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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제5회임길진환경상 시상식_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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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제5회임길진환경상 시상식_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

익명 (미확인) | 화, 2017/04/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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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임길진환경상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 수상

설악산케이블카사업 최종 부결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

  ◯ 환경운동연합 임길진환경상위원회(위원장 이시재 환경운동연합 고문/성공회대 초빙교수, 이하 위원회)는 4월 5일 오후 5시 서울NPO지원센터에서 임길진환경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위원회는 이날 제5회 임길진환경상 수상자로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을 선정했다. ◯ 김정욱 심사위원장은 심사평에서, “특별히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지역민들의 뜻과 힘을 모아 위기에 처한 환경을 지키는데 헌신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또 좋은 성과를 올렸다고 심사위원 전원이 이의 없이 제5회 임길진환경상 수상자로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이하 강원행동)’을 결정”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또한 “운동의 결과는 전국의 다른 국립공원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는 대단히 크며, 이 문제는 설악산의 케이블카 설치와 이에 따르는 위락시설 개발문제가 현재로서는 제동이 걸리게 되었지만, 큰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개발요구는 계속 터져 나올 것으로 보여 이 모임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강원도의 환경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설악산케이블카 사업부결을 이끈 강원행동의 활동은 설악산의 생태적 가치와 전 국토의 2퍼센트 밖에 안 되는 국립공원 절대보전지역 마저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나선 헌신이며, 우리시대의 환경정의를 몸소 실천하는 투쟁이다. ◯ 강원행동 박그림 대표는 설악산 어머니와 산양 형제도 오늘의 수상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박그림 대표는 지난해 국립공원 100주년을 맞아 국립공원의 미래를 함께 토론했던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며, 케이블카 건설과 산악관광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국립공원 50년의 암담한 현실을 개탄했다. 설악산을 비롯한 모든 국립공원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박그림 대표는 강조했다. ◯ 강원행동은 강원지역 57개 시민단체와 100여명의 도민들이 참여한 단체로서, 지난 2015년 8월 28일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가 이미 두 차례나 부결된바 있는 설악산국립공원케이블카사업을 조건부 승인하자 “설악산이 뚫리면 전국의 국립공원이 망가진다.”는 위기의식에 공감하고, 10월 19일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을 결성하였다. ◯ 2015년 10월 강원도청 앞에서 시작된 443일 간의 농성과 364일간의 원주지방환경청 앞 1인 시위, 설악산케이블카 경제성보고서 조작 검찰 고발, 국회 환경 노동위원회를 대상으로 환경 영향 갈등 조정 협의회 구성 요구안 제출, 설악산 국립공원 계획 변경 처분 무효소송 제기, 설악산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서 거짓 작성 검찰고발, 고공시위 진행, 환경 영향 평가서에 대한 주요 문제점 분석, 양양군청 노숙투쟁 및 국정감사 대응, 주민공청회 대응, 문화재위원회 부결촉구 캠페인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 이 같은 투쟁의 결과로 ‘설악산케이블카가 반 생명 토건독점세력만을 위한 사업’이라는 여론형성과 대중인식증진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연대와 지지방문을 유도하여 설악산의 생명과 가치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냈다. ◯ 특히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였던 주민공청회에 적극 대응하여 4개월 간 사업추진절차를 중단시킨 활동은 지난 2016년 12월 28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가 설악산케이블카사업에 대한 최종 부결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 임길진환경상은 생태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 故임길진 박사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2013년 제정되었다. 심사는 임길진환경상 심사위원회(위원장 김정욱 서울대 명예교수)가 진행하며, 지속가능한 공동체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풀뿌리 환경운동가 및 단체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역대 임길진환경상 수상자> 2013년 제1회 박미경 정책기획위원 (광주환경연합) / 특별상 서울환경연합 여성위원회 2014년 제2회 박성률 목사 (강원도골프장문제 해결을 위한 범도민 대책위원회) 2015년 제3회 정수근 처장 (대구환경연합) 2016년 제4회 최예용 소장 (환경보건시민센터) / 특별상 김신환 동물병원 원장 2017년 4월 5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권태선 박재묵 장재연 사무총장 염형철 김춘이 운영처장 ([email protected] 010-7350-6325) 김보영 시민참여팀장([email protected] 010-8386-3330)   IMG_8513 IMG_8341 IMG_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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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문화재청은 국회와의 약속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조사 진행. 설악산 조사에 환경단체 참여와 문화재위원회에 환경단체의 직접의견개진 요구    ...
수, 2016/02/2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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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배경(국제연대)

