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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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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익명 (미확인) | 수, 2015/06/03- 10:38


[시민정치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민주주의의 외관을 한 21세기형 신권위주의 체제로 갈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인간적 이상을 실현할 정의로운 민주공화국을 발전시킬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 진보 세력은 지금 극심한 혼란과 분열과 무능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기미가 없다. '87년 체제'가 강요하는 구조적 제약에 허덕이는 데다 주체의 공부와 준비도 턱없이 부족하다. 혹시라도 이 체제의 틀 안에서 다시 기적적으로 민주 진보 세력이 집권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회의 진보를 이끌기는커녕 외려 시민들 사이에 민주주의와 민주 진보 세력에 대한 영원한 불신만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다. (☞관련 시평 :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무언가 결정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 지리멸렬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음을 증명한 우리의 민주 진보 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재·보선 이후 많은 정치 분석이 제시하는 식의 어떤 정치 공학적 계산이나 특정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같은 것이 아니다. 또 지금은 수명을 다한 현존 체제 안에 갇혀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을 승리에 대한 헛된 꿈으로 공천권 다툼이나 하고 있을 때도 아니다. 야권은 이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바탕한 담대한 기획으로 새롭게 자기 정립을 이루어 내야 한다.

 

나는 그 담대한 기획의 핵심에 말기적 병리를 드러내고 있는 현재의 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민주공화국 체제의 수립에 대한 전망을 두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시민의 평등한 참여와 정치적 중심성이 실현되는 참된 인간적 민주공화국인 '제7공화국'을 만드는 전망 말이다. 바로 이런 전망을 매개로, 성숙한 호남 주민들의 민주의식을 기득권 안주와 무능의 알리바이로만 악용해 온 새정치민주연합이나 대기업 및 공공 부문 정규직 조직 노동자의 이해관계 보호를 진보 정치와 등치시켜 온 자칭 진보 정당들의 정치적 클리셰를 벗어 던지고, 민주 진보 세력의 정치적 중심을 새롭게 세워보자는 이야기다.

 

물론 우리 야권에 당장 시급한 일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는 것이긴 하다. 시간도 부족하고 여러 정치 세력이 모두 지리멸렬해진 상황에서, 심지어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분당의 위기마저 감도는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자는 거대 기획을 외치는 일은 얼핏 망상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총선 승리나 정권 교체라는 과제도 단지 그와 같은 '체제 교체' 또는 '국가 교체'에 대한 명확하고 담대한 비전과 그 체계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기존 체제의 틀 안에 머문 채 익숙한 정치 문법과 수사를 답습하면서 새정치연합이나 진보 정당들이 제대로 성찰하고 혁신하며 연대할 수 있을까? '정권 심판' 같은 상투적 구호와 뻔한 인물과 식상한 정치 구도를 내세워서 광범위한 시민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까? 통진당의 강제 해산으로 이제 더 이상 반복할 수 없게 된 2012년식의 야권 연대의 모델에 대한 대안 없이, 새누리당과 선거에서 맞서 이길 수 있을까?

 

판 자체를 갈아엎겠다고 나서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해야 한다. '친노'니 '비노'니 하는 식의 계파 싸움은 그것이 단지 계파 싸움이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과거에 얽매인 퇴행적 싸움이라서 추악하다. NL이니 PD니 하는 다툼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설득해야 한다. 싸우더라도 더 나은 나라에 대한 더 나은 비전을 놓고 싸워야 한다. 새로운 정치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말이다.

