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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탐험(주월산) 후 귀농한 동문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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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탐험(주월산) 후 귀농한 동문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익명 (미확인) | 월, 2015/07/27- 11:48

오지탐험(주월산) 후 귀농한 동문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7월 첫째 주 토요일, 동문산행이 괴산주월산에서 있었다.

 

이주섭동문과 나(윤정인 78)는 덕평휴게소에서 오세제회장님과 장정미동문가족을 만나 잠깐 담소한 후에 주월산 등산로 입구에서 다시 만났고 이때 괴산으로 귀농한 김영수, 김지숙동문이 함께했다. 등산로 입구가 고지대여서 실제 등산로는 50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다만 양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마치 정글 속 오지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나중에 내려 왔을 때 동네 주민이 산이 사유지라고 했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했다.산 중턱에서 각자 싸온 간식으로 식사를 하고 난후 산봉우리 정상을 향해 가는 도중에 정상 못 미쳐 소나무 밑에서 나는 전날 제사 지내느라 부족했던 잠을 청했다. 자연바람 속의 낮잠은 그야말로 꿀잠이어서 피로가 싹 사라졌다. 내려오면서 따먹은 산딸기 맛이 아직도 입안에 맴돈다. 귀농한 지 얼마 안 된 김동문 집으로 가서 집 바로 앞에 있는 밭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마침 옥수수가 내 키만큼 자라있었고 나는 밭이랑에 잡초로 나 있는 쇠비름을 캐서 갖고 와 효소를 담가두었다. 대학 시절에 갔었던 농촌봉사활동이 생각났고 잠깐 동안의 작업은 역시 녹녹치 않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정선임 동문과 부군이 도착한 후에 김 동문 내외가 차려준 소박한 만찬으로 즐겁고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김동문 내외와 들른 수안보 온천은 마침 메르스여파로 한가로웠고 이번 산행은 여러모로 행복하고 유익하였다. 다음 8월 산행은 2일(일요일) 태봉과 궁예의 전설이 서린 철원평야의 고대산 등반 후 담터계곡에서 쉬다 올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민재(010-6243-3634)동문에게 문의하기 바람.

 

 <8월산행 경로 강원,경기 경계선>

8월 산행 안내글<조민재>:8월2일(일) 연천 담터계곡에서 8시 40분 집결

안녕하세요? 민동산우회 8월 정기산행은 태봉과 궁예의 전설이 서린 철원평야에 우뚝 선 고대산(고태산)입니다. 고대산의 동쪽과 서쪽은 철원군과 연천군의 경계이자 강원도와 경기도를 나누는 곳입니다. 가는길에 들를 예정인 철원노동당사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가장 상징적으로 간직한 곳입니다. 또한 신탄리역에서 고대산쪽으로 새롭게 단장된 벽화마을도 볼거리입니다. 하산길의 담터계곡은 주변 산짐승을 사냥한 뒤 먹고 버린 뼈로 담을 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여름에도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로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랍니다. 답사와 등산 및 피서가 함께하는 곳, 더위를 날려버릴 이곳 북녘으로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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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농부, 나일농 농부의 꿈

                                                                                                            안철환(81/물리)

고등학교 때 남들처럼 공부하느라 코피 흘리는 게 소원이었던 적은 있었어도 풀 매느라 코피 쏟기는 상상불허였다. 남들이 들으면 무진장 열심히 농사짓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요즘 도시에 농사바람이 불어 남들 농사 참견하러 다니느라 정작 내 밭에는 풀 천지가 되어버렸다. 와이프(김영채, 수학 83)가 방학을  해서 이 때가 기회다 했지만 오랜만에 쉬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밭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핑계 대고 늦잠을 잤더니 밭에 가는 시간이 9시 넘어서였다. 한 여름 아침 9시면 해가 중천이다. 본격적인 하루의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라 남들은 새벽에 나갔다가 일 다 보고 들어올 시간에 우리는 중무장을 하고 밭에 풀을 매러 나갔다. 그렇게 이틀을 일했더니 바로 탈이 난 것이다. 그것도 어느 회의 자리에서였다. 처음엔 코 구멍에서 물기가 흐르기에 웬 콧물이지 하고 손으로 닦았더니 코피가 아닌가. 그리고는 피가 멈추지 않고 줄줄 흐르는데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내가 말할 차례가 왔는데도 말할 엄두도 못내고 남들 눈치 보며 손수건으로 코구멍을 틀어막는데도 피가 금방 멈추질 않았다. 옆 사람이 놀라 물어보기에 며칠 풀 맨 것 땜에 그런 것 같다고 얘긴 했지만 뙤약볕에 했다는 얘긴 못했다. 요즘 말로 쪽 팔리는 일이라...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집사람을 살살 달래며 새벽에 밭엘 가기로 했다. 처음엔 피곤해 하는 마누라 몰래 갔다. 풀 매는 새벽의 공기는 참으로 환상이었다. 게다가 아침에는 모기도 없어 일하기가 완전히 베스트였다는 것을 썰(設)을 푸니 영채가 바로 마음이 동해 다음 날부터는 새벽에 함께 풀 매러 밭에 갔다. 그렇게 한 삼일을 가고 이 글을 쓰는 것 같은데 아직도 싱그런 아침 기운이 마음을 떠나질 않는다.