해양수산부와 원양업계는 원양산업발전법의 개악을 중단하라

 
✓ 해수부는 원양업계의 압력에 굴복해 원양산업발전법을 개악하려는 시도를 중단하라.
✓ 해수부는 원양산업발전법 제도개선 논의에 시민단체 참여시켜 원점에서 재논의하라.
✓ 국가보조금을 독식한 대형 원양기업들은 불법 조업 근절 노력에 동참하라.
  오늘날의 수산업은 전 세계 어장의 80%를 남획‧고갈해버리는 등 인류의 미래 식량 확보와 바다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지속가능한 수산업과 해양환경 보호는 선택이 아닌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수산업 특히 원양산업의 불법 조업은 감시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2010년대부터 불거진 한국 원양선박들의 불법 조업 문제는 2013년 결국 유럽연합으로부터 불법어업국가로 지정받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상황에 놓이자 다급해진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는 원양선박 규제조항을 강화하는 원양산업발전법(이하 원산법)을 2015년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개정했다. 선박 모니터링과 규제, 벌칙 강화 등이 내용의 핵심이다. 그 결과, 한국은 2년 만에 예비불법어업국 오명을 가까스로 벗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관련 업계가 규제 완화 요구를 해오자 해수부는 그동안 불법 조업 문제를 지속해서 제기해 온 시민단체들을 배제하고, 원양업계와 원산법 개정안 민관합동 TF를 구성해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우리 시민사회 단체들은 우려를 표명하며 아래 사항을 요구한다.  
1. 불법 조업과 인권침해를 방조하는 원산법 개악을 당장 중단하라
해수부는 지난 11월 22일~24일 2박 3일간 ‘원산법 전부개정 민관 TF회의’를 개최했다. 참석자 13명 중 해수부 관계자 5명을 제외한 8명 중 7명이 원양업계 인사로 꾸려졌다. 이 회의에서 논의한 ‘원산법 전부 개정(안)’은 업계가 요구했던 벌칙 조항 완화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다. 먼저, 현 원산법 하에서는 형사처벌을 부과하는 중대한 위반사항에 대해 개정(안)은 행정처분인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함으로써 징역형과 같은 형사처벌 가능한 위반 행위를 대폭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현 원산법 형사처벌 최고 수위-<5년 이하의 징역 혹은 5억 원 이상 10억 원 이하 중 높은 금액>-를 개정(안)에서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벌금 수위를 현격하게 췄다. 더욱 문제는 중대한 위반사항에 대해 <5억 원 이상 10억 원 이하 중 높은 금액>을 형사처벌이 아닌 ‘과징금’으로 부과하도록 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와 합의했던 벌칙 수준이 완화된 것이 아니라는 해수부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규제 완화 전략이다. 인권 보호 측면에서도 개정(안)은 퇴보했다. 해수부는 2012년, 사조오양 75호 사건을 비롯한 한국 원양어선에서의 외국인 선원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둘러싸고 고조된 국내외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선원에 대한 인권 침해를 한 경우에는 원양어업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원양산업법을 개정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현 원산법 제 13조의 제 3항(외국인 선원의 근로보호)을 신설하였다. 해수부는 계속되는 외국인 선원들에 대한 인권 침해에 대응하기 위해 위 조항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행할 방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정(안)에서는 위 조항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거하여 훈시조항으로 만들고 철저히 무력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벌칙 조항의 완화와 근로보호 규정의 형해화는 불법 조업과 외국인어선원 인권침해에 대한 억지력을 상실하게 하고, 결국 불법행위를 양산하거나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져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또 한 번 추락시킬 것이다. 해수부는 업계의 요구에 굴복해 벌칙 조항을 완화하는 개악을 당장 중단하고, 불법 조업자를 적극적으로 억지할 방안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2. 원산법 개정안 민관합동 TF에 시민단체를 참여시켜 원점에서 재논의하라.
현재 원산법의 내용은 불법 조업에 단호히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국제사회와 합의 하에 정했다. 그러나 원양업계의 규제 완화 압박에 해수부는 지난 7월 ‘원산법 추가개정을 위한 민관합동 TF’를 꾸렸고 여기에 불법 조업 문제를 제기하던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에, 지난 9월 25일 환경운동연합과 시민환경연구소 등 4개의 시민단체가 해수부에 원산법 개정 TF의 공식 참여를 요청했으나, 해수부는 NGO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업계의 반대”가 있기 때문에 포함 불가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원양업계만 참여시킨 원산법 추가개정은 밀실에서 협의된 개정(안)에서 보듯이,불법 조업 벌칙조항을교묘하게 완화하는 등 국제사회와 합의 내용을 변질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해수부는 모든 시민이 해양수산환경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는 기본원칙을 주지하고 업계와 밀실협의한 개정(안)을 전면 폐기해야하며, 민관합동 TF에 시민사회단체를 포함해 원점에서 재논의해야할 것이다.  
3. 원양업계는 해수부 압박을 중단하고 불법 조업 근절과 선원 인권 보호 노력에 동참하라.
한국 원양업계는 불법 조업은 물론 심각한 선원 인권침해로 국제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원양업계는 이에 대해 자성하고 강도 높은 쇄신을 추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무리하게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것은 결국 원양업계들이 불법 조업 의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 원양산업 전체국가보조금의 80% (6411 억 원)를 독식한 것으로 언론에 발표된 바 있는[1] 동원산업, 사조그룹, 신라교역, 한성기업, 동원수산, 인성실업 등 6대 원양 대기업들은 해수부에 대한 규제 완화 압박을 중단하고 납세자인 시민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근시안적인 규제 완화를 제창할 것이 아니다. 다른 산업들에 발맞추어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고 불법 조업 근절과 선원 인권 보호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2017년 12월 4일