 

숱한 시민들이 가난 때문에 자살을 하고 '갑질'에 시달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정치를 끝내겠다고 해야 한다. 통일은 대박이라면서도 외려 남북 간의 긴장만 조성하고 툭하면 '종북 타령'이나 해대는 냉전 정치를 끝내고 굳건한 평화 위에서 번영하는 복지국가의 비전을 보여 주고 실현하겠다고 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바닷물 속으로 수장되고 있어도 부패하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국가, 또 그래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이제는 비정함까지 보이는 국가를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상상력을 개방하여 많은 시민들의 열정을 동원하고 희망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야권의 정치 세력들은 새로운 자기 정립에 나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기 자신들의 정치철학과 이념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하고, 어떤 나라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다듬어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이전투구식 딱지 붙이기 경쟁이나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철학의 경쟁, 비전의 경쟁, 역량의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제도나 구조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를 끝내고 우리나라를 더 나은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다. 가령 우리는 더 이상 대통령이 제왕처럼 굴지 못하게 권력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도 견제받지도 않은 헌법재판관들 따위가 우리 헌정 질서의 이념과 원칙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더 많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고 더 많이 의제 설정을 주도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지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칙에 본원적으로 어긋나는 지금의 소선거구제의 개선 문제는 빠져서는 안 된다. 사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많은 정치 세력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심지어 선관위조차도 현행 제도를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실마리를 잘 살려 새로운 정치 체제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지렛대로 다듬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개혁이 되면 우리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정치적 지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단순한 정권 심판론이나 교체론 또는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도를 넘어서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더 이상 지역주의의 덫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대기업 및 공공 부문 정규직 조직 노동자층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리지 않는 새로운 민주-진보 정치에 대한 비전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런 토대 위에서 고삐 풀린 시장을 길들이고 시민들의 사회적 기본권을 강화하며 오늘날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도 완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선거 제도 개혁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는 야권의 연합 정치를 위한 새로운 전망도 열어 줄 수 있다. 아마도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여러 계파를 포함하여 지금 야권의 정파들은 각자 더 이상 '묻지 마 연대'를 강요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념과 노선을 선명하게 추구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이 형성될 수 있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 체제에서 그런 환경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 같은 것을 매개로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말하자면 '분열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정치환경을) 위한 연대'의 정치를 구상할 수 있다.

 

어쨌든 야권의 정치 세력들은 연대를 하되 그런 식의 선거 제도 개혁 등을 매개로 단순히 지금의 체제 안에서 국회의 의석 몇을 더하려는 따위의 계산이나 하는 연대가 아니라 제7공화국이라는 미래의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각 정치 세력은 이제 서로가 지닌 철학의 설득력과 비전의 성숙함을 두고 경쟁하되, 지금의 87년 체제 안에서 그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열려는 점에서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그런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알량한 기득권에 안주코자 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선뜻 그런 혁신적 연대의 길에 자발적으로 나설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일조차 시민 사회가 먼저 나서 기성 정치권을 압박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민주적 정당 체제를 만들고 또 정당 정치를 강화하라고 말이다.

 

당연히 시민 정치로 정당 정치를 대신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실 우리의 시민 정치는, 지금껏 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민주주의를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열정적 에너지를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응축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몰주체적-비이성적 동일시는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에 대한 비전을 매개로 시민 정치의 새로운 모델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민 사회가 먼저 나서 올바른 정치의 비전을 세우라며 지리멸렬한 정치권을 압박하고 시민 정치와 정당 정치의 건설적 분업 관계를 확립함으로써 말이다. 바로 이런 '시민 주도성'이야말로 우리가 넘어서고자 하는 지금의 제6공화국 헌정 질서의 성립과 운영 과정에서 전적으로 빠졌던 것이었다.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는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민주적 주체성이 중심에 서는 연대여야 한다. 많은 시민들이 이런 노력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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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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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오너스' 시대, 사이다 정치인은 어디에?

