

 

카운트다운은 계속된다

인도의 활동가들이 타네르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타네르의 석방을 촉구하는 인도의 앰네스티 활동가들

지난주의 국제적인 연대 행동을 비롯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위들이 전 세계에서 벌어졌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우리의 동료이자 친구인 타네르가 석방될 때까지 우리는 매일매일 연장되고 있는 불의를 계속해서 새겨나갈 것이며, 터키에서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그 싸움에 임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앰네스티 노르웨이지부의 직원들과 자원활동가들이 터키 정부를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타네르를 석방하라!

앰네스티 노르웨이지부의 직원들과 자원활동가들이 터키 정부를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타네르를 석방하라!

금, 2018/04/1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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