1998년 즈음인가 IMF 때 직장을 그만두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낮술을 먹고 주변에 있던 주말농장에 들어가 호기심에 심었던 배추가 싹이 난 것을 보고 환장해버렸다. 3일만에 싹이 난 배추를 보는데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랐던지 이 사건을 나는 무당 신들린 경험과 갔다고 뻥을 쳤다. 씨를 심으니 싹이 나는 것이야 생물 시간에 배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건만 나는 막상 배추 싹이 난 것을 보고는 씨 안에 누군가 있었구나 했다. 그 때 얻은 밭이 세 평이었는데 매일 밭에 가 살았다. 영채는 “드디어 저 인간이 맛이 갔구나” 하는 눈빛을 쏘아댔건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 손으로 일군 최초의 유기농 배추를 수확하러 갔더니 주말농장 사장님 말씀 하시길 “자네 몸도 불편해 내가 제초제도 뿌려주고 화학비료도 주었네,”하는데 그 마음이 고맙기 그지 없건만 속으로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참으로 난감해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도 나는 농사에 완전히 미쳐 버렸다. 이듬해 나는 세평에 성이 차지 않아 800평을 얻었다. 물론 나 혼자 다 할 수가 없어 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100평씩 나눠 농사짓기 시작했다. 그 때는 얼마나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지 꺼떡하면 해 뜨기도 전에 밭에 가서 여명 뜨는 거 보며 하루 농사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농사에 미쳐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데 친구 한 놈이 놀러 와서 하는 말이 “너, 위장취농이지?” 하는 게 아닌가. 농담으로 던진 얘기지만 나에게는 적지않이 고민을 남겨주는 문제 제기였다. 내가 하는 짓이 남들에게 진정성이 없어 보였구나 하는 것에서부터 혁명을 꿈꿨던 놈이 하찮은 농사일에 미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게 진정 위장취농이면 나는 뭘 목표로 하는 건지, 내가 농사일로 행복하면 세상이 행복해지는 건지 등등 별로 즐겁지 않은 고민을 안겨다 주었다. 그렇지만 내 천성이 원래 별 득이 되지 않는 고민에는 집착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냥 재밌는 농사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영채를 꼬셔 지금의 밭을 돈 주고 샀다. 양가 집안 어른들이 반대가 심했다. 네가 그 몸으로 무슨 농사를 짓겠다고 전세 사는 주제에 농사를 짓겠다고 밭을 사는 거냐? 등등. 재밌는 것은 영채가 아파트 사려고 모은 돈을 아무 미련 없이 밭 사는 데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지않은 세평에 미쳐 다닐 때 한심하다는 눈빛을 여과없이 쏘아대던 집사람이 아껴가며 모아두었던 돈으로 밭 사는데 투자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도 궁금해 나중에 물어보니 직장 다닐 때는 항상 피곤하고 짜증이 많던 사람이 농사를 짓고부터는 늘 웃고 재밌는 얘기를 많이 해주는 것을 보고 농사가 뭐기에 사람을 저렇게 바꿔놓았나 신기해 맘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지금의 밭을 2000년부터 농사짓고 있는데 이른바 도시농업 운동을 하기 전인 2004년까지는 나 혼자 미친 듯이 밭을 기어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도 사람 좋아하는 본성은 못 속이는지 그 넓은 밭에서 혼자 농사지으면 갑자기 적적한 마음이 밀려들어 밭 입구를 쳐다보면서 “심심한 놈 안 놀러 오나?” 하고 사람을 그리워하곤 했다. 그러다 도시에 농사바람이 불더니 밭에 있는 시간보다 돌아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그것도 전국구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광역도시를 비롯해 전국을 그야말로 쏘다니고 있다. 2011년 불의의 사고로 쓰지 못하던 다리마저 동강 뼈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고 부터는 휠체어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돌아다니는 오지랖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밭에선 목발짚고 밭 일을 하지만 조금만 먼 길을 걸으려면 옛날처럼 목발로는 도저히 걸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2012년은 내 인생에 최고로 바쁜 해였던 것 같다. 조직을 두 개나 만들었으니.... ‘텃밭보급소’라는 전문 도시농업 단체를 시작으로 전국의 도시농업 단체들 협의체인 ‘도시농업시민협의회’를 창립했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찌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그리고 그 단체들에서 맡은 내 직책 임기가 올해로 끝이다. 세상에 내가 제일 바쁜 사람일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20대 때보다 나이 50살 넘어 더 바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만큼 요즘은 틈도 없이 살고 있다. 웃기는 코피까지 흘리며....이런 상황에서 이런 글을 써달라고 하니 사실 황당했다. 사는 얘길 해달라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무국장님이라 마다하지 못하고는, 이리저리 머리 굴리다 마감 시간 지난 이 시간에 주저리 주접스런 글을 쓰고 있다. 아무튼 내년부터 시간이 나서 다시 농사에 집중할 것을 생각하면 괜히 피식 웃으며 기분 좋은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도시사람들이 농사에 열광하는 것은 흙냄새를 맡고자하는 몸부림이라 평가한다. 나는 그것을 생존의 몸부림이라 본다. 대학 때 즐겨 불렀던 타박네야의 “우리 엄마 젖 먹으러 무덤가에 기어간다”의 엄마 젖은 분명 흙냄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흙냄새를 맡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어 기어가면서까지 맡으러 가는 것이다.