환경운동연합(KFEM) 시민환경연구소(CIES) 그린피스(GREENPEACE) 환경정의재단(EJF) 공익법센터 어필(APIL)

[1]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29/2013102903172.html
일, 2017/12/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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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제련소 환경영향조사 다시 실시해야 – 대기질 실측 2계절 조사만 실시, 석포천 수질조사 지점 누락 – -훼손지 불소 농도는 구미불산사고 수준, 굴뚝에서는 거의 배출되지...
화, 2017/10/2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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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를 뿌리 뽑지 못하면 우리 삶이 뿌리 뽑힌다” 故 박길래 17주기를 기리며

 

조수자(환경보건시민센터 공해피해자지원위원장)

[caption id="attachment_177411" align="aligncenter" width="500"]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서 “내 폐를 돌려다오!!!”라는 피켓을 든 박길래씨(경향신문DB) 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서 “내 폐를 돌려다오!!!”라는 피켓을 든 박길래씨(경향신문DB)[/caption] 검은 민들레 박길래씨는 2000년 4월 29일 이른 새벽,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무거운 세상살이 훌훌 벗고 저승길로 건너갔습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님이 머문 그 나라에서 당신은 더 이상 고울 수 없는 노-오란 민들레로 피어나소서.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 기억 속에 남겨 뒀던 얘기들 한마디 한마디 떠올려 봅니다. 故 박길래씨 그가 이승과 이별한지 17주년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지난 이야기를 여기에 담아 봅니다.
어느 아주머니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박길래씨는 1989년 한국 최초의 공해병 환자로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았습니다. 70~ 80년대 연탄공장이 밀집한 상봉동 삼표연탄 공장  주변에 거주하던 그녀가 얻은 병은 ‘진폐증’이라 했습니다. 한 번 걸리면 까맣게 변한 석탄먼지가 폐에 가라앉아 치유가 되지 않는 불치의 병 진페증은 광부들에게서나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박길래씨로 인해 도시의 오염된 공기 속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임이 알려지고 증명이 되었습니다. 발병에서부터 공해병이란 판정을 받기까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형극의 길로 표현될 만큼 험난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복지와 시민의 건강을 뒤로 미룬 정부는 박길래씨에게 공해병환자로 인정 할 경우 물밀듯 밀어닥칠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것이 두려워 판정을 질질 끌면서 박길래씨의 진폐증과 연탄공장과는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 가기에 급급했습니다. 게다가 사업주 측의 공작 또한 집요했으며 ‘돈을 줄 테니 소송을 포기하라’는 유혹과 협박에 재판기간 내내 시달림에 지친 그 즈음 인권변호사로 명망이 높은 故 조영래 변호사의 도움으로 긴 싸움 끝에 원고 승소 판정을 받아 냈으며 한국 최초로 반공해운동사의 상징적 인물이 됐습니다. 승소 판정 후 14번의 재판 끝에 얻어낸 피해보상금은 고작 1천만 원. 살아있는 동안의 치료비도 감당 할 수 없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보상금이 적다는 생각보다는 재판 중에 함께 했던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더 소중했다고 하였습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는 어느새 반공해 운동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상봉동 지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건강진단을 받도록 하는 한편 공해발생 현장이 있으면 먼 길 마다않고 달려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이 나와선 안됩니다” 라며 피해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강연도 하며 반공해 운동, 환경운동의 전도사로 활동했지만 박길래 그녀의 굴곡진 삶과 고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계속된 건강악화로 그녀는 외부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 갔습니다. “숨이 점점 찹니다. 이젠 몇 발짝 걷는 것도 힘이 들어요” 병명도 모르던 시절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돈도 다 써버린 뒤 남은 것은 병든 육신뿐, 밭은기침과 호흡곤란으로 더 이상 기댈 곳 없어 검은 폐를 끌어안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검은 꽃으로 스러진지 17년. “들레 들레 민들레야 필적에는 곱더니만 질 적에는 까맣구나” 지리산 노고단에서 활동하는 안혜경 선생이 부른 검은 민들레 노래만이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는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된 환경성 피해자들, 현재 진행형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석면피해자, 시멘트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환경공해병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박길래-640x463  

최초의 공해병 환자 박길래의 삶과 죽음

 

박현철(함께사는길 편집주간)