20대 국회의 책무

이양수 한양대학교 강사

 

5월 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민심은 새누리당의 오만을 심판했다. 20대 국회에 거는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도 정치판의 고유 논리가 강력하다. '상시 청문회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모처럼 협치를 꿈꿨던 모두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개원 협상은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의 노골적인 국내 정치 개입은 벌써 내년 대선 경주의 축소판이 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각 당 모두 나름의 목표를 제시한다. 한 목소리로 '민생'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민생을 챙겨야 하는 당위성만큼은 거스를 수 없다. 박하디 박한 서민의 삶을 개선한다는 데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개선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선 말만 앞세운 민생은 '창조 경제'만큼 추상적이고 헛구호일 뿐이다. 좋은 말만 한다고 상황이 호전될 수는 없듯이, 몸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민생 회복의 비전과 전략이 절실하다. 미봉책으로 때우다간 결국 더 깊이 박힌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고름이 찬 종기는 고름을 빼내야 하듯이, 만일 민생을 위한 20대 국회가 되고자 원한다면 우리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미세 먼지 대책처럼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대외 사정은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 G2로 상징되는 새로운 경제 냉전 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동북아의 정치 군사 지형도도 요동치고 있지만, 우리의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어느 때보다 현명함과 균형감이 필요해 보이지만, 그러기엔 우리 사회에 패인 불평등의 골이 깊어만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20대 국회의 책무는 이중적이다. 먼저 행정부에 대한 철저한 견제가 필요하다. 더 이상 행정부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의 결정은 고스란히 다음 정국에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급변하는 변화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미래의 비전과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 단순히 정치인의 일자리를 연장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로 전락되어선 안 된다. 우리 사회에 고질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그 문제를 과감하게 타파할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비전 

 

정치판 논리가 물론 단번에 타파될 수 없다. 관행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듯 쉽게 고치기 힘들다. 정치인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솔직히 20대 국회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권력을 향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20대 국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미래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과거가 반복되면 미래의 매력은 사라진다. 오늘이 달라야 미래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대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새로운 권력 다툼은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 책무를 다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념 편향적인 우리 정치 지형은 악순환을 키운다. 우리 정치는 중도 보수를 정치적 지향점으로 삼았다. 개혁 성향의 인사들조차 그 종착지는 보수이다. 이런 경향은 20대 국회에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보수적 합리성의 부재 상황에서 극단적인 이념은 정치의 주축을 형성한다. 극우 성향의 친박과 대립각을 세울 경우 보수 지향의 정치색은 더욱 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진보 진영의 상황도 비슷하다. 친노 진영의 이념의 색채를 더 강하게 띨수록 중도 보수의 목소리도 커져 갈 것이다. 

 

이런 상황의 희생자는 현실에 입각한 정치적 비전이다. 늘 그렇듯 현실 분석이나 새로운 비전이 자칫 정치 이념 논쟁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비전이 아닌, 이념의 대립 구도에서는 정책 토론이 나타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 자체를 이념으로 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도에서 '신(新) 사고'는 허울뿐인 이름이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합리적 보수의 패러다임에 갇히고 만다. 이런 상황의 극복은 오로지 기존 이념의 편향성을 벗어나고 상황에 맞는 새로운 비전을 찾는데 달려 있다.

 

우리 국회는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 이념을 떠나 정치적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만, 이념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된다. 우리 정치의 고질병은 여기서 생긴다. 비전의 상실은 시민의 선택 폭을 좁히고, 단견은 현실의 변화를 가로막는다. 인간의 선택은 상상한 만큼 폭이 넓어진다. 한 개인이 이럴진대, 사회에서는 이런 상상이 더욱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봐야 한다. 창조 경제라고 부르짖는다고 창조적 생각이 불쑥 나오는 건 아니다. 비전의 폭을 넓혀 시민의 선택 폭을 넓힐 때만 가능하다.

 

분산과 통합 

 

새로운 상황은 무릇 새로운 사고를 요구한다. 20대 국회는 상상조차 힘든 험한 길을 걸어야 한다. 대내외 상황이 무엇보다 녹록지 않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인구 오너스(Onus, '인구 보너스'의 반대 개념으로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경제 성장이 지체되는 현상)'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생산 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고 있다. 2017년 생산 가능 인구 감소, 2018년 고령 사회 전환, 2020년 베이비붐 세대 노령 인구 진입 등 인구 구성에 관한 심각한 사회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모두는 어느 세대도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것이기에 우리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새판 짜기'가 필요한 사안이다. 합리적인 재정 지출은 물론,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동시에 과감한 결정을 통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 시대의 '을'들이 진정 공존할 기반을 찾아야 한다. 

