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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6월 항쟁을 기억하는 서울KYC 회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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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6월 항쟁을 기억하는 서울KYC 회원의 날

익명 (미확인) | 금, 2015/07/03- 16:59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 6월13일 [이한열 기념관]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현장인[남영동 대공분실]을 다녀왔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안내는 평화길라잡이의 새로운 활동 장소로 이날 첫 시범안내가 있었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은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87년은 전두환 이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1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독재타도, 호헌철폐 그리고 대통령직선제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그해 6월 대학생이한열은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집니다.
이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가야 하는데..."였다고 합니다.
만화동아리에서 활동을 했고, "혁이"라고도 불리었던 젊은 대학생은 그렇게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후 27일간
중환자실에서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87년 민주화 열기는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을 정점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투표로 지금의 헌법으로 개정이 됩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첫번째 장소로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자 모자이크 속 청년은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가꾸고
그 건너편에 그가 좋아했던 "시"가그 청년 가슴에 맺힙니다.
그리고 입구에 붙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의 글들...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장하다 미운오리새끼, 이럴수가 있느냐 이한열  네모습이 보고싶구나. 엄마가] 어머니께서 남기신 글귀인데...
네모습이 보고싶구나..저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경란 관장님의 안내로 2층 전시실로 들어섰습니다. 2013년에도 서울KYC민주올레를 통해 방문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6월9일 부터 9월25일까지 한시적으로 기존의 전시물을 잠시 교체하여, [운동화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기획전시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운동화는 87년 당시 이한열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운동화'를
최대한 당시의 상태에 가깝게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복원된 운동화는 3층 전시장에 보존처리된 의복, 가방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2층 전시장에는 복원과정과 과정에서의 어려움들을 이경란 관장님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이한열이 남긴 한 짝의 운동화는 오른발입니다.  
전시회에는 이한열이 남긴 오른발에 자신의 왼발 운동화를 나란히 놓은 코너가 마련되어 이었습니다.
이한열의 어머니, 동아리 선배, 쓰러지는 이한열을 부축했던 친구, 그리고 현재 이한열장학금을 받는 학생 등
각자의 왼발에는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왔다. 운명처럼 마주칠 그 날,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친구, 미안하다.
나는 올해에는 더 밝고, 더 즐거운 얘기를 우리의 청년들과 해보려 한다." -경제학과 동기 우석훈



이한열 기념관을 나오면서
지금 우리는, 87년 아스팔트위의 청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숨으로 일궈낸 그 민주주의가 지난 8년간 꼼짝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오전 이한열 기념관을 나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 다시 남영동대공분실로 이동하였습니다.

남영동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만들어졌습니다.
1985년 김근태의원의 고문사건으로 세계언론에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으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곳입니다.
1991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보안분실로 변경된 후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본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된 건축물입니다.
건축주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를 정확히 파악한 영리한 건축가의 영민한 작품(?)입니다.
외관은 멋진 일반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부로 들어가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지금은 하얀 대문으로 바뀌었지만, 얼마전까지 두꺼운 철제 대문으로 소리만으로도 공포감을 주는 대문
몇층으로 가는지 알수없는 원형계단, 빛만 들어오도록 하여 조사자의 자살을 막는 좁은창문 등등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 것인지를 설계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설계한 것임을 곳곳에서 알수 있었습니다.



오늘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KYC에게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
그동안 평화길라잡이 선생님들이 준비한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시민들에게 (물론 우리 회원분들이시만요) 소개하는 날이기때문입니다.
이날의 안내는 안은정 선생님이 해주셨습니다.



원형계단을 따라 5층 조사실로 가보았습니다.
5층 조사실 509 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던 장소이고. 이곳은 현재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의 고문치사 사건후 은폐과정을 소개하였고,
같은층 515호에서는 김근태의원의 고문과정을 통해
고문은 고문피해자를 파괴하여 반대세력에게 국가에 저항하지 말라는 분명한 메세지를 학습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문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 힘들게 만들며,
고문피해자가 고문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때 가졌던 트라우마로 여전히 일상생활을 하는것이
어렵게 된다는 것을 해설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최근까지 이 공간이 조사장소로 사용이 되었고,
작가 조정래 선생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었다고 합니다.

5층에서 4층으로 내려오면 [박종철 기념전시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걱정을 했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대학생 박종철의 평범한 일상과
고문치사와 은폐조작 그리고 이사실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시대에는 월북자, 납북어부, 재일교포 등 사회적 약사들이 고문으로 간첩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 공무원간첩조작사건처럼 탈북자가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고문피해에 대한 체계적인 실태조가나 치유대책, 고문방지법,
고문피해자구제지원법안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인재근 의원이 발의한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보상 구제법안'은 국회에 계류중인 상태입니다.
헌법12조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나옵니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에 재정되었던 부분이라고 하는데, 참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사회를 운영하는것이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고문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성을 파괴하여 공동체를 위험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렇게 훌륭한 헌법을 가진 우수한(?)  대한민국입니다.
이 헌법에 나온대로 우리의 기본권이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잘 만들어 가는것이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 서울KYC 회원들과 함께 했던 [이한열 기념관]과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평화길라잡이의 [남영동 대공분실]시민안내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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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역사도시를 걷는다"

2011년 한양경성서울 600년 역사도시를 걷는다
2012년 100년, 남산의 역사를 걷는다
2013년 낙산. 그리고 동대문의 기억
2014년 백악아래 펼쳐진 600년 수도 서울의 중심
그리고
2015년 역사도시 서울, 그리고 서촌의 근대적 변화
2011년부터 시작된  서울KYC 역사도시 걷기 시민강좌가 올해 5회째를 맞이했습니다.