  2000년 4월 29일 밤 11시 중대용산병원, 꽃 한 송이가 졌다. ‘검은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던 한 사람이 향년 58세를 끝으로 목숨을 꺾었다. 그의 낙화로 인해 한국반공해운동사의 한 장(章)이 또한 접혔다.   ‘박길래, 그 이름은 무한증식의 본능을 가진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희생양이며 이 사회가 키워낸 공해병 때문에 넝마처럼 해진 육신과 영혼이다.’지난 96년 4월, 당시 이미 죽음과 악수하는 삶을 살고 있던 박길래 씨와의 인터뷰 끝에 쓴 기사에서 기자는 그렇게 썼다. 그는 정말 한 벌 해진 옷을 벗듯 병마에 시달린 육신을 놓고 영면했다.   그의 장례는 너무나 검박해서 차라리 초라한 것이었다. 환경연합 등 환경단체와 그의 삶과 반공해운동을 후원하던 이들이 한 뜻으로 환경단체연합장(葬)으로 치르고자 했던 그의 장례는 혈연조차 적빈(赤貧)이었던, 그의 몇 안 되는 친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5월 1일 새로 3시, 마침내 운구차가 차게 굳은 그의 몸을 싣고 떠났다. 그 새벽 고(故) 박길래의 생애는 벽제의 장재장에서 연기로 날아가고 한 줌 뼈로 남았다.한국반공해운동이 사회운동의 한 부문에서 시민운동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웅변한, 존재 그 자체로 환경운동의 귀한 동력이었던 한 탁월한 운동가가 영면의 길을 떠난 것이다.   88년 문송면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한국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천둥소리였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입사한 회사에서 수은중독으로 쓰러진 문송면의 희생은 적어도 다시는 그와 같은 원시적인 작업환경 속에 노동자들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노동환경운동의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그의 죽음은 공장의 담 안에서 벌어진 직업병으로 인한 것이었다.   박길래의 경우, 병의 원인은 공장 안에 있었지만 병을 얻은 것은 정작 공장 밖 그의 생활공간에서였다. 이 경우의 병은 공해병으로 분류된다. 담장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원인은 같다.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대상화하고 투여된 자본 이상의 이윤을 뽑아내려는 비윤리가 당연시되는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장 안의 노동자들의 건강조차 챙기지 않으면서 공장 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해물질의 외부유출까지 신경을 쓰는 곳이 있을 리 없다. 그 결과는 박길래라는 희생자였다.   70~80년대 상봉동은 연탄공장 밀집지대였다. 삼표연탄공장 인근에 살았던 박길래는 연탄공장에서 날아온 탄가루 분진을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폐는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지만 병의 정체는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감기인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감기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어요.”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 상봉동에 이사온 79년, 그해 겨울에 걸린 감기는 정말 질기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잘 낫지 않는 희한한 감기에 걸려 박길래는 일도 못하고 벌어놓은 돈 죄 까먹으며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83년에는 갑자기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이대부속병원에서 건강종합검진을 받았지만 시력저하의 원인은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84년의 종합검진 때도 그의 병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85년 검진에서야 결핵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아무리 결핵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무슨 병인지 알고나 죽자’고 이를 악문 그는 86년 11월 국립의료원에서 폐조직 검사를 받았다. 그의 폐 조각은 숯처럼 검었고 연탄가루처럼 부서져내렸다. 박길래는 그 때 이미 알았다. 자신이 낫지 못할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공식판정은 ‘진폐증’. 