 

바라건대 20대 국회는 사회적 이슈의 토론장이길 바란다. 감시의 기능만이 아닌, 열린 논의의 공간이 되었으면 싶다. 당리당략적 섣부른 결론보다 문제의 심각성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심각한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성숙한 토론은 시민의 정치 교육의 토대인 것이다. 필러버스터 정국처럼 다시 한 번 국회의원 각각은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당의 획일 논리에 대항할 용기가 필요하다. 국회의원 각각이 제 목소리를 낼 때 시민의 시선은 집중된다. 그 다음은 시민 선택의 몫이다. 국회 권력의 분산은 성숙한 시민 선택의 기반이며 진정한 통합의 문이다. 

 

우리는 과거에서 이미 배우고 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더 이상 시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 설 자리는 없어야 한다. 오너스 시대에 우리의 미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먼 목표를 놓고 생각해야 한다. 더 이상 대권 주자들 주위를 서성이는 패거리 집단이 아닌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대답이 필요하다. 내년 대선 우리의 선택이 진정 의미가 있으려면 이런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할까? 왜일까? 20대 국회도 그 나물에 그 밥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건 왜일까? 우리 가슴을 뻥 뚫어 줄 사이다가 그립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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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6/06/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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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포럼

 

2018 참여사회포럼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한국모델의 교훈: 회교 그리고 전망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입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긴 인연을 함께 해 오신

이병천 선생님(강원대 경제전공)께서 곧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줄곧 전공을 넘나들며 담론장에서의 굵직한 논쟁 한가운데 서 계셨고,

시민사회 영역에 끊임없이 실천적인 개입을 해오셨습니다. 

선생님의 퇴임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참여사회연구소에서 올해 첫 <참여사회포럼>으로 이병천 선생님의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 제목: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한국모델의 교훈: 회고 그리고 전망
  • 일시: 2018년 2월 23일(금) 오후 4시
  • 장소: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 발표: 이병천 강원대 교수, 전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선생님께서 지난 30여년간 연구해오신 
정치경제학, 자본주의 모델, 체제론 등을 종합적으로 회고하시고,
자본주의의 한국 모델의 단절과 연속의 계기와 이중적 속성 등을 살펴봄으로써 대안적 경로를 모색하고자 합니다.

법고창신의 정신을 말씀하시며, 항상 앞에 놓인 것들을 넘어오셨던 이병천 선생님의 강연에 꼭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퇴임을 맞이하시며 당신의 학문의 길을 돌아보셨던 지난 인터뷰와 칼럼을 링크합니다.

 

 

수, 2018/02/2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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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불확실성’ 트럼프의 미국은 어디로?

환율 전쟁 불똥, 한국은 어떻게 피하나

조성대 한신대학교 교수

 

대통령직에 취임하자마자 트럼프는 지난달 2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 발표, 23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선언, 24일 '키스톤 XL' 등의 송유관 건설을 허가하는 행정명령, 25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라는 행정명령, 27일 무슬림 7개국 국민들의 입국과 비자발급을 중단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31일 중국, 독일, 일본 등과의 환율 전쟁 선포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 돈키호테식 행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16년 미국 대선에서부터 현재까지 차례로 짚어보자.

 

트럼프 현상의 버팀목은 중하층 백인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공화당으로 엑소더스를 시작했는데, 흑인 대통령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함께 다음의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1990년대 이래 미국 경제가 월가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로 재편되어온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미국의 양대 정당이 월가 자본가의 이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WTO와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생산직 일자리가 멕시코 등 제3세계로 빠져나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남은 일자리도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다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안의 불법 이민자들이 남은 복지마저 약탈해갔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당연히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불법 이민에 관대했던 공화당의 주류들이 마음에 와 닿을 리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란 슬로건 아래 "해외로 이전한 공장들을 되돌리고", "불법 이민자들을 즉시 추방하며",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며", "모든 무슬림의 입국을 거부할 것"이라 외치는 트럼프에게로 향했다. 즉 트럼프는 미국 사회가 ‘갈색화’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하는 인종적 우파와 세계화와 양극화로 삶의 방향을 잃은 블루칼라 백인들을 대변하는 하나의 시대 현상이었다.

