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5월 29일. 일본 동 광산 하나오카 광산 갱내에 갑자기 물이 차기 시작했다. 곧 붕괴 사고로 이어졌고, 23명이 갱도에 갇혔다.
사고 이틀 만에 기적적으로 조선인 한 명이 탈출했지만, 여전히 22명은 갱도에 갇혔다. 그러나 광산 측은 나머지 22명에 대한 구조 작업을 벌이지 않은 채 갱도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모두 숨졌다. 남아있는 주 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명을 버린 반인륜적 조처였다.
희생자 가운데는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도 있었다. 모두 11명.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애초 일본이 약속한 유골 발굴 및 송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해방 70년 특집으로 준비한 목격자들 <돌아오지 못한 유골들> 편에서는 일본 강점기 강제동원돼 끌려간 나나쓰다테 사건의 희생자를 포함해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로 논란을 빚었던 군함도 하시마 탄광 등지에서 강제노동하다가 목숨을 잃고서도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유골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취재했다.
This is an English version of “Sorrowful Homecoming” a documentary produced by “Team Witness” and uploaded twice on the website of the Korea Center for Investigative Journalism (Newstapa) on Mar. 2016.
This documentary include testimony as North Korean ‘comfort women’ victim who was raped by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Mr.Dakashi Ito who is japanese journalist shooted twice in 1999, 2015 when he visited North Korea.
똥통이 빠진 친구가 있으면 밖에서 “더러우니까 나와” 라고 말하지 말고 친구가 빠져있는 똥통으로 뛰어들어 “친구야 여기 냄새 나고 더러우니까 같이 나가자”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 친구를 똥통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장일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중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들의 사정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의 입장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관계의 진전은 어렵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 어업비자를 받고 국내 연근해어업에 종사하는 스리랑카 이주 노동자
스리랑카 이주 노동자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국경을 넘어오기 전 그들은 우리의 제자였고 이웃이었고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 이주 노동자가 되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 이은서 씨와 어업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에 온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 코이카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순희 씨와 한국어과 학생들
이 다큐멘터리는 어업 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스리랑카 이주노동자의 국내적응교육을 책임지는 이은서 씨와 코이카 해외봉사단으로 스리랑카 케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순희 씨의 시선을 중심으로 담았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이 두 사람의 시선을 투영시켜 스리랑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으로 오고 싶어하는 이유도 목격합니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성환 감독은 <동강은 흐른다>(제4회 서울국제다큐영상제 대상) <김종태의 꿈>(제7회 인권영화제 올해의 인권영화상) <우리산이야>(제1회 서울환경영화제 대상) <1818공감유랑버스>(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AND지원작) 등 작품을 연출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올해도 쌀 수매가가 작년에 비해 약 10% 가량 하락했기 때문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전망한 올해 쌀 생산량은 약 426만 톤으로 작년과 비슷한 양이다. 그런데도 쌀 수매가는 작년보다 낮아진 것이다. 국민들의 쌀 소비량이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농민들은 정부의 무분별한 쌀 수입정책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지적한다. 값싼 수입 밥쌀의 물량공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풍요롭고 즐거워야 할 수확의 현장에서 신음짓는 농민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15년 쌀 손익계산서를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조목조목 따져보았다.
방송 : 11월 7일 토요일 밤 11시 시민방송 RTV
다시보기 : newstapa.org/witness
세상길 험한 파도 캄캄한 항로 어머님 조각배엔 폭풍이 닿소 잔 위에 실은 노래 한숨 서려도 눈물을 생켜가며 힘차게 사오
어머님 사랑 –백년설
백기완의 고향은 황해도 은율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큰 형, 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평생 통일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왔던 것도 어쩌면 이산가족인 그의 가족사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6월 초부터 “불쌈꾼” 백기완에 대한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좀처럼 언론사 촬영을 허락치 않았던 그였지만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2015년 고관절을 다친 이후 건강이 예전만 못해서인지 1시간 이상 인터뷰 진행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왔습니다. 헝크러진 하얀 백발의 모습도 그대로였습니다. 해방 이후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중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을 차곡차곡 카메라 영상으로 담아냈습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6월초부터 백기완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60일 동안 빠짐없이 기록한 그의 인터뷰 촬영 분량은 1,789분에 이릅니다. 이를 통해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백기완이 걸어왔던 삶의 궤적과 재야운동의 이력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추석을 맞아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그 인터뷰 내용을 간추리고 중심을 뽑아내 백기완의 인생과 이야기를 담은 2부작 다큐를 준비했습니다 .
그가 헝크러진 백발의 머리를 빗이 아닌 손으로만 정리하는 이유는 뭘까요? 해방 이후 13살 어린 나이로 서울로 유학와서 백범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친필 휘호의 내용은 뭐였을까요? 장준하 선생과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반대 투쟁에 나섰던 사연은 뭘까요?
또 유신독재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이후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문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가 불렀던 노래는 뭘까요? 손톱뽑기 등 야만적인 고문과 죽음의 공포에도 끝내 독재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 인터뷰를 마치고 걷고 있는 백기완
지난 60일 동안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담아낸 백기완에 대한 기록의 과정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의미와 자세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불쌈꾼’ 백기완의 이야기는 1부(10월 6일)와 2부(10월 13일)에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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