탄광촌 광부나 걸리는 병에 자신이 왜 걸렸는지 그는 너무도 쉽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탄공장 밀집지대에 살았다는 죄가 그녀를 진폐라는 불치병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길고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87년 들어서는 이미 치료비조차 구할 길이 없을 지경이었다. 옆집 사람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그 이름으로 병원을 다녀야 했다.   그러던 차에 TV뉴스에 ‘상봉동의 연탄공장 다니는 여인이 진폐증에 걸렸다’는 오보가 나왔다. 억울했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갔다. 87년 1월 23일 조 변호사와 함께 소장을 작성해 삼표연탄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공해추방운동연합(환경연합 전신)이라는 동지가 재판이 진행되면서 생겼다.   박길래의 싸움은 외롭지 않았다. 하나둘 어느 결에 반공해운동의 상징으로서 운동의 중심이 된 그의 곁에 후원자들이 모여들었다. 재판은 지리했고 회유는 끈질겼으며 방해는 야비하고 치사했다. 삼표연탄의 모기업인 강원산업은 거액의 무마비를 미끼로 ‘송사를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고, 깡패들이 계속 협박전화를 해댔다. 박길래는 꺾이지 않았다. 이미 그는 환경운동가였다. 현재진행형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그에게 그 어떤 회유나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전신을 갉아먹는 기침과 피고측의 온갖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87년 12월 그는 승소했다. 그저 연탄공장이 있는 동네의 주택가로 이사왔다는 죄 때문에 천형을 짊어지게 된 대가로 받아 든 보상금은 너무나도 적은 것이었다. 단돈 1천2백만원, 그 돈으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치료비를 갚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2백만원을 보상금에서 덜어내 공해추방운동연합에 비디오와 대형 TV를 사서 기증했다. “나 같은 사람들 더 많이 구제하는 데 유용하게 쓰세요.” 16살에 고향 정읍에서 상경해 결혼도 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장만한 집 두 채를 다 팔았다. 여기에 나머지 보상금 1천만원을 보태 치료에 진 빚을 갚았다. 그래도 20만원이 모자랐다. 청춘을 걸고 모은 재산이 7년 투병 끝에 날아간 것이다. 사라진 것은 그 뿐 아니었다. 남겨진 것은 육신을 갉아먹는 기침과 썩은 폐뿐이었다. 그의 나머지 인생은 무덤으로 가는 긴 터널일 뿐이었다.   박길래는 굴하지 않았다. 박길래의 법정투쟁은 똑같은 사연을 가진 상봉동 주민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이후 5명의 진폐 환자가 상봉동에서 더 발견됐다.   박길래는 상봉동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상봉동 주민 공해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 삼표연탄공장 즉각 이전 △ 전 주민 건강검진 실시를 당국에 요구했다.   이들의 운동에 의해 88년 6월 서울시내 연탄공장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X-선 검사가 실시됐다. 1천8백42명이 검진에 응했고 그 가운데 상봉동 주민들이 1천2백명이나 됐다. 그리고 국정감사를 통해 검진 결과가 드러났다. 1천8백42명 중 50명이 진폐의증의 정밀검진대상자로 밝혀졌고 상봉동 주민이 24명이나 됐다.   박길래는 진폐 판정 이후 반공해운동가로 살았다. 어디든 자기를 부르는 곳에 달려가 “공해를 뿌리 뽑지 못하면 우리 삶이 뿌리 뽑힌다”고 호소했다. 90년 남산에서 공해추방운동연합 주최로 열린 지구의 날 행사에서 박길래는 이미 기울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진폐증을 불러오는 주택단지 내 연탄공장들은 이전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공해를 거부해야 합니다.” 박길래의 호소는 빗소리에 녹아들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는 한번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생명의 길이를 한줌씩 걷어내야 할 정도로 병세 심각한 환자였지만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해추방운동연합과 함께 공해추방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반공해운동의 전도사로 끈질기게 활동했다. 