 

이런 배경 아래 취임 이후 트럼프가 보인 일련의 막무가내 행보는 블루칼라 백인 중심의 "미국 우선(America First)"주의에 입각한 일방주의, 중상주의(현실주의, 보호주의), 인종주의적 반이민주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취임사에서 트럼프는 첫 번째 정책 목표로 50조 달러어치로 추정되는 셰일가스 및 유전의 적극적인 개발로 에너지 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을 제시했다. 에너지 수입 감소로 물가를 잡고 생산 확대로 생긴 이윤을 공공 인프라를 구축에 투자하면 고용 확대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향후 10년 동안 2500만 개 일자리와 4%의 성장을 약속했다. 또 소득세와 법인세도 감면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감세와 동시에 공적 지출의 확대 때문에 발생하는 재정 압박을 어떻게 감당할지 잘 모르겠다. 심지어 트럼프는 네 번째 정책 목표로 미국 패권과 힘에 의한 평화를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국방비 증액은 당연한 결과로 재정 압박이 더욱 부추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군비 경쟁을 부추길 위험도 다분하다. 

 

트럼프는 이러한 재정 팽창의 위험을 일방적 중상주의로 돌파하려는 듯하다. 그래서 여섯 번째 정책 과제에서 “강하고 공정한(tough and fair)” 무역협정을 강조했다. 혹자는 FTA 폐기 및 TPP 탈퇴를 고립주의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는 미국 노동자 제일주의에 입각한 미국 우선의 무역 강화가 정답일 것이다. 중국이 일차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무역 불균형에 대한 보복 관세와 달러 약세를 위한 환율 전쟁 선포 등이 예상된다. 심지어 트럼프는 하나의 중국 정책도 부정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 한판 뜰 기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잘 먹힐지 의문이다. 중국의 상당히 발달한 내수 시장과 역대 최고급으로 보유하고 있는 달러 및 미국 국채는 공격에 버틸 체력과 언제든 반격할 무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반이민 정책도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당장 중동 지역의 평화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란의 반발이 두드러진다. 특히 이란과의 대형 계약의 연이은 무산과 핵개발 재장전 가능성은 엄청난 복병이 될 수 있다. 국내 저항도 만만치 않다. 전국적인 시위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난 1월 30일 국무부 관료 100여 명이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비난하는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급기야 연방법원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난 3일 시애틀 연방 지방법원은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 자유권을 명시한 수정헌법 1조를 위반했으며 미국 전역에서 그 시행을 잠정 중단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법적 다툼의 최종 결론은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지겠지만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출발부터 삐걱거리게 되었다. 

 

미국 우선에 입각한 일방주의 및 중상주의는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과거 공화당 행정부에서도 보복 관세를 부여하는 수퍼301조 등이 공격적으로 활용되었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강도가 더 세질 것으로 예상될 뿐이다. 사드 배치는 당연한 수순이 될 전망이다. 주한미군 주둔을 위한 한국 정부의 분담금을 증액하라는 요구가 더 강해질 것이다. 한미 FTA의 재협상 요구도 예견된다. 환율 전쟁의 불똥이 우리에게도 튈지도 모른다. 모든 쟁점에서 미국 우선의 공정성이 기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공정성의 잣대가 트럼프만이 아는 고무줄이라는 데에 있다. 눈앞에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실제 대선 기간 중 트럼프는 즉자적인 제안을 쏟아내었다가 철회한 적이 많았다. 김정은은 미치광이라고 했다가 이후 당선되면 김정은과 대화할 것이라고 번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크다. 이 돌발적 돈키호테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우의 간교함과 사자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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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2/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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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 공약'이라더니, 기본소득이 뜨고 있다