우리가 젊을 때 꿈꿨던 혁명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팍팍한 사회주의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엄마 젖냄새, 흙냄새, 사람냄새, 생명냄새를 물씬 맡아가며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혁명 이전의 한 노동자가 매일 나사를 끼우는 일을 했는데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그 사람은 변함없이 매일 나사를 끼우고 있다면 혁명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87년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뤘고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권력을 잡지 못해서일까? 그만 주접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원고 분량을 다 채운 것 같으니.....

 

월, 2015/07/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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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5년째 학생운동을 이어가는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 김의기장학회회장 정욱동문을 만나 사는 이야기와 장학회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1. 간단한 자기 소개부터..

91년에 경영학과를 입학해서 경영대학생회에서 오래 활동을 했습니다. 학생운동 시절 결코 귀감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활동한 기간에 비해서 내공이 깊은 운동권도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학생운동 시절에 동지들 힘들게도 하고 아쉬움이 많았던 과오들이 아직도 나름의 활동을 열심히 하려 하고 후배들에게도 뭔가 도움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동력이 된 것 같네요. 어쩌면 누군가는 제가 학생 운동하던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혼란의 2015년의 한 명의 사회인, 직업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하는 부분 역시 소홀하지 않으려 현재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어떻게 직업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하고 있나요?

저는 "생애자산관리"를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보험, 증권 등의 금융상품 세일즈를 넘어서 고객의 삶이 계획한 대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재무적 관점에서 돕는 일을 하는 겁니다. 기존 보험세일즈가 사실상 판매와 가입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생애자산관리는 고객의 생애를 고려하여 돈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과 상품 가입 등의 실행뿐 아니라 수익률 관리 등의 지속적인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관리"라는 측면에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서비스는 아니지요. 세상에 기여한다는 것을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합니다만, 제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에 집중하는 철저한 기준 때문에, 남들은 비판없이 쉽게 판매하지만 저는 판매하지 않는 상품들, 남들은 꺼리지만 저는 기꺼이 취급하는 금융상품이 많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착한소비운동의 일환인 "사랑의보험", "사랑의장례" 사업을 통해 단체 후원도 많이 합니다. 세일즈와 무관한, 금융의 진실을 알리는 강의로 재능기부도 많이 하구요.

3. 본격적으로 장학회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장학회를 만들게 된 배경과 진행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2011년 상반기에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요구가 높았습니다. 6월11일 청계광장 집회에 90년대 졸업동문들이 깃발까지 만들어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집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습니다.(사진은 그날 모습) 그날집회참가자중심으로학부후배들과의지속적인연대방안을논의한끝에장학회를만들자한겁니다. 6월에 바로 준비위원회 조직하고, 힘있는 출발을 위해 발기인 격으로 20명의 동문의 참여로 두 명의 09학번 후배에게 각각 100만원씩 장학금 전달하며 "김의기선배를 기억하는 동문장학모임(준)"이라는 명칭으로 장학사업 시작을 알렸습니다.