진폐 판정 후 이사간 세검정 신영동에서도 그녀의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당나무를 지키는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여름 당나무가 토지주에 의해 결국은 베어지고 그의 몸조차 함께 무너졌다. 진폐 합병증으로 허리뼈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굽은 척추로 인해 보조대를 차야 앉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깥나들이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런 상태로 여러번 죽음의 문턱을 넘어들었다. 모두가 “이젠 가시나 보다” 할 때에도 그는 다시 깨어났다. 민들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언젠가는 정말 상황이 나빠져 지인들이 병원에 모여들었을 때에도 다시 살아나 “괜스레 성가시게 했다”며 도리어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99년 말 정말이지 힘든 상황이 되었다. 너무나 오래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탓에 다 해진 입으로는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가 됐다. 무너진 척추 때문에 보조대를 하고 간신히 앉아서도 박길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후원해 온 만화가 신영식 씨의 집에 요양하러 갔을 때 그는 말했다.“신 선생님, 부지를 좀 알아봐 주세요.”불우아동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건립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박길래의 마지막 꿈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살면서 자신의 약값조차 마련할 수 없이 고생하면서도 박길래는 그 꿈을 위해 후원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북한선교협의회가 주관하는 탈북동포돕기운동에 거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4일 오후 2시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추모식에 오랫동안 그의 후원자였던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정욱 교수, 만화가 신영식 선생,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 등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이들은 몰랐던 박길래의 면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감동과 더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박길래는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의 수의를 마련하고 장례비까지 다 챙겨두었다. 그렇게 삶을 정리한 채 오래 기다리던 나라로 갔다. 남겨진 이들의 흐느낌이 길게 이어졌지만 그의 영정은 웃고 있었다.   <검은 민들레 박길래 돕기 후원회>를 통해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지켜온 지인들 가운데 하나인 조수자 선생은 박길래를 보내는 인사가 단지 슬픔이어서만은 안 된다고 말한다. 박길래, 그는 한국의 공해추방운동을 환경운동으로 대중화하는 길목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뛰었던’ 걸출한 환경운동가였다는 것이다. “그저 그를 한 명의 공해 피해자로 보내버리고 잊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를 동지로서 앞세운 것입니다. 그를 보내는 인사는, 다시는 당신과 같은 이가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이어야 합니다.”그럴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은, 한국환경운동사의 지울 수 없는 상징으로서 고(故) 박길래 동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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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4/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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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도, 방폐장도 안전하지 않아요”