[시민정치시평] 2017년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말한다는 것

 

김주온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아직은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촛불 시민들의 열망을 담은 조기 대선은 기정사실화 됐다. 각 정당의 후보들도 윤곽을 드러내고 공약을 발표한다. 새 정부는 인수위원회 활동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하기에 장기적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 모두에 대한 검증이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이 판국에 기본소득 역시 주요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촛불 광장 초기에 급상승하는 지지율을 보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청년배당에서부터 이어진 기본소득 논의에 일찍이 불을 지핀 덕이기도 하다. 대선 출마 선언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그의 단호한 주장에 다른 후보들도 차례로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후보들이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녹색당과 노동당의 기본소득 정책이 시기상조라 불렸던 지난 총선이 불과 1년 전임을 상기해보자. 심지어 기본소득을 진보정당의 "황당 공약"이라고 평했던 신문은 기본소득은 원래 우파적 정책이라며 스리슬쩍 말을 바꾸기도 했다.

 

실현 가능성 논의를 넘어

 

지난 1년간 우리 사회가 만들어온 기본소득 논의는 실현 가능 여부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지금 한국에서 가능한가?"로 요약되는 질문은 공약의 현실성을 따지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물음만을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질문으로 삼는 상황이 아쉽다.

 

현실을 고정한 채 실현 가능성만을 공학적으로 따지는 걸 넘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선택의 기준 자체를 심판대에 세워보자. 지금은 소수 정치인이나 엘리트만이 아닌 다양한 시민들의 주도로 우리가 꿈꾸는 나라의 틀을 새로 짜야 할 때다. 가난한 이도, 장애인도, 여성도, 소수자도, 어린이도, 동물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함께 사는 세상의 밑그림을 그려볼 기회의 시간이다.

뜨거운 토론을 전개할 사회적 시공간이 절실하다. 나는 기본소득이 그 물꼬를 터줄 잠재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고자, 혹은 최소한 그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의 정동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매력적인 의제다.

 

기본소득을 말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일은 당장 법안을 발의하고 실험을 확대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허락된 적이 있었나? 한국처럼 의제 휘발성이 큰 나라에서 단기간에 기본소득이 주요 의제로 부상하는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특히 기득 정치세력과 기업들이 기본소득을 외치는 맥락은 자유와 평등의 철학적 기반 위에 세워지는 분배 정치의 관점과 거리가 멀다.

 

정부는 기계화, 정보화로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미래에 초래될 사회적 혼란을 관리하기 위해서, 기업은 "해고는 살인이다"와 "비정규직 철폐"의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 끔찍한 한국 사회에 더 많은 '유연성'을 도입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부르짖고 있다. 이들은 자원과 권력을 가지고 담론의 향방을 결정하려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반대로 기본소득 이후 이러저러한 긍정적 효과가 생길 거라는 예측도 마찬가지의 한계를 지닌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는 어떨까? 우리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본소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넘어서, 기본소득'으로' 말하기

 

나름 꽤 다양한 사람들과 기본소득 얘기를 나눠오며 느낀 바가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듣고 어떤 질문을 하는가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 즉, 평소 자신의 관심사나 신념, 편견 등이 드러난다. 재밌는 것은 몇 가지 빈번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게 여타의 정치적 아젠다들을 좌우파로 나누듯 쉬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경계를 흔들어 그 안에서도 균열을 야기한다. 노동이나 생태와 같은 주제가 그렇다. 여성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 권한 부여), 시민권 강화와 관련해 기존 성 역할의 고착화가 심해지리란 의견과 아닌 의견으로 나뉜다. 재원 조달 및 제도화 과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국가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또한 동료시민인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시장과 화폐라는 역사적 산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예술 혹은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의문이 제기되는 순서는 다르지만 조금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방금 얘기한 주제들은 거의 빼놓지 않고 한 번쯤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실현 가능성만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를 넘어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기본소득을 렌즈 삼아 경제 성장 패러다임과 미래의 일과 노동, 젠더 문제나 복지국가론을 투과시켜볼 수 있다. 사람들도 이를 매개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미래, 사회의 미래에 대해 더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 완성의 종착점으로서보다 새로운 상상, 편견에 열린 자세를 마주하는 시작점으로서 말이다.