장학회 논의 초기부터 민동 회장단에게도 알려 같이 논의하고, 우리보다 1년여 일찍 시작한 정재경장학회와의 협력도 논의하는 등 여러 동문들과 고민을 나누며 11월에 40여명의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의기장학회"로서 정식 발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회장으로 뽑아주셨는데 아직 기대만큼 장학회를 만들어 놓지 못해서 회장직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웃음)

4. 장학금 재원 마련과 장학금 수혜 현황은?

기본적으로 회원들의 CMS 회비로 장학금을 마련해오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주로 30대중후반~40대 초반이 중심이었던지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큰 돈을 기탁한 것도 없었고.. 이제는 한 학기에 천만원 가까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운영되는 것이 설립 계기와 취지와 어울리고,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부터 강조했던 것이 돈으로 사회적 책임을 대신한다거나 면책(?)받는 것이어서는 안되고, 우리 세대와 학부 현장의 후배세대의 실천적인 연대의 공간으로 장학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학문을 장려한다(장학)는 것이 단지 강의실에서의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배워 역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공부라 정의했기에 장학금 지급 외에도 더 내용적인 것을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아직은 갈길이 멀지만... 그래서 장학회원 가입할 때 회비의 금액에 대한 규정은 300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CMS 이체수수료 이상만 되면 누구라도 함께 하자는 취지입니다. CMS 외에도 장학회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여러분들이 정성을 모아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계시던 박상훈 신부님(예수회, 석사84 철학)께서 서강옛집 원고료를 기부해 주시기도 했고, 서강청년동우회와 과모임 등 활동을 중단한 모임들에서 재정 잔고를 기부해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결혼식 축의금 내주신 한 분당 5천원씩을 떼어 기부하기도 했지요.(웃음)

지금까지 20명의 장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을 했고, 의기형의 누님들이 회원으로 함께 하시게 된 2013년부터는 의기제에서 장학금 수여를 해오고 있습니다.

5.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보다 의기형의 이름을 걸고 장학사업을 하고 있는 이상, 보다 많은 민주 동문들의 참여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타의 동문 장학회와는 내용적으로 달라야 하기에 단지 장학금 전달을 넘어서 학부 후배들과의 연대 강화를 통해 학생운동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반대로 졸업한 선배들이 자신의 운동을 찾아가고 더 열심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들도 늘려갈 계획입니다. 당장 2학기 장학금 수여식을 장학회 회원들과 김의기장학생들의 참여 속에 송년회를 겸하는 자리로 소박하면서도 알차게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 의기형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김의기장학회가 의기형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는 우리들의 실천의 약속이 되고 세대간 연대의 장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가는데 더욱 성실히 노력하겠습니다.

월, 2015/07/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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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민주동문협의회 대표자회의 결과

 4.16국민연대 박래군집행위원장이 참석하여 세월호투쟁에 대한 상황보고를 하였으며 서민동에서는 매주 토요일 집중교대투쟁 및 국민상주단의 지속적 전개를 결의하였다. 또한 8월경 세월호투쟁을 주제로 서민동포럼을 열고 동시에 416인권선언추진을 각 민동별로 진행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기로 하였다.

두 번째 안건인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시민과미래’ 7월 총회에 참석하기로 결의하였으며 9월 예정인 2기 민주시민교육사 2급과정 모집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또한, 서민동에서는 장시간 토론을 통해 8.15 통일행사에 결합하고 특히 ‘통일선봉대를찾아라’라는 부문행사에 참여 및 후원을 결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민동의 중장기적 발전 방안에 대해 김선택(74/경제)고문이 발제했다. 혼돈과 위기의 신자유주의시대에 대해 정부와 정치의 기능에 대해 강조했다. 즉 반신자유주의적인 민주개혁정치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7월 9일(목) 오후 6시10분 인디스페이스(구 종로 3가 서울극장 6관)에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다룬 '레드툼-빨갱이무덤' 단체관람을 계획하고 있고, 7월 15일(수) 오후 7시 30분에는 이수역 7번 출구에 있는 아트나인(메가박스 건물 12층)에서 상영하는 '위로공단' 단체관람은 무료이다. 그리고 허인회 고대민동 부회장이 SNS문자 메시지 월 3만원 정액제에 대해 안내했다. 거기에 또 일만원을 후원해 2만원에 서비스한다고 제안해 호응을 받았다. 이후에는 오랫만에 만난 전민동 구성원들이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참석대학: 국민대, 경기대, 서강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고려대, 단국대, 연세대, 이대, 재경대경민동, 재경원광대, 총신대

 

월, 2015/07/2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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