p1 생명과 평화의 도보순례단이 3월 27일 경주 방폐장을 출발하여 4월 8일 영광원전 도착까지 약 2주간의 도보순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출발 첫날인 27일 “원전도, 방폐장도 안전하지 않아요” 라는 주제로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 농성장을 방문하여 장기적인 싸움에 지친 주민들을 위로하고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월성이주대책위 사무국장 신용화씨는 전남 영광원전 주민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순례단에 전달했다. 다음 영상은 신용화씨가 영광원전 인접지역 주민들께 띄우는 편지이다. 성공회 김현오 신부가 대독했다.(영상제공:경주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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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이주대책위 주민들은 편지 전달식 이후 ‘이주만이 살 길이다’ 라는 구호가 적힌 노란 조끼를 입고 순례단과 함께 걸으며 하루순례에 참여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175973" align="aligncenter" width="640"]출발에 앞서 순례단과 월성주민들이 하늘,바람,땅에 큰 절을 올리고 있다.ⓒ경주환경운동연합 출발에 앞서 순례단과 월성주민들이 하늘,바람,땅에 큰 절을 올리고 있다.ⓒ경주환경운동연합[/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75974" align="aligncenter" width="640"]월성 나아리 주민 황분희씨가 도보 순례단 맨 앞에서 걷고 있다. ⓒ경주환경운동연합 월성 나아리 주민 황분희씨가 도보 순례단 맨 앞에서 걷고 있다. ⓒ경주환경운동연합[/caption]  
<편지 전문>
"안녕하세요? 나아리에 살고 있는 신용화입니다"
저희 집 뒤로 만개한 분홍빛 진달래가 화사하고 따뜻한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한순간 이곳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고 있는 제 모습에 갑자기 서럽고 쓸쓸함이 밀려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집 뒤에 펼쳐진 살아있는 산수화 한 폭의 풍경에 머리가 맑아지고 차분해지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이사 온 후에 이곳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저의 삶은 많은 부분 혼란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엄마의 삶에서 끊임없이 한수원과 정부를 의심해야 하며 정당함이 비정상이 되어버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끝없이 필요한 지금 제 현실은 저를 지치게 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싶도록 만듭니다. 얼마전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한 고등학생과 잠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요.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마을의 방사능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알게 되었니?” 하고 물으니 페이스북에 다 올라와 있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방사능 괜찮아요.” 하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기에 “왜 괜찮다고 생각하니?” 라고 물으니 “나는 문제가 안 생기고 내 2세부터 문제가 생긴대요.” 라고 대답하더라구요. 순간 속으로 철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잘못알고 있구나 문제가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일 뿐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 있어.” 라고 알려주니 이 소년이 갑자기 울먹이면서 하는 말이 “그럼 나보고 어떻게 살라구요. 살 방법이 없잖아요.” 라며 혼란스러워 하는 거예요. 이 소년은 너무도 무서웠던 거지요. 소년 나름 어떻게든 피할 방법을 찾아 나름 안위했었는데 그마저 틀렸다고 하니.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살며시 나왔습니다. 나와서 후회했습니다. 알려주지 말걸 하고.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곳에 사는 동안 현실을 외면하고 진실을 덮고 모른 척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진실을 알아가고 알리는 것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니다 힘을 내어보자, 진실을 가둘 수는 없는 것.’ 온 가슴이 멍울진 작은 한 발이라도 내딛어보려 합니다. 나의 작은 힘이라도 힘차게 내딛을 때 우리는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이고 많은 분들이 함께 함으로 옳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월성, 영광, 고리, 울진, 대전 유성구 그리고 대한민국을 아끼고 더 나아가 푸른 지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할 때 이주와 탈핵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파이팅해 봅시다. 방사능오염지역을 떠나 건강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의 이주,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한 탈핵 파이팅.

2017년 3월 26일

월성원전 인근지역 이주대책위원회 신용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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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3/3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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