 

국가의 부를 공유하라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기본소득에 찬성하지만…"으로 운을 떼는 사람이 최근 확연히 늘어난 것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기본소득의 무엇에 대해 얘기할 것인지, 어떤 입장으로 얘기하는지 명확히 해보자. 막연한 찬성 혹은 반대보다는 기본소득의 무엇을 어떤 관점에서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는지를 밝히는 것이 구체적인 논의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면, 그건 기본소득 개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책적 분화에 대한 토론이 된다. 또 한편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괜한 거부감'을 곰곰이 뜯어볼 때, 기저에 자리한 여성혐오적인 편견이나 노동에 대한 편견 혹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들을 좀 더 드러내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부터 솔직하게 말해본다. 2017년의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얘기할 때, 무엇을 얘기하는지를 넘어서 어떤 태도로 얘기하는지 역시 중요하다. '욕망'이나 '자유'와 같은 단어는 이제껏 한국 사회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하지만 이 단어들 역시 무엇을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다음을 꿈꾸기 위해 필요한 말이 아닐까. '성실한 빈민'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 극장'식의 재현 말고, '한국형 생애주기'에 의해 박제되지 않고 특수성을 재단당하지 않는 단독자로서의 삶을 존중하자. 그래서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의 기본소득이 특히 중요하다. 각자가 충분한 시간을 버는 일이고 곧 사회적 논의의 시간을 모으는 일이다. 소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소생시키는 시간을 바란다.

 

지난해 우리는 국가 최정점의 권력을 가진 이가 참으로 성실하고도 뻔뻔하게 사익을 추구해온 행태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우리야말로 당당해지자. 말로만 갖게 되는 권리가 무용하다면, 손에 쥔 구체적인 '몫'으로 들어올 원래 우리의 것을 요구하자. 국가의 부를 공유하라 외치자.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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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02/2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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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전쟁, 야권이 놓치고 있는 것은…

[시민정치시평]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필요하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정부와 여당이 뜬금없고 어처구니없는 '역사 전쟁'을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정치적 합리성도 기본적인 양식도 없다. 역사학계 전체를 좌파라고 매도하질 않나, 자신들이 검정한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친다고 생떼를 쓰지 않나, 막가파도 이런 식의 막무가내 몽니는 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전쟁이 시작된 데 대해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이건 그냥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신원(伸冤) 투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지극히 위험한 정치와 교육의 사사화(私事化)다. 나라 꼴이 이게 뭔가 모르겠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권이 저항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어쩐지 길거리에 나온 어린 학생들만도 못한 인식으로 이 사태에 대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뜸 '역사 왜곡'이 문제란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교과서가 역사 왜곡을 할 것이라서 반대한단다. 일단 논리적 허점부터 너무 분명해서, 당장 반박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이 친일을 했던 사실을 덮자고 이 모든 사단이 났다는 둥 하면서 열을 올린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모종의 음모론 이상이 되기 힘들 텐데도 자꾸 집권세력의 이념전쟁 프레임에 갇히려고만 한다. 어찌 이리도 무능한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신원투쟁을 멈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교과서 국정화를 막을 마땅한 제도적-정치적 수단도 없는 것 같다. 야권은 '노동 개악' 같은 다른 중요한 의제들을 제쳐 놓고 마냥 이 문제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일 터인 데다 제대로 싸움을 이끌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우리 시민들이 나서 정부 여당이 국정화 방침을 철회하도록 계속 압력을 가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반대의 초점을 좀 더 예리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뜬금없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집권 세력이 이번 전쟁을 시작하면서 가지고 들어가는 강한 교육적 시각이 하나 있다. 바로 교과서를 통해 어린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근본 시각이다. 그 올바른 역사가 무엇이든, 이런 시각이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배우는 학생들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그저 교과서와 교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사고와 지식을 주입받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전제된다. 학생들이 아직 미숙하기는 해도 온전하게 존엄한 시민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 야권이나 시민사회의 일부처럼 계속 역사 왜곡이나 '친일 미화' 따위에만 반대의 초점을 설정한다면, 이는 사실 집권 세력과 동일한 근본 시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린 학생들이 국정 교과서 따위를 통해 기성세대가 원하는 방향의 생각을 갖도록 하겠다는 그와 같은 '주입식 교화 교육'에 대한 발상은 사실 집권 세력이 가령 전교조가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로 학생들을 좌경화시킨다고 비난할 때에도 바탕에 깔고 있는 교육관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발상은 결국 교육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근본에서 학생들을 저마다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생각의 참된 주인이 되고, 그리하여 참된 시민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 역사 전쟁의 격렬한 외양 뒤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서 진짜로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역사 왜곡이나 친일 미화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자라나는 학생들의 '민주적 시민성'을 왜곡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미래의 시민들을 저마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세력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면화한 '신민(臣民)'으로 길러내겠다는 은폐된 정치적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이는 결국 우리 학생들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그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때 수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갔던 그 '가만히 있으라' 교육을 더 강도를 높여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싸워야 한다.