한양도성 안을 걸으며, 역사도시 "서울"을 이해하는 강의와 답사로 시작해서
매년 한양도성의 남쪽, 동쪽, 북쪽을 거쳐
2015년 올해는 한양도성의 서쪽 안팎을 주제로 했습니다.



3번의 실내강의와 3번의 현장답사!
최근 "핫플레이스"가 된 상촌-웃대-서촌-세종마을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요?
작은 교육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원들과 시민들이 신청해주셨습니다.



현대에 와서 "서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는지
전우용 선생님이 첫강의를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과거의 서촌과 다르고, 정확한 위치와 명칭은 아니라고 합니다.

[참고]
북산 밑을 북촌, 남산 밑을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장교, 수표교 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교동 이하를 아래대, 강변을 오강,
성밖 사면 십리 이하를 내자(字內라 함은 서울 성벽에 천지현황의 순으로 어느 점으로부터 어느 점까지의 간은 천자구역 혹은 지자구역이라 하여 그 문자와 문자의 간을 각 군영에서 분담 수비한 고이다)라 하여
동서남북의 네 촌(통칭 왈 四山밑)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
西村에는 西人이 살았으며 그 후 서인이 다시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 또 대북 소북으로 나뉨에 미쳐는 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으며 그리고 동촌에는 小北, 중촌에는 중인,
우대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한 吏輩 庫直 족속이 살되 특히 茶洞, 相思洞 등지에 商賈(통칭 시정배)가 살았고
아래대는 각종의 軍屬(장교 집사등류)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소위 대전별감(궁가의 隸屬)파들이 살고
창덕궁 동편의 원남동 연지동 근처는 武監 족속이 살았으며
동소문안 성균관 근처는 館人(속칭 관사람)이 살고 왕십리에는 軍銃(兵村)들이 살고
오강변에는 船人商賈들이 많이 살았는데 속칭 강대사람이라 함은 강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함이었다.
(이중화, ‘京城 町洞名의 由來及今昔의 比較’ “別乾坤” 4-6, 1929.10)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통해 인왕산아래 명소를 둘러보는 두번째 강의 "윤진영"선생님
중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사를 조직하고, 공동시집을 발간하며 "중인문학"을 꽃피우던 지역
조선의 기후에 맞게, 바위산과 소나무가 멋졌던 인왕
인왕산과 그 주변 지역을 멋진 그림으로 남겼던 겸재정선의 많은 작품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따라가보는 재미있는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수송동 계곡은 겸재정선이 남긴 그림을 기초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옛모습을 통해, 새것을 만들어가며 과거와 현재가 만나 원형이 복원된 멋진곳이네요.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을 지나 도시 "서울"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경복궁 서쪽 지역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펴보는 강의 "안창모 선생님"
총독부가 경복궁에 자리잡으며, 서쪽은 동척 관사를 비롯해 제법 규모있는 관사가 들어옵니다.
지금도 그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고 하네요.
경무대가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북악과 인왕 아래지역은 도시 개발이 지체되고 단절도 생깁니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주변 지역의 분위기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북촌에 비해 오래된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며, 이 지역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있는데. 어떻게 될까요??



현장답사도 세번 이뤄졌습니다.
그 첫번째는, 안창모선생님과 함께
대한제국의 꿈을 꾸었고 근대 이후 정치외교의 중심지였던 정동일대를 둘러봤습니다.
대한문에서 시작해서, 성공회대성당, 서울시청서소문별관 전망대, 정동,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사직동에서 마무리 했습니다.
경운궁과 대한문이 대한제국의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도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살피고
경운궁에 외국공사관이 들어서며, 맞이한 변화들.
학교, 병원, 교회 등 근대의 모습을 어떻게 지켜고 보존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두번째 답사는 돈의문 밖, 물길(만초천)을 따라걷는 답사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시작으로 독립문공원, 영천시장, 서지西池 터,
경기감영터(적십자병원)를 지나 만초천 위에 지어 구부러진 서소문아파트,
서소문공원까지 갔습니다.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지역의 변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초의 일본 공사관이 있던 지역이고, 근대적 시설도 많이 들어섭니다.
사대외교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자주독립의 의미로 만들어진 독립문
일본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한 '독립'의 진정한 의미와는 좀 멀기도 했습니다.
경인철도와 종로선 전차의 두선로가 교차하던 지점이라 호텔등도 생겨나고 번성했던 이곳.
만초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도시의 변화들이 생겨나고 이젠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물길 위에 지어져 휘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는 서소문아파트가 옛지형을 상상하게 합니다.



세번째 답사는, 경복궁 서쪽의 큰 물길인 백운동천과 옥인동천 물길따라 걷는 답사입니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시작하면서, 내사산을 중심으로 경복궁과 종묘,사직, 육조, 종로와 운종가!
600년 계획도시 "한성"의 도시 구조를 이해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치만, 경복궁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은암천 길을 따라
동척 관사 지역이었던 통의동으로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과 골목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물길이 복개되면서, 도로가 생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길이 또 넓어지고
골목이 나뉘어지고 하는 등, 지형적 변화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옥인동은 오전인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칩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래된 과거의 풍경을 간직하며 시간의 층위들이 쌓여가고있는 지역.
또하나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오래된 풍경과 함께 그 풍경을 만들고, 지속시켜온 시간과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기억해서, 역사도시 서울의 또하나의 상징으로 남는 지역이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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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2015년 역사도시 걷기 시민강좌에 관심갖고 참여해주신 여러분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새로운 주제로 도시를 걸으며
역사를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준비하겠습니다.

다시한번,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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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5/11/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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