 

교육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한 가지 시각만을 강요하고 대안적 관점들을 숨기는 것은 결국 피교육자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조작 가능한 '사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어리더라도 우리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교육은 역사 문제든 다른 사회 문제든 다양한 시각과 논점을 제시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그 기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소모적인 역사 전쟁이나 이념전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이라도 민주공화국에서는 역사 문제처럼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이견이 분분한 문제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구성원 모두가 신뢰할 만한 원칙을 찾아내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다. 통일 전의 분단국가 독일에서도 교육 문제를 두고 우리와 비슷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 좌우 진영은 서로에 대해 '의식화' 또는 '우민화' 교육을 그만두라며 날 선 이념전쟁을 치렀더랬다. 이 와중에 1976년 독일의 한 소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좌우 진영을 망라하는 정치가, 연구자, 교육자가 함께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우리나라에서는 '민주 시민 교육'이라고 부르는 '정치 교육'의 원칙을 합의해 내었다.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협약)'다.

 

이 합의에 따르면, 정치 교육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하며(강제 또는 교화의 금지),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논쟁성에 대한 요청),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분석능력 및 학생의 이해관계 중심) 해야 한다. 이 합의는 단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민주 시민 교육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영국에서는 아예 교육법 안에 유사한 원칙들을 담았다.

 

이 합의는 그 핵심에서 학생들의 인간적, 시민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교육을 지양하고,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쟁을 교실에서 재현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끔 성장시키겠다는 정신의 표현이다. 정치보다 교육적 관점이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의 표현으로, 우리 헌법에 명기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도(흔히 정치적 사안에 대한 회피의 원칙으로 오해되지만) 바로 이 점을 지시한다고 해야 한다.

 

정치권, 특히 야권에 권고하고 싶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는 단호히 반대하되, 엉뚱한 역사 전쟁 프레임에 말려 허우적거리지 말고 올바른 프레임을 설정하여 시민사회 및 학계 등과 함께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 같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초정파적 합의기구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앞장서라고 말이다. 핏대 서린 이념전쟁에 계속 휘말리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야권이 우리의 소중한 미래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진정성과 성숙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가졌음을 입증하는 더 나은 길일 것이다. 솔로몬 재판에서 진짜 아기 엄마는 아기를 반 토막 내서 나누어 갖자는 제안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진짜임을 증명했다. 자칫 나라를 죽일 수도 있는 이 치졸한 역사 전쟁의 프레임은 따르지 않고 조용히 거부함으로써 진짜 '애국 세력'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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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